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34
빼앗기다
컨셉 앨범과 재킷 사진을 찍고 며칠 후에 또 촬영이 있었다. 이번에는 짧은 영상 촬영이었는데 우리 그룹과 멤버들을 소개하는 영상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멤버들이 다 같이 있는 모습, 멤버 각자의 모습을 낱낱이 찍었다. 사진 촬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이점이라고 하면 얼굴 가까이에 바짝 다가오는 카메라였다. 모공까지 샅샅이 보일 만큼 가깝게 촬영해서 찍었다. 기겁해서 반사적으로 움찔거릴 뻔했다.
“피부관리를 열심히 해서 다행이다.”
“이원 형은 원래 피부 좋았잖아. 나는 스트레스 받으면 여드름 올라오는데. 힝.”
박하는 깨끗한 피부를 타고났다. 하지만 예민하기도 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트러블이 난다고 했다. 다행히 이번 촬영에선 여드름이 나지 않았다. 초록 형에게 관리 비법을 전수 받았다고 들었다.
“이번 촬영에선 오란이 제일 잘 나온 것 같아.”
영상 작가님은 무표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웃음 짓는 과정을 촬영했다. 무표정과 웃음의 갭이 가장 큰 사람이 오란이었다. 마지막 컷의 임팩트가 컸기 때문이리라.
지온은 살짝 비웃는듯한 표정으로 마쳤고, 서혼 형은 시원스러운 미소였다. 박하는 쾌활한 웃음이었는데 무표정부터 쭉 잘생겼다고만 생각했다. 초록 형은 다정한 미소를 지었고 나도 크게 웃진 않았다.
촬영 감독님의 요청에 오란이 웃어 보이자,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눈이 가는 아치를 그리고 입 동굴이 쏙 들어가며 가지런한 이가 보였다. 게다가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에 콕 찍힌 보조개까지.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였다.
여전히 놀라운 변화였다. 오란의 본성을 아는 나에게조차 영업용 미소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란은 자신의 강점을 잘 알고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성형 문제도 그랬다. 코를 살짝 높였다고 전해 듣기만 했고 나는 오란의 이전 얼굴은 몰랐다. 하지만 하길 잘했다는 회사 직원분들의 대화는 들은 적 있었다. 오란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더 입체적으로 바뀌었다고.
아이돌에게 성형은 가치를 높이기 위한 행동. 호기심과 비난의 눈길과 위험을 감수한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란은 자신의 선택에 당당한 사람이었다. 내가 본받고 싶을 만큼.
“함이원. 잘 봤냐? 카메라 앞에서 명심할 건 딱 한 가지야.”
“뭔데?”
“뻔뻔함.”
오란의 좌우명이 이건가? 뻔뻔해지자?
“오글거린다고, 현타 온다고 하잖아. 그걸 안 느끼면 돼. 그러면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거든.”
머리로는 알아도 실천하기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어쩌다가 오란이 이런 성격이 됐을까. 드문 성격이라는 점엔 이견이 없을 터였다.
“프로면 프로다워야지.”
“프로답지 못한 행동을 싫어한다는 건 알겠어.”
만약 내가 프로답지 못하게 행동하면? 오란이 얼마나 경멸하는 눈길을 보낼지 선명하게 보였다. 조심해야지.
“그런데 이 영상 어디에 쓴대, 초록 형?”
“말씀 안 해주시던데? 우리 공식 계정 생기면 거기 올라가지 않을까?”
“짧은 영상이라 그런가. 근데 약간 광고 촬영 현장이랑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긴 해.”
비교할 만한 경험이 있다는 뜻인데?
“서혼 형은 광고 찍어봤어?”
“아역배우로 활동할 때. 베이커리 광고였는데 빵 왕창 먹어서 한동안 질려서 못 먹었었어.”
“와! 연예계 선배님!”
“리스펙. 호온?.”
팔을 흔들며 환호하는 팬을 흉내 내는 박하. 래퍼 특유의 손동작을 하는 지온. 나도 새삼스럽게 서혼 형의 경력을 떠올렸다.
“평소엔 얼빠진 운동광인데. 실감 확 되네.”
“얼빠졌다니 오란아….”
“지금도 봐. 한소리 따끔하게 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기가 약해서 이 험한 연예계에서 어떻게 살아남겠냐. 형은 그 덩치에 감사해야 돼. 안 그랬음, 쯧! 내가 선배님한테 너무 건방졌나?”
서혼 형은 찔리는 사건이 있었는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오란의 거친 표현엔 아무런 태클을 걸지 않았다. 아역이었던 과거에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
“…내가 기 세고 싶다고 세지는 것도 아니잖아.”
“딱 서서 나 봐. 눈에 힘주고. 눈썹을 들썩해도 좋고 턱을 까딱. 짧은 단어로 말하면서.”
“뭐 어쩌라고?. 이렇게?”
…시비 거는 깡패?
서혼 형이 연기를 잘해서 쓸데없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저러면 절대 쉬워 보이진 않지. 쫄아서 도망치거나 본격적으로 싸움이 나지 않을까.
나라면 무서워서 말도 못 걸겠는데. 다른 멤버들도 나랑 똑같은 감상인지 멈칫거렸다.
“크흡. 아이돌의 자아가 반대해서 안 되겠다. 하던 대로 해. 누가 괴롭히면 나한테 말하고. 내가 대신 싸워줄 테니까. 리더한테 말해도 괜찮고.”
자기는 은근슬쩍 멕일 테고, 초록 형이라면 친절하게 족 되게 해줄 거라나.
…초록 형이?
“그러면 돼?”
“우리가 아이돌이라 다행인 줄 알아. 솔로 가수나 배우여 봐. 잡아먹히고도 남았지.”
여럿이서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이라서 이런 좋은 점이 있구나. 동생이 당하고 오면 쫓아가서 혼내주는 형제 같은 멤버도 있고. 물론 서혼 형은 맏이지만.
“박하나 제톤은 은근 세서 별로 걱정 안 되는데. 서혼 형이나 함이원은….”
“왜 말을 줄여? 나는 어떤데?”
나도 어디 가서 지고 다니는 타입은 아닌데. 할 말은 하고.
“함이원 넌, 당돌하지만, 기본적으로 순진하지.”
“순진?”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해줘?”
그거나 이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애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그런데?”
“사람을 잘 믿는다고 봐야지. 배신당해본 경험이 없는 것처럼.”
“아….”
변명할 말이 없었다. 배신당해본 적이 없는 건 사실이라서. 멤버들이나 현오 형처럼 몇 안 되는 한정된 인간관계에선 아직 배신당한 적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결핍 때문인지 부모님은 나를 곱게 키우셨다. 그 이후엔 인간관계 전혀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배신을 당할 일 자체가 없었다. 타인을 믿어야 배신도 당할 수 있으니까.
“마음에 장벽이 없어. 타인이 말하는 대로 잘 믿지. 불순한 의도를 가졌다고는 의심조차 안 해. 너의 매력이기도 한데. 언젠가는 너에게 커다란 시련을 가져올 거라고 본다.”
“…….”
“세상엔 널 이용하고 네 믿음을 배신으로 돌려줄 나쁜 새끼들이 있어. 분명히. 경계해.”
오란이 나에 대해 세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형처럼 느껴졌다. 세상 경험으로는 형일지도 모른다.
“고마워. 신경 써줘서.”
“뒤늦게 후회하면서 질질 짜면 귀찮으니까.”
나를 걱정했다는 소리다. 나도 이제는 오란이 말에 숨겨진 속뜻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키득거리면서 남은 촬영을 준비했다.
* * *
뮤직비디오.
아이돌 앨범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뮤비를 보고 그 아이돌의 비주얼과 퍼포먼스를 확인할 수 있고 세계관과 곡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었다. 완벽하게 계획된 영상은 팬들에게 하나의 선물이었다.
“이 감독님을 잡아야 합니다. 돈 쓰는 만큼 그 값을 해주시는 분 흔치 않아요.”
회의 끝에 우리 테오라를 맡게 된 뮤직비디오 감독님은 관계자 사이에선 이름이 알려진 분이셨다. 3대 엔터에서도 선호하는 감독님이라나.
실력은 보장된 분이라고 한다. 회사에서 무리해서 섭외했다고. 정말로 회사가 우리에게 사활을 걸었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뮤직비디오의 러프한 콘티를 받았다. 뮤비 콘티가 완성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스토리에 일관성이 있었다.
이쪽으론 문외한이라 자세히는 알아볼 순 없지만, 나쁘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뮤직비디오가 제작되어 나오면 멋있을 것 같았다.
“어떠세요?”
“역시 비싼 감독이라 그런지 나쁘지 않네요. 방향은 살짝 고쳤으면 좋겠지만.”
“노련함이 느껴지네요. 믿고 가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콘티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어졌다.
그런데 느닷없이 안 좋은 소식이 들어왔다. 뮤직비디오 촬영을 맡아주기로 한 감독님이 일방적으로 뮤비를 못 찍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온 것이다. 회사 직원분들도 영문을 알지 못하고 당황했다.
뒤늦게 사정을 알게 됐다. 3대 엔터 중의 하나인 키씨 엔터에서 그 감독님에게 위약금을 제하고도 2배가 넘는 돈을 제시했다고.
결국 우리는 감독님을 빼앗겼다.
키씨 엔터가 대형 기획사인 만큼 영향력은 막강했다. 큰 거래처이기도 했고, 거기에 돈까지 얹어 주겠다니. 감독님에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으리라.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측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위약금을 크게 걸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손해 본 느낌은 안 날 텐데.”
“팍 떠오르는 분이 없는데. 어떤 감독님을 모셔와야 하죠?”
“열심히 수배해봐요. 아쉽지만.”
우리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는 직원분들을 지켜봐야 했다. 새로운 뮤직비디오 감독님은 쉬이 구해지지 않았다.
분위기가 심각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우리는 연습실에서 콱 박혀서 연습에 열중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뮤비 얼른 안 찍으면 일정 꼬일 텐데. 눈을 낮추려니 아쉬우신가 봐.”
서혼 형이 숨을 고르며 걱정을 털어놓았다. 박하가 새로 오실 감독님이 우리랑 더 잘 맞을 수도 있다고 희망이 담긴 발언을 했다. 그럴 확률이 없진 않겠지만.
“뮤비를 찍기는 어렵지 않아도 멋진 뮤비를 찍긴 어렵지. 우리 뮤직비디오는 영화 느낌을 내야 해서 더 어렵고.”
오란 다운 현실적인 견해였다. 그에 지온이 자기 생각을 추가했다.
“영화감독이 찍어주면 좋겠다. 막 computer graphics도 넣고.”
“CG! 오오! 겸업하시는 분들도 있잖아!”
박하가 한술 더 떴다. 뮤직비디오가 아니라 영화를 찍을 셈인가. CG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는데.
“…그래? 후우. 그럼 내가 해결해 볼게.”
멤버들의 눈이 초록 형에게 모였다. 리더라서 책임감을 느끼겠지만 과한 반응이었다. 뮤직비디오 감독을 구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걸까.
“초록 형. 책임감 가지지 않아도 돼.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선.”
“어쩌면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이원아. 결과가 어떻게 될진 몰라. 하지만 내 선에서 시도해볼 방법이 있다면 해봐야 하잖아?”
“남초록. 어떤 일 하려고 하는지 알겠는데. 괜찮겠어?”
오란은 초록 형이 어떤 방법을 쓸지 아는 듯했다. 그 방법이 초록 형에게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것도. 그러고 보니 서혼 형과 박하도 그 방법을 짐작한 듯했다.
“괜찮아.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야지. 얼굴에 철판 한 번 깔아서 우리한테 도움이 된다면 해야지. 얼마든지.”
자세히 알 순 없지만, 내가 이 상황을 풀어나갈 방법을 알고 있다면? 나라도 한번 시도해보겠지. 초록 형을 말릴 순 없었다.
초록 형이 어떤 결과를 냈는지는 곧바로 알게 되었다.
테오라의 뮤직비디오를,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감독님이 찍어주신다는 소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