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11
약먹는 천재마법사 911화
청문회(7)
청문회가 끝나고 회장을 나서는 길.
휠체어를 미는 안타레스와, 그의 도움을 받아 회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 레녹의 모습.
회장 근처에 웅성대며 모여 있던 인파가, 레녹이 한번 시선을 던지는 것만으로 우르르 갈라진다.
애써 못 본 척, 우연히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피하며 조금이라도 마법사의 모습을 눈에 담아두려 하지만.
처음 청문회장에 들어갈 때와 달리, 더 이상 레녹과 시선을 마주치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
귀가 먹먹해지는 듯한 어색하고 위화감 어린 침묵.
단 한 사람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것에서 비롯되는 어설픈 외면.
그 모든 행위가 어떠한 폭력과 강압 없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저벅, 저벅.
레녹보다도 뒤늦게 회장을 나선 시의원들과 재판관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아직 회장 근처에 남아 있는 레녹의 존재를 분명 인지했으면서도, 굳이 대면하려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
인파를 헤치며 레녹을 안내하던 발레포르 마탑의 마법사, 아베니아 스텐슨이 걸음을 멈춰 섰다.
“반 님.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렇군.”
레녹이 휠체어에 턱을 괸 채로 피식 웃었다.
발칸에 머무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베니아가 레녹의 안내를 맡고 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안내 과정에서 불필요한 충돌을 두려워한 이들 사이에서, 그녀 정도만이 이 일을 기꺼워했기 때문이 아닐까.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극단적인 실전파들이 모여 있다는 발레포르 마탑의 이름을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름을 기억해 두지. 고생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멈칫거리며 고개를 숙인 아베니아가 주저하다 말했다.
“추후 시간이 될 때 마탑을 방문해도 괜찮겠습니까? 반 님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안타레스가 발레포르 마탑의 우수함을 보증하더군.”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에서는 언제나 우수한 협력 사업체를 구하고 있다. 관계자에게 말해두지.”
“용병 녀석들이 도움이 될 때도 있군요.”
아베니아가 웃었다.
“그가 제 경고를 잊지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처음 레녹을 찾아왔을 때만큼이나 깔끔하게 인사를 마치고 물러서는 아베니아의 모습.
멀어지는 마법사를 바라보던 레녹이 안타레스에게 말했다.
“한 번쯤은 개입할 줄 알았는데, 정말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더군.”
“스텐슨을 말하는 건가?”
“네 이야기다.”
“…….”
침묵하는 안타레스를 두고 레녹이 느긋하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 청문회를 지켜본 소감은 어땠지?”
“음,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안타레스가 웃었다.
“청문회에서 네가 시의원들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즐겁더군. 정말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것 같았다.”
“…….”
“너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네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이해했겠지. 어떻게 그렇게까지 선을 탈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야. 오히려 존경스럽더군.”
하기야, 타인의 시점으로 청문회를 지켜본다면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을지.
안타레스의 심경을 마냥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기에 레녹이 쓴웃음을 짓는 사이,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눈을 감은 그가 중얼거렸다.
“역시 틀리지 않았어. 오늘 하루만큼은 너를 따라온 일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참 어렵게도 돌려 말하는군.”
레녹이 휠체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댄 채로 말했다.
나른한 기색으로 청문회장에서 하나둘씩 걸어 나오는 수행원들을 바라보며 웃는다.
“아니, 미래를 보고 돌아왔기에 직접 말하지 못하는 것뿐인가?”
“…….”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는 이해했으니까.”
안타레스는 청문회를 지켜보기 위해 함께했다 말했지만, 레녹은 이 예지능력자가 자신의 여흥을 위해 시간을 쓰는 성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레녹과 함께 청문회에 동행하는 것을 수락한 시점에서 원하는 바가 있기 때문.
결정적으로, 레녹이 청문회장을 떠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레녹이 아닌 안타레스의 의지였다.
덜컹!
그 순간, 회장의 뒷문이 열리더니 문 너머에서 여러 명의 소년들이 걸어 나왔다.
고풍스러운 예복을 차려입은 앳된 나이의 어린 소년들.
나이로는 고작해야 열살도 되지 않아보이는 그들은, 레녹이 심판규약에 서약하기 위한 석판을 옮기던 이들이었다.
“……!!”
자기들끼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나오다, 뒷문 너머에 있는 레녹을 보고 흠칫 놀라는 소년들.
그들 역시 레녹이 청문회장에서 어떤 말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는지 알고 있는 것이겠지.
애써 내색하지 않고, 하지만 굳이 못본 척도 할 수 없기에 가벼운 묵례와 함께 지나친다.
잔뜩 움츠러든 소년들이 엉거주춤하게 레녹을 스쳐 지나가 떠나려던 찰나.
줄의 가장 뒤편에 서 있던 금발의 소년을 향해 레녹이 입을 열었다.
“꽤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 인사도 없이 떠날 생각인가?”
“네, 네?”
앳된 얼굴의 소년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서 레녹을 돌아보았다.
두려운 기색으로 어깨를 떨면서, 목덜미에 돋은 소름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
소년과 레녹의 나이 차이는 겉으로 보기에도 십 년 이상.
두 사람의 입지를 감안하면 대화가 성립하는 것조차 이상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레녹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제자리에 굳어버린 소년을 향해 가볍게 손을 까닥였다.
“아베니아 스텐슨은 안타레스에게 예지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말라 경고했었지.”
“저, 저기…… 무슨 뜻인지 저는, 잘……!!”
후욱!!
손짓 한 번으로 어린 소년을 자신의 앞에 데려다 놓은 레녹이 속삭였다.
“시종일관 청문회장 전역을 주시하던 안타레스가, 네게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던지지 않더군.”
“…….”
콘라드 헤이번이 전해주었던 경고는 허언이 아니었다.
거대도시 발칸. 현재 이 대륙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와 자본을 자랑하는 도시국가.
수십 개의 에이리어를 망라하는 초광역 생활권의 정점에 서 있는 권한보유자는, 다른 이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청문회에 숨어 레녹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심판규약을 직접 운반하며 개입할 수 있는 위치.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을법한 어린 나이. 안타레스가 자의로 예지를 피해야 할 만큼 강한 인과를 가진 존재.”
레녹이 비웃듯이 물었다.
“발칸의 시장님. 거대도시를 이끄는 책무를 맡고 있는 것치고는, 너무 어린 나이로 위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핫.”
그 순간, 시종일관 겁에 질려 있던 소년의 표정이 싹 변했다.
마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전혀 다른 감정이 싹을 피우듯. 다른 인격이 알을 깨고 뛰쳐나오듯이.
두려움과 불안으로 위축되어 있던 표정이 풀리면서, 그 안에서 의미 모를 희열이 배어나온다.
“아…… 그렇군.”
소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물끄러미 레녹을 바라보던 소년이 희멀건 웃음을 띄워 올렸다.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이고 어색한 미소가 레녹을 향한 직후, 소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세가 언급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카이세라.”
지금까지 시치미를 떼던 것이 무색할만큼, 태연하게 그 이름을 언급하는 소년.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말투와, 반대로 굉장히 선명한 감정의 편린.
역시, 이 거대도시를 이끄는 수장은 평범한 인과나 운명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다.
그 사실을 자각한 레녹이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은, 어떤 시간대의 카이세를 말하는 거지?”
“이런, 벌써 거기까지 알고 있는겁니까?”
소년이 웃었다.
앳된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조와 냉소가 뒤섞인 복잡한 반응.
소년의 탈을 뒤집어 쓴 노괴가 가감없이 감정을 내보인다면 이러할까.
“미안하지만 난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프로젝트의 금제는 모두에게 공평한 속박. 인과역전(因果逆轉)의 묘리에 달한 맹세니까요.”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쯤에서 이 아이를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당에서 찬송가를 부를 시간이 됐거든요. 늦으면 메리 수녀님께 꾸지람을 듣게 될 겁니다.”
“찬송가라…….”
소년의 태연한 답변에 레녹이 피식 웃었다.
그 말이야말로, 지금 이 상황을 소년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듯했기 때문.
하지만 레녹이 굳이 이 시점에서 시장을 강제로 대면한 것은, 이런 대답 따위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발칸의 시장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아직까지 숨어 있는 이유가 궁금해 묻는 것이 아니다.”
“…….”
“어떤 식으로든 네 대답이 이번 청문회에 참석한 근본적인 원인과 엮여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말해.”
레녹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카이세에게서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으음, 이래서 당신과 지금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소년이 곤란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좋습니다. 심판규약을 가지고 노는 괴물과 장난질을 쳐서는 안 되겠지요. 대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을 얻을 방법에 대해서일 뿐입니다.”
“금제의 우회법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다.”
“와인스턴 부시장이 다녀왔던 19구역에 답이 있습니다.”
소년이 느릿하게 말했다.
“당신의 연이 그 너머에 닿을 수 있다면, 진실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카이세에 대한 비밀이, 19구역에 존재하는 [문] 너머에 숨겨져 있다는 말인가.
레녹이 그 사실을 곱씹던 찰나, 소년이 옷깃을 털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 원래는 당신과 이런 식으로 조우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역시 예지자란 귀찮은 존재군요. 바리츠의 혈족도 그렇고, 오랜 역사에서 배척받는 능력이란 달리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치워버리고 싶지만, 결말이 정해진 예지자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것도 없다 생각하는지라.”
소년이 그 말과 함께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기회가 된다면 또 보도록 하죠. 대마법사. 그리고 안타레스 당신도.”
그 말과 함께, 아무런 이능도 사용하지 않고 걸어서 떠나는 소년의 모습.
가방끈을 고쳐메더니, 저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는 일행에게 순진무구하게 손을 흔든다.
하지만 레녹도, 안타레스도 그런 소년을 굳이 막아서거나 잡지 않았다.
“안타레스.”
멀어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녹이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말해두지.”
“…….”
“펠릭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등대지기와 만나서 미래를 관측하면 네 결말을-”
“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
안타레스가 웃으며 답했다.
“초견의 공능으로 볼 수 있는 건 오지 않은 미래뿐이거든. 관측되어 결말이 확정된 미래를 개변하는 능력은 없어.”
“……이미 확인해 봤던 건가?”
“생전의 천견 본인에게 직접.”
안타레스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예지능력자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정해진 결말을 바꿀 수 있는지는 알고 싶어 했거든.”
“…….”
“좋은 실험이었어. 결과와는 별개로.”
안타레스의 대답은 부드러웠지만, 그 내용까지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펠릭스가 바란다면, 라피스 팔시어를 한번 찾아가 볼 생각이야.”
“소용없다는 걸 알아도?”
“그래도, 펠릭스의 미련을 조금 덜어줄 수 있다면.”
안타레스가 웃었다.
“그는 아직 순례길에서 나누었던 약속을 지키고 있거든.”
“…….”
“그렇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야겠지.”
* * *
발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마법사의 청문회.
이 도시에서 가장 섬뜩한 악명을 몰고 다니는 마법사가 직접 출석을 통보했던 청문회가 끝난 지 이틀.
[여기 자신이 사람을 무척 어렵게 죽인다고 말하는 마법사가 있습니다.] [이 남자는 진정으로 자신이 신중한 파괴행위를 저질러왔다고 믿는 걸까요?]하지만 발칸의 모든 미디어 매체들은 레녹이 했던 말을 며칠 내내 곱씹고 조명하며 떠들어대기 바빴다.
[49구역을 지배하는 대마법사, 견뢰 반이 청문회장에서 남긴 말이 큰 화제가 되고 있어……] [네트워크와 SNS 트렌드 랭킹에서 해당 문구가 며칠 내내 차트 상위권을 점령하고……] [수백 명이 넘는 초인을 죽인 마법사가 내뱉은 망언에 대해 각계에서 지탄을-] [청문회 전문이 공개되지 않았음에도, 해당 중계 방송의 시청률이 기록적인 수치를 돌파했다는-]“……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로군.”
견뢰의 마탑.
탑 내벽 복도에 기대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펠릭스가 황당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위층계 내벽 복도 앞에 쭈그리고 앉은 레녹을 힐끗 바라보던 펠릭스가 말했다.
“말 한마디만으로 발칸의 모든 언론매체를 뒤덮을 수 있다니, 대마법사는 역시 달라도 뭐가 달라.”
“…….”
아무런 대답도 없이, 복도 안쪽에 배설된 마력회로를 고치는 일에 열중하는 레녹의 모습.
팔짱을 낀 채로 신문을 툭툭 두들기던 펠릭스가 물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일부러 한 일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레녹이 손을 털고 일어섰다.
푸른 빛으로 발과하는 복도 마력회로에, 예전과는 다른 새하얀 백색의 마력이 섞여 흐르고 있다.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미간을 찌푸린 레녹이 말했다.
“따지자면 내 실수지.”
“실수? 자네가 실수라는 것도 할 줄 알았나?”
“……날 대체 뭘로 생각하는건지 모르겠는데.”
레녹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에 공감이 가서, 적당한 대답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게 적당한 대답이라고?”
“그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턱을 매만지며 생각하던 레녹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때는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아. 거기까지는 감안하지 못한거지.”
“…….”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레녹을 내려다보던 펠릭스가, 새의 머리가 푹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제니한테 들었는데, 지금 딥웹에서 자네는 온갖 말도 안 되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더군.”
“…….”
“불살의 대마법사, 생명경시 마탑주, 인간사랑개, 그 밖에도 온갖 이상한 이름들이…….”
“그걸 굳이 내 앞에서 설명을 해야겠나?”
레녹을 타박하고 싶은건지, 새로 얻은 별명을 가지고 놀려먹고 싶은 건지 모를 펠릭스를 두고 등을 휙 돌렸다.
“어쨌든 거의 다 끝났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마력회로 안에 질량술식을 부여해 넣기만 하면 돼.”
괜히 펠릭스를 불러놓고 한참 기다리게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이 날 때마다 마탑의 시설을 개조하고,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는 일에 집중하다 보니 일정이 맞지 않았을 뿐.
그중에서도 지금 레녹이 하는 일은 꽤 오랫동안 미뤄둔 탑의 질량술식 부여작업이었다.
구세계의 승천자, 전쟁대리인 헤르메스 오로크니어.
질량술식을 사용해 단신으로 전쟁을 수행하던 그의 힘은, 레녹도 쉽사리 다루지 못할 만큼 고차원의 권능이다.
승천의 자격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대답을 다음 세계에 올려보낼 정도로 걸출한 초월자의 술식.
그만큼 난해하고 복잡하며, 연비가 나쁜 질량술식을 이제서야 탑의 시스템 내에 동화시킬 수 있던 것은.
레녹의 최대마력량이 늘어나며, 질량술식의 극도로 나쁜 연비를 감당할 수 있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
외해의 마력을 흡수해 마력량을 끌어올린 일은 라피스를 돕는 과정에서 벌어진 우연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마력량 자체가 크게 늘어난 것 자체는 레녹에게도 엄청난 이득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아니고서야 지금처럼 마탑의 온갖 시스템을 새롭게 개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지.
얼굴에 묻은 검댕을 셔츠 소매로 대충 닦아낸 레녹이, 들고 있던 마력조정장치를 흔들면서 말했다.
“남은 건 탑의 모든 마력회로를 엔진부에 다시 연결하는 것뿐이다. 동화작업 자체는 5분도 걸리지 않을 테니 따라와.”
“……늘 생각하지만, 자네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로군.”
펠릭스가 기가 막힌 기색으로 고개를 저으면서도 얌전히 레녹을 따라 걸었다.
“발칸을 수차례 뒤집어놓은 대마법사가 이런 모습으로 며칠 내내 탑을 수리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니, 다른 사람들은 보고도 믿지 못할걸세.”
“그런가? 난 이런 작업 자체는 나름대로 재밌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레녹이 피식 웃었다.
“확실한 개선점이 있고, 내 판단에 따라 결과의 고점이 달라지는 작업은 흔치 않아. 보기엔 지루해 보일지 몰라도, 성취감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그건 또 흥미로운 대답이로군. 자네같은 마법사에게도 아직 성취욕과 같은 감정이 남아 있는 겐가?”
“그렇지.”
탑의 엔진이 자리한 지하공동으로 향하며 레녹이 말했다.
“오래전에는 내가 어떤 노력을 해야 강해질 수 있을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거든.”
“…….”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던 그때가 조금 그립기도 하지만…… 끝났다.”
찰칵!!
봉황전의 마력을 직접적으로 수급하는 마탑 엔진부에 다시 마력회로를 연결하고, 재점화를 실시.
붉고 푸른 빛으로 빛나는 격렬한 마력 사이로, 새하얀 백색의 의념이 섞여서 천천히 빛나기 시작한다.
탑내 권역을 자유롭게 이동가능한 라이트닝 커넥터 시스템을 구축한 뒤로, 사실상 처음으로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는 엔진부.
서서히 불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탑의 외벽과 내벽이 동시에 진동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거세게 흔들리다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는 탑의 지하공동 저편에서, 새하얀 덩치를 가진 새끼 용이 달려 나왔다.
[아우우……!!]이리저리 흔들리는 탑의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사지를 벌리고 레녹을 향해 펄쩍 뛰어 안기는 거대한 새끼용의 모습.
“탑의 권역 주위에 가상의 질량을 부여해서, 지상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조정하는 작업이다.”
레녹이 수호령수의 통통한 거체를 마법으로 경량화시켜 받아내며 말했다.
“나중에는 마탑 전체가 지상의 물리법칙에 구애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표지.”
“지상의 물리법칙이라면……?”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레녹이 웃었다.
“나는 이 마탑이 지상이 아니라 하늘을 부유하는 공중요새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 발상.
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주체가 탑을 직접 만들어낸 마법사라는 점에서 펠릭스는 어떠한 첨언도 하지 못했다.
“널 오늘 부른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낸 레녹이 거대한 엔진부 지지대 사이에 걸터앉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딥웹 쪽 일을 처리하기 전에 확인하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시간이 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딥웹 쪽 일이라고?”
펠릭스의 질문을 무시하고 연초를 꺼내든 레녹이 물었다.
“안타레스의 일. 알고 있겠지?”
“…….”
“그는 라피스의 공능을 빌려서도 자신의 결말을 바꿀 수 없을거라 말하더군.”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다만 순례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언젠가 라피스를 한번 찾아가겠다고 내게 말했다.”
“…….”
“순례길이란 뭐지? 왜 너희들은 대륙을 돌아다니는 여행을 그런 이름으로 부른 거지?”
아무런 말 없이 눈을 감는 펠릭스를 보며 레녹이 물었다.
“크로켄 아실러스가 그 여정에 함께했고, 너와 안타레스가 아직 그 길 위에 남아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한 번쯤 들어보아야 할 것 같군.”
“그건…….”
머뭇거리던 펠릭스가 말했다.
“그건 우리의 꿈이었네.”
“꿈?”
“숱한 용병과 전사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비사가 있지.”
펠릭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대륙을 여행하며 자신만의 순례를 마친 전사는, 자신의 결말에 걸맞는 운명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
“특별한 규칙이나 형태를 가진 것은 아니야. 지나온 여정 자체를 의미한다는 이야기만 나 역시 들었을 뿐이지. 하지만-”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펠릭스가 말했다.
“전사로서 승천에 도전하기 위한 잊혀진 고대의 승천의식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은 분명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