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294
제294화
전쟁에 참여한 이들중 상당수가 렌과 같은 전장에 있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안다. 렌 아르젠이 매번 전장에서 어떠한 기적을 보였는지.
믿기지 않게도 그가 있었던 전장에서 렌 아르젠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제국과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패의 기사, 신의 사자, 하늘의 기사, 대륙의 영웅, 불세출의 천재, 검술의 귀재, 아르젠의 소가주 등등…….
수많은 수식어가 렌 아르젠의 뒤를 따랐다. 렌은 그러한 수식어들을 부담스러워했지만, 다른 이들은 렌을 그리 부르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공식적인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이가 렌 아르젠이었다.
전장에서도 마찬가지, 그 어떤 괴물이 와도 이겨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리라. 렌이 펼쳐낸 신성력이 단장의 마기를 손쉽게 막아낸 것만 보아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너를 진작에 처리했어야 했다.”
단장은 후회스러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니지, 이따위 발광을 하기 전에 너를 먼저 죽였어야 했어.”
렌은 그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레베카는 어디 있지?”
렌은 레베카라는 이름이 단장의 역린이라는 걸 알고 도발했다.
“네가 감히 레베카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아?”
이전이라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이리 흥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미쳐가는 단장은 조그마한 자극으로도 금세 침착함을 잃었다.
“네가 또 죽였나?”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마기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렌이 펼쳐낸 신성 장막을 부숴낼 듯이 쏟아지는 마기.
그것을 막기 위해 렌이 검을 들자, 두 인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듯 섰다.
“늦었군. 렌.”
“망할, 괴물이 따로 없네. 도둑놈.”
먼저 전장에 와 있던 아스터와 폴른이었다.
“두 사람은 다른 악마를 막으십시오.”
“뭐? 단장을 죽이라며?”
폴른이 물었고.
“돕겠네.”
아스터가 죽을 각오를 다지며 말하는 그때.
시꺼먼 검기가 공간을 격하고 가로질러 단장에게 쇄도했다.
원래라면 이따위 검기쯤이라며 맨손으로 받아냈을 단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위력을 직감하곤 마기를 거둬들여 검기를 막아낸다.
“플레처 아르젠……!”
단장은 그 검기의 주인을 단번에 알아챘다.
이미 몇 차례 부딪히지 않았던가. 플레처 아르젠만 아니었어도 제국도, 브릴런트도, 신성 왕국도 진작에 무너졌으리라.
“끝까지 나를 방해하는군.”
“그러니 이제는 끝을 봐야겠지.”
플레처가 순식간에 병사들을 뛰어넘어 렌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폴른과 아스터가 플레처를 보고는 주춤하며 물러선다.
“아버지.”
“물러서라. 단장은 내가 맡겠다.”
렌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플레처가 자신을 보호하듯 나설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힘을 아껴라. 이럴 때 나서는 것이 가주다.”
“같이 싸우시죠.”
“아니다. 너는 다음을 대비해라.”
– 이 인간이 현 아르젠의 가주인가? 제법이군. 본질을 보는 눈을 가졌다.
그는 단장을 죽이는 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었다. 그 뒤로 튀어나올 악마를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리고 자신보다 렌이 그 악마를 상대하기 적합하다는 것도.
여명이 플레처를 칭찬하자 괜스레 렌이 뿌듯함을 느꼈다.
예전이라면 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왜 이렇게 자신이 변해 버린 것인 걸까.
렌은 금방 그 이유를 짐작했다.
‘돌로레우스의 환상 때문이군.’
그 안에서의 아버지는 분명 매정하고 쓰레기 같은 모습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모든 게 돌로레우스의 농간이라는 것을 알게되자, 그의 행동들이 조금씩 다시 보이게 되었다.
돌로레우스조차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렌의 기억 속 플레처의 사소한 행동들은 사실 렌을 위하는 것들이 많았다.
훈련장에 어린 렌이 들어오는 걸 막은 것도 사실 그가 형제들과 가문의 기사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고.
렌이 가문의 수습 기사들과 훈련을 받게 상황을 만든 것도 그가 수습 기사들 사이에서라도 자신의 기사들을 찾게 하기 위함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몰랐다. 하지만 이제야 그 상황을 돌이켜보니 알 수 있었다.
아마 돌로레우스는 그것은 몰랐을 테지. 그저 플레처가 렌을 무시해서 그리 행동했으리라고만 생각했기에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렌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눈치채고 환상을 버틸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아버지의 그러한 행동들이 자신을 구해준 것은 아닐까.
“감사합니다. 아버지.”
플레처는 렌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단장을 노려보며 검을 들고 있을 뿐.
“잘 보아라.”
그가 수백의 검기를 일으키며 단장과 격돌했다.
렌은 뒤에서 그의 싸움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제서야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에서 그의 검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검술에서 그의 의지가 엿보였다. 아르젠의 사대 유파 검술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플레처만의 독문 검술.
공격 일변도의 패도적인 검술은 꼭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부수고 말겠다는 그의 결의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지상에서 솟구치는 수백 개의 칼날이 사정없이 마기를 파고들고, 상대의 공격은 방어가 아닌 공격으로 맞받아친다.
연달아 폭음이 울려 퍼졌다. 마기에 튕겨 나간 칼날들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병사들이 휩쓸리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두 사람의 치열한 격돌이 연이어 이어졌다.
충격파가 지면을 뒤집어엎고 검기와 마기가 서로를 탐하듯 계속해서 맞부딪힌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격돌의 흐름이 변했다. 검기의 형태가 별안간 뒤바뀐 것이다.
‘이제 진짜군.’
렌은 지금까지는 서로의 탐색전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더욱 거세지는 충격파에 혀를 내둘렀다.
그림자로 변해 버린 검기가 주변 가득 메운 그림자들 속으로 파묻히듯 들어가 사라졌다.
찰나 전장이 고요해졌지만, 단장과 플레처 그리고 렌에게는 그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자신이 단장이었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했을까, 과연 어디에서 검기가 튀어나올까. 뭐가 진짜고 무엇이 가짜일까.
그 짧은 순간에 수십 가지의 고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동시의 단장의 마기가 그곳을 내리치며 지면을 붕괴시키고.
솨아아아아아아아악!!
일변하는 그림자들 속에서 사각을 뚫고 단장을 향해 쇄도한다.
‘이게 초월자들의 싸움인가.’
렌은 보는 내내 감탄했다. 플레처의 검술도 검술이었지만, 그 모든 것에 반응하여 받아치는 단장의 실력도 놀라웠다.
그림자들이 담은 칼날의 위력이 모두 다른 상황에서 적절하게 마기를 분배하지 않으면 결국 뚫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장은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거의 성공시켰다.
완벽한 성공이 아닌 이유는 중간중간의 그림자가 그의 마기를 뚫고 단장의 몸에 상처를 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다 막았겠어.’
지금의 단장은 마기는 강해졌을지언정 판단력은 흐려진 상태였다.
오히려 이 정도의 실력을 보인 것만 보아도 플레처 아르젠보다 결코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이 정도면 됐다.’
렌은 둘의 싸움에 더 집중하기보다는 난장판이 된 주변 연합군의 싸움을 도울 생각으로 움직였다.
악마 둘을 홀로 상대하고 있는 애스턴과 남은 악마들을 상대로 고전분투하고 있는 연합군들.
렌이 그들을 도우려고 나서려는 찰나, 뒤늦게 전장에 합류한 바실과 에드리크가 렌의 어깨를 붙잡고 막아선다.
“대장은 마지막에 싸워라.”
“벌써 네가 나설 필요 없다.”
두 사람이 렌을 막고 나섰다. 둘뿐만이 아니었다.
바실의 휘하에 있던 어린 기사들과 오리온의 용병 부대도 합류했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로자리아의 지원군들이 곧장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냈다.
“렌, 너는 뒤로 빠지거라.”
카리나의 지팡이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거센 마력이 대규모 마법진으로 흘러들었다.
“한 번에 쓸어버리겠다.”
카리나의 마법병단이 다같이 마력을 모아 대규모 마법진을 구축했다.
그것을 발견한 적진의 악마 하나가 기괴하게 생긴 지팡이를 치켜들며 마기를 쏟아낸다.
“너희들 마음대로 될 것 같으냐!!”
귀신처럼 쫙 찢어진 눈코입을 한 얼굴 형상이 떠오르며 귀를 찌르르 울리는 사이한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병사들과 기사들, 사제들은 아무런 영향도 없어 보였지만, 마법사들만은 달랐다.
“쿨럭!”
“크하아악! 그만! 그만!!”
4성 하위 이하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귀를 막으며 비틀대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피를 토해냈고, 어떤 이는 귀와 코로 피를 흘렸다.
‘마력에 영향을 주는 힘인가.’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악마들의 수법에 마법사들이 대처를 못 하고 있었다.
심지어 버티고 있던 4성 상위의 마법사들도 조금씩 흔들릴 정도.
대규모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테지만, 악마가 그 타이밍을 제대로 노리고 들어왔다.
“정신 차리거라! 내가-.”
그때였다.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 같던 마법진이 누군가의 개입으로 안정화되기 시작한 것이.
그 마력의 시작점을 찾은 카리나가 놀란 눈으로 렌을 보았다.
“너…….”
“도와줄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렌은 카리나만큼이나 능숙하게 마력을 움직여 마법진을 안정화하고 나가떨어진 마법사들의 부족한 마력을 대체해주었다.
카리나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렌을 보다가 다시 마법에 집중했다.
‘마기를 막아내는 게 먼저야.’
마법사들의 상황을 확인한 바실이 기습적으로 지팡이 든 악마를 공격했다.
바실의 공격을 막느라 악마의 마기가 잠시 흐트러진 틈을 타, 카리나가 마력으로 방벽을 씌우고 마법사들을 마기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정신 차려라! 지금이다!”
카리나의 지휘로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완성했다. 평소 얼마나 혹독하게 훈련받았는지 보이는 대목이었다.
[아스트랄 비전(Astral vision)]연합군의 위로 수백의 감겼던 눈이 떠지며 눈동자에서 수백의 빛의 광선이 쏘아져 악마군단을 휩쓸었다.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다. 대규모 마법은 전쟁에서 다수를 학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병사들의 사기가 한 번 더 오르고,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갖던 마법사들이 한숨 돌린다.
“또 왔군.”
플레처의 뒤를 따라온 아르젠의 기사들도 합류하여 연합군을 도왔다.
“소가주,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늦었으면 빠져 있어. 네가 나설 것도 없이 우리면 충분하니까.”
아르한이 웃으며 말했다.
“얼마나 강해진 거야? 이번 싸움 끝나면 나랑 붙는 거 잊지 마.”
스칼렛은 렌에게 끝내 확답을 받고는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 외 직계들은 아르젠의 저택에서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했고 나머지 아르젠의 수호 기사 여덟이 그들과 같이 악마들을 도륙했다.
이제는 완연한 연합군 측의 우세. 하지만 이마저도 단장과 플레처의 싸움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버지…….’
렌은 당장 개입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참고 있었다.
아무리 저들이 힘을 축적하라고 해도 렌이 개입하여 상대를 빠르게 처리하면 서로의 힘을 아낄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렌이 나서지 않은 이유는 플레처가 렌을 보며 열망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단장을 이겨내고 지금 가로막힌 벽을 한 차례 더 넘고 싶다는 의지.
눈동자 속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 눈빛을 보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기십시오.’
반경 100m가 넘는 공간을 플레처와 단장만이 사용하고 있었다.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갈라졌다. 공간이 비틀리며 바람이 격동했다.
사아아아아아아…….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폭음이 멈췄다. 둘 사이에 적막이 내려앉고 흙먼지가 그들을 가렸다.
렌은 멀리 떨어져서 그 싸움의 결과를 정확히 확인했다.
촤악!
단장의 몸에 플레처의 핏물이 튀었다. 단장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손톱이 플레처의 가슴팍을 길게 갈랐지만 그뿐이었다.
자신의 심장에 박힌 검을 내려다보며 그가 울컥 피를 쏟았다.
“우웨에엑!!”
검게 뭉쳐진 덩어리와 함께 검붉은 피를 내뱉었고, 비틀거리던 단장이 플레처의 어깨를 붙들고는 중얼거린다.
“레…베…카…….”
털썩.
플레처의 몸을 타고 주르륵 미끌리며 단장이 쓰러지고 플레처가 검을 빼냈다.
대륙을 공포에 물들게 했던 단장의 최후라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죽음이었다.
플레처가 그대로 뒤를 돌아 렌에게 향했다.
아무렇지 않게 걸었지만 렌만은 눈치챘다. 조금 전 마지막 일격이 플레처가 순간적으로 내보일 수 있는 최선의 일격이었음을.
그리고 그 일격으로 인해 플레처는 더 이상 예전처럼 검을 들 수 없게 되었음을.
“아버지…….”
“이제…, 네가 아르젠의 가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