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877
약먹는 천재마법사 877화
운명을 보는 눈(13)
“최악의 상황이군.”
투명한 유리벽이 세워진 아름다운 공동.
작은 속삭임조차 은은한 메아리를 품고 울려 퍼지는 강당 아래, 너른 원탁을 두고 여러 명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본래는 수십 명이 자리해도 넉넉할만큼 거대한 원탁에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은 시의원들.
상원과 하원 사이에서 당장 이번 일에 엮인 의원들이 임시로 소집한 회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이, 앞에 놓인 잔이 빌 때마다 즉시 내용물을 채워주고 있다.
하지만 의원들의 표정은 자신이 무엇을 들이키는지도 모를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원탁의 한복판에 자리한, 거대도시 중심부를 비추는 입체 스크린
21구역의 낙후된 도심을 고스란히 비추는 스크린 너머로 수십 발의 낙뢰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
쿠르르릉!!
마력을 섬세한 단위로 조형하는 카메라가 번개의 형상을 제대로 담지조차 못한다.
그 움직임과 속도가 너무나 빠르고 격렬한 탓에, 도심 속을 질주하는 뇌광의 편린만을 겨우 담아내고 있을 뿐.
눈이 아릴 정도로 시린 번개를 휘감은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발칸 20번대 구역을 벗어나고 있다.
[흐아아악!!] [피해, 전차째로 터져 죽는다……!!] [요새 방어용 바리케이드가 한 번에 뚫렸어!!]새파란 벼락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산산이 부서진 전차와 바리케이드의 파편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누구 하나 특정할 것 없이, 마력을 쥐고 흩뿌리는 것만으로 모든 저항과 구속을 깨부수고 짓뭉개는 압도적인 폭거.
먹구름 사이로 수십 발의 벼락을 두르고, 뇌명성을 개가처럼 울리며 사라지는 저 괴물이 누구인지는 자명했다.
“견뢰가 등대지기를 납치했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49구역의 대마법사. 견뢰 반.
발칸에서도 그 악명으로는 한손안에 드는 마법사가, 중앙의회의 수배령을 무시하고 등대지기의 신변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
하필이면 다른 괴물도 아니고, 피에 미쳤다는 악명이 자자한 광인이 개입해 판을 깨버렸다는 것에 놀라지 않은 이가 없다.
“수배령이 내려진지 한나절만에 정보가 새어나가다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군……!!”
“진작 저지부대를 전선에 배치하고 출입을 통제했어야지. 책임자는 대체 뭘 하고 있던 게야!”
거세게 노성을 지르지만 당황과 동요는 숨길 수 없다.
초조한 손짓으로 원탁을 두들기면서도, 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싶어 스크린을 힐끔거리는 모습.
“진정하시지요. 그 마법사를 상대로 그런 예방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격노한 시의원들 사이에서도 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이번 일에 발을 들이밀기는 했으나, 크게 엮이지는 않은 젊은 하원의원들.
대부분이 현장에서 업무경험이 풍부해 일선에서 정보를 직접 전해 듣는 쪽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놓아두고. 앞으로 해야 할 조치에 대해서 더 논의를 해보지요.”
“당장 수배령에 대해 해명할 공문도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서기관들이 양식을 만들어오면-”
“아니, 자네들은 몰라!”
백발이 부스스한 노인이 짜증스레 원탁을 두들겼다.
“그 마법사가 직접 나선 시점에서, 라피스 팔시어를 순순히 내줄 가능성은 거의 없단 말일세!!”
“…….”
“이럴 거면 처음부터 언급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어. 이번 일에 나서지 못하게 미리 못을 박아 두었어야 했는데……!!”
노인의 말에, 다른 하원의원들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견뢰와 이미 이번 일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었던 겁니까?”
“필요불가결한 일이었지. 이 도시에서 대능력자들 간의 회담을 위해서라는 이유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이마에 핏대가 솟은 노인을 두고, 하원의원들이 시선을 돌렸다.
홀연히 나타나 단신으로 도시를 뒤집어놓은 미친 마법사에 대해서, 그들 역시 적지 않은 흥미가 있었기 때문.
스크린 너머 남아 있는 벼락의 잔상을 바라보며 의원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21구역에 배치된 모든 병력과 용병들이 손도 쓰지 못했군.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작전은 아예 무용지물인가.”
“근방 에이리어의 기상관측장치 반절이 망가져버렸어. 이렇게 먹구름이 낀 환경에선 사실상 상대할 방법이 없는 거지.”
“최신식 영상기록장비로도 실시간 촬영이 고작이야. 저장장치가 계속 망가지는 터라, 영상팀에선 이미 녹화본을 모두 폐기했어.”
견뢰의 악명이 도시 전역에 퍼진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그 현신을 목격한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레녹이 그간 발칸의 음지에서 활동해 온 것도 있을뿐더러, 애초에 이 도시의 권역이 지나치게 넓기 때문.
같은 도시에 살고 있음에도 마음만 먹으면 평생 동안 마주칠 일도, 소식을 듣지 않을 수도 있는 곳이다.
“어떻게 하필 그 순간을 노리고 골라서 나타난 거지? 이걸 정말 미친 마법사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
“대마법사의 지성은 우리같은 범인에 비할 바가 아니지. 반쯤 맛이 가 있어도, 직관만큼은 예지의 영역에 도달해 있을 거다.”
“라바테논 마법대학 방문 당시 사고가 우연이 아니었어. 부상과는 별개로 이런 짓을 숨 쉬듯이 할 수 있는 괴물인 거야.”
“어떻게 하지? 이제라도 수배령을 철회해야 할까?”
그 말을 끝으로, 원탁에 둘러앉은 의원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그 누구도 19구역을 둘러싼 이번 사태가 이런 식으로 진행될거라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
“와인스턴 부시장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나?”
“극도로 심각한 정신오염이야. 파주술사가 달라붙어 밤낮으로 뇌를 씻어내고 있다더군. 내일 아침에 좀비가 되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던데.”
“다 업보인게지. 아직 불안정한 인조인간 제조기술을 대뜸 제 몸에 시술하면, 정신간섭에 취약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잖나.”
“그 기술에 미친 여자가 그런 걸 신경이나 썼을까? 자기 몸을 증거 삼아 사용화를 추진할 생각만 가득했을걸.”
부시장을 언급하는 의원들의 목소리에 희미한 냉소가 섞인다.
그녀의 능력과 성향과는 별개로, 시정부 소속으로 의회와 대립하는 부시장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들 역시 상당했던 것.
“19구역의 사태에 대한 유일한 목격자는 부시장 뿐이다. 제대로 된 정황증거가 없다면 이쪽에서 명분을 쥘 수 없어.”
“일단 견뢰의 마탑에 접촉해 입장을 전해 듣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
“이미 답신을 받았다. 본 사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일체 관계도 없다더군.”
다른 하원의원들의 표정이 황당하게 변했다.
“말이 되는 건가? 탑주가 승천자의 혈족을 납치한 이 상황에서 발뺌을 하겠다고?”
“그 대답이 지금 이 도시에서 마탑의 위치를 보여주는 게지.”
“…….”
그제야 지금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깨달은 하원의원들이 침묵에 잠겼다.
거대도시의 아이템 시장이 생긴 이래, 마탑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이 분야에서 막강한 입지를 구축했는지.
탑주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시의회조차 간과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그 한마디로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군. 이건 본 사안의 관계자들만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지금으로선 언론을 움직여 반응을 보는 게 우선이겠군.”
“그러지 않아도 발칸 내 모든 소식통이 난리가 났다. 그 등대지기를 납치했으니, 조만간 중앙까지 소식이 퍼지겠지.”
대마법사가 평범한 인간을 납치해도 가십거리가 될 법한데, 무려 청의 눈을 이끄는 수장을 데려갔으니 일이 얼마나 커질지는 뻔하다.
하물며 그것을 수천 명이 넘는 군인과 용병들 사이에서 대놓고 보여준 이상, 소문이 퍼지는 것은 필연.
여기 모인 의원들 역시 애초에 이 사건을 덮어버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일을 키워야 해. 마탑주의 악명을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부풀려 버려야 한다.”
“그 미친 마법사가 그런다고 신경이나 쓰겠어?”
“그래도 해야해. 이걸로 여론을 악화시키고, 탑의 입지를 조금이나마 빼앗아 올 수 있다면-”
철컥!!
“거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공동의 유리문을 열고 나타난 메이어가, 지팡이를 짚은 채로 모여 있는 의원들을 보며 말했다.
개중에서도 유독 나이 들어 보이는 노인을 보자 사태를 관망하던 상원의원들이 반응했다.
“아, 메이어 의원. 늦으셨구려.”
“기다리고 있었소. 이번 일에 대해서 자네의 의견을 꼭 한번 듣고 싶군.”
“…….”
반면 메이어의 등장에 하원의원들은 다소 미묘한 기색으로 시선을 돌린다.
메이어는 하원에서 의원직을 시작해, 감사직을 거쳐 상원으로 자리를 옮겨간 시의원.
어려운 자리에서 성과를 내고 명성을 높인 능력은 인정하나, 하원의원들이 묘한 기분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굳이 그런 내색을 감추려 하지 않는 의원들에게도 태연하게 인사를 건넨 메이어가 빈자리에 앉았다.
“언론 보도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부풀려지기 시작할 거요. 괜히 손을 써서 반의 신경을 건드릴 이유는 없겠지.”
“생각해 보면 자네는 그 마법사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었지.”
상원의원들 중 누군가 은근히 물었다.
“어때? 좀 뭐라도 전해들은 말이 있나?”
“…….”
그 말에 다른 하원의원들까지 메이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메이어 의원이 반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
애초에 메이어 자신이 반과의 친분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기에, 의회 관계자들은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이까.”
하지만 메이어는 그런 의원들의 말에 딱 잘라 입을 닫곤, 화제를 반대로 돌렸다.
“시정부 측에서 내건 수배령에 대한 문의를 하고 오는 길이오. 정부 측 작전권을 이쪽으로 가져올 필요가 있어 보이더군.”
“작전권?”
“등대지기가 어디로 향할 생각이었는지 짐작이 가오. 19구역에 숨겨진 비밀을 생각하면, 이 도시를 탈출하지 않은 것은 분명-”
그렇게 중얼거리는 메이어의 표정이 고심에 잠겼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공군을 움직여서 격리구역을 점유해야겠지.”
“격리구역이라. 설마…….”
“왜 반이 등대지기를 납치했는지는 나도 모르오. 애초에 그 의중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아.”
다른 의원들이 메이어의 말을 이해하고 살짝 표정이 변한 순간, 메이어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와서 당장 라피스 팔시어의 신변을 이쪽에서 확보할수는 없겠지. 하지만 아직 한 사람이 더 남아 있지 않소이까?”
“그건…….”
“에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염열마법사.”
품 안에서 에반의 얼굴이 그려진 수배지를 꺼내놓은 메이어의 눈빛이 차분하게 빛났다.
“지켜야 할 주인을 잃은 이 자가, 일단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 * *
“잡아, 저쪽으로 사라졌다!!”
“빌어먹을, 분명 여기서 본 것 같은데……!!”
숨을 씩씩대며 골목 저편으로 달려나가는 한 무리의 용병들.
마력을 날카롭게 일으켜 세운 채, 골목 사방을 샅샅이 뒤지다 포기하고 사라진다.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골목을 돌아 사라지는 용병들을 바라보며, 레녹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손을 뻗었다.
“5천 셀이오.”
“좀 비싸지 않습니까?”
“그럼 4천 셀.”
늙은 과일상에게 사과 한 알을 사 들고 일어선 레녹이 용병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사과를 한입 베어 문 레녹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더 깎을걸 그랬군.”
“아, 저쪽이다!!”
“빌어먹을, 과일상 옆에 앉아 있었어?!”
다시 골목으로 돌아온 용병들이 레녹을 발견하고 즉시 총화기를 치켜들었다.
타타타탕!!
“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포장마차와 가게 간판 위로 총알이 와르르 쏟아진다.
인기척을 눈치채자마자 간판 뒤로 돌아넘어가 총알을 피해냈다.
드르륵!!
당장이라도 뚫릴 것 같은 간판의 파열음을 뒤로하고 앞으로 뛰었다.
팟!!
“도망친다, 쫓아가!”
“씨발, 뭐가 저렇게 빨라……!!”
마력을 사용해 육체를 강화한 초인조차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순식간에 으슥한 담벼락 벽 사이를 번갈아 뛰어넘은 레녹의 신형이 사라지고.
콰앙!!
담을 어깨로 들이박아 부순 용병들이 즉시 레녹을 찾기 위해 속도를 높인 순간.
레녹이 담벼락 뒤에 도망치지 않고 선 채로 그들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자.”
한입 먹은 물렁한 사과를 용병의 얼굴에 던진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한 용병의 입에 사과조각이 처박힌 순간, 레녹이 주먹을 휘둘러 용병의 턱 위로 꽂아 넣었다.
뿌직!!
입 안에 사과가 든 채로 턱뼈가 어긋나고 용병의 눈이 뒤집어진다.
“으겍……!!”
“이 개새끼가!!”
“쓸데없이 반항하지 말고 포기해, 이 병신아!!”
다른 용병들이 레녹을 둘러싼 채로 잔뜩 흥분해서 욕설을 내뱉었다.
“그 마법사와 시비를 붙고 네가 앞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냐!!”
“걍 뒤진 목숨인데, 우리한테 돈이나 헌납하고 뒤지라고……!”
“그 마법사라니…… 아, 여기 있군.”
이제는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않는, 묘하게 기분 나쁜 지칭어에 레녹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허리를 숙였다.
쓰러진 용병의 품 안에서 무언가를 주워든 레녹이 손가락을 가볍게 까닥였다.
“이걸 찾고 있었거든.”
“잡아!”
찰칵!!
푼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싸구려 라이터.
총구를 치켜든 용병과, 마력을 두른 단검을 냅다 찔러넣은 용병들이 레녹을 덮친 순간.
한 손으로 라이터를 켠 레녹이 다른 손으로 불꽃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점화(點火)]화륵!!
으슥한 뒷골목이 순간 붉은 광채로 번뜩이고, 이내 엄청난 열기와 함께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건물 뒤편으로 거대한 불의 그림자가 일렁이다,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갑작스러운 총격전에 숨어 있던 행상인들이 그 열기에 땀을 뻘뻘 흘렸을 정도.
“후우.”
거짓말처럼 사라진 용병들의 기척을 뒤로하고, 담벼락 너머에서 걸어 나온 레녹이 한숨을 내쉬었다.
녹아내린 라이터를 과일가게 옆 쓰레기통에 버린 레녹이 덜덜 떨고 있는 과일가게 주인에게 말했다.
“오렌지 하나. 이번엔 3천 셀에 사죠.”
* * *
“이건 좀 괜찮군.”
과일가게 주인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번에는 친절하게 오렌지 껍질까지 직접 잘라주었다.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오렌지를 맛보는 레녹의 손 끝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법사.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입니까?]레녹이 손가락에 끼고 있는 새하얀 옥반지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학의 형상을 닮은 유려한 백옥이 희미하게 발광하며, 파티샤의 목소리를 냈다.
[저 역시 당신의 심경을 고려해 가능한 인내하려 했으나, 오래 지켜보고 있기가 힘들군요. 지금 라피스 님은-]“시끄럽군.”
하지만 레녹은 놀라는 대신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런 능력이 있다면 진작에 사용해서 짐을 좀 덜어주지 그랬나.”
지금 레녹이 끼고 있는 반지는, 본래 가지고 있던 인도자의 반지 위에 파티샤의 능력을 더해 위장한 기물이다.
쿤다라의 장생종이라 소개했던 파티샤는, 특정한 사물이나 사람과 동화해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존재였던 것.
이번 일에 라피스와 동행한 유일한 수행원이었던 것 역시 이러한 능력 때문이었겠지.
[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하지만 파티샤는 스스로의 존재를 반지와 동화시켜 변형한 뒤에도 여전히 말이 많았다.
[한번 모습을 바꾸면 돌아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요. 본디 라피스 님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던-]“잠깐만.”
레녹의 날선 목소리에 파티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골목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차가운 표정으로 공용화장실로 들어가는 레녹의 모습.
레녹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조용히 변기를 바라보다, 그대로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우욱.”
무릎을 꿇고 갑자기 속을 게워내는 레녹의 모습에, 파티샤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상하게 영양보급에 집착하던 것도 그렇고, 일이 어그러진 시점에서 자꾸 기행을-]타박하던 파티샤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레녹이 토해낸 것이 단순히 음식물이 아니라, 피가 흠뻑 섞인 토혈이라는 것을 확인했던 것.
[……당신.]경악을 숨기지 못하는 파티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레녹이 조용히 입가를 닦았다.
‘오래는 못 해먹겠군.’
견뢰를 등장시켜 라피스를 납치한 시점에서, 화신체를 꺼내 동시에 운용하는 것은 필연.
가뜩이나 섬세한 조작이 어려워진 마력을 화신체와 레녹 양쪽으로 나누어 사용해야 한다.
심지어 화신체에게 라피스를 데려가기 위해 거리를 한참이나 벌린 상황.
체내마력이 불타다 못해 증발하는 기세로 소모되고 있었다.
콰드드득……!
자연술식의 요령을 미리 익히지 못했다면, 최대마력량을 늘려놓지 않았다면 진작 의식을 잃고 쓰러졌겠지.
하지만 레녹이 아직까지도 화신체를 유지하며 동시에 운용하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힘겹게 몸을 끌고 걸으며 레녹이 생각에 잠겼다.
‘라피스가 납치당한 시점에서 수배령이 내게 집중되는 건 필연. 여기서 에반의 신분을 버리고 사라지면 의심만 가중되겠지.’
시정부는 이미 이번 일에서 청의 눈과 전쟁을 치를 각오를 하고 라피스를 죽이려 했다.
여기서 에반이 그대로 사라졌다가는 발칸 시정부의 모든 공권력이 라피스를 납치한 견뢰 쪽으로 집중될 터.
‘두 개의 신분을 일이 끝나는 순간까지 유지하는 건 정해진 일이다. 오히려 걱정되는 건 시의회 쪽의 대처인데…….’
추적당하던 시점에서, 레녹은 시의회에서 라피스가 팔굉성채로 향하는 것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라피스의 목적이 19구역에 있던 외해의 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비슷한 환경을 보유한 성채를 노릴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
그걸 인지하고 있다면 시의회 역시 라피스가 성채에 도달하지 못하게 미리 개입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수배령을 통해 추적당하는 시점에서 목적지까지 미리 간파당한다면 라피스의 계획은 사실상 끝이나 마찬가지.
바로 그것이 레녹이 무리를 해가며 화신체를 사용해 견뢰의 신분을 꺼내든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이다.
라피스가 성채에 도착해 천견을 만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선, 시의회조차 통제하기 힘든 아주 큰 혼란이 필요했다.
다른 모두가 통제하지 못하면서도, 반대로 레녹 자신만큼은 통제할 수 있는 혼란이.
‘견뢰의 신분으로 시의회의 시선을 끌면서, 에반의 신분으로는 마력을 안정화시킨다.’
계속해서 악회되는 컨디션 속에서 준비해둔 생각을 차례대로 건져 올린다.
‘화신체와 거리를 좁히면서 마지막에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도록 동선을 유도하고, 수배령과 중앙의회를 모두 떨쳐내면…….’
이 도시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마법사와, 가장 이름 없는 마법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교차하는 한순간.
레녹이 사용하는 두 신분을 사용해, 누구보다 먼저 이 판을 어지럽게 망가뜨려 재편하는 장구한 계획.
승천의 자격이 무엇인지, 앞서 떠난 승천자가 무엇을 남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라피스를 돕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천견의 의식체가 라피스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녀가 무엇을 남기려 하는지 레녹은 마지막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허리를 펴고 일어선 레녹이 입을 닦으며 말했다.
“노력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조용히 하지.”
[다친 겁니까? 언제부터 이렇게…….]파티샤가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에반이 언제 이렇게 큰 부상을 입었는지, 그녀 역시 분명히 두 눈으로 직접 보았었기 때문.
[그 악마 같은 마법사와 충돌한 직후군요.]“…….”
먹구름 낀 하늘 전역을 뒤흔드는 벼락의 주인.
외겁도시 출신인 파티샤조차 순간 영혼이 압도당하는 듯했던 비이성적인 살의의 파동.
인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살의를 한데 뭉쳐서 빚어내면 그러한 느낌이었을까.
코앞에서 마주하고도 그 저의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지성체.
암흑의 바다 너머에 존재하는 종말을 마주하는 듯한 먹먹한 절망감.
[소문에 한 치의 과장도 없었군요. 어떻게 그런 망가진 존재가 아직 이 도시에서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지, 저는 도대체-]“당장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레녹이 소매 끝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아직 라피스는 무사해. 시간이 지체되기 전에 데려오기만 하면 괜찮을 거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는 겁니까?]“다섯 번째 등대의 권한을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레녹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쓰레기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라피스의 신변이나 정신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권한 자체가 소실되어버리겠지.”
[…….]“시간안에 라피스를 찾아서, 성채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돼. 그것뿐이다.”
[……저희가 할 수 있을까요?]파티샤가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그 마법사를 상대로 라피스 님을 되찾을 수 있을지…….]“그걸 위해서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잖나.”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마력을 움직이다, 이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상태가 정말 안 좋아진 모양이군요. 정말 이대로도 괜찮겠습니까?]“……괜찮아.”
다만 화신술식을 동시에 운용하기 시작하며 몸에 적지 않은 부하가 걸리는 상황.
수배령을 들고 찾아오는 추적을 뿌리치고 마력을 안정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레녹이 외투를 여미며 말했다.
“오히려 신체능력 자체는 평소보다 훨씬 좋아. 아마 네가 하고 있는 일이겠지?”
[기력을 증강시켜 드리는 재주가 있습니다만, 크게 기댈 만한 느낌은…….]“아니, 아주 좋아. 이 정도면 차고도 넘친다.”
레녹이 괜히 용병들과 싸움에서 총알을 피하고 달릴 수 있던 것이 아니다.
몸에 흡수했던 외해의 마력이 넘실대며 조정되는 대신, 몸을 반강제적으로 증강시키고 있는 상황.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파티샤가 제공하는 기력 증강이 지금 불안정한 레녹의 육체에 무척이나 잘 맞는다.
체내가 진탕하는 것과는 반대로, 신체능력이나 활력 자체는 상시 강화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
마법 자체는 위력 조절이 어려워 매개체를 빌리거나, 아예 조절을 포기해야 한다쳐도.
평범한 육체능력자 정도로 몸이 움직이기만 해도 레녹이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아진다.
“팔굉성채가 어느 쪽에 있는지 안다. 일단 그쪽으로 가지.”
“네가 도시 전역에 수배령이 내려진 신종 방화범이냐?”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레녹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얼마나 화끈하게 놀길래 도시의 윗대가리들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군.”
레슬러마스크를 뒤집어쓴 건장한 체구.
온갖 창검과 화기를 온몸에 주렁주렁 매단 흉험한 기세.
느릿하게 깜박이는 신호등 위에 올라탄 딜런이, 레녹을 삐딱하게 내려다보며 히죽 웃고 있었다.
“마침 잘됐군. 우리 술집에 사는 마녀랑 비교해서,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 확인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