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96
숨
“오길 잘했지?”
개가 끄는 썰매를 체험하고 돌아가는 중에 초록 형이 조수석에서 몸을 틀어 우리에게 물었다.
“지금 내 꼴을 보고도…?”
홍오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현지에서 구매해 입은 두툼한 겨울 등산복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꼬질꼬질해진 상태였다.
이동하는 도중에 차 바퀴가 구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뒤에서 밀어야 했는데 그러다가 넘어지고 굴러서 이 지경이 됐다.
열심히 털어내고 탔는데도 차 안이 말라붙었던 진흙이 떨어진 잔해로 흙투성이였다.
“재밌잖아? 이런 경험은 돈 주고도 못한다고. 안 그래?”
“누가 돈 주고 이런 경험을 한대? 이런 경험 시키려면 돈 받고 해야지.”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이원아, 적어도 딴생각은 안 나지?”
“어, 그러고 보니….”
공항에 내려서 지금까지 사건이 빵빵 터져서 차분히 집중할 시간 같은 게 없었다.
일단 내가 깊은 생각을 못 하게 한다는 목적은 이룬 것 같았다. 애초에 멤버들 전원이 함께하는 여행이 조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잠들기 전에는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했더니 머리만 대면 잠들기 바빴다. 워낙 다이내믹한 일정이었던 터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어제 먹었던 생선 튀김 먹고 싶다아! 어제 갔던 곳 또 가도 돼?”
아이슬란드 물가가 비싸서 재료를 사서 요리해 먹는 경우가 많다는데 우리는 거의 사 먹고 있었다.
우리 멤버들이 먹는 양이 많다 보니 음식점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놀라운 금액을 확인해야 했다. 원래 한국에서도 놀라운 금액이 나오곤 하는데 여기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이슬란드에서 살았더라면 정말로 식비 때문에 파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까.”
다들 반대하는 기색이 없어서 이틀 연속 같은 식당에 방문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내키는 대로 가볼 곳을 정하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즉흥적인 여행치고는 꽤 알찼다.
길을 좀 헤매고, 자잘한 사고가 터지긴 해도 벌써 다녀온 여행지가 여러 곳이었다.
“밤에 나가야 한다는 거 잊지 않았지?”
“난 저녁 먹고 바로 잘 거야! 오로라 봐야 하니까!”
오늘 밤엔 박하가 그토록 고대하던 오로라를 보러 가기로 했다. 오로라를 찾아다니는 걸 ‘오로라 헌팅’이라고 부른다는데 오로라는 운이 따라줘야 볼 수 있었다.
혹여나 오늘 오로라를 보지 못하면 내일도, 모레도 오로라를 보러 나갈 예정이었다.
한 번으로 볼 수 없으면 두 번, 두 번으로도 안 되면 세 번 시도하면 되는 일이니까.
“오로라를 이렇게까지 봐야 할 일?”
“오란 형은 감수성 부족이야!”
“주로 어르신들이 꽃 좋아하고 자연 풍경 좋아하고 그러지 않나?”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박하는 상처 받았다는 듯 가슴을 부여잡고 홍오란을 째려봤다.
입 다물고 있길 잘한 것 같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오로라를 꼭 봐야 하는 이유가 뭔가 하고 궁금하던 차였는데.
“실제로 보면 다르다고 했어!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될 거라구! 두고 봐!”
“두고 보시든지.”
시큰둥한 홍오란의 생각을 바꾸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내 생각도 바뀌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좋겠다.
재충전을 위해 하게 된 여행이지만 오로라를 직접 보고 감동할 수 있다면 이 멀리까지 온 보람이 더 있을 것이다.
“보고 감탄하기만 해봐! 내가 앞으로 십 년은 더 놀려 먹어줄 테니까!”
“안 말려.”
“이익!”
저러다 눈물이라도 글썽거리면 박하가 가만두지 않을 텐데.
홍오란의 승률은 50퍼센트 정도. 반 정도는 박하에게 지는 셈이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걸 보면 즐기는 게 틀림없다.
두고 보자,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더라. 박하와 오란이 투닥거리는 동안 초록 형은 지도를 보면서 서혼 형에게 길 안내를 하고 지온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잤다.
이렇게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꿋꿋하게 잘 수 있다니 능력자가 아닐 수 없다.
“이원아, 심심해? 게임이라도 해볼까?”
심심할 새도 없는데 서혼 형은 내게 말 거는 사람이 없는 이 틈에 내가 머릿속으로 곡 작업이라도 할 것 같나 보다.
별생각이 없었지만, 작정하면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긴 했다.
원래 내가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고 때로는 말을 많이 하면 피곤하기도 해서 백색 소음을 가만히 듣고 있는 게 편안하지만, 서혼 형의 노파심도 이해는 한다.
내가 온전히 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좁은 차 안에서 무슨 게임?”
“그러지 말고 노래라도 틀고…! 흡!”
박하는 자기가 말을 잘못 꺼냈다는 듯이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노래가 무슨 금기라도 되는 것처럼….”
일로서의 음악과 떨어뜨려 놓겠다고는 했지만, 노래도 못 듣게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서혼 형의 철저함 덕분에 나는 비행기를 탄 이래로 음악 결핍증에 시달렸다.
이어폰을 귀에 꽂기에도 눈치가 보였고, 잠깐 무슨 노래가 들릴까 하면 나를 끌고 슬쩍 안 들리는 곳으로 이동했다.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들을 수 있었는데, 손님이 우리밖에 없을 땐 정중히 노래를 꺼주면 안 되겠냐고 요청하기도 했다.
“나 이젠 괜찮아진 것 같아.”
“얼마 안 지났는데 벌써 괜찮아졌다고? 착각이 아닐까 이원아?”
“내 생각에도 아직 평소의 이원 형으로 안 돌아왔어!”
평소 모습을 떠올려서 연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도대체 평소의 내가 어땠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평소랑 똑같지 않아?”
“아니! 절대 아니야! 평소 이원 형은 눈빛도 이렇게! 앉을 때 어깨 각도도 이렇게! 눈썹도 이렇게! 입술은 이렇게! 그랬다구!”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묘사였는데 잠든 지온을 제외한 멤버들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만 모르는 미세한 차이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되겠어.”
“…그럼 조금만 더 참아볼게.”
내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고 하니까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래 참지는 않아도 될 테니까.
태어나서 음악을 접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던 시기가 없었다. 가족과도 거의 대화하지 않았던 나는 살아오는 내내 음악의 세계에 푹 빠져있었으니까.
그래선지 노래를 듣기 힘든 이 상황이 낯설고 어색했다.
서혼 형은 내가 ‘완벽한 휴식’을 취하길 원해서 하는 행동이겠지만, 음악이 내 곁에 얼마나 가까이에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어 주고 있다.
청개구리 심보인지는 몰라도 아무 노래도 못 듣게 하니까 더 듣고 싶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노래라도 듣고 싶기도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 * *
오로라 헌팅을 나간 첫날에는 허탕을 쳤다. 오로라 지수가 높은 날이긴 했는데 구름이 많아서 오로라가 보이지 않았다. 둘째 날도 실패.
셋째 날이 되어서야 우리는 오로라를 볼 수 있었다.
“와….”
말문이 저절로 막히는 광경. 검푸른 밤하늘에 펼쳐진 초록빛 커튼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야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으로 봤던 오로라는 겉껍데기 일부만 복사해낸 수준이었다.
“이 먼 나라까지 와서 보는 이유를 알겠어.”
오직 오로라를 보겠다는 목적 하나로 이곳까지 오기도 한다더니. 이제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멋있다…!”
오로라 노래를 부르던 박하는 한 마디 내뱉고는 하늘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 풍경에 압도된 듯했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박하가 사진을 찍어야겠다면서 카메라를 세팅했다.
아무리 전문가용 카메라라고 해도 직접 눈으로 보는 느낌을 전부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박하 실력이라면 엇비슷한 인상이라도 담아내지 않을까?
“기념사진 찍…!”
찰칵찰칵 오로라를 찍어대던 박하가 우리를 돌아보면서 말을 하다 멈췄다.
“오호라! 홍오란! 딱 걸렸어!”
“…내가 뭘?”
“거기 눈에 고여있는 거 뭔데!”
“잘못 봤겠지.”
“내 시력 몰라? 잘못 봤을 리가 없어! 울었지? 잠깐 기다려봐!”
박하가 눈물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오란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찾았다! 옷 소매에 젖은 자국!”
“침 흘렸어.”
“입 벌린 줄도 모르고 오로라 감상하다가 침을 흘리셨다? 그것도 격하게 감탄했다는 증거지!”
“…….”
눈물이든 침이든 박하에게는 상관없었다. 단지 홍오란이 감탄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이었다.
오란은 눈물을 침으로 둔갑시켜 박하를 속이려고 해봤지만,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다.
“그렇게 감성이 메마른 척하더니! 홍오란 혼자서 눈물을 찔찔 짰대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유치하게 놀리고 있었지만 홍오란에겐 효과가 좋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눈썹을 삐죽이고 있지만 목이 서서히 붉어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열받았나?
유치할수록 약 올리는 효과가 뛰어난가? 언젠가 써먹을 생각으로 잘 기억해두기로 했다.
위대한 자연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거야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일. 그렇지만 홍오란은 자신만은 아무렇지 않을 거라 믿은 오판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게 인간이라더니.
만족할 때까지 홍오란을 놀린 박하는 우리 단체 사진을 찍어 줬다. 배경이 어두워선지 우리가 그렇게 잘 나오진 않았지만, 여기에 다 같이 왔다는 기록을 남긴 데에 의의가 있었다.
그 후, 우리는 접이식 의자를 펼쳐두고 코끝이 빨개질 때까지 오로라를 감상했다. 기억 속에 빠짐없이 모두 담아갈 기세로.
“오로라도 멋지고 거기 수놓아진 은하수도 멋지고…. 두 번 실패하고 겨우 봐서 그런가? 더 귀중한 광경 같아.”
“숙소에 떼어다 놓고 싶은걸.”
그래도 지금의 느낌은 아니겠지만, 나도 비슷한 충동이 생겼다. 언제든 이곳에 온 기분을 낼 수 있다면 하늘 한 조각이라도 훔쳐 가고 싶었다.
“노래하고 싶어.”
내가 내 입으로 뱉은 말에 깜짝 놀랐다. 무의식적으로 노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내가?
아까부터 쭉 가슴이 벅차오르긴 했는데 왜 그런지 이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노래를 토해내고 싶었던 거다.
내게 음악은 곧 삶 그 자체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행위가 언제부터 이렇게 자연스러워진 걸까.
무슨 노래라도 나오면 바로 춤출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도 아이돌 다 됐다 싶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머리는 신비롭고 비현실적인 이 장소에 어울리는 노래를 무의식적으로 검색했다. 딱 어울리는 곡이 없어서 새로운 곡을 만드는 쪽으로 노선을 틀었지만.
“쉿.”
“이원이 집중한다.”
멤버들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지만,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속삭임이 마치 노래처럼 들려서 머릿속에 영감이 솟구쳤다.
번 아웃? 슬럼프? 그런 건 진작 날려버린 후였다. 휴식과 여행도 톡톡히 도움이 되었겠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내가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다시금 깨달은 것.
마치 숨같이 당연해서 잊고 있었다. 내가 음악 없이는 살 수 없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