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45
제145화
이른 아침부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제2 훈련장으로 향한 금사자 기사단의 앤드류가 입구에서 대뜸 멈춰서서 멍하니 훈련장을 바라본다.
“뭐…야?”
훈련장에 세워져 있던 훈련용 더미들이 죄다 시꺼멓게 탄 상태로 쓰러져 있다. 바닥은 여기저기 헤집어지고 돌무더기가 사방으로 튀어나와 있다.
간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또 흑성에서 습격이라도 한 건가?”
심각해진 앤드류가 다급히 현장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고 있을 때, 금사자 기사단원들이 뒤이어 속속들이 도착했다.
“앤드류! 이게 무슨 일이야?”
금사자 기사단의 부단장인 도미닉이 난장판이 된 훈련장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나도 몰라. 근데 이 흔적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음……. 그러게. 마치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게…….”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번쩍 뜨고는 시선을 마주친다.
“단장님?”
“단장님인가!”
짙은 뇌기의 흔적. 훈련장을 이렇게 초토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아는 한에는 렌 아르젠밖에 없었다.
“맞다.”
그들의 뒤편에서 소리소문없이 다가온 모건이 말했다.
“그러니 그만 호들갑 떨고 훈련장이나 되돌려 놔라.”
“모건 님! 정말 단장님께서 이리 만드신 겁니까?”
“그래, 내가 봤다. 아랫놈들에게 시키든 하인들을 시키든 빨리 돌려놓고 훈련에 임하거라. 너희 단장은 이렇게 앞서 나가는데 단원들이 느려 터져서는 속도를 맞출 수 있겠느냐?”
모건의 지적에 앤드류와 도미닉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 누구보다 가장 절절하게 느끼고 있는 게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단장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단원들 중에선 상급 기사조차 없으니 마음이 점점 초조해질 수밖에.
“급할 거 없다. 천천히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너희 단장이 불가해한 인물이니까.”
“감사합니다. 모건 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건의 위로에 불안감이 조금은 가셨지만, 그래도 그들의 마음속의 불씨는 이전보다 더욱 크게 불타올랐다.
“마르셀 어딨어! 준기사 녀석들이 빠져 가지고! 아직도 안 나온 거야?”
“앤드류, 그 녀석들은 우리보다 1시간 먼저 나와서 제4 훈련장을 돌고 있어.”
“아……, 그래? 웬일로 그렇게 일찍 나왔대?”
“웬일이 아니라, 이전부터 그랬어. 우리보다는 더 일찍 나와서 훈련해야 한다고.”
“뭐? 폴! 너도 알고 있었냐?”
“응, 알고 있었지.”
“근데 왜 나만 몰랐던 거야? 쯧, 내일부터 2시간 일찍 나와야겠어.”
앤드류의 말에 질겁한 도미닉이 그를 말렸다.
“네가 그러니까 말 안 한 거잖아. 인마. 이미 우리도 충분히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고 있다고. 이보다 더 일찍 나오는 건 오히려 훈련에 방해돼.”
“……그래도.”
“부단장은 나야. 말 들어.”
“칫.”
모건은 한발 물러서서 기사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가 알던 금사자 기사단은 이제 사라졌다. 준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경쟁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게으름과 귀찮음이 만연해 있던 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금사자 기사단을 시작으로 다른 기사단들이 변해가고, 준기사들이 변해갔으며 말단 병사들도 차츰 노력하기 시작했다.
‘왕국이 달라졌다.’
내부를 좀먹던 고위 인사들이 모조리 쓸려나가니 힘이 없던 군부는 강력해졌고 행정부는 그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권력 구도는 행정부를 이끄는 알란 헤르티아와 군부를 이끄는 루이즈 헤르티아로 나누어졌다.
자칫 내부의 분열이 일어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견제할 상대가 생겨 이전처럼 쉽게 부패하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 왕위가 누구에게 돌아가느냐에 따라 왕국의 흐름이 완전히 뒤바뀌겠지만, 모건은 브릴런트에 난데없이 불어닥친 폭풍의 중심에 있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렌 아르젠…….’
지난밤 제2 훈련장에 홀연히 나타난 렌 아르젠. 그가 홀로 검술 훈련하는 모습을 모건은 직접 목격했다.
그가 처음 휘두르는 검은 조금 어설펐다. 하지만 도전적이고 당당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고서는 절대 보일 수 없는 검로와 기의 운용.
마치 새로운 것을 시험하고 도전하듯 렌은 그 자리에서 생전 처음 보는 기술을 수차례 시도하고 만들어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었다.
‘마스터의 경지라고 했던가…….’
처음에 렌이 보였던 검술은 분명 마스터라 하기에 모자람이 있었다. 그랬기에 어설펐고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설픔은 점차 사라지고 그의 실망은 기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펼쳤던 기술은 진짜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그 기술.
분명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기술이었다. 순간 모건조차 그가 그리는 검로에 빠져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신비로웠다.
‘왕국의 두 번째 마스터…….’
모건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깃든다. 그를 무겁게 누르던 부담감이 한결 해소된 느낌이다.
“이제는 정말 안심하고 물러나도 되겠군.”
그가 다시 국왕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 드디어 검술이 고급에 이르렀구나.
“예.”
중급이 100%에 가까워지며 급격하게 줄어들었던 숙련도의 상승 속도가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며 뚫린 탓이었다.
“새로운 깨달음이 하벤베르크 검술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붙는 느낌이군.
조상님도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벌써 하벤베르크 검술이 고급에 이를 줄은 몰랐던 듯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 아직 멀었다. 진짜 검에 대해 깨우치기 위해선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나도 그리 느꼈다. 하벤베르크 검술이 고급에 이르고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스터의 경지.
그곳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순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느낌이었다.
– 이제 너도 너만의 투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게다. 지금은 그 힘이 미미할지라도 계속해서 갈고 닦으면 강해질 것이니, 검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손아귀가 저려온다. 몇 시간 동안 검을 잡고 휘둘렀더니 머리가 핑 도는 것만 같았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고차원의 검술. 기의 발현부터 주입, 변형, 방출까지. 그 모든 것을 몇 단계 빠르고 정확하게 해내야 한다.
– 설마 쉬려고? 이제 음공 배워야지.
검을 내려놓고 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던 내게 블리스가 다가와 말했다.
“아, 맞죠.”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 교황을 죽이는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블리스의 음공을 완성해야 했으니.
– 음악에 마력을 불어넣는 순간 그건 강력한 힘을 갖게 돼. 사람들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지.
이번에 그가 가르쳐주는 음악은 리코더가 아닌 다른 악기로 하는 연주였다.
팽팽하게 조여진 줄을 튕기며 음을 만들어내는 이 악기는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는 데에 아주 효과적이라고 했다.
– 지금까지처럼만 따라오면 돼.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높아서 꽤 애를 먹고 있었다.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세기로 몇 분 동안 연주를 해야 한다. 그 손놀림은 또 얼마나 현란한지 음악이 아닌 그의 손만 보고 있어도 재밌게 느껴질 정도.
만약 연주자 특성을 갖지 못했다면 그에게 배울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 따라 해봐.
“……알겠습니다.”
나는 한동안 악기를 배우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며칠이 더 흘렀다.
침대에 누워 있는 조안나의 안색은 며칠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생기가 넘쳤다. 푸석하던 머리카락엔 윤기가 흘렀으며 퀭했던 눈동자에는 어느새 총기가 가득하다.
[강령이 풀립니다.]– 완전히 회복했어. 뿐만 아니라 마나가 더 잘 흐르고 쉽게 모일 수 있게 혈을 뚫어놨으니, 앞으로 하루가 다르게 좋아질 거야.
“감사해요. 정말…로.”
그녀가 헛바람을 들이켜며 내게 말했다. 자신의 몸 상태가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이나 팔다리를 훑고 거울을 확인하며 스스로를 매만졌다.
“흐윽…….”
왈칵 눈물을 흘리고 입술을 깨문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녀도 그녀를 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특성: 마나 펄스(Mana Pulse)
힘: 5
민첩: 5
체력: 6
감각: 8
마력: 1
그녀의 신체 능력이 전체적으로 소폭 상승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녀에게 마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앞으로 저 마력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겠지.’
그녀의 마나 펄스라는 특성은 가만히 있어도 그녀에게 마력이 쌓이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더구나 젬마의 조각술로 그것이 한 단계 더 증폭되었을 테니.
‘그러고 보니, 브릴런트에도 마법병단을 만들긴 해야 하는데…….’
조안나에게 마법을 가르치면 제법 괜찮은 마법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마나 펄스라는 사기적인 특성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뛰어난 마법사는 단순히 마력량이 많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그만한 노력과 지식, 재능이 필요한 분야. 적성이 맞지 않는 이들은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도 끈기는 있어 보이니, 어느 정도는 하겠지.’
아무래도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만한 인물이 있는지 찾아봐야 할 듯싶다.
“나중에 또 오겠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해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서려던 나는 그녀에게 깜빡하고 말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아, 그리고 제프먼 경이 복귀할 겁니다.”
“네?”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제프먼이 그렇게 어머니의 음식을 그리워했다고 하더군요.”
“오랜만이라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녀가 양 주먹을 꽉 쥐며 결의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고마워.”
방문을 나서는 뒤편에서 감사의 인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녀가 완전히 회복했으니 제프먼도 더 이상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겠지.
제프먼은 오늘부로 복귀할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지금 내가 왕성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고.
똑. 똑. 똑.
“렌 아르젠입니다.”
왕성에 들어온 나는 의전장관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저번보다도 더 퀭한 모습의 테리 번스가 의자에 앉아 나를 맞이했다.
“시간이 없으니 용건만 빠르게 하지.”
“제프먼을 오늘부로 복귀시킬 생각입니다.”
“마음을 돌릴 수 있다더니, 제프먼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던데?”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나는 여유롭게 소파에 기대앉았다. 테리 번스 또한 나를 바라보며 맞은 편에 앉아 턱을 치켜든 채 눈빛을 빛냈다.
“말해봐.”
“제프먼의 마음을 돌리면 제게 무슨 보상이 있습니까?”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제프먼을 복귀시키는 게 아니다. 이번에 쓸려나간 인물들이 너무 많았다. 한 명의 인재라도 소중한 이때, 상급 기사인 제프먼은 귀중한 자원이 되겠지.
나는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무얼 원하지?”
테리 번스는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행정부의 수많은 고위 간부들이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건 이유가 있는 법.
제프먼의 충성을 확실히 받아내는 게 왕국에 얼마만큼의 이득인지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끝났을 것이다.
나는 굳이 그러한 것들을 설명하는 대신 그에 대한 대가를 말했다.
“제가 원할 때, 이유 불문하고 제 의견에 힘을 실어주십시오.”
“…….”
처음으로 그의 답변이 늦어졌다. 테리 번스는 행정부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
그의 성격상 자신의 영향력을 알기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거겠지. 내가 어떤 의견을 던질지 알 수 없으니.
“……그러지.”
‘호오?’
이렇게 바로 수락할 줄은 몰랐다. 내가 혹여 왕권에 반기라도 내비치면 그 또한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테리 번스의 성격상 그때 가서 약속을 지키지 않을 리도 없으니…….
‘생각보다 나를 더 신뢰하거나, 아니면 내가 그를 잘못 본 거겠지.’
어찌 되었든, 이 정도면 충분하다. 딱히 그 외에 원하는 것도 없고.
“용건 끝났으면 가 봐. 제프먼에게 갈 건가?”
“예.”
“그래, 나가 봐.”
그가 손을 휘저으며 나를 내보냈다. 어지간히도 바쁜지 곧장 자리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는 모습이다.
나는 바로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제프먼이 그곳에 갇혀 있기에.
철컥- 끼이익-
내가 가자마자, 문지기가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렌 아르젠 경이 오시면 언제든 문을 열어주란 명이 있었습니다.”
“제프먼을 가둔 곳의 열쇠 있습니까?”
“여깄습니다.”
문지기가 망설임 없이 내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이것도 명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곤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내려가니 독방에서 쇠고랑을 찬 상태로 벽에 기대 있는 제프먼의 모습이 보였다.
봉두난발에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던 그가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제프먼 알베르트.”
“…….”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흉흉한 안광이 번뜩인다. 매우 복잡한 눈빛이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여 어지럽게 얽혀 있는.
“복귀해라.”
“……내가 배신하면, 어쩌려고 그러지? 나를 죽일 건가? 아니면 어머니라도 볼모로 삼을 건가?”
그의 목소리에 분노와 억울함이 배어 있었다.
“큭.”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과연 내가 지금 할 말을 들으면 제프먼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웃을까? 기뻐할까? 아니면 믿지 못하고 조롱한다며 분노할까?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야.’
그 무엇보다 내게 웃음이 흘러나온 이유. 그것은 눈앞의 상급 기사가 앞으로 나를 따르게 될 것이란 확신 때문이었다.
그것이 자꾸만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뭐가 그리 웃기지?”
“음……, 좋아서?”
“…….”
가볍게 웃은 내가 자물쇠를 풀고는 철창을 벌컥 열었다.
“나와라. 네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역시 어머니를 볼모로-.”
“듣기로는 정말 오랜만에 요리를 해보겠다고 하더군.”
“그게 무슨… 헛소리냐. 지금 나를 놀리려는-.”
“치료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를 아드득 갈던 그가 순간 멈칫한다. 제프먼이 짓고 있는 저 멍청한 얼굴이 퍽 웃겨 나도 모르게 또 웃음을 흘렸다.
“살려냈다고. 네 어머니인 조안나 알베르트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