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44
44. 의도(義盜) 신투향비(神投享批)
두구는 은란이 소영에게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
으며, 두구 갈신도 따라가려 했으므로 은란에게 말했다.
“내가 가면 누가 아가씨들을 보호하겠소?”
“괜찮아요. 저는 조식이 끝났으니 내가 금란 언니를 보살펴도 돼
요. 어서 가 보세요.”
“좋소. 그렇다면 유사시엔 휘파람을 부시오. 그러면 즉시 달려와
서 아가씨들을 보호하겠소.”
“네, 알겠어요. 어서 가 보세요.”
이때 검은 그림자가 두구에게 날쌔게 덮쳐왔다.
두구는 재빨리 피하며 바라보았다. 그 뒤엔 검은 개와 두 그림자
가 급히 오고 있었다. 왼쪽에는 소영이며 오른쪽은 일진풍 팽운이
었다.
두구는 안심이라는 듯이 숨을 돌려 쉬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난 또 누구라고, 알고 보니 거지였군.”
팽운이 반가운 듯이 말했다.
“당신의 이 영리한 개가 아니었던들 나는 기회를 또 한번 놓칠
뻔했소 여러분이 부대를 떠난 후, 난 생각할수록 언짢고 섭섭하여
여러분을 찾으려고 정처없이 떠났었지요. 뱃사공인 제자의 말대로
곧장 달려와 밤새도록 찾았으나 찾을 길이 막연하였는데, 때마침
당신의 그 영리한 개로 인하여 이렇게 다행히 만난 것이오.”
마문비가 흑백을 가리지도 않고 우리를 부대에서 물러가라한 것
은 비단 그대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약간의 수치스러운 일이었소.
후에 기회가 있으면 꼭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겠소.”
팽운은 두구가 격분하여 말하는 것을 듣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
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말을 못했다.
은란은 분위기가 너무 딱딱하고 어색한 것을 보고 팽운에게 시선
을 돌렸다.
“팽도련님, 너무 언짢게 생각치 마세요. 우리 두구 아저씨는 장
난을 아주 잘하세요.”
팽운은 본래 호방한 성격에 매우 거만한 사람이라 두구의 격한
어조를 언짢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더구
나 은란까지 이렇게 말하는데 화를 낼 수도 없어 억지로 마음을 진
정시켰다.
“나에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 마문비가 당신들을 부대에서 떠
나 가라고 했을 때 나도 당신들 못지 않게 섭섭하고 괴로왔소. 그
러나 나는 나의 스승의 꾸중을 무릅쓰고, 내 마음대로 나의 제자들
을 모이게 하고 특별히 이곳으로 온 것이오.”
“그러고 보니 그대도 사귈 만한 친구였군!”
이때 상팔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소영은 상팔을 보며 궁금함을 참지 못하였다.
“마문비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은패를 구했으니 다행이오.”
두구는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럼 은패를 하나 훔쳐 나왔단 말이오?”
“그렇지. 은패를 하나 훔쳐 오긴 했지만 훔칠 생각은 없었네.”
“그럼 훔치기 잘하는 신투향비라도 만났소?”
이때 건너편에서 검은 그림자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서 있었다.
“두형은 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군. 우리는 이십 년이나 만나지
못했는데…..”
시선을 돌려 보니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사나이가 서서히 다가왔
다. 그는 약 오십 세쯤 되어 보이는 사람으로, 코 밑에 팔자 수염
을 하고 두 눈빛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그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했소. 그래 어디서 지냈소?”
“이십 년 전에 무엇을 훔치다가 발각되어 한 대 얻어맞고 난 후,
기분이 좋지 않아 조용한 곳에 가서 기술을 다시 연마하여 이제 다
시 강호에 들어오게 된 것이오.”
금란과 은란은 그의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
렸다.
신투향비는 시선을 두 여인에게 돌리며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웃기는 왜 웃소? 내가 도둑질한다고 해서 고상하고 점잖지 못하
다는 말이오?”
은란은 미안해 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너무 노여워 마세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으니 용서하세요.”
“그럼 용서하지.”
향비는 그 말을 하면서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은란은 깔짝 놀라 그것을 자세히 보았다. 그것은 금비녀였다.
그녀는 더욱 놀라며 제 머리를 만져 보니 머리에 꽂은 금비녀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은란은 급히 일어나며 그것을 받았다.
“주시는 것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만약 내가 기술을 남에게 가르쳐 줄 일이 있다면 아가씨에게 가
르쳐 주고 싶소.”
은란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배울 게 없어 도둑질을 배운담!’
이때 상팔이 나섰다.
“아가씨와 그만 농담하시오. 내가 두 친구를 소개하겠소.”
상팔은 소영을 가리켰다.
“이분은 우리의 큰형님이신 소영이시오.”
향비는 상팔과 소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어린애를 가지고 큰형님이라고 하다니….. 중주이고는 늙
을수록 망령이군!’
향비는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
“저는 중주이고와 형제같이 지내는 사람입니다. 이들과 함께 당
신을 큰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오. 향형,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상팔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형님, 그가 지금 한 말을 믿지 마시오. 속으로는 아니꼽다고 생
각할 것이니, 형님의 특이한 기술을 한 번 보여 주시오.”
소영은 싱겁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두구가 옆에시 한 마디 거들었다.
“향비는 속과 겉이 다릅니다. 언젠가는 한번쯤 큰형님의 맛을 보
게 될 겁니다.”
이윽고 향비는 아니꼽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제쳤다.
“좋아, 난 원래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지. 방금 나는 중주이고의
체면을 생각해서 형님이라고 불렀던 것이오. 그러니 다음부터 속에
서 진정으로 우러나와 부르게 하려면, 소형의 진실한 묘기를 봐야
겠소이다.”
소영은 강호의 호걸들은 마음 속으로 존경하지 않으면 절대로 고
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못 들은 척하였다.
상팔은 향비를 바라보며 웃었다.
“향비, 우리 형님은 아량이 넓기 때문에 자네의 두서없는 말은
염두에도 두지 않을 것이네.”
상팔은 다시 팽운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분은 개방의 신방주의 계승자인 일진풍 팽운이오.”
팽운은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
“거지입니다.”
“난 신방주와 몇 번 만난 적도 있지. 이십 년 전에 말이야.”
“그때 나는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지도 않았소.”
“만약 그대가 그때 들어갔다면 지금 다른 사람이 소개할 필요도
없지.”
팽운은 그가 아니꼽고 비위에 거슬리는지, 속으로 그의 거만한
기세를 꺾으려고 생각하고, 웃으며 향비에게 다가섰다.
“하긴 그때 내가 스승의 문하생이 되었더라면, 오늘 이렇게 향형
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거요.”
상팔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 마디 했다.
“이번엔 정말 좋은 적수를 만났군. 향비, 자네가 한 수 졌네. 거
지에게 기세를 부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세.”
“거지는 상대 못하겠어. 그의 몸에는 가치있는 물건이 아무것도
없군 그래. 훔칠 만한 물건이 없어.”
이때 두구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형님, 시간이 없소. 은패를 위조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
하오.”
상팔은 서서히 품속에서 은패를 내어 주었다.
“향비가 어디서 이것을 훔쳤는지 모르겠지?”
두구는 은패를 받아들고 자세히 앞뒤를 보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알고 보니 은패의
그림이 어찌나 세밀하게 되었는지 위조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향비는 두구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두구, 자네의 위조술을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지만, 이것을
위조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나?”
“이 은패가 어찌나 세밀하게 되었는지 몹시 힘들겠지만, 하루 낮
과 밤이면 이렇게 똑같이 만들 수 있겠소.”
“하룻밤이란 휴식시간을 포함하고 지금부터 용구를 마련하려면
이틀이 지나야겠군?”
“그 정도는 걸리겠지!”
“백화산장의 모임은 아직 해산하지 않았을 것이니 역시 내가 기
술을 발휘해야겠군.”
향비가 말을 마치자, 상팔은 잠잠히 서서 머리 속으로 계산해 보
았다.
‘소영과 두 아가씨 그리고 거지와 향비 또 나, 두 사람이 은패
하나를 사용한다 해도 아직 세 개가 부족하구나.’
상팔은 향비를 바라보았다.
“향비, 아직도 세 개가 더 부족하네.”
소영이 말했다.
“두 개면 족하오.”
“형님은 꼭 들어가야 하오.”
“마문비가 나를 데리고 들어간다는 약속을 어찌 어기겠소?”
“그것은 부득이한 경우이고, 지금 은패가 있으니 마문비를 따라
가는 것은 형님의 입장으로 봐서 좀 천하게 보이지 않겠소이까?”
“괜찮소. 그와 같이 가면 편리한 점이 많을 거요.”
상팔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우리가 몰래 들어가는 목적은 오직 두 노인을 구하기
위해서이니 사람이 많이 필요하고 만약 마문비가 부하를 거느리고
오면 일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상팔은 고개를 끄덕이며 향비를 바라보았다.
향비가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두 개고 세 개고간에 문제가 아니오. 난 조수가 한 사람 필요하
오. 만일 훔치다가 들키거나 하면 소식을 전할 사람이 있어야 하
오.”
상팔은 얼굴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놈이 또 무슨 재주를 부리려고 하나?’
“내가 동행하지.”
향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웃었다.
“당신은 배가 나와서 안 되오. 무슨 큰 인물이나 되는 것 같아
보여서 같이 가게 되면 나의 이 초라한 꼴과 어울리지 않소.”
두구는 향비가 상팔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여 급히
그의 앞으로 나섰다.
“내가 가겠소.”
“안 돼! 그대는 항상 무뚝뚝한 얼굴이라 사람이 보면 어색한 기
분을 느끼게 하오.”
상팔이 말했다.
“거지는 어떠한가?”
“더욱 안 되지, 거지와 같이 가면 사람들 주의를 끌거든.”
“그럼 어느 분을 택하겠소?”
향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여자를 데리고 간다면 필시 여러 사람의 주목을 끌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손을 쓰기도 편리하지.”
상팔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향비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은란 아가씨를 데리고 가려 하나? 아가씨에게 물어 봐야
하지만 젊은 아가씨가 자네같은 늙은 사람을 따라 갈까? 설복시킬
수 없을걸.”
은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같이 가기를 원하지만….”
향비가 반색을 지었다.
“하지만 뭐요?”
“저는 백화산장 출신이며 귀주성내의 모든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으니….”
향비는 행여 은란이 다른 핑계를 댈까봐 얼른 서둘렀다.
“괜찮아. 내가 변장을 시켜 줄 테니. 시간이 없소. 그러니 빨리
갑시다.”
은란은 소영에게 인사를 하였다.
“공자, 저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겠어요.”
소영은 웃으며 은란을 바라보았다.
“고생이 많겠군.”
향비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더니 말했다.
“오시(午時) 전에 우리 이곳에서 만납시다.”
향비와 은란은 날 듯이 달려갔다.
상팔은 소영에게 다가서며 속삭였다.
“저 향비는 훔치는 수법에 능하여 강호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또
한 의협심도 강하오. 그래서 이십 년 전 무림에서도 의도(義盜)라
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소. 그가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보니 일은
잘된 거요.”
“훔치는 일은 나쁘지만 겉으로 점잖음을 가장하고 속으로는 간사
한 사람보다야 월등히 낫지요!”
소영은 상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상형과 마문비는 만날 장소를 약속했소?”
“형님은 정말 마문비와 수행인으로가장할 것을 결정했습니까?”
“결정했소. 마문비에게 약속을 지키지 위해서이고, 또 이번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오. 만약 부모님을 구출하지 못한다면 그후로 백
화산장의 파수는 더욱 엄중해지고 심목풍도 더욱 내 부모님을 못살
게 굴 것이오.”
소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드디어 비장한 각오를 드러냈다.
“만약 부모님을 구출 못하면 나는 백화산장에서 죽겠소.”
“형님, 안심하시오. 우리는 이미 형제가 되었으니 형님의 부모님
은 바로 나와 두구의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요. 만약 두 노인을 구출
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백화산장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겠소.”
소영은 상팔을 감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두 분의 정의는 참으로 고맙소.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지…”
“그런 말은 하지 마시오. 우리는 이미 형제지간이 아니오!”
“나는 그동안 말할 수 없이 고민을 하였소. 이제 실토를 하지 않
으면 안 되겠소.”
“형님, 분부만 하시오. 물불을 가리지 않겠소.”
“상형과 두형이 나를 형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나는 송구스런 마
음에 몹시괴로왔소. 이제부터는 나이 대로 나를 셋째로 불러주시
오.”
상팔은 손을 저었다.
“안 될 말이오. 무림에는 나이가 많든 적든간에 모든 면에서 월
등한 사람이 존경을 받아야 하오. 그리고 형님은 우리보다 무공도
높으니 우리가 호형함이 마땅하오. 하물며 나와 두구는 형님을 만
난 후로 과거에 잘못한 일을 뉘우쳤소. 앞으로는 형님을 섬기며 좋
은 일을 많이하여 과거의 죄를 씻겠소이다.”
상팔은 둥근 얼굴에 큰 귀를 가졌고 배가 쑥 나와 무슨 큰 인물
이나 되는 듯 보였다. 또한 아주 착하게도 보였다. 이 때는 엄숙한
표정으로 정의감에 불타 장사꾼답지 않게 의협심이 넘쳐 보였다.
“상형의 성의가 그렇게 대단하시니 나도 더 거절은 않겠소. 그러
나 후에 무림 일이 잘되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중주이고를 중주이
의(中州二義)로 바꿔야겠소.”
상팔은 유쾌히 웃었다.
“오늘부터 하는 일이 잘되어 마음만 편안하면 되오. 그런 명호
(名號) 따위는 마음에도 없소.”
상팔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나와 마문비는 오전에 만나기로 했소. 형님은 약속을 지키겠다
니 더 이상 권하지 않겠소.”
“그러나 우선 마문비를 만나야 하오.”
“마문비와 중원인물들은 지금도 형님에게 경계심을 가지고 있으
니 그들과 만나면 군중들이 냉정하게 대할 것이오.”
“그건 내가 참을 자신이 있소.”
“좋소. 기왕 그렇다면 우리는 어서 갑시다. 사람이 많으면 불편
하니 내가 형님을 모시겠소.”
소영은 마문비와 중원군중들이 자신에게 퍽 깊은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 가는 것도 모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문비와 군중들은 철저하게 감시할 것이다. 그리고 중원
군중들의 도움없이 자신과 상팔 몇몇 사람의 힘으로만은 도저히 백
화산장에게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좋소. 상형이 수고하시오.”
상팔은 두구에게 귓속말로 소근거리며 소영과 함께 걸어갔다.
두 사람은 육, 칠십 리를 와서 멎었다. 상팔이 정중히 소영에게
말했다.
“형님, 마문비가 비록 형님의 무공을 존경하나 의심이 많으니 조
심하시오.”
“나 역시 이번 일이 모욕당하지 않고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모든 것을 이해하면 되오.”
소영은 살며시 눈을 감고 조식하였다.
동녘 하늘이 서서히 밝아 왔다.
얼마 후엔 금빛 찬란한 햇빛이 온누리에 퍼지며 맑은 물을 비치
고 두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이때 한 조각의 배가 멀리 멎자, 한 사람이 검은 휘장을 들치고
늠름한 모습으로 배에서 내렸다.
사나이가 내리자 배는 다시 서서히 뱃머리를 돌렸다.
상팔은 배에서 내린 사람 앞으로 다가섰다.
“총타주는 과연 약속을 잘 지키는군요!”
마문비는 시선을 돌려 상팔에게 답례하였다.
“두 분 오래 기다리셨지요?”
“어제 상의한 일에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었소?”
“기왕 상형에게 승낙을 했으니 곤란을 무릅쓰고라도 해야지요.”
마문비는 다시 소영을 보며 말했다.
“다만, 셋째 장주에게 미안하여 마음이 불안하오.”
소영은 셋째 장주라는 말을 듣자 몹시 귀에 거슬리고 불쾌하였으
나 감정을 가라앉혔다.
“마형이 협조하시니 감개무량하오.”
상팔이 마문비에게 말했다.
“마형, 형님을 잘 부탁하오. 난 이만 가 보겠소.”
“멀리 관송하지 않겠소. 잘 가시오.”
“천만에.”
상팔은 몸을 돌려 떠나 버렸다.
소영은 상팔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마문비를 바라보았
다.
“마형, 언제쯤 변장합니까?”
마문비는 서서히 하나의 보따리를 꺼냈다.
“이 보자기 안에 의복과 변장하는 약물이 있소. 소형은 우선 옷
을 먼저 갈아입고 약을 사용하시오.”
소영은 보자기를 받아들자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착잡하였다.
그는 숲 속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약에 물칠을 하여 얼굴에
발랐다. 여자처럼 곱고 수려한 소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딴 사람의
얼굴로 변하고 말았다.
마문비는 소영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소형은 오늘 오후 백화산장으로 들어가 연회에 참석해야 하니
성명도 갈아야 하오.”
“그림 마형이 하나 지어 주시오.”
마문비는 한참 머뭇거리며 생각했다.
“원컨데, 소형이 순풍에 돛단 배와 같이 모든 일에 성공하여 부
모님을 순조로이 구출하십사 하는 뜻으로 마성(馬成)이라 부르는
것이 어떻소?”
“참으로 좋은 이름이오.”
“우리 귀주성에 가서 밥을 먹고 난 후에 백화산장으로 가는 것이
어떠하오?”
“난 분부대로 하겠소.”
“그렇다면 지금 갑시다.”
“기왕 마형의 수행인으로 가장하였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분부하
시오.”
마문비는 쑥스러운 듯이 웃음지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마문비과 소영은 말없이 걸었다. 귀주성내에 들어가니 곳곳에는
무기를 들고 말을 탄 무림 인물들이 득실거렸다.
마문비는 소영을 데리고 높고 크게 지어진 누(樓)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살피면서 서서히 누각 위로 올라갔
다. 맨 위에는 무림인물들이 초만원을 이루었고 거리 쪽으로 둥근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탁자 곁에는 누런색의 장삼을 걸친 중년
사나이가 앉아 있었고 그 곁에 두 개의 빈 좌석이 남아 있었다.
마문비는 그 탁자 안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앉았다.
소영은 변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익숙하게 수행인답게 마문비
뒤로 가서 섰다.
누런 장삼을 걸친 중년 사나이가 마문비에게 무어라고 말을 건네
려는 듯했으나 한 번 바라보고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문비도 그의 얼굴이 퍽 익었다. 그래서 자세히 바라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의 성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문비는 사환을 불러 음식과 술을 주문했다. 그리고 소영을 향
하여 말했다.
“너도 이리 앉아라.”
“예.”
소영은 단정히, 그리고 침착한 자세로 앉았다.
객실은 초만원이고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출입
자들은 대부분 강호의 인물들이었다.
소영은 사방을 살피며 생각하였다.
‘심목풍이 얼마나 많은 무림 동지들을 초청했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귀중성내에 들어 왔을까?’
두 사람은 재빨리 음식과 술을 배불리 먹고 나와 성내를 한 번
둘러보고 백화산장을 향해 걸었다.
이들은 한적한 곳에 이르자 마문비는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성내를 돌아보아도 소림과 무당 인물은 보이지 않소. 심
목풍은 정중한 사람은 초청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찌하여 나를 초
청했을까? 옛날 사람들의 말에는 연회와 집회는 그리 좋은 것이 없
다고 했소. 보아하니 심목풍은 대회에서 비밀리에 손을 쓸 것이 분
명하오. 백화산장에 들어가면 우리는 같이 있을 수 없으니 소형은
더욱 조심해야 하오.”
“말씀 고맙소. 들어간 후에 가급적이면 총타주와 같이 있겠소.”
“상팔, 두구도 대회에 참석하오?”
“그들은 은패를 소지하고 있으니 쉽게 들어올 수 있을 거요.”
“잘 됐소. 중주이고의 무공은 막강하니 들어온 후에 우리의 하는
일에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오.”
“난 절대로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니 마형은 안심하오.”
마문비는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갔다.
이 길은 소영도 익숙하여 눈을 감아도 백화산장을 찾아갈 수 있
었다.
얼마쯤 걸으니 백화산장이 나타났다.
마문비는 백화산장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많으나 직접 보는 것
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뚫어지게 백화산장을 바라보았다. 꽃과 나무가 웅장하게 둘
러싸고 있고, 높은 건물이 구름을 찌를 듯이 솟아 있으며, 맨 윗층
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움직였다.
“마형, 이 백화산장은 보기에는 경비가 소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경비가 매우 엄하오. 저기 사방에 꽃과 나무가 있는 곳에는
모두 고수들이 숨어서 경비하고 있소.”
마문비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가르쳐 주어 고맙소.”
이때 나무 뒤에서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예를 갖추며 말했다.
“두 분은 청첩을 받고 대회에 참석하러 오시는 분이신가요?”
“그렇소.”
두 사람은 갑자기 양쪽으로 물러서며 길을 터주고 허리를 굽혔
다.
“들어 가시지요.”
마문비는 원래 백화산장의 곳곳을 구경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니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할 수 없이 곧장 들어
갔다. 대나무 숲을 지나자 높고 큰 나무와 아름다운 꽃에 싸여 있
는 웅장한 누각이 나타났다.
왼쪽에는 십이 명의 동자들이 서 있었으며, 오른쪽에는 십이 명
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서 있었다. 몇 개의 나무로 된 탁자가 문
앞에 놓여 있고, 가운데서는 두 사람이 나란히 다닐 수 있는 통로
가 있었다.
그곳에는 팔자 수염을 한 두 노인이 양쪽 탁자 뒤에 각각 앉아
있고, 두 사람의 뒤에는 각각 정복을 한 두 대한이 서 있었다.
마문비의 예리한 시선은 노인들의 뒤에 있는 대한에게로 갔다.
마문비는 그들의 무림의 고수들이라는 것을 즉시 알고 진기를 암암
리에 운기하여 경계를 하며 천천히 들어갔다.
소영은 뒤를 바싹 따랐다.
마문비가 탁자 옆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두 노인이 동시에 일어
서서 허리를 굽혔다.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마문비는 싱겁게 웃으며,
“예(豫), 악(鄂), 상(湘), 공(貢)의 총타주 마문비올시다.”
왼쪽에 있는 노파가 말했다.
“알고 보니 마도련님이시군요. 서명을 해주시겠소?”
노인은 두 손으로 마문비에게 모필을 내어 주었다.
마문비는 모필을 받아 용이 날고 봉이 춤추는 듯한 유려한 필치
로 탁자 위에 자기 이름을 썼다.
오른쪽에 있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 양해하시오. 은패를 보여 주시겠소?”
노인은 은패를 들고 자세히 살피고 다시 예를 갖추어 돌려 주었
다.
“마도련님, 이것을 잘 보관하시오.”
마문비는 얼굴을 찌푸리며 화를 내려다 참고 은패를 품 속에 넣
었다. 왼쪽에 서 있는 노인은 시종 소영을 살피고 있다가 마문비가
은패를 품 속에 넣자 비로소 마문비에게 물었다.
“이분은 총타주와 어떤 관계인 사람인지요?”
“나의 수행인인데. 초청장에는 분명히 하나의 은패에 두 사람이
들어 올 수 있다고 했는데 내가 잘못 봤을까?”
오른쪽 노인이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총타주, 노여워 마시오. 우리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행할 뿐이
오. 신분은 자세히 알아야 하며 수행인들의 숙소도 마련해야 하니
까요.”
노인은 이윽고 소영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보게, 이름은?”
“마성이 라고 하오.”
이때 왼쪽에 있던 노인이 높은 음성으로 안에다 대고 외쳤다.
“예, 악, 상, 공의 총타주 마문비께서 수행인을 데리고 당도했
소.”
이때 붉은 옷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아가씨와 동자가 급히 다가오
며 예를 갖추었다.
“마도련님을 영접합니다.”
마문비는 마음속으로 퍽 떠들썩하게 야단들이구나 하고 생각했
다. 마문비는 손을 흔들어 만류하였다.
“됐어.”
붉은 옷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아가씨는 마문비를 보고 빙긋이 웃
었다.
“제가 마도련님을 인도하겠어요.”
그녀는 몸을 사뿐히 돌리더니 앞장 서서 걸었다. 마문비는 아가
씨의 뒤를 따랐다. 소영도 마문비 뒤를 따랐다. 그 뒤에는 동자가
따라왔다.
마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는 망을 보며 따라오는 것을 보니 방비
가 엄하구나!’
아름다운 아가씨는 두 사람을 인도하며 등이 걸려 있는 큰 문으
로 들어 갔다.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는 복도를 지나 넓은 대청문
앞에서 멎었다. 그리고 높이 외쳤다.
“예, 악, 상, 공의 총타주 마문비 도련님이 왔습니다.”
이때 대청 안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소영은 그
사람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화려하게 차린 그 사람은 청문 밖으로 나와서 마문비 앞에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
“난 주조룡입니다. 오래 전부터 마형의 높은 존함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셔서 백화산장을 한층 더 빛나게 해 주시니
참으로 큰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