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53
약먹는 천재마법사 953화
금제(8)
휘오오오!!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고요한 숲 속.
습기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 마르고 시원한 공기만이 가득한 수림.
쏟아지는 잎사귀를 지팡이로 치워가며, 레녹은 광대한 숲을 홀로 걷고 있었다.
[마스터.]품 안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다비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안을 사용하는 유기체를 길잡이로 데려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올리비에라를 말하는건가?”
[영 신뢰할 수 없는 유기체라구요. 태도도 그렇구요.]다비가 투덜거렸다.
[조금 오래 살았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자라는 건 틀림없지. 네 말도 맞아.”
레녹이 웃었다.
“하지만 쿤다라까지 가는 길을 뚫어내려면, 결국 올리비에라 본인을 움직이게 하는 편이 가장 수월할 거다.”
[…….]“이번 거래에서 그러했듯, 내가 외겁도시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언제든 주도권을 잡으려 할 사람이야. 차라리 그녀를 직접 쿤다라까지 끌고 가는 편이 쓸데없이 일이 끌리지 않겠지.”
애초에 올리비에라가 아나테마의 인과를 그만큼 강하게 원하지 않았다면 이런 요구를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터.
레녹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올리비에라의 거취를 직접 움직여가면서까지 그녀의 능력을 빌리려던 것이 아니었나.
“칠채보의 마안은 인과율에 간섭할 수 있는 극소수의 선천이능 중 하나. 장생종의 도시에서 틀림없이 유용하게 쓰일 구석이 있다.”
불룩 튀어나온 다비의 볼을 잡아당긴 레녹이 말했다.
“그녀도 시간이 필요하다 했으니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닌 셈이지. 일단 해야 할 일부터 처리하자.”
[그러지 않아도 탐색은 다 끝났어요.]다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여기, 바로 앞이에요. 들리죠?]“……그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잎사귀가 사각대는 숲의 소음.
하지만 레녹은 그 자연의 소리 사이로, 희미한 기계음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나무 밑동 아래에는 톱니바퀴가 회전하고, 바위 아래로 고요한 엔진소리가 울려 퍼진다.
건조한 숲 한복판에서, 위화감 없이 섞여 들어간 고도화된 기계의 흔적.
치이익!!
눈앞을 가리는 노이즈 장막을 한 손으로 거미줄처럼 쭉 걷어낸다.
텅 비어 있던 숲의 풍경이 일그러지며, 광석을 깎아 만들어진 거대한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암반만 한 크기의 거대한 광석을 원석째로 깎아서, 성채의 주춧돌로 삼아 지은 아름다운 정경.
성채의 천장과 창문, 환기구 사이로는 뜨거운 열기와 마력광이 규칙적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다.
마치 거대한 보석의 용광로처럼 쉴새없이 증기를 뿜어내며 호흡하는 독특한 공방의 풍경.
그 보석공방의 앞에, 십수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 총을 들고 서 있었다.
“…….”
철컥!
보석을 깎아 만든 듯한 매끈한 형상의 머스킷 소총.
총구를 하늘 위로 치켜든 채, 잔뜩 경직된 표정으로 길을 막아선 사람들의 모습.
마력을 담아 발광하는 소총을 차마 레녹에게 겨누지는 못한 채 공방 문 앞을 가로막고 있다.
애써 레녹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려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걸어나왔다.
“아케인 공방의 마이스터는 속세와 떨어져 실력을 연마하는 일에 열중해야 하지요.”
머리와 수염을 잘 다듬어서 빗어넘긴 남자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이 엘바토 듀리스. 발칸의 대마법사를 뵙고도 모를 만큼 눈이 어둡지는 않습니다.”
“…….”
“허더필드 숲의 결계를 맨몸으로 부수고 들어올 정도로 심유한 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틀림없겠죠.”
듀리스 공방의 마이스터, 엘바토 듀리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레녹에게 물었다.
“아나테마의 변절을 응징했다는 사도살해자께서, 무슨 일로 저희 공방을 찾으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지는 않지만, 견뢰의 행적과 성정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검은 코트와 은빛의 지팡이.
공방이 위치한 숲의 대결계를 물에 젖은 종이처럼 찢어버리고 들어오는 거침없는 손속.
폭발하듯 번뜩이는 마력의 기척을 보고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
그렇기에 엘바토 듀리스는 상대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방을 지키는 경호원과 손님들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저 마법사 하나를 상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쥐여 달래 보내주고, 죽이려 한다면 최대한 가진 것을 챙겨 도망쳐야 할 터.
하지만 레녹은 그런 엘바토의 말을 듣고도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짚고 비스듬히 서서, 수염을 다듬은 엘바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을 뿐.
“닮았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엘바토의 말을 무시한 레녹이 가볍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짓에 놀란 경호원들이 움찔거리며 방아쇠를 당기려다 얼어붙었다.
어느새 그들의 머리 위에 시커먼 사슬을 맨 악마 거인이 떠올라 있었다.
고오오오……!!!
새카만 암흑을 온 몸에 두르고 뭉쳐 빚어낸 듯한 흉험한 외견.
갈퀴처럼 구부러진 손아귀 사이로 검은 사슬을 쥔 채, 양팔을 활짝 펼친다.
“으, 으윽…….”
“큭…… 으흑…….”
숲 한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악마거인의 존재에, 죽음을 직감한 경호원들이 울음 섞인 신음을 토해냈다.
공방 전역을 둘러싼 온갖 보안 장비와 자동사격 아티팩트.
마이스터가 제작한 중장마총을 쥐고 있음에도, 도저히 이 곳에서 살아나가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
엘바토 역시 악마 거인의 모습을 보자마자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럴수가. 가비행의…….”
“명에 대해 알고 있군.”
레녹이 눈을 빛냈다.
“그가 네 공방을 방문한 적이 있었나?”
“……공방을 이용한 손님에 대한 신상정보는, 마이스터로서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요.”
어깨를 짓누르는 악마 거인의 섬뜩한 기세에 엘바토가 더듬거리며 힘겹게 말했다.
“특히,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아케인 공방에서는 절대로-”
“나는 그런 장인정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레녹이 따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명이 네 공방에서 어떤 아티팩트를 만들려 했었지?”
듀리스 공방은 마력이나 술식을 내장한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아케인 공방.
마이스터 본인이 뛰어난 술사이자 고위계 초인인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아티팩트에 내장시킬 능력을 정하는 것은 마이스터가 아니다.
명처럼 강대한 흑마법사라면,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데 있어 어떤 술식이나 능력을 넣을 것인지 본인이 직접 선택하고 지정해 주었을 터.
“…….”
하지만 엘바토는 레녹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거짓을 말하느니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는 각오인가.
그 의중을 눈치챈 레녹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개가 좋군.”
쿠구궁……!!
악마 거인이 한 팔을 천천히 엘바토의 앞에 내민 채로 주먹을 쥔다.
허공에서 끓어오르는 흑마력의 광채에 엘바토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 그 순간.
쿵!!
묵직한 무언가가 엘바토의 눈앞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슬쩍 눈을 뜬 엘바토의 앞에 보이는 것은, 검은 사슬에 단단하게 묶인 흑색의 관.
악마 거인이 관에 매인 사슬 한쪽을 쥔 채, 엘바토를 재밌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회담이 끝난 뒤 회수해서 안치해두었다.”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네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으니.”
“……회담이라면.”
“확인해 봐라.”
레녹의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을까.
창백해진 얼굴로 관을 향해 다가선 엘바토가 천천히 안을 확인한 순간.
“아, 아버지……!!”
그 자리에서 힘이 풀린 것처럼 주저앉아버렸다.
“엘바토 님!!
“마이스터, 정신 차리십시오!!”
경호원들이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총조차 내려놓고 황급히 엘바토를 부축했다.
“마이스터 오슈토 듀리스는 에타노크에서 진행된 회담에서 교단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 부산스러운 모습을 보며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바로 그의 아들이자, 듀리스 공방의 주인이 맞겠지?”
* * *
탁!
벽난로 너머로 따뜻한 열기가 피어오른다.
간소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레녹이, 앉지도 못하고 서성이는 엘바토를 돌아보았다.
“그렇습니까…….”
레녹의 말을 듣고 있던 엘바토가 창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교단과 거래를…….”
엘바토에게 오슈토가 죽음을 맞이한 과정과 이유.
그가 아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교단을 찾았고, 신녀가 그 부탁을 들어주었으며.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난 뒤 새로운 신녀가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는 사실까지.
“오슈토 듀리스는 생전에 다양한 세력을 자신의 고객으로 삼았다. 그 때문인지 교단의 신녀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
그간 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한 레녹이, 연초를 꺼내며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를 향해 눈짓했다.
“피워도 되나?”
“아, 예. 물론입니다.”
허락을 구하는 질문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진 것일까.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끄덕인 엘바토를 두고 레녹이 불을 붙이며 말했다.
“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과 타인의 목숨을 거래했고, 그 대가를 뒤늦게 치렀지.”
“…….”
“다만 그가 죽음을 맞이한 방식에 대해, 따로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기에……”
연기를 훅 내뿜은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유해를 네게 전해주어야겠다 생각한 것뿐이다.”
오슈토 듀리스의 죽음은 그가 자처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교단과 정확하게 어떤 거래를 한 것인지, 직접 조사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사실들이 있는 바.
“……저는, 어릴 때부터 몸이 자주 아팠습니다. 조금만 바깥에서 놀고 나면 몸에 열이 오르고, 두드러기가 나서 며칠을 앓아눕곤 했죠.”
맞은편 의자에 앉은 엘바토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
“열 살이 지난 뒤로 그런 병세가 크게 나아서,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호전되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하신 일이었군요.”
“…….”
“아버지는, 항상 당신께서 편히 죽지 못하실 거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엘바토가 슬픈 듯이 미소지었다.
“나이를 먹고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설마 이런 식일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
한동안 그렇게 시선을 떨군 채 벽난로의 불빛을 바라보던 엘바토가, 양 뺨을 두들기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버지의 잘못으로 희생당한 다른 환자분들은 제가 직접 수소문해 평생 속죄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연초를 피며 고개를 젖힌 레녹이 대꾸했다.
“난 너를 책망하거나 잘못을 지적하려 찾아온 게 아니다. 그 부분에 대해 속죄를 하든 책임을 지든 마음대로 해.”
“…….”
오슈토 듀리스가 벌인 인신공양은 아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같은 병을 앓고 있던 환자들을 희생시킨 결과.
하지만 그 혜택을 입은 엘바토 듀리스가 무엇을 책임지고 속죄할 수 있는지는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다.
결국 당사자 본인이 직접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일.
애초에 레녹이 듀리스 공방을 찾아온 것은, 당시 있던 일의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슈토 듀리스가 당시 교단과 무엇을 거래했기에 당대 신녀와 직접 만날 정도의 특혜를 누릴 수 있었느냐는 거다.”
레녹이 물었다.
“공방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면, 당시 오슈토 듀리스가 제작한 아티팩트와 고객 명단이 남아 있겠지?”
“……그건.”
오슈토 듀리스는 이젤 나이드리와 직접 만날 정도로 교단 내에서 큰 특혜를 누린 것은 물론이고.
아들을 살려달라는 억지를 부리고도 신녀가 그 소원을 들어주었을 정도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물론 종국에는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애초에 교단원도 아니었던 오슈토가 수십 년 넘게 살아 있던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
그렇다면 당시 오슈토 듀리스가 교단에게 제작해 주었던 아티팩트가, 그만큼 교단에게 있어 중요한 물건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레녹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뒤 자신의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듀리스 공방을 찾아왔던 것이다.
“아직도 고객의 신상정보를 팔아넘길 수 없다고 말할 생각인가?”
“…….”
망설이던 엘바토가 눈을 질끈 감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방 지하에, 아버지께서 남겨두신 장부가 있습니다.”
“…….”
“장부를 확인하면 아버지가 교단과 무엇을 거래했는지 알 수 있겠지요.”
엘바토가 방의 문을 열고 레녹을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조용한 지하실.
암흑 속에서도 은은하게 반짝이는 보석계단을, 레녹과 엘바토가 밟고 내려가고 있었다.
한 손에는 작은 등불을 든 엘바토가 앞장서고, 레녹이 연초를 문 채 뒤를 따랐다.
“공방의 시설이 화려하기 그지없군. 돈이 대체 얼마나 많은 거지?”
“……아티팩트를 제작하다 보면 다양한 마석과 원석을 주로 다루게 되지요.”
엘바토가 멋쩍은 기색으로 대답했다.
“가공이 끝나고 남은 부분을 모아서 장식하다 보니, 어느새 공방의 상징이 되어버렸습니다.”
“…….”
“돈맛을 봤다는 욕도 많이 들었지만, 소문이 한번 퍼지고 나니 오히려 주문이 배로 늘더군요…….”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공방은 필연적으로 비싼 재료와 촉매를 사용하고, 그만큼 공방 역시 반대급부로 부유해진다.
그건 다시 말하자면 부유한 공방에서 필연적으로 좋은 아티팩트를 제작해낸다는 말과 같은 의미.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레녹이 품 안에서 작은 휘장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물건이 듀리스 공방에서 제작한 물건이라고 들었는데.”
“아, 닉스의 휘장이군요.”
자연스럽게 휘장을 건네받은 엘바토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디 보자…… 장식의 마감을 보니 18년 전에 만든 물건이군요. 그때는 아티팩트에 유명한 정령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
“의뢰인은 서른 정도로 보이는 기품 있는 왕족이셨지요. 사용자의 기척을 완벽하게 가려주는 물건이 필요하다 해서, 암영석에 프리즘 기법을 더해 기척을 왜곡시키는 용도로 만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 기억력이 꽤 좋군.”
자동응답기처럼 주르르 흘러나오는 엘바토의 말에 레녹이 물었다.
“그런데 아까는 내게 고객의 신상정보를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나?”
“……예전에 만든 아티팩트를 다시 보게 되는 일은 흔치 않아서, 조금 말이 많았군요.”
정작 그렇게 말한 엘바토 본인조차 조금 무안한지, 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지금 봐도 무척 잘 만든 아티팩트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디자인이 조금 유행을 타는 스타일이지만, 휘장이 으레 그렇듯이 공적인 자리에서도 무탈하게 어울리지요. 무릇 아티팩트를 만드는 장인은 아티팩트의 능력뿐만이 아니라, 고객의 소속과 입장을 고려해 섬세하게 니즈를 맞추지 않으면…….”
“하지만 내가 이 휘장을 손에 넣을 때 주인은 네가 말한 왕족이 아니었는데.”
“예?”
“이리나 페스필드라는 유물 탐사대의 대장이 교단과 결탁해서 손에 넣은 귀물이었지.”
“…….”
“의도는 좋았지만, 모든 아티팩트가 원래 주인의 손에 머무를 수는 없는 법이지.”
레녹이 휘장을 돌려받으면서 피식 웃었다.
“그래도 직접 제작한 유물을 세심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겠군. 고객이라면 신뢰가 가겠어.”
잠깐 휘장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그에 대한 정보를 쭉 읊어낼 정도라면, 엘바토가 평소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아티팩트를 제작하는지는 짐작이 간다.
엘바토 듀리스의 재능은 아버지인 오슈토 본인이 직접 보증했던 만큼, 실력에 있어 별다른 하자도 없었겠지.
듀리스 공방에 예약주문이 3년 가까이 밀려 있는 것도 이렇게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흠흠, 이쪽이 오래된 장부들을 보관해두는 창고입니다.”
헛기침을 터트린 엘바토가 계단 끝까지 내려와, 바로 뒤쪽에 위치한 쪽문을 열었다.
희미한 등불이 빛을 발하는 어두운 복도. 고요한 방 안에는 오래 묵은 종이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엘바토는 레녹보다 몇 걸음 앞서 걸으며 복도 양 옆으로 자리한 보관함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보관실 앞쪽은 제가 사용하던 장부를 보관해 두었고, 뒤쪽이 아마 아버지께서 남겨두신 장부일 겁니다.”
“직접 찾아본 적은 없나 보지?”
“아버지의 고객이 찾아오실 때가 있어서 간혹 장부를 들춰보기는 합니다만. 워낙에 양이 방대해서 저도 다 확인해 본 적은 없군요.”
부스럭대며 복도 뒤쪽을 걷자, 오래되어 쌓인 먼지가 풀풀 흩날렸다.
하지만 엘바토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먼지 더미에 파묻히다시피한 채로 장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두터운 책자를 수십 개 쌓아두고 빠르게 일자를 살피는 엘바토의 모습.
“어디 보자. 제가 열살 즈음에 있었던 일이라 하셨으니, 시간상으로는 아마 이쯤일 텐데…….”
“그 당시 듀리스 공방의 거래량도 엄청난 수준이었나 보군.”
“저도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공방을 차릴 당시에는 어떤 고객이든 한 번씩은 주문을 받으셨다고 하니까요.”
레녹의 말에 대답한 엘바토가 순간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렇기에 교단과도 거래를 틀 수 있었던 것이겠죠.”
“…….”
“아, 찾았습니다.”
풀썩!
일자가 적혀 있는 장부 앞쪽 목차를 확인하며 넘기던 엘바토가, 아래쪽에서 감색 책자를 하나 꺼내 들었다.
낡은 거래 내역서를 한데 묶어 책자로 정리해낸 오래된 장부.
묶어둔 끈이 낡아서 덜렁거리는 장부의 목차를 손으로 짚어나가던 엘바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지를 펼쳤다.
“55페이지. 비탄의 협곡. 귀도 교단의 총본산으로 향하는 입구가 이곳이었죠?”
“…….”
“이 장부 안에 아버지께서 교단에게 어떤 아티팩트를 제작해 넘겨주셨는지 적혀 있을 겁니다.”
“거래 내역서에는 정확하게 어떤 정보를 담아두게 되어 있지?”
“다른 장부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제작에 사용된 부품과 재료. 수신인, 일자, 장소 등이 표기되어 있죠.”
엘바토가 장부의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며 설명했다.
“다만 제작에 사용된 설계도면은 마이스터만이 출입 가능한 금고에 엄중히 보관하고 있어서, 추후 금고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내역서부터 확인하고 생각해보지.”
거래 내역서를 꺼내든 엘바토를 보며 레녹이 물었다.
“오슈토 듀리스에게 교단과의 거래를 주선한 장본인이 누구인지, 그것부터 알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장비 제작을 주문한 의뢰인의 이름이 분명-”
순간, 엘바토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카이세 바쥬르라고 적혀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