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380
380. 거인의 마지막 가는 길인데 옆에서 지켜보고 싶군요.
다음 날 아침.
박경수 회장은 출근을 미루고 아침 일찍 찾아온 큰아들과 서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애플의 하청을 받겠다는 거냐?”
지그시 바라보는 박경수 회장의 시선에도 재현은 위축되지 않고 어깨를 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자체 브랜드를 가진 제일 전자가 OEM 생산을, 그것도 경쟁사 제품을 만들어낸다니.
다른 시선에서 보면 분명 굴욕적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막내인 재성이 넘겨주는 오더였기에 더욱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지는 않는 모습에 박경수 회장은 눈에 이채가 돌았다.
“경쟁사들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게야?”
재현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하청을 하겠다는 이유가 뭐냐? 이게 경쟁사인 애플을 도와주는 일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물론입니다.”
재현은 박경수 회장의 시선을 받으며 차분히 대답했다.
“면목 없습니다만 지금 제일 전자의 모바일 사업이 잘 안 풀리는 건 다 제 잘못입니다. 스마트폰으로의 전환이 너무 늦은 데다가 초반에 허둥대며 방향을 제대로 못 잡는 바람에 경쟁사들한테 시장을 선점당해 버렸죠. 뒤늦게 따라가 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잘 안 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재현은 고개를 숙이며 스스로 잘못을 인정했다.
“이게 다 제가 판단을 잘못 내린 탓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제일 전자의 사업 실적이 좋지 않은 건 박경수 회장도 잘 알았다.
그래도 잠자코 있었던 건 스스로 어떻게 길을 헤쳐 나가는지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설마 타개책으로써 애플 제품 위탁 생산을 맡으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박경수 회장이 계속 말해보라는 것처럼 턱을 까딱였다.
“모바일 사업부를 새롭게 재정비할 겁니다. 선두 주자들과 충분히 경쟁할 수 있는 신제품을요.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그사이 적자를 최소화하고 생산라인을 유지하는 데 애플에서 받는 물량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자존심은 접는다.
위탁생산을 통해 적자를 줄이고 다음번 제품은 반드시 성공시키겠다.
그런 의지가 충분히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박경수 회장은 장남이 정신적으로 한층 성장했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대견하게 여겼다.
하지만 겉으론 여전히 엄한 얼굴로 다시 지적했다.
“실패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다음 기회를 노리겠다는 의지는 칭찬해 주마. 허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박경수 회장은 입매를 굳히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차후 그룹을 승계받는 데 흠집이 될지도 몰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상상이었다.
재현도 그런 생각을 해보았는지 순간 어깨를 움찔했으나 재차 의지를 다졌다.
“물론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들이 많겠죠. 그래도 제 잘못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감수하겠습니다. 실적을 내서 부정적인 시선을 극복해 보이겠어요.”
많이 달라진 큰아들의 모습에 박경수 회장은 한동안 말없이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안 된다고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 뭐든 방법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한 법이지.”
박경수 회장은 팔짱을 끼면서 입을 열었다.
“뜻이 그렇게 확고하다면 한번 해보도록 해.”
기쁜 표정을 짓는 재현에게 박경수 회장은 엄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대신 이미 기회를 한번 준 만큼 이번에도 결과가 좋지 않다면 그땐 지금 있는 자리를 내놔야 될 거다.”
후계자 자리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하지만 재현은 이미 결심을 단단히 굳힌 뒤였다.
“예.”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재현의 얼굴에 굳은 결의가 넘쳤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뒤 재현이 서재를 나가자 박경수 회장은 그제야 얼굴 표정을 풀었다.
“이제 한시름 덜었군.”
막내인 재성은 손대는 족족 뭐든지 다 성공하는데 정작 장남이 제대로 기를 펴고 있지 못하니 은근히 걱정하던 참이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들려오는 소식에 아마 본인도 많이 괴로웠을 거다.
자신감을 잃고 위축된 게 보여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는데 저렇게 스스로 극복을 해버리니 참으로 대견했다.
“껍질을 깨고 한층 더 성장한 것 같으니.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박경수 회장은 안심한 듯 연신 흐뭇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 * *
어느새 사람들을 지치게 하던 무더위가 가고 붉은색 단풍이 온 산을 예쁘게 물들이는 가을이 됐다.
재성은 소파에 앉은 채 네오픽스 허인환 대표를 보며 말했다.
“그럼 신사옥은 내년 1월부터 공사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현재 인허가를 진행 중에 있고 11월 중으로 필요한 모든 행정 절차를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새로 지을 네오픽스 신사옥은 연면적 250,000㎡에 지하 10층 지상 32층 규모였는데, 내부에 엘리베이터만 21대나 설치될 정도로 상당한 크기를 자랑했다.
지금 네오픽스 직원 숫자를 생각하면 안 쓰는 공간이 더 많을 정도였는데 그룹 본사 건물보다 훨씬 규모가 컸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네오픽스 내부에서 이렇게 큰 사옥이 필요하냐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이게 끝이 아니라 앞으로 네오픽스를 더 크게 키울 생각이었던 재성은 그대로 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제일 건설과 메가시티 리츠 보유 아파트 매매 계약을 끝냈습니다.”
“넘겨받기로 한 물량이 모두 2,600세대라고 그랬죠?”
“예. 소유권을 전부 이전받은 후에도 전세 계약이 만료되는 내년까지는 리츠사에 관리를 위탁할 예정입니다.”
“굳이 그런 일까지 직접 할 필요는 없으니 잘했어요.”
워낙 부동산 경기가 바닥을 찍고 있다 보니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리츠 투자자들이 매도에 동의했다.
“성과급 지급 계획을 내부적으로 한 번 더 꼼꼼하게 점검한 뒤에 연말쯤 매입 신청을 받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아파트를 실적 보너스로 지급하는 건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보니 이것저것 챙기고 점검할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연공서열에 따른 천편일률적인 보상이 아니라 성과에 따라 객관적이고 균형을 갖춰 보너스가 지급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렇게 회의를 마무리 지으려고 할 때.
권혁재 실장이 노크를 하며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이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에요?”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권혁재 실장이 어두운 목소리로 급보를 알렸다.
“방금 미국에서 소식이 들어왔는데 스티브 렌 애플 전 CEO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순간 회장실 안이 크게 술렁였다.
IT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나 마찬가지인 인물이 바로 스티브 렌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성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시선을 받은 권혁재 실장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조금 전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허어…….”
“병세가 심하단 이야기는 들었는데……. 결국.”
다들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탄식을 쏟아냈다.
이렇게 될 것 알고 있던 재성 역시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더 나눌 이야기가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예.”
“알겠습니다.”
허인환 대표와 네오픽스 임원들이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안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 진동벨이 울렸다.
액정에 데이비드의 이름이 뜬 걸 확인하곤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안 그래도 전화를 하려고 했어요.”
[소식을 들으셨나 보군요.]“시장 반응은 어때요?”
스티브 렌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애플 최대주주이자 투자자로서 시장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애플에 대한 우려와 비관론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대형 헤지펀드에서는 공매도를 때릴 움직임도 보이고요.]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성이 핸드폰을 손에 든 채 머리를 끄덕였다.
“스티브 렌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충격은 피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럴 겁니다.]애플이라는 군침 도는 먹잇감을 하이에나 떼 같은 헤지펀드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재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스티브의 상태를 알고 브래드 CEO가 날 찾아온 건지도 모르겠네요.”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제일 전자에 재하청을 주는 건 민감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어쩐지 너무 쉽게 요구를 들어준다 했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인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여우같은 면모가 보였다.
재성은 당했다는 생각을 살짝 하면서도 한편으론 안심했다.
이 정도 역량이라면 앞으로 격랑에 휩쓸릴 애플을 잘 이끌어 나갈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딱히 내가 손해 본 것도 없고 말이야.’
어차피 브래드를 지지할 생각이었으니 서로 이득을 본 거였다.
“급한 일정만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갈 거예요. 나머지 이야기는 그때 만나서 하도록 해요.”
[장례식에 참석할 생각이십니까?]“시대를 바꾼 거인의 마지막 가는 길인데 옆에서 지켜보고 싶군요. 그리고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으니.”
[으음. 가능하면 저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만. 이번 일로 증시가 요동칠 것 같아 아무래도 자리를 비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데이비드가 말했다.
“그렇겠죠. 장례식만 참석하고 뉴욕으로 이동할 거니까 금방 볼 수 있을 거예요.”
통화를 끝낸 재성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권혁재 실장을 보았다.
“내일 미국으로 갈 거니까 일정 전부 비워놔요.”
“알겠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다 들었기에 권혁재 실장은 곧장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깊은 생각에 잠긴 재성을 본 권혁재 실장은 조심스럽게 방에서 물러났다.
* * *
한 시대를 변화시킨 혁신의 아이콘답게 스티브 렌의 사망 소식은 속보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애플 신화를 만든 스티브 렌 사망!] [시대의 큰 별이 지다. 스티브 렌, 지병으로 향년 57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다!] [스티브 렌 사망. 전 세계 IT업체에 미칠 영향은?혁신의 아이콘이라고 불리며 시대를 이끌어 온 애플 창업자 스티브 렌이 자택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애플은 성명을 발표해 “스티브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고 우리는 크나큰 슬픔에 잠겼다”고 밝히며 홈페이지에 스티브 렌의 대형 흑백 사진을 내걸고 애도를 표했다.
새로운 애플 CEO인 브래드 역시 “스티브는 오직 그만이 만들 수 있었던 기업을 남기고 떠났으며 그의 정신은 애플의 영원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는 가운데 스티브 렌의 사망이 IT업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칠 걸로 예상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이 장 시작과 동시에 일제히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다.]
온갖 기사와 애도 메시지가 쏟아지는 가운데 재성이 탄 전용기가 팰러앨토시 인근 비행장에 착륙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재성이 수행원들과 함께 트랩을 내려오자 골드원 펀드 간부 직원이 마중을 나와 있다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나단이라고 합니다.”
가볍게 악수를 한 재성은 한쪽에 세워진 리무진에 올라탔다.
“장례식이 비공개로 치러진다고 했죠?”
“예. 유가족과 일부 지인들만 참석한 채 진행한다고 합니다.”
생전에 사생활이 노출되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 스티브 렌다운 마지막이었다.
“유가족 측에서 참석을 허락하고 장소와 시간을 알려 줬습니다.”
“자칫하면 여기까지 와놓고도 헛걸음을 할 뻔했는데 다행이네요.”
“이대로 가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바로 도착해서 피곤했지만 그래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보다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