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88
제88화
찬바람이 스멀스멀 내 몸을 휘감았다.
냉기 저항이 있기에 엄청난 추위는 느껴지진 않았으나, 잠을 깨기에는 충분했다.
“으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기를 이용해 취기를 몰아냈어야 했는데, 그런 짓 할 거면 술 처먹지 말라는 아더의 일갈에 그러지 못했다.
‘취해서 그런 거겠지?’
기억 속 장면들이 순간순간 끊겨 있어, 앞뒤 인가가 이어지지 않았다.
창문으로 다가가 하늘을 보니, 이제야 새벽의 여명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새벽의 차가운 냉기가 창문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옷을 챙겨 입고 바깥으로 향했다.
“하낫! 두울! 세엣! 네엣!”
훈련장이 있는 곳으로 가니, 기사들의 힘찬 구호가 안쪽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전날에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구보를 뛰는 모습은 내가 보아도 감탄사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이제 일어났나?”
“아, 예. 스테판 님.”
“자네는 근데 정말 추위를 안 타나 보군.”
“예?”
그 물음에 고개를 내려 내 복장을 보았다. 얇은 겉옷 하나만 걸친 상태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
급하게 나오다가 제대로 옷을 챙겨 입을 생각을 못 한 것이다.
냉기 저항 때문에 그리 춥지도 않았으니.
“렌, 자네는 북부에 빠르게 적응하겠군.”
“추위를 잘 견뎌서 말입니까?”
“아니.”
그가 신기하다는 눈빛을 내게 보내며 말을 이었다.
“어제 보니, 대륙에서 올라온 이들 중 유일하게 자네만이 우리들을 측은하게 보고 있더군.”
“……제가 말입니까?”
“그래.”
술에 취해 나도 모르게 내 본심을 밖으로 드러낸 듯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다만 왜 그리 봤는지 말해주겠나?”
나는 망설이며 저 멀리 훈련장을 뛰고 있는 기사들을 보고는 어제 생각했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어제 아더의 안내를 받아 북부 전사들의 무덤을 봤었습니다.”
“아더가 꽤 편해졌나 보군.”
“하하, 뭐, 저는 편한데 아더는 또 그렇진 않은가 보더군요.”
“그 녀석이 원래 좀 고지식하니, 자네가 이해하게.”
“예. 아무튼, 이곳에선 괴수들과의 마찰이 불가피하고 매주 전사들이 죽어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스테판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꿈틀거리는 입매가 그의 씁쓸함을 대변하는 듯했다.
“어제의 연회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들은 어떻게 그 많은 죽음을 매일 견디며 살아갈까. 전우애가 부족하거나 개인주의도 아니고 사람들이 그리 가깝게 지내는데 왜 무덤에는 사람들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았던 걸까 하고 말입니다.”
“그 짧은 사이에 많은 것을 파악했군.”
“그렇게까지 생각하니, 저들이 애써 그 죽음을 무시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덤에 찾아가지 않는 것도, 술을 퍼마시며 밝은 척 웃는 것도. 전부, 애써 현실을 살아가기 위함이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스테판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아더와 꽤 편해졌다고 했지?”
“예.”
“그럼 저들과 같이 뛰어보겠나? 이제 훈련장을 다 돌면 성채 전체를 크게 돌 거니까 말이야.”
설마 이 아침부터 훈련장을 뛰던 건 그저 몸의 예열 단계였을 뿐이라는 건가?
“허.”
나는 헛웃음을 내뱉고는 겉옷을 벗어 주변에 대강 던졌다.
“추울 텐데.”
“괜찮습니다.”
스테판이 내 등을 툭툭 치며 나를 앞으로 보냈다.
어서 저들의 틈에 끼라는 뜻이었다.
‘인정받은 건가?’
딱히 그러려고 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 내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관통했나 보다.
사람과 가까워지려면 그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라 했던가. 맞는 말이다.
“렌 경?”
아더가 이제야 나를 발견했는지 반가운 얼굴로 불렀다.
“같이 뛰시려는 겁니까?”
“왜? 겁나? 나보다 못 뛸까 봐?”
내 말에 아더가 자존심 상한 얼굴로 눈을 빛냈다.
“저희는 이미 여기 20바퀴는 뛰었습니다만?”
“그래?”
그리 말한 나는 다시 대열에서 빠져 커다란 모래 자루 하나를 등에 메고 다시 합류했다.
“그럼 나는 이거 메고 뛰지 뭐.”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하게 만들어 보던가.”
피식 웃으며 그리 말하자, 결연한 표정을 지은 아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오늘은 더 빠르게 달린다! 뒤처지는 놈들은 전부 추가 훈련이다! 알겠나?”
예에에에에에에에!!
뒤쪽에서 귀청 떨어질 만큼 기세 좋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내 말이 어지간히 그들을 자극한 듯했다.
‘조금 쫄리는데.’
기세 좋게 모래 자루까지 멨는데 못 쫓아가면 그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다 같이 제창한다!”
가장 선두에 선 알란이 소리쳤다.
“폭풍이! 몰아치는! 새하얀 벌판을!”
“폭풍이! 몰아치는! 새하얀 벌판을!”
“폭풍이! 몰아치는! 새하얀 벌판을!”
생전 처음 들어보는 군가였다.
성채가 떠내려갈 정도로 목청 터져라 부르는 그들의 군가는 성채 영지민들의 아침을 알리는 가락이었다.
“용맹한! 전사의 후예들이여! 오늘도 우리는 승리한다!”
“용맹한! 전사의 후예들이여! 오늘도 우리는 승리한다!”
발걸음에 맞춰 딱! 딱! 맞아 떨어지는 박자와 그들의 기백이 느껴지는 노랫가락.
그들을 따라 뛰며 그 함성의 내부에 있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그들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전우여! 우-리는!”
“전우여! 우-리는!”
처음 들었을 때는 따라 부르지 못했지만, 성채를 도는 긴 시간 동안 그들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군가를 불렀다.
“북부를! 지킨다아아!!”
“북부를! 지킨다아아!!”
하도 듣다 보니, 나도 어느 정도 군가를 따라부를 수 있게 되었다.
[체력이 0.1 증가했습니다.]
나는 떠오른 메시지도 무시한 채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 전의 나를 다그치고 싶었다.
왜 만용을 부려서 모래 자루를 메고 뛴다는 헛소리를 했는지.
이들 전부가 기를 쓰지 않고 순수 자신의 체력만으로 뛰었다.
설산을 돌아다니려면 그 무엇보다도 강인한 체력이 필수라고 한다.
이들이 여태 저 위험천만한 설산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훈련장에 도착한 나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제 먹은 것들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확실히 북부의 전사들에 비하면 아직 내 체력은 부족하다.
아니, 노하우가 부족한 걸까.
정신력과 체력만큼은 정말 금사자 기사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단장님?”
때마침 금사자 기사단원들도 훈련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이 이곳에 온 지 둘째 날이라는 것과 전날 그렇게 술을 퍼먹었던 걸 생각하면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으나, 방금 아마란스 기사단과 함께 뛰고 나니 도저히 좋게 보이지 않았다.
“하아……, 다들 이리로 모여라.”
내 굳어진 표정을 보고 가장 먼저 상황 파악을 끝낸 도미닉이 다급히 단원들을 불러 모았다.
“어리바리 타지마!”
“예, 예!!”
급격히 가라앉은 분위기.
내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든 단원들이 군기가 바짝 잡혀 도열했다.
“내일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3시간 앞당겨 기상한다.”
북부의 해는 생각보다 더 늦게 떠오르고 빠르게 진다.
내가 원하는 건 새벽녘이 보이기도 전에 기상하는 것이었다.
“예!”
이제는 제법 내 성향을 파악했는지 이 녀석들도 딱히 의문을 제기하진 않는다.
어련히 필요하니 그리 말한 것이겠거니 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아마란스 기사단에 맞춰 체력 훈련을 진행한다. 북부에 왔으면 그에 적응해야겠지.”
“예!”
멋모르고 저리 대답하는 듯했지만, 아마 내일부터 이들의 훈련을 따라잡으려면 어지간히 고생해야 할 거다.
북부의 매서운 강추위에 적응하면서 그 훈련량을 따라가려면 아무리 금사자 기사단이어도 쉽지 않겠지.
“렌 경. 지원군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습니다.”
아더가 내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말렸다.
“아니, 나는 그 꼴 못 봐.”
“그럼 적응 기간이라도 좀 주는 게…….”
“너희 적응 기간이 필요해?”
고개를 돌려 금사자 기사단원들에게 물었다.
가장 앞쪽에 있던 앤드류가 눈을 희번덕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필요 없습니다! 바로 적응하겠습니다!”
“맞습니다!”
“단장님도 오늘 바로 뛰신 것 아닙니까?”
“저희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세 좋게 소리쳤다.
“그렇다네?”
“……알겠습니다.”
아침의 가벼운 소란이 끝나고 나는 아마란스 기사단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아침 구보를 같이해서인지, 아니면 어젯밤 술을 같이 마셔서인지 몰라도 녀석들의 눈빛은 처음과 다르게 내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하루 만에 이리 잘 적응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 정도야 뭐.”
“아마란스 기사단은 저희 북부 군단 내에서도 가장 많은 훈련량을 가진 부대입니다. 금사자 기사단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환경적 문제도 있고, 여러 가지 요소 때문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괜찮아. 죽기 직전까지만 굴리면 되니까.”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아까 뛸 때는 나도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또 할 만한 것 같다고 느껴진다.
금사자 기사단도 일단 굴리면 어떻게든 굴러가겠지.
“금사자 기사단이라고 했나? 좀 잘해줘야겠군.”
“저쪽 단장이 우리 단장님보다도 더 심한 것 같은데?”
“그래도 우리 단장은 적응 기간은 주잖아?”
“무섭다, 무서워…….”
들으라고 그러는 건지, 바로 옆 테이블인데도 아마란스의 기사들이 중얼거리며 측은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딜 가나 단장의 고충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구나 싶었다.
저들도 나중이 되면 단원들을 생각하는 나와 아더의 마음을 깨닫게 되겠지.
“오늘은 병영과 막사를 오가며 병사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실전은 언제 가나?”
“성벽 밖으로 나가는 건 적어도 2주는 더 배우시고 가는 게 좋습니다.”
“2주? 너무 길어. 3일로 하지.”
“3일은 너무 짧습니다.”
“언제 놈들이 준동할지 모르는데 안전만 챙길 순 없어.”
“……알겠습니다. 렌 경이라면 괜찮겠죠.”
“고맙다.”
* * *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3일이 흐르고 브릴런트의 지원군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성벽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탐색대에 합류하여 그들이 하는 일을 배웠다.
탐색대의 대장은 랄프 아이벤슈츠.
아더의 천덕꾸러기 동생이었다.
“여기 북부의 험난한 산맥을 넘어가면 괴수들의 본진인 검은 땅 설원이 나와요. 그러니 절대 이 경계는 넘어가선 안 돼요. 이것만 주의하면 그래도 큰 위험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검은 땅을 넘어가지도 않았는데 네임드가 습격했다며?”
“그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에요. 주변 저희 병사들의 주둔지를 피해 공격을 한 걸 보면 한 놈이었다는 게 저희들의 추측인데, 네임드 혼자 여기까지 나온 게 거의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괜찮아요.”
“그런 변화가 생겼으면 더 의심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에이, 그런 식으로 안전만 따지면 저희 전부 성채 내에 처박혀서 나오면 안 되죠.”
랄프는 전혀 걱정 없다는 듯 말했지만, 내겐 그 변화가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탐색대의 임무는 임시 주둔지 주변을 살피며 검은 땅에서 넘어온 괴수들이 없나 확인하고 검은 땅으로 넘어가기 전 설산의 이상 징후를 미리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임무는 무사히 끝이 났다.
오늘은 그리 깊숙이 들어가는 날이 아니었기에 탐색 범위도 그리 넓지 않고 위험도도 높지 않았다.
“자네, 하라는 내 호위는 안 하고 정말 많이도 돌아다니는군.”
알란이 장난스레 농을 던졌다.
“어차피 성채 내부에만 있으신데 누가 전하를 위협하겠습니까?”
“하하하, 그래서 말인데 오늘 밤 간부 회의에서 자네가 나 좀 도와줬으면 하는군.”
“예? 뭘 말입니까?”
“이곳에만 있기 몸이 근질거려서 말이지. 내일은 이들을 따라 성 밖으로 나가볼 생각이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그래서 자네한테 부탁하는 거 아닌가? 자네가 날 지켜주면 되지. 내 호위 기사잖아?”
척 봐도 절대 그 의지를 꺾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귀찮기는 하지만, 알란도 결국 성 밖으로 나가긴 해야 해. 그 시기가 조금 빨라졌을 뿐.’
저녁에 간부 회의가 시작됐다.
아인 바이에른의 간부들이 지휘통제실에 모여 산맥의 지도를 펼치고 심각한 분위기로 다음 부대 작전에 대해 논의했다.
“괴수들의 파동을 감지하는 마도구가 드디어 왔습니다. 이걸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선 무조건 경계 근처까지는 가야 합니다.”
“병력 차출이 이게 최선인가? 네임드가 나타나면?”
“대규모 부대를 편성하면 놈들이 그것을 감지하고 습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검은 땅을 혼자 넘어온 전례도 얼마 전에 생겼고, 근래 들어 산맥의 기류가 심상치 않습니다. 차라리 소수 부대를 편성해서 빠르게 설치하고 나오는 게 나아 보입니다.”
“흠……, 하지만 차출할 병력이-.”
“큼,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명목상 이번 지원군의 최고 지휘 통솔자가 알란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회의에도 알란이 참여했다.
나는 그의 호위라는 명목으로 왔고.
“여기 상급 기사가 있습니다.”
알란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지원 후보로 나를 생각하지는 못했는지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겼다.
“제가 렌과 함께 부대에 합류하겠습니다.”
“렌은 그렇다 치더라도, 왕자님께서도 말입니까?”
“스테판 경, 이번 지원국 최고 지휘 통솔자가 저입니다. 저도 하루빨리 실전을 경험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테판과 간부들이 조금 난감하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아까는 알란의 말을 들어준다고 했었지만, 막상 와서 작전에 대해 들으니 생각 이상으로 위험해 보이는 임무였다.
알란이 과연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검은 땅의 경계 부분까지 가는 임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