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76
‘뭐랄까…….’
이상한 기분이네.
꿈을 꾸고 멍한 정신으로 일주일을 보냈는데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방에 틀어박혀 온갖 고민에 시달렸다. 루실리온이 한 말에 대한 대답부터 예전 가족들의 몰락까지.
복수를 하면 단순히 통쾌하고 시원할 줄만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미묘한 씁쓸함도 함께 있다.
아, 이전 가족들을 동정한다는 건 전혀 아니다.
루실리온이 손을 썼다고 한들…… 차이도와 차이현은 애초에 언젠가 사고를 칠 놈들이었다.
‘아버지는 좀 충격이었지.’
궁지에 몰리면 그렇게 고고하고 인자하던 사람이 모든 걸 잃으면 추잡한 밑바닥을 보이는구나 싶었다.
어머니는 평생 숨어 살게 되는 걸까?
“루실리온….”
그가 이 모든 걸 처리했다는 걸까?
내가 죽고도 잠시 그곳에 남아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죽을 때를 상정해서 많은 것을 염두에 뒀던 걸까?
“의외네…….”
루실리온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선이 있어서, 격의 없이 굴면서도 그 선 안으로 사람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줄로만 알았다.
제게 직접적인 피해만 없다면 크게 누군가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
하지만, 도와 달라고 하면 반드시 도와주는 꽤 다정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사람.
그렇게 생각했었다.
“슬슬 아빠한테 마지막 보고를 해 볼까.”
별지기 건도 아빠한테 얘기하지 못했었는데.
‘오늘 루실리온에게 대답하러 신전에도 가야 하니까.’
여전히 어떤 것에도 확신을 얻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시간을 보며 침대에서 한참을 빈둥거리다 아빠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근할 시간 즈음 맞춰 집무실로 향했다.
“에이린?”
“아빠.”
“요 며칠 방에서 쉬더니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이니?”
“그냥…… 보고할 것도 있고 상담할 것도 있어서요.”
아빠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짧게 한숨을 쉬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들어오렴.”
“응.”
“이르지만, 차나 한잔 마실까?”
“네.”
집무실에 자리하고 있는 소파에 앉아 느리게 발을 구르고 있자 아빠가 탕비실에 들어갔다.
“아빠?”
“왜?”
“아빠가 직접 우리시게요?”
“그래, 네 엄마한테도 종종 해 주곤 했지. 그렇게 형편없진 않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쩐지 믿기지 않았을 뿐이다.
아빠는 뭔가 직접 차를 우릴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으니까.
생각과 다르게 아빠는 제법 능숙하게 차를 우려 내게 가지고 왔다.
맞은편에 앉은 아빠를 가만히 보다가 찻잔을 두 손으로 붙잡고 가볍게 매만지다가 설핏 웃었다.
“처음 아빠를 봤을 땐 엄청 무서웠는데.”
“……그랬나?”
“네, 엄청 커다란 맹수 앞에 선 기분이었거든요.”
아빠가 멋쩍은 낯으로 찻잔을 기울였다. 예전엔 그렇게 날이 선 것 같은 아빠도 지금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있잖아요, 아빠. 다 해결됐대요.”
“해결?”
“별지기도, 저쪽 세상에 있는 옛날 가족들도…… 전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았어요.”
내 말에 찻잔을 기울이던 아빠의 손이 멈칫했다. 아빠가 이내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마저 기울였다.
“다행이구나.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하려고 했는데.”
“네?”
“신인지 뭔지와 담판을 지어 볼 생각이었지.”
아빠가 엄청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내가 당황해 눈을 끔뻑이자 아빠가 가볍게 웃었다.
“그 신이 널 도와준 거니?”
“아뇨, 루실리온이…….”
파삭―
찻잔의 손잡이에 금이 갔다. 내가 냉큼 입을 다물자 아빠가 재빨리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놈들 다시 원래대로 돌릴 수 없다고 하니? 내가 처리해 주마.”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람…….
아빠도 제 말이 퍽 억지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잠시 조용해졌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보고는 이거겠고 상담은 뭐니?”
“아빠는 왜 엄마랑, 결혼을 할 생각을 했어요? 확신…… 같은 게 있었어요? 평생 함께할 자신이라든가….”
“…….”
아빠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 한구석에 세워 둔 검을 쥔 아빠가 눈을 번뜩였다.
“그 대신관이지? 아빠가 죽이고 오마.”
“그게 아니라아……! 아니, 맞는데 그게…….”
팔짱을 낀 아빠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딱히, 엄청난 확신이 있거나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내 되먹지 못한 부분을…… 꼴사납고 약한 부분을…….”
팔짱을 낀 아빠가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평생 네 엄마뿐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뿐이다.”
아빠가 짧게 대답했다.
사랑을 하면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번개가 내리쳐서 이게 사랑이라고 머릿속에 때려 박아서 알려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결혼하면, 아빠는 외로울까요?”
“외롭겠지.”
“아빠는 내가 결혼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나는…… 아빠와 함께할 수 있는 평생 동안은…….”
가만히 얘기를 듣던 아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긴 다리로 성큼 걸어와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아 그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꾹 눌렀다.
“에이린.”
“네.”
“자식이 부모의 품을 떠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네가 결정했다면, 그놈의 사지 하나를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의견을 존중할 거란다.”
아니, 사지 자르는 부분에서 그냥 존중하지 않은 거 아닌가요?
내가 입술을 툭 내밀자 아빠가 키득키득 짓궂게 웃었다. 내가 어렸던 어느 날의 아빠처럼.
“난, 아빠 품 떠나기 싫어요.”
“언젠가 떠나게 되겠지. 나보다 소중한 것들이 더 많이 생길 거란다.”
“……아빠, 평생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만약 그런 방법이 있으면…….”
내가 드래곤이니까 어떻게든 그 방법을 찾아낸다면…….
“아빠는, 나랑 함께 살아 줄 거예요?”
“…….”
아빠의 동공이 한껏 벌어졌다가 이내 천천히 축소되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니.”
아빠의 다정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대답과는 상반되는 따스한 목소리였다. 아빠의 커다란 손이 뺨을 다정하게 스쳤다.
아빠가 두 팔을 벌려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너희에게 최선을 다하고 때가 되면 죽어서 네 엄마를 보러 갈 거란다.”
“…….”
“철없던 시절의 보답도, 그 시절 하지 못했던 말도 쌓여 있거든. 다 너희들이 내게 알려줬지.”
아빠가 말했다.
“널 사랑하는 만큼, 나는 네 엄마도 사랑한단다. 그리고 네게 짐이 되고 싶지도 않구나.”
“하지만…….”
“에이린은 이제 내가 지켜 줄 만큼 약하지 않잖니.”
다정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내용만큼은 그리 다정하지 않았다. 내가 떼를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이 시기가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끝이 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혼자 남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 어리광은 이제 아빠에게 부릴 수 없는 어리광이다. 아빠는 이미 오래 전부터 결심을 했던 거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곤 고개를 끄덕였다.
“떼써서 죄송해요.”
“그리고 내 생각엔 에이린, 내가 반대하긴 했지만, 너는 이미 마음을 정한 거 같은데.”
아빠가 말했다.
“결국, 평생을 함께할 가족은 네가 만들어야만 하니까.”
아빠는 다정하다. 아빠가 하는 말은 전부 옳았다. 그러나 동시에 잔인했다.
그간 막연히 생각해 온 주변인들의 죽음을, 아빠는 이미 죽음 후의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네가 내 품을 떠나는 건 분명히 서운하지만…….”
아빠가 나를 조심스럽게 품에서 떼어냈다.
“에이린, 네가 확신을 하고 있다면 나는…… 말리지 않으마.”
“……아빠.”
“근데 좀 괴롭힐 순 있다.”
“아빠…….”
“곱게 키워 둔 내 아이를 냉큼 낚아채 간다는데 조금의 심술은 봐주렴. 하지만, 그 대신관이 널 많이 도와준 건 나도 인정한다.”
아빠는 퍽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가 보렴.”
“……아빠?”
“뭔가 중요한 날인 거지?”
“……네, 답을 하기로 했거든요.”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렴, 아가.”
아빠의 입술이 내 이마에 가볍게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내 사랑스러운 따님.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사랑할 거란다.”
아빠의 든든한 말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떠밀어 주는 손길에 집무실을 나섰다.
* * *
멀어지는 에이린을 보며 에르노 에탐의 입가가 설핏 일그러졌다.
“정말, 아이가 언제 저렇게 컸는지 모르겠군. 달리아. 너도 보고 있으면 좋을 텐데.”
유독 궐련이 당기는 날이었다.
에르노 에탐이 손끝으로 입꼬리를 가볍게 긁적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어른이 되어 제 품을 벗어나는 딸을 보는 기분은, 무척 섭섭하고 어딘가 뻥 뚫린 듯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한참이나 소파에 앉아 있던 에르노 에탐이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사각사각―
곧 서류를 처리하는 소리만이 넓은 집무실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 * *
눈을 감고 상상한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드래곤의 마법은 힘을 얻곤 했다.
‘루실리온이 보고 싶어.’
그렇게 떠올리고 바라는 것만으로, 나는 그의 앞에 설 수 있었다.
새하얗고 텅 빈 방에 루실리온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루실리온의 모습이.
그건 어딜 어떻게 봐도 출장을 다녀온 모습은 아니었다. 일주일 방에 갇혀 폐인처럼 지낸 모습이면 모를까.
“루실리온.”
“……에이린?”
“너 출장이라면서…….”
내가 볼멘소리를 내자 루실리온은 나를 가만히 보다가 빙긋 웃었다. 언제나와 같은 미소였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에이린을 다그칠 것 같았거든요. 생각은 정리되셨나요?”
“응.”
창밖을 보던 루실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두어 걸음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루실리온이 나를 가만히 보았다.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난 솔직히 네가 첫 번째가 될 수 없어.”
“그런가요,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하는 수 없죠. 역시 머리 깎고 새 종교로 귀의해서 백 년 뒤를 노려 보겠습…….”
“잠까아안!”
깔끔하게 마음을 접으며 가위를 꺼내 드는 루실리온을 보며 나는 급히 소리를 질렀다.
“사람 말을 좀 끝까지 들어!”
“네.”
그가 순순히 가위를 내려놓았다.
“최대 백 년 한정이야.”
“…….”
“그 뒤엔, 네가…… 첫 번째가 될 수 있을 거야.”
내 말에 루실리온의 눈이 커졌다. 새파란 눈동자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흔들림이 담겼다.
“난 제멋대로고 금방 질리고 마음도 약하고 또, 긴 시간에 지쳐 버릴지도 모르고 성가시게도 할 거고 귀찮은 일에도 휘말릴 테고 아이도 낳고 싶지만 아픈 건 싫고…….”
나는 단점이 될 만한 이야기를 줄줄 내뱉었다. 하나둘 뱉다 보니 자꾸만 계속 생각났다.
“네.”
“어쩌면 널 평생 제대로 믿지 못하고 언제 떠나갈지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심장이라도 드리겠다고 했잖아요.”
“나 감당할 자신 있으면…….”
평생 미치지 않고 곁에 있을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내게 사랑을 알려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루실리온이었으면 했다.
“우리 결혼하자.”
내 말에 루실리온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좋아, 해. 사랑은…… 아직 내가 어려서 모르겠지만. 널 좋아해. 친구인지, 이성으로서인진 모르겠지만 나랑 평생…… 앗.”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실리온이 나를 품에 끌어안고 덥석 들어 올리더니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루, 루시?”
“그럴게요. 평생 에이린만 바라볼게요. 에이린을 지키고 곁에 있을게요.”
“……응.”
환하게 웃는 루실리온의 미소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심이 가득 담긴, 우스울 정도로 풀어진 미소라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게 내가 유일이 아니어도, 내겐 네가 유일이야. 네겐 별것 아니었을 빵 하나의 작은 동정이 내겐 구원이었어.”
“응.”
“사랑해, 에이린.”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루실리온의 얼굴이 비스듬히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과 내 입술이 맞닿았다.
우리는 이날 인연을 맺었다. 아주 긴 시간 이어질, ‘연인’이라는 이름의 새 인연이었다.
― 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