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239
239. 잘하면 일을 아주 쉽게 풀 수 있겠는데.
며칠 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회장실이 있는 최상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중년 사내가 수행원 한 명과 함께 내렸다.
카펫이 깔린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중년인은 바로 씨네박스 박승훈 사장이었다.
상반기에 개봉한 스틸 워리어 2가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고, 한국과 중국에서 멀티플렉스 극장 사업이 순항하고 있어서 그런지 얼굴이 아주 좋아 보였다.
복도를 걸어간 박승훈 사장은 문을 열고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20평쯤 되는 부속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비서실 직원들이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한쪽에 서서 선정혁 대리와 얘기하고 있던 권혁재 실장이 가까이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신가.”
머리를 숙이며 하는 인사에 박승훈 사장 역시 웃는 낯으로 손을 내밀었다.
직급은 자신보다 한참 아래여도 본사 비서실장이라는 특별한 자리인 데다 재성의 측근이기까지 하니 아무리 사장이라도 함부로 낮춰보진 못했다.
“회장님은 안에 계시나?”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권혁재 실장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선 회장실 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문을 다시 열며 말했다.
“들어오시랍니다.”
박승훈 사장은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곤 열린 문을 지나쳤다.
“어서 와요.”
마침 재성이 책상 앞에서 막 일어나는 중이었다.
박승훈 사장을 반갑게 맞이한 재성은 소파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재성이 가장 상석에, 그리고 박승훈 사장이 오른쪽에 허리를 내리자 정효정 대리가 차를 가져와서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갔다.
으레 내놓는 커피가 아닌 향긋한 차 내음이 느껴졌다.
“구기자차인데 요즘처럼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에 좋답니다.”
“아, 예.”
가끔 생각하는 거긴 하지만 재성은 요즘 사람답지 않게 노인 입맛이라고 해야 하나, 어른들이 좋아할 것 같은 차를 내놓을 때가 있었다.
솔직히 얼굴만 보면 무조건 커피는 블랙, 술은 고급 위스키만 마실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얼굴로 이게 몸에 좋답니다 하면서 보리차니 도라지차 같은 걸 권하는 걸 보면 참으로 기이한 기분이었다.
재벌가에 태어나 너무 일찍부터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자란 탓인 걸까.
“왜 그러시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던 박승훈 사장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찻잔을 들었다.
홀짝이면서 한 모금 마신 그는 으음, 하고 짐짓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맛이 진한 것이 아주 좋군요.”
“그거 다행이네요. 그건 그렇고…….”
재성은 다리를 꼬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배급한 할리우드 영화 흥행 성적이 꽤 좋다고 하더군요.”
박승훈 사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개봉 2주일 만에 관람객 1700만 명이 들어왔으니 이번 주말까지 2천만 명을 무난하게 넘길 걸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천만 영화를 하나 만들기가 정말 어려운데 중국은 기본으로 깔고 시작하니 역시 인구 대국다웠다.
‘이렇게 14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가 밑바탕이 되니까. 모든 기업들이 일단 자리만 제대로 잡으면 큰 성공을 거두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거겠지.’
물론 중국 정부의 폐쇄적이고 철저하게 자국 기업에 유리한 정책도 한몫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중국에서 수십 곳의 멀티플렉스 극장을 운영하고 일 년에 서너 작품씩 외화를 배급하는 씨네박스는 상당한 특혜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화젠민이라는 거물을 뒷배로 두고 있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기에 화젠민과의 관계를 더욱 세심하게 관리해야만 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날려 보내는 건 바보 같은 짓일 테니까 말이야.’
물론 나중에 봄날이 가고 미국과 중국이 부딪치게 되면 관계를 재고해 봐야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최대한 꿀을 빨 수 있었다.
상념을 지운 재성은 박승훈 사장을 보며 말했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는 박 사장이 직접 컨펌한 작품이라면서요?”
“그렇습니다.”
“역시 작품 보는 안목이 대단하네요.”
“과찬이십니다.”
칭찬을 받자 박승훈 사장의 어깨가 절로 올라갔다.
“박 사장을 보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예요.”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사업 때문에 중국 측 인사들을 자주 만나니 나보다 현지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예. 뭐 그건 그렇지요.”
진지한 얼굴로 재성이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 화젠민 부주석이 골치 아파하거나 필요로 하는 것이 뭔 것 같아요?”
“……?”
뜬금없는 물음에 박승훈 사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고는 딱히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글쎄요…….”
유력한 차기 주석 후보로 자리를 다져가고 있는 화젠민에게 부족하거나 걱정거리가 있기나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박승훈 사장은 한 가지를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모르겠습니다만 골칫거리라면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큰 기대 없이 혹시나 해서 물어봤던 재성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박승훈 사장을 봤다.
“그게 뭐죠?”
“양위안 충칭시 서기 문제입니다.”
“양위안 서기라면…….”
“중국 차세대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거론되는 유력 인물입니다.”
누군지 몰라서 얼굴을 굳힌 것이 아니라 이름을 듣자마자 사건이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로 중국 최악의 정치 스캔들 가운데 하나인 양위안 사건이었다.
‘중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일인데 그걸 잊고 있었다니.’
재성은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박승훈 사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같은 태자당 출신이기는 하지만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화젠민 부주석하고 달리 상당히 강성인 인물입니다. 창홍타흑(唱紅打黑)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비리 척결과 자본주의를 배척하고 공산당 문화를 부흥시켜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충칭에 멀티플렉스 극장을 열려다가 연기하게 된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화젠민 부주석의 입김도 안 통할 정도라는 말이네요.”
“예. 완전 독불장군이 따로 없습니다.”
박승훈 사장이 머리를 절래 흔들며 말을 이었다.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차기 대권을 노리면서 강경파로 돌아섰다고 합니다.”
재성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대권이라면 설마 주석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창홍타흑 운동과 충칭식 경제개발로 중국인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는 데다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다면 지는 해라고 해도 아직 최고 권력자인 후진타오 주석하고 대립각을 세울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이러다 보니 상하이방도 양위안을 뒤에서 밀어주며 후진타오 주석과 공청단을 견제하는 모양새입니다.”
“상하이방의 적자가 아닌 화젠민 부주석으로서도 양위안의 부상이 그리 달갑지 않겠군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머리를 끄덕이며 박승훈 사장이 말을 보탰다.
“최악의 경우 주석 자리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실권을 다 빼앗긴 허수아비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혼자 모든 걸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통치체제에 가까운 현재 중국의 권력 구조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후진타오 주석과 공청단도 눈엣가시 같겠지만 양위안을 가장 껄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화젠민 부주석일 겁니다.”
애초에 화젠민이 갑자기 유력 주자로 떠오른 것도 상하이방의 황태자였던 천량위가 부패 혐의로 실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인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직 권력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지 못한 화젠민한테 큰 위협일 수도 있겠군.’
또 다른 정적인 왕신 부총리가 있었지만 상하이방이 반대하는 이상 최고 권력자가 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양위안은 다르지.’
양위안 역시 후진타오 주석과 공청단의 반대에 부딪힐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바람을 일으킨다면 분명 큰 위협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문제를 해결할 해법을 찾은 재성은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박 사장하고 이야기를 나누길 잘했군요.”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좋을 텐데요.”
“무슨 말씀을.”
재성은 얼굴 가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생각하신 것보다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습니까.”
박승훈 사장이 다행이라며 대꾸했다.
“그건 그렇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재성이 말했다.
“함께 점심이라도 먹자고 권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바로 다음 일정이 있어서.”
“아닙니다. 저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 되니 이쯤에서 일어날 생각이었습니다.”
박승훈 사장은 눈치껏 먼저 일어나 그럼 이만, 하고 인사했다.
허리를 직각으로 숙인 박승훈 사장이 밖으로 나가자 재성은 소파에 앉은 채 머리를 굴렸다.
“이거 잘하면 일을 아주 쉽게 풀 수 있겠는데.”
적이 많은 만큼 양위안의 약점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경우고, 재성에겐 남들이 모르는 무기가 있었다.
바로 지난 삶에 대한 기억들이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었던 만큼 몇 날 며칠이고 언론이 그 이야기만 할 때가 있었다.
당연히 사건에 얽힌 배경과 내용이 세세하게 다 알려졌고, 그 정보는 재성의 머릿속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즉 지금은 아무도 모른 채 묻혀 있는 양위안의 비리를 그는 알고 있다는 거다.
“하지만 의혹만 가지곤 거래를 할 수 없겠지. 뭔가 증거가 필요한데…….”
잠시 생각하던 재성은 핸드폰을 꺼내 데이비드의 번호를 눌렀다.
뉴욕은 밤이었기에 평상시보다 통화 연결음이 더 길었다.
[여보세요?]자다가 일어난 목소리로 데이비드가 전화를 받았다.
“자고 있었습니까? 깨워서 미안하군요.”
[아닙니다. 잠시만요…….]침대에 누워 있었는지 부스럭거리며 옷을 주워 입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데이비드가 하나 해줘야 될 일이 생겼어요.”
그러면서 재성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싱긋 웃었다.
* * *
8월 둘째 주 유니콘 그룹 본사 임원 회의실.
조명이 어둡게 다 꺼져 있는 가운데 상석에 자리한 재성은 정면 스크린에서 나오는 영상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재생되고 있는 건 바로 한일강제합방 10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홍보 동영상이었다.
2분간의 짧은 영상이 끝나자 벽 쪽에 서 있던 선정혁 대리가 스위치를 눌러 회의실의 불을 켰다.
“어떠십니까?”
짧은 침묵을 참을 수 없었는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서경주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해 영상을 제작하긴 했지만 그건 본인 생각이었고, 다른 사람의 눈엔 어떻게 보일지가 문제였다.
특히 재성의 반응을 걱정하고 있던 서경주 교수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턱을 괸 자세로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던 재성은 음, 하면서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호,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셨는지…….”
걱정이 사실이 되었나 싶어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전 세계 주요 거리에서 영상을 틀기로 했던 걸 취소하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에 한창 속으로 땅굴을 파 내려가던 서경주 교수는 문득 짝짝, 박수 소리를 듣고서 정신을 차렸다.
“아주 좋아요. 교수님께서 정말 노력을 많이 해주셨군요!”
재성이 활짝 웃는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만들어졌군요.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을 텐데, 솔직히 정말 기대 이상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서경주 교수는 한순간 지옥에서 천국으로 끌어올려진 기분이었다.
“혹시라도 잘못된 부분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그래서 아까부터 계속 얼굴이 굳어계셨군요. 하하,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되는데.”
재성은 연신 미소를 지은 얼굴로 서경주 교수를 대했다.
“무엇보다 편집이 빠르고 음악이 적재적소에 잘 들어가 있어서 몰입할 수 있어서 좋네요. 제반지식이 부족한 외국인들도 이 영상을 보면 한일강제합방의 부당함을 바로 알 수 있도록 구성이 잘 꾸며져 있어요. 거기다 일본 식민통치의 잔학성도 전달할 수 있고.”
“아무래도 외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영상이니까요.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알기 쉬운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주안점을 뒀습니다.”
재성의 칭찬에 기분이 들뜬 서경주 교수가 신난 듯 대꾸했다.
“여기 자문 받은 분들 이름을 보니까 유명한 역사학 교수님들이 많더군요.”
재성이 손에 들고 있는 건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전에 서경주 교수가 미리 나눠준 자료였다.
거기엔 동영상을 제작할 때 참고로 쓴 문헌이나 참고 서적들, 그리고 자문을 받은 여러 대학의 교수들 이름이 함께 나열되어 있었다.
보통 거기까지 들여다보는 사람은 잘 없어서 괜히 준비했나 싶기도 했지만 이렇게 재성이 알아봐 주니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아, 예. 안 그래도 회장님께서 민감한 주제라 상대가 트집 잡을 거리를 만들어주면 안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역사학 교수님들을 찾아뵈며 역사적 오류가 있으면 찾아봐 달라고 협조를 요청했지요.”
특히 그 부분은 서경주 교수도 각별히 신경을 쓴 것이라 더욱 뿌듯했다.
“그렇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서경수 교수는 진심이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영상을 제작하는 내내 보람차고 즐거웠습니다.”
대답하는 서경주 교수의 눈동자가 활기차게 빛나고 있었다.
재성은 그걸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이 동영상이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될 겁니다. 상상해 보세요, 대형 전광판에 교수님께서 직접 만든 영상이 틀어지는 광경을.”
말만 들어도 벅차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서경주 교수를 향해 재성이 환히 웃었다.
“그때가 정말 기대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