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98
약먹는 천재마법사 998화
첫 번째 관문(8)
[작염구(炸炎球)]화르륵!!
화려한 비단에 휘감긴 벽이 겹쳐 무너지면서, 그 사이로 불길이 넘실댄다.
실체가 없는 불꽃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벽과 천장 사이를 무자비하게 두들겼다.
콰아앙!!
전신에 불꽃을 두른 탑주가 폭발적으로 가속하고, 레녹이 손에 화염을 감고 주먹을 쥐었다.
레녹과 탑주의 신형이 뒤엉켜 구르다, 다음 순간 십수 미터를 뛰어넘어 충돌한다.
화염의 파동이 수십 번씩 폭발하며 화청루의 너른 복도를 지지고 불태웠다.
[소연탄(小燃彈)]드르르르륵!!
마치 기관총을 쏘아내는 듯한 소음과 동시에, 수백 발이 넘는 초소형 작염구가 작렬.
화청루 최상층 복도 천장을 뚫고 벌집처럼 탄흔을 남겼다.
“빠르군. 작염구를 이렇게까지 소형화시켜서……!!”
타다닥!!
초소형 작염구의 포화를 피해 질주하던 레녹이 벽면 뒤로 뛰어들며 몸을 숨긴 직후.
탑주의 등 뒤에서 나타난 레녹이 양손을 모아 비틀고, 순식간에 화염의 창을 만들어 쏘아냈다.
뻐어엉!!
탑주의 몸을 휘감은 재례의가 쩍 갈라지더니, 레녹이 던진 화염창을 불사르고 사라진다.
염열마법을 염열마법으로 불태우는 맞불의 일종. 레녹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재례의(災隷衣)인가. 타티아나 치글렛이 쓰는 걸 본 적이 있지.”
“네놈이 발칸에서 그 아이를 상대로 싸워보았다면 그러했겠지.”
탑주가 웃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하나 결국 네놈은 치글렛도, 견뢰도 죽이지 못하고 패배한 개 따위가 아니더냐.”
“…….”
“내 그렇게 네놈이 곱씹고 있을 패배를 기특하게 여겨, 차후 견뢰와의 재전에 앞장설 수 있게 배려를 해주었건만…….”
이글거리는 불길 너머로 레녹을 바라보는 탑주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주제를 모르고 감히 본주의 호의를 무시해?”
[환령기고(煥領氣庫)]쿠화아악!!
재례의의 옷자락이 활짝 열리더니, 그 안에서 화염으로 이뤄진 무수한 병기들이 쏟아져나왔다.
화염창, 불칼을 비롯해 이글거리는 불길로 이뤄진 날붙이가 레녹을 향해 쏘아지고.
동시에 레녹이 한 발로 바닥을 거칠게 내리찍었다.
[환염보(煥炎步)] [답섭(踏燮)]레녹의 발을 중심으로 불길이 파문처럼 터져 나와, 화청루 최상층 바닥을 불태웠다.
탑주와 레녹이 서 있던 자리가 무너지는 순간 병장기의 파도가 방향을 잃고 빗나가고.
콰르르릉!!
“배려라. 딱히 그런 것을 원한 적은 없는데.”
아래층으로 떨어지면서 한 손을 뒤로 숨긴 레녹이 피식 웃었다.
“배려는 술주에게 관리자 자리를 빼앗긴 당신이 받아야 하는 것 아니었나?”
“……네놈이 진정……!!”
그 말 자체가 탑주의 역린을 건드린 것일까.
표정이 일그러진 탑주가 레녹과 거의 동시에 한 손을 내리그으며 펼치고.
허공에서 추락하던 레녹과 탑주의 손바닥이 정면으로 맞닿았다.
착!!
염열계열 고유마법
성질변화 압축현현
염열계열 고유마법
성질변화 지정현현
“축화.”
“축화……!”
쿠화아아아악!!!
같은 원류에서 시작된 두 마법사의 [축화(築火)]가 사선으로 반전.
영거리에서 최대의 위력을 발휘하는 불꽃이 맞잡은 손을 타고 전방향으로 분출했다.
뻐어어어어엉!!!
화청루 최상층 복도가 불타 무너지고, 화려한 금자탑의 머리가 불꽃에 휘감겨 폭발했다.
장장 수십 미터는 되는 화염줄기가 양쪽으로 분사되며 화청루의 화려한 금자탑을 터트린다.
일그러지는 화염구름 속에서 탑주와 레녹의 신형이 화청루의 외벽을 타고 추락했다.
휘오오!!
구름 아래 몸을 눕힌 채 뒷짐을 진 탑주와, 화염을 휘감고 돌아서는 레녹의 모습.
탑주가 굳은 표정으로 레녹을 노려보던 찰나, 레녹이 웃으면서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 손짓의 방향을 알아차린 탑주가 퍼뜩 시선을 들어 올린 그 순간.
[화염인(火炎印)] [천붕(闡崩)]화청루의 옆에서 나타난 거대한 화염의 주먹이 그대로 탑주를 후려갈겼다.
콰아아아앙!!
그 충격으로 탑주의 신형이 화청루 중간층에 처박히면서 텅 빈 복도 위로 미끄러졌다.
“음……!!”
재례의를 소모해서 위력을 반감했음에도 숨이 턱 막히는 충격.
화염을 실체화한 물리력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묵직한 마법이다.
얼굴이 굳은 탑주가 한 손으로 균형을 잡으며, 다른 손으로 허공에 붓질하듯 불길을 피워낸 순간.
쐐애액!!
거대한 화염주먹 위에 올라탄 레녹이 엄청난 속도로 가속해 탑주를 들이받았다.
“외도 따위가!!!”
노성을 지른 탑주가 한 손으로는 화염의 법진을 그리며, 다른 손으로 수인을 맺고 마법을 영창.
활활 타오르는 성문이 솟구치며 굳게 문을 닫고 레녹과 탑주 사이를 가로막았다.
한 손으로는 마법진을, 다른 손으로는 수인으로 각자 다른 마법을 시전하는 최고난도 분할영창.
쿠와앙!!
화염의 날개를 두른 레녹이 불타는 문 위로 충돌하며, 성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문을 뚫고 탑주를 덮쳐도 이상하지 않은 불꽃이 화청루 중간층계를 메우고 넘실거렸다.
탑주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빠르게 화염의 마법진을 완성하고, 그 안에 손을 들이밀었다.
[포화무장 2번]블레이버 마탑의 솔라 시스템. 탑의 의식공간에 존재하는 불꽃을 무구의 형태로 소환하는 [포화무장].
개중에서도 1번부터 10번까지 이름이 붙은 넘버링을 탑주가 꺼내 들려던 그 순간.
문 너머에서 레녹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연소무장 소환.”
콰아아아앙!!!
거대한 점화장치가 문을 박살 내고 들이닥치며 불꽃을 내뿜었다.
박살 난 문틈 사이로 레녹의 왼팔이 튀어나오고, 그 팔에 매달린 배열장치가 작동.
파이프가 회전하면서 탑주가 그리던 화염의 마법진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위이이잉!!!
“무슨 수작을……!!”
마법이 아니라 선천이능에 가까운 순수한 속성조작. 파이로키네시스를 상대하는 듯하다.
당황한 탑주가 마법진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어떻게든 포화무장을 꺼내려던 그 순간.
콰직!!
점화장치로 탑주의 발등을 내리찍은 레녹이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폭발하는 불꽃을 부스터 삼아 몸을 밀어 올리고, 약물의 힘을 빌려 몸의 부하를 억누른다.
[이음(二陰)]피를 타고 흐르는 얼음작인이 체내 세포의 괴사를 막고, 삐걱대는 몸을 단단하게 이어붙였다.
[삼환(三環)]온몸에 수십 겹씩 겹쳐 두른 초소형 결계법진이 관절과 근육의 붕괴를 억제하고 원형을 보존했다.
[사혁(四焱)]전신에 휘감긴 불길을 반동 삼아 가속한 레녹의 주먹이 엄청난 속도로 탑주의 옆구리에 꽂혀 들어가고.
그 모든 동작을 염열마법이 보조하고 분출하며 위력을 한도까지 끌어올렸다.
레녹의 유약한 몸을 보조하는 수십종의 마법과 결계, 약물과 축복이 동시에 작동한 순간.
구중도래 연계비의
[십종(十終)]잠시나마 반동을 잊은 레녹의 권격이 탑주의 전신을 향해 폭격하듯 때려 박혔다.
퍼버버버버벅!!!!
발등의 뼈가 아작 나 으깨지는 것과 동시에, 팔과 다리의 힘줄을 끊고 근육을 파열시킨다.
명치와 턱, 간장과 허리를 위아래로 깨부수고 관통하며 타오르는 손으로 헤집어 끊어낸다.
술식발동을 경계하고 반응하려던 탑주의 허를 찌르는, 전신의 급소를 찌르고 뭉개는 묵직한 타격.
“……!!!”
작정하고 쏟아붓는 타격기에 전신이 난자당한 탑주의 눈이 순간 흐릿해진다.
턱을 두들겨 맞으며 뇌가 흔들리고, 순간적으로 사고가 끊기는 것은 고위계 초인조차 불가피한 일.
하지만 탑주는 뼈와 근육을 깨부수는 충격에도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으드득!! 네놈이……!!”
인간을 육편으로 만들어 버릴 살인기를 두들겨 맞고도, 숨이 끊어지기는커녕 대번에 의식을 되찾는다.
육체의 고통에 오래 얽매이지 않는 대마법사의 초월적인 정신력.
애초에 이런 부상과 타격 자체에 상당한 내성을 지닌 워메이지의 솜씨다.
탑주 역시 중앙에서 목숨을 걸고 쉴 새 없이 사선을 넘나들었다는 증거.
“오냐, 직접 승부를 내고 싶다면 받아주마……!!”
자신의 피를 불태워 전신에 두른 탑주가,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이를 악물고 걸어 나왔다.
“내 이 자리에서 견뢰의 봉황전(鳳凰殿)을 되찾을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시험을 내릴지니!!!”
“아니, 반대다.”
하지만 레녹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도 걸어 나온 탑주를 보며 한걸음 물러섰다.
피곤한 표정으로 양손을 털어낸 레녹이 말했다.
“이것 자체가 영창이었거든. 다 끝났군.”
“……뭐라고?”
견뢰와의 전투에서 천번이 보여준 기술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주문사용법.
그것을 되새긴 탑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발아래서 터져 나온 불길이 순식간에 탑주의 몸을 가두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화심궤(火深櫃)] [천열(泉熱)] [발홍(發紅)] [적축(赤築)]……
탑주의 몸을 두들기며 때려 박은 체술이, 한발 늦게 대체영창으로 작동해 염열마법을 구현한다.
뒤늦게 폭발하는 마법 하나하나가, 모조리 불길을 예열하고 위력을 끌어올리는 시동기.
사람 하나를 가둬놓을 공간을 지정하고, 그 안에 화기를 집중시켜 끌어내는 형태의 복합영창.
염열계열 고유마법
10중영창 복합공명
심의(心意).
“용염비(龍炎庇).”
양손을 합장한 레녹이, 그대로 손뼉을 쓸어내리듯이 비틀어버린 그 순간.
탑주가 갇혀있던 화심궤가 사선으로 쪼개지면서 그 자리에서 눈부시게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수십 층이 넘는 화청루의 금자탑이 절단면을 따라 쪼개지며 양단된다.
단면 위로 옮겨붙은 불길과, 펄펄 끓는 증기 위로 탑주의 신형이 떨어지고.
무너지는 금자탑 위로 추락해 굉음을 터트렸다.
쿠우우웅!!!
그 뒤를 따라 지상에 내려선 레녹이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를 보고 웃었다.
“징그럽게도 질기군. 용염비의 조합 순서를 역산해 위력을 반감시켰나?”
염열마법을 10중첩으로 조합시켜 영창하는 심의, 용염비(龍炎庇).
말 그대로 용의 불꽃을 덮어 누르는, 특정 공간 아래 화력을 집중시키는 대인지정 염열계 극의다.
위력이 강하지만 영창에 시간이 필요한 극의를 대체영창을 사용해 거의 즉발로 때려 넣었음에도, 탑주의 몸은 증발하지 않았다.
회피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한 순간 탑주는 용염비의 발동을 위해 조합된 마법의 순서를 역산.
그 직후 자신의 불꽃을 끼워 넣고 강제로 조합식을 비틀어 위력을 상쇄시켰던 것이다.
탑주 역시 원류가 같은 염열마법사이자, 술식을 억누르는 대신 강제로 키워 버렸기에 가능한 대처.
동시에 탑주의 술식에 대한 감각과 이해도가 엄연히 대종사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순간적인 센스나 판단 자체는 생각 이상으로 높군. 출력에 기대지 않는 기술도 이 정도 수준인가.”
견뢰의 신분으로 화신체를 만났을 때는 출력으로 찍어누르는 스타일이라 생각했는데, 직접 상대해보니 기술이나 판단이 굉장히 날카롭다.
능숙한 분할영창. 법진과 수인을 다루는 숙련도. 고위마법에 의존하지 않고 예열을 중첩하며, 상대의 술식을 짐작하고 받아치는 대처.
레녹이 터트린 심의를 피하는 대신, 맨몸으로 받아내고 위력을 경감시킨 판단까지.
탑주의 마법에 대한 재능은 물론이고, 그가 지닌 화염내성이 면역에 가까운 수준에 도달했다는 증거.
“하지만 그 모든 판단 자체가 결국 자신이 불꽃으로는 죽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 화염내성이 대체 어느 정도인 거지?”
“후후…… 그겐 네놈 역시 마찬가지 아니더냐?”
엉망진창이 된 화청루 1층 식당 잔해 사이에 기대앉은 탑주가, 검댕이 묻은 얼굴로 웃었다.
화륵!!
연녹색의 불길을 피워올려 어깨에 갖다대자, 탑주의 목에 난 상처가 천천히 치유된다.
‘치유의 능력을 지닌 불씨인가.’
탑주가 레녹에게 보여주었던 불씨들 중 하나.
그중에서도 레녹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특별한 능력을 지닌 불꽃이다.
저 불씨의 용도와 가치가 어느 정도일지는, 레녹조차 보고도 쉽게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
레녹이 그 치유의 불씨를 보고 눈을 빛내는 사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탑주가 말했다.
“본주의 화염을 배열장치로 흡입해 제 몸에 흘려보내다니, 평범한 술사라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 했을 것이야.”
“…….”
“네놈. 아무래도 체온을 조절하기 위한 장비 이상의 능력을 갖고 있는 듯하구나.”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탑주의 눈이 묘한 빛으로 번뜩였다.
“그 피 안에…… 뭘 숨기고 있는 게지?”
레녹이 탑주의 불꽃을 흡수해 마법진을 취소시키고, 그 반동을 얼음작인의 축복으로 감내했다는 사실을 탑주는 알아보았다.
다만 워낙 전투가 빠르게 돌아가는 바람에 능력이 무엇인지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
“지금 그런 걸 궁금해할 때가 아닐 텐데.”
레녹이 탑주를 보며 냉소했다.
“이쯤되면 이해했겠지. 출력을 제한한 채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
“아니면 이 자리에서 접합술주에게 발각당할 때까지 해보자는 건가?”
관문도시에 드리운 장막으로 인해, 도시 내부의 마력환경이 격변하는 심야.
하지만 마력을 입자 단위로 조작하는 대마법사들은 그런 환경의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다.
레녹과 탑주 모두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기에, 암시장을 불태우면서 날뛸 수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
서로 출력을 제한한 채 공방을 주고받은 시점에서, 결판을 내려면 불꽃을 끝까지 예열시켜 부딪혀야 할 터.
하지만 전대 관리자인 마탑주가, 과연 접합술주의 눈에 띄는 것을 감수하고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레녹은 탑주가 그러한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당신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관리자 자리에서 내려오지도 않았겠지.”
“…….”
“염주들을 이용한 것도, 암시장에서 나와 접촉한 것도 모두 자신의 통제하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잖나.”
블레이버 마탑주의 태도는 여러모로 모순적인 부분이 많다.
접합술주를 경계하는 듯하면서도, 그에게 이 소란을 발각당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며.
주문연맹을 내키지 않아 하는 듯하면서도, 연맹이 관문을 차지한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인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태도와 판단의 간극에, 탑주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존재하고 있을 터.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그를 좀 더 자극해 강제로 밑천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견뢰를 상대하다 망신을 당했던 것처럼, 결국 당신은 제 몸을 건사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잖나.”
“…….”
“당신은 나를 견뢰에게 패배한 개라고 부르면서 조롱했지만…….”
고개를 숙인 탑주를 향해 걸음을 옮긴 레녹이 말했다.
탑주를 내려다보는 레녹의 시선이 싸늘하게 빛났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개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 누구지?”
“……하핫.”
그 순간, 탑주가 천천히 어깨를 들썩이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흩어진 머리칼 사이로 그의 붉은 눈동자가 기름진 것처럼 번들거렸다.
“네놈이, 무엇을 안다고 그딴 말을 지껄인단 말이냐.”
“…….”
“발칸의 사고는 본주의 잘못이 아니었다. 맡은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아랫것들의 패착 때문이었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탑주가 고개를 삐그덕거리면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네놈도, 치글렛도, 견뢰 그놈도…… 모두 마찬가지야. 본주가 기회를 주고, 선택을 권유했는데 그걸 보란 듯이 걷어차 버리더군.”
“…….”
“몇 번이고 인내심을 발휘하며 판단을 재고할 기회를 주었는데, 감히 본주의 호의를 조롱해?”
이마에 핏줄이 선 탑주가 씹어뱉듯이 중얼거리자,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혀를 깨물어서 출혈을 일으키는 자학.
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한 손으로 받아 양손에 바른 탑주가 말했다.
“다 필요 없다. 역시 저능한 술사들에게는 그런 배려조차 사치였던 거지.”
“……너는.”
“에반 마르티네스. 인정하지. 네놈은 이것을 볼 자격이 있다.”
피범벅이 된 손으로 합장한 탑주가 눈알을 번들거렸다.
“수백 년을 이어온 유서 깊은 마탑의 수장이, 외도의 길을 걷는 마법사에게 역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리라.”
솔라 시스템 전개.
[포화무장 2번]화르륵!!
피범벅이 된 손바닥을 뚫고, 그 자리에서 솟구치며 회전하는 지팡이의 모습.
탑주가 한차례 소환하려다 실패했던 비보가, 이번에는 전조조차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작시곡(灼時曲) 개방.”
쿠웅!!
흐르는 불꽃을 스태프의 형상으로 만든 지팡이를 움켜쥐고, 거칠게 내리찍는다.
“시간, 점화……!!”
불길 너머로 레녹을 노려본 탑주가 주문을 영창한 순간.
키이잉!!
레녹의 의식 저편에서 강렬한 위화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의식 자체가 빠르게 가속하면서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기시감.
아나테마와의 결전에서 손에 넣은 팔괘법진. 체내시간을 늘리는 선천이능이 저 스태프에 반응하고 있다.
“……설마.”
블레이버 마탑 선대 마탑주의 사리를 재료로 삼아 만든 법보.
작동과 동시에 팔괘법진을 자극하고 발동시키는 무언가.
불꽃과 시간. 두 개념을 동시에 자극하고 강제하고 있다면 그 원리가 어디에 기반하고 있을까.
순식간에 스태프의 능력을 직감한 레녹이 얼굴을 굳혔다.
“시간을 불태워서 가속시키는 종류의 법보인가……!!!”
“술주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면, 눈치챌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결판을 내버리면 될 일.”
히죽 웃으면서 스태프를 움켜쥔 탑주가 고개를 젖히면서 속삭였다.
“자성영역 전개.”
자성영역 전개
연원위계 심상구현
[일리사화번(日理私火燔)]무채색의 파문도, 심상을 각인해 풍경을 뒤바꾸는 전조도 없다.
자성영역의 전개 과정을 생략하고 완성된 영역을 곧바로 이 자리에 현현하는 신기.
콰아아아앙!!!
레녹의 머리 위에서 시공이 벌어지며 탑주의 영역이 떨어져 내렸다.
갈라진 시공 저편에서 심상각인이 끝난 영역의 풍경이 언뜻 엿보인다.
타오르는 거대한 불의 제단. 그 제단 위에서 탑주에게 불타 죽은 이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다.
레녹을 향해 불타버린 손을 뻗으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섬뜩한 형상.
‘늦었군.’
자성영역이 가장 그 존재감을 크게 발하는 순간은 바로 영역을 전개하는 시점.
그렇기에 탑주는 작시곡을 사용해서 영역을 미리 완성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법보 작시곡(灼時曲)은 스스로의 시간을 불태워서 일시적으로 가속하는, 수명을 대가로 시간을 당기는 신기.
탑주는 가속한 시간 속에서 자성영역을 완성시켜 그대로 이 자리에 씌워버린 것이다.
장막을 뚫고 술주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반대로 영역 내부에서 레녹을 압도할 수 있다는 판단.
가속한 시간 속에서 레녹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천화만리향을 전개하는 건 불가능해. 지금부터 예열을 시작해 봤자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거다.’
천번의 자성영역, 천화만리향(天花萬里香)은 위력이 강한 대신 아주 오랜 예열이 필요한 영역.
꽃잎이 전부 만개한 직후 가장 큰 힘을 발휘하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탑주와 교전을 시작하자마자 준비했다면 모를까, 영역 싸움을 상정하지 않은 이 시점에서는 사실상 무용지물.
‘술주에게 발각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건지,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성영역 전개는 한 사람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시공 전체를 덮어씌우는 극의.
그렇기에 대상지정 저항을 지닌 레녹도 영역에 포함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다만 영역 안으로 진입한 시점에서 전투가 극도로 어려워지는 것은 필연.
로베라이드 중장과의 전투에서도 아껴두었던 적색성계를 지금이라도 꺼내야 할까.
하지만 일단 한번 적색성계를 발동한 뒤에는 멈출 수 없다.
적색성계를 발동한 뒤 그대로 수술실에 쳐들어가 전투를 이어 나가거나, 혹은 술주와의 전투에서는 적색성계 없이 싸워야 할 터.
술주와의 교전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 자체를 배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쩌저저적!!!
레녹의 머리 위로 공간이 갈라지며 펼쳐진 완성된 자성영역의 풍경.
자성영역 일리사화번이 레녹의 신형을 집어삼키고 시공을 개변하려던 바로 그 순간.
“내가 분명히 말한 적이 있을 텐데.”
레녹의 뒤에서 걸어 나온 누군가 벌어지는 영역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덥석!
한 손으로 갈라지는 공간을 붙잡고 시선을 들어 올린 찰나.
“예약된 수술시간 동안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
레녹을 향해 벌어지던 자성영역의 풍경이 순식간에 닫히면서 그대로 ‘접합’되기 시작했다.
쩌저저저접!!!!
이미 완성된 자성영역이, 레녹의 눈앞에서 그대로 닫히면서 현실을 개변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암시장의 밤하늘을 가르고 떨어지던 불의 제단이, 시공의 균열 사이로 접히면서 소멸하는 비현실적인 풍경.
방금 전까지 밤거리를 가득 메우던 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고요한 적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레녹과 탑주가 그 보고도 믿지 못할 기괴한 기적에 말을 잃고 손을 멈춘 사이.
녹색 수술복을 입은 누군가 천천히 등을 돌려세웠다.
마스크를 한 손으로 걷어내자, 무심한 인상을 지닌 청년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레이버 마탑주. 내 말이 말같이 들리지 않았나?”
“…….”
탑주와 레녹의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난 외과의사.
녹색의 수술복을 입고, 한 손에는 얇은 장갑을 끼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마력도, 의념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함.
하지만 레녹은 이 남자가 누구인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맨손으로 공간을 접합해서 영역을 강제로 ‘닫아버리고’, 8레벨의 대마법사들 사이에 난입해 사태를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주문연맹의 대술주이자, 첫번째 관문의 관리자. 교단의 사도를 참살한 사도살해자.
탑주의 예상은 틀렸다.
접합술주, 아베스타 채프먼이 관문 내에서 벌어진 이변을 눈치채고 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