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52
약먹는 천재마법사 852화
인수인계(20)
‘자색과 흑색은 기억에 있다. 은색은 처음 보는 놈이군.’
특무기관 이지스는 강력한 육체능력자에게 완성된 술식을 박아넣어 만들어진 인간병기.
대부분은 부여된 술식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데 그쳤지만, 개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개체들이 있었다.
중력을 다루며 운석을 떨어뜨리는 술식을 사용하는 자색과, 흑마법을 다루며 육탄전에 특화된 흑색.
둘 모두 판데모니엄의 멤버들을 상대로 밀리지 않을만큼 특출난 힘과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온다.”
먼저 움직인 것은 흑색의 바로 뒤에 나타난 자색의 바이저였다.
양손으로 간단한 수인을 맺고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콰아아아아!!!
격렬한 폭풍이 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발전시설 전체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글쎄.”
레녹이 그렇게 대꾸하며 발전시설 바깥을 비추는 모니터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시의회는 너희들을 무사히 구해줄 생각 따위는 없는 것 같군.”
콰아아아!!!
발전시설의 하늘 바로 아래에서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집채만 한 운석.
모니터를 통해 그것을 확인한 헤이워드가 형용하기 어려운 짐승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우, 우와아악!!”
운석이 떨어져내리는 것과 동시에, 발전시설의 전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거대한 두꺼비가 시설의 옥상 위로 솟아올랐다.
눈부히게 빛나는 거대한 번개두꺼비가 입을 쩍 벌리고 떨어지는 운석을 덥석 집어삼킨 순간.
뻐어어어엉!!!
두꺼비의 머리통이 그대로 폭발하며 운석째로 산산조각 내버렸다.
쿠과과과!!!
수천 개의 파편으로 쪼개진 운석 파편이 그대로 시설 위로 추락한다.
그 충격으로 발전시설의 천장이 대거 무너지고, 사방에서 전선이 끊어지며 파이프가 박살 나기 시작했다.
파직, 파직, 파지지지지직!!!!
“막아낼 걸 확신하고 던졌군. 선공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단 확신이 있었나?”
순식간에 반파되어 버린 발전시설을 올려다보며 레녹이 웃었다.
“판단이 좋아. 적당한 시점에 저지른 걸 보면 강단도 있고.”
발전시설 전체를 요새화시키긴 했지만, 그 근간이 되는 힘은 결국 레녹의 마력이 아니라 이 시설의 누수전력이다.
요새화 마법을 구성하는 술식의 내구성과 정밀함이 원본보다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이지스는 레녹이 자신의 마력이 아닌 시설의 전력을 끌어다 사용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그 취약한 내구성을 노려 단번에 요새화 술식 자체를 무너뜨린 것이다.
레녹이 사용한 마법을 알아보고 전개방식을 추측해낼 정도의 식견과 지식.
파훼식을 찾아내 알맞은 시점을 골라낼 판단력과 작전을 실행해낼 수 있는 강력한 출력.
그리고 무엇보다, 레녹을 적으로 돌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단호한 의지.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중앙의회의 비호를 받는 최정예 특무기관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마 이 모든 작전은 선두에 서 있는 흑색 바이저의 능력일 터.
복마전의 중간결산 당시, 이벨린을 이용한 저격과 난입이 저자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을 레녹은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흑색은 잠깐이지만 무려 그 마이야 렌슬릿과도 공방을 주고받을 만큼 뛰어난 무위를 보유한 실력자.
물론 개조실험으로 완성된 이지스의 초인이 마이야보다 강할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녀를 상대로 전투가 성립한다는 것 자체가 특기할 만한 일임은 분명했다.
[끄억.] [꾸웨엑…….]발전시설의 요새화가 파훼되고, 사방을 순회하던 두꺼비 정령과 기계의 군세가 무너져 내린다.
전력을 먹이 삼아 움직이던 두꺼비와, 그로 인한 자기장을 따라 만들어진 기계병사들이 제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쿠과과과!!
속절없이 번뜩이며 소멸하는 스파크과, 비처럼 쏟아지는 나사와 철골의 비 사이.
모습을 드러낸 이후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흑색 바이저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쐐액!!
모니터를 통해서는 그 움직임이 거의 잡히지 않을 만큼 섬뜩한 기동력.
시설 복도 천장과 벽면을 마치 편안한 운동장처럼 밟고 짓누르며 가속하고, 앞을 가로막는 장벽을 처부순다.
온몸에 새카만 흑색의 마력을 두른 채, 바이저를 깊게 눌러쓴 그 신형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뻔한 일.
패닉에 빠진 헤이워드가 안절부절못해 소리쳤다.
“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
“강해 보이는 친구로군. 저게 누구요?”
“이, 이지스에서 운용하는 처형부대의 대장이다!!”
순진한 라파엘의 질문에 헤이워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흑마법의 대가이자, 아주 잔혹한 자라……!! 저자가 도착하면 우리 모두를 죽일 거요!!”
“흐음.”
“흠은 X발 무슨 흠!!”
어딘가 시큰둥한 라파엘의 말에, 발끈한 헤이워드가 참지 못하고 라파엘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우리 모두 처형대상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점잔 빼고 있을 텐가!!!”
“아, 아니…….”
당황한 라파엘이 헤이워드의 손을 놓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대꾸했다.
“흑마법의 대가라는 게, 아무한테나 붙일 수 있는 말은 아니지 않소.”
“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헤이워드의 고함.
하지만 레녹은 라파엘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이해했다.
판데모니엄에 기거하는 명왕에 대해 라파엘이 알고 있다면, 그 수식어가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테니.
그러나 저 흑색 바이저가 다루는 흑마법이 그만큼 강력한 휘광을 두르고 있다는 것 역시 맞는 말이었다.
‘기시감이…….’
모니터 너머로 꿈틀거리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지성이 느껴지긴 하는데, 여기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렵다.
직접 마주하고 눈으로 보는 게 아니면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슬아슬한 위화감.
“시설을 주파하는 속도를 보면 3분 안에 도착하겠군.”
거기서 결론을 내린 레녹이 다시 스크린을 주워들었다.
“금방 올 것 같으니 저쪽이 도착하면 다시 얘기하지. 난 이걸 좀 더 보고 있겠다.”
“아니, 다들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것 같은데-!!”
헤이워드의 말을 뒤로 한 레녹이 곧바로 마법사 양성 계획 관련 데이터들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나열하는 부분까지 읽었던 상황.
=전제 1. 에반 바일런은 인조인간이다.
그 아래쪽에는 레녹이 느꼈던 황당함을 뛰어넘는 여러 가지 전제들이 적혀 있었다.
=전제 2. 에반 바일런의 출신이 불분명한 것은 그가 크리스퍼 베이비이기 때문이다.
=전제 3. 에반 바일런이 늦은 나이에 정령술을 각성한 것은 그렇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전제 4. 에반 바일런이 혁신적인 마력이론을 발표할 수 있던 것은 인간과는 다른 것을 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전제 5. 에반 바일런이 공용마법을 습득할 수 있던 것은 그가 이 시대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
=결론. 에반 바일런의 천재성은 그가 인조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본 프로젝트는 상기된 전제와 결론을 참이라 가정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이 연구소의 이름이 어째서 바일런 연구소였는지, 보고서의 서두를 읽는 것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문구들.
에반 바일런의 존재와, 그 천재성을 규명하고 싶어 하는 아주 노골적이고 강력한 집착.
“재미있는 말이기는 한데…….”
레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게 명제를 기본으로 하는 논리학에 적합한 전제랑 결론인가?”
다비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하나도 안 맞아요.]“……그렇지?”
[결론에 써야 할 사실을 전제에 섞어서 써놓았잖아요. 그냥 원하는 결론을 내려고 말을 가져다 붙인 거라구요.]전뇌정령이 보기에는 영 조잡하기 그지없는 명제였는지 다비가 드물게 계속 투덜댔다.
[이래서 유기체들은 안된다니까요. 비겁하게 말을 바꿔대기나 하고, 남는 전기는 착한 정령한테 먹이로 줄 거라는 약속도 안 지키고…….]“…….”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해당 보고서만은 아니었던 모양.
다비의 불만을 모른 척 접어둔 레녹이 곧바로 다른 데이터들을 열어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에반 바일런은 인조인간이다.
그 천재성은 그가 만들어진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전제로 인조인간을 만들어 그 천재성을 재현하기 위한 일련의 사전작업이, 연구소에 삭제된 데이터 안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
“그렇군…….”
바일런 연구소는 에반 바일런을 연구해서, 공용마법을 익힐 마법사를 양성하려던 것이 아니다.
이 연구소를 세운 이들은, 공용마법을 익힐 재능을 타고난 인간을 ‘만들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의도를 깨닫고 나면, 다른 데이터를 돌아보는 것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에반 바일런을 납치하거나 해칠 계획은 없었군.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나.’
처음부터 에반의 협력이나, 유전정보를 손에 넣는 것을 가정하고 시작한 계획.
보고서는 애초에 에반의 신변을 확보하거나 그를 죽이는 것 자체가, 견뢰의 마탑과 엮인 순간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명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녹은 돌아가는 상황을 깨닫고도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왜…… 하필 인조인간이지?’
오랫동안 스스로를 관조하고 연구한 끝에, 레녹은 자신이 순수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초월적인 재능을 선택해 손에 넣은 운명의 순간과는 별개로, 이 육신에는 어떤 유전자 조작의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레녹 역시 자신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해 왔기 때문.
하지만 레녹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시의회가 같은 의심을 하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에반 바일런을 골랐는지.
왜 하필 인조인간이라 생각했는지.
그가 지금까지 해낸 일련의 연구와 성과, 논문을 통해 발표된 엔트로피에 대한 기이할 정도의 집착.
모든 결론을 하나의 전제 아래 끼워 맞추며 프로젝트를 구성하고 있을 뿐. 어째서 에반 바일런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근거는 일절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로 거대한 그림을 그리면서 근거 없는 불확실한 결론에 의지하고만 있단 말인가.
그것은 레녹이 알고 있는 중앙의회와는 결코 맞지 않는 발상이다.
노괴들이 모여 있는 상원과 원로원이라고 해도, 고작 이 정도 근거만을 가지고는 결코 행동에 나서지 않을 터.
무언가 더 있다.
그들이 에반을 인조인간이라 확신하게 만들었던, 레녹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더 있다.
그것을 확신한 레녹이 빠르게 남은 데이터들을 전부 훑어내고, 마지막 문서에 도달한 그 순간.
레녹은 보고서를 읽기 시작하며 떠올랐던 의문의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상기의 연구 전반은 19구역에서 진행되었던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경과를 기반으로 한다.
“…….”
레녹이 찾고 있는 비밀. 그가 알지 못하는 내막의 편린. 이해할 수 없었던 결론의 근거.
지나가듯 적혀 있는 한마디 첨언에 불과했지만, 레녹은 확신할 수 있었다.
중앙의회에서 에반의 존재를 두고 인조인간이라 단정하고 있던 이유.
근거없는 결론을 두고 이렇게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투자를 병행하고 있던 이유.
그것은 이미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에서, 인조인간의 ‘천재성’을 가지고 한차례 연구를 단행했었기에 가능한 결론이었던 것이다.
“하…….”
중앙의회는 알고 있다. 아직 잊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 영광을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 그때의 실패를 다시 한번 재현하려 하고 있던 것이다.
뿌득.
스크린을 움켜쥔 레녹의 손에 힘이 들어간 순간, 의지에 호응한 마력이 일어나 그대로 변환장치를 박살 내버렸다.
콰앙!!
변환장치가 부서지는 것과, 통제실의 문이 쪼개지는 굉음 중 어느 것이 먼저였을까.
짙은 어둠을 전신에 두른 채로 걸어들어온 흑색 바이저를 두고 고민하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허, 허억……!!”
헤이워드가 숨을 들이키고, 라파엘조차 그 위압감에 순간 압도당할 만큼 진득한 흑마력.
하지만 흑색 바이저는 두 사람을 보지도 못한 것처럼 무시하고, 레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힘없이 기대 앉은 레녹과, 그 손에서 부서진 스크린을 확인한 바이저가 고개를 기울였다.
[봤군.]칙칙하다 못해 무기질적인 남성의 목소리.
[제때 맞춰 도착했다 생각했는데 늦었나? 아니, 그쪽이 예상보다 빨랐다고 봐야겠지.]“…….”
대답하지 않는 레녹을 두고, 흑색 바이저가 말했다.
[거기 담겨 있던 것은 시의회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초인양성 프로젝트의 핵심 기술이다. 금제율령이 풀린 직후 이지스를 비롯한 여러 특무기관이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원천이지.]“그래서?”
[기술의 가치를 금전적으로 환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따지자면 중소 도시국가 하나와도 능히 비견되는 힘이다. 그것을 의회의 승인없이 열어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나?]철컥!!
어느새 레녹의 바로 앞에 선 흑색 바이저가, 마법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중앙의회에서 너를 호출했다. 특무기관 이지스의 소관으로 호송할 예정이니 협조하도록.]“협조라…….”
그렇게 대꾸한 레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팡이를 짚고 선 레녹이 바이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힘없이 기침하며 겨우 균형을 잡은 레녹이 속삭였다.
“실패한 프로젝트의 부산물을 제것처럼 여기는 놈들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
[…….]레녹이 연초를 물고 천천히 연기를 빨아들이며 물었다.
“너희가 말하는 그 기술. 이 연구소에 진행되던 계획. 그 모두가 온전히 의회의 것이라 말할 수 있나?”
[…….]“시의회에서 나를 호출했다고 했나? 그래, 응해줄 수 있지.”
바이저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레녹이 느긋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의회로 간다면, 그건 의원들을 끌어내고 이 사태를 추궁하기 위해서지. 시시한 거래를 위해서는 아닐 거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레녹의 말에 헤이워드의 입술이 힘겹게 떨렸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견뢰와 중앙의회 간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겠지.
라파엘 역시 이리저리 시선을 오가며 숨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흑색 바이저는 그런 레녹의 말에 움츠러들지도, 반대로 화를 내거나 동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손에 쥐고 있던 단말기를 허리춤에 꽂아 넣고는, 살짝 시선을 들어 올렸을 뿐.
[초인양성 기술은 특무기관을 구성하는 핵심 기반이 되었지만, 각 기관에 배정된 세부적인 개념과 조정은 모두 다르다.]“…….”
[그중에서도 이지스의 역할은 규격을 뛰어넘는 괴물과 재해를 상대로 싸움이 성립할 정도의 전력을 갖추는 것에 있다.]키이잉!!
급격하게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흑색 바이저의 기세가 한없이 깊게 가라앉았다.
마치 그 자리에서 깊은 바닷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듯한 묵직한 침잠.
동시에 바이저를 휘감은 흑마력의 출력이 빠르게 높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사용하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도시를 위협해 온 숙적들의 힘.]]후욱!!
흑색 바이저를 중심으로 하는 어둠이 안개처럼 뿜어져 나와, 그의 머리 위에서 형태를 갖춰 나간다.
[북대륙에 찬란한 문명이 남아 있던 시절, 끔찍한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던 타락한 흑마법사의 힘이지.]어둠이 형태를 갖추고 굳어져, 통제실 천장까지 닿을 법한 거대한 문의 형태로 변했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그 안에서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그럭!!
인간의 몸집만한 거대한 사슬을 팔뚝에 두른 검은 거인.
마치 악마의 형상과도 같은 흉험한 외견을 지닌, 압도적인 자태를 흩뿌리며 나타난 존재.
작게 기침하며 그것을 바라보던 레녹의 표정이 순간 괴상하게 변했다.
“……음?”
분명 처음 보아야 할 저 흉악한 형상이, 어딘가 기묘하게 눈에 익었기 때문.
[……?]반대로 악마 거인 역시, 레녹을 알아본 듯 묘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양팔에 사슬을 옭아맨 악마 같은 형상의 거인.
저 존재는 분명 명이 평소에 성명절기로서 부리고 다니던 소환수였던 것이다.
명이 자의를 가지고 발칸에 나타날 때면 항상 데리고 다니며, 수족처럼 부리던 존재가 어째서 이지스의 말을 듣고 있는 건지.
레녹이 그 의문을 빠르게 자각하고 고민에 잠긴 순간.
[가자.]차르르륵!!
양팔에 악마 거인의 사슬을 함께 묶어 두른 흑색 바이저가 자세를 한껏 낮추었다.
[승리는 없어도 패배는 불가하니, 지옥의 거래를 이 자리에 명시한다.]“…….”
흑색 바이저의 심상치 않은 선언에, 레녹 역시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리며 신중한 표정으로 대비에 나섰다.
지옥의 거래. 무패의 계약인가.
명이 한때 애용하던 힘이라면 분명 흑마법 중에서도 최고위 등급에 위치한 고위 소환수일 터.
상대 역시 수준급의 육체능력자인 만큼 최소한의 주의는 필요하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머릿속으로 흑마법 관련 대방책을 고민하던 찰나.
콰직.
악마 거인이 자신의 팔에 묶여 있던 사슬을 제 손으로 잡아 뜯었다.
“……?”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두 사람이 반응하기도 전에, 악마 거인이 흑색 바이저의 등을 떠나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스르륵.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를 옮긴 악마 거인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레녹의 등 뒤에 선다.
팔짱을 낀 채로 당당히 레녹의 뒤를 지키듯이 떠오른 거인이, 흑색 바이저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
[…….]나타나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편을 바꿔먹는 악마 거인의 모습.
입장이 바뀐 기묘한 상황에 지켜보던 이들마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