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Chinese warlord from Joseon RAW novel - chapter 2
이 나이대 남자애들이 처음 모이면 하는 짓거리야 뻔하지 뭐.
“야! 너 동이족(東夷族)이라며?”
웬 덩치 큰 놈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난 배에 탄 이후 입도 뻥끗 한 적 없는데.
어째서 이런 사정은 단톡이라도 있는 것처럼 빠르게 퍼지는 것이지.
“청나라 국민도 아니면서 무슨 관비 유학이냐?”
“꼬우면 홍콩 총독님한테 따져.”
“홍콩 놈이었냐? 홍콩 총독은 보나 마나 양이놈이겠지? 그놈이 뭘 안다고 청국의 내정에 간섭해?”
“내정간섭은 개뿔.”
“뭐?”
“홍콩 총독께서 가련한 조선인 소년의 사정을 굽어살피어 양광 총독님과의 협의 끝에 중화를 위해 언제든 한 몸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전도유망한 애새끼 하나 유학 보내주는 게 내정 간섭이냐?”
다투는 소리를 들은 다른 유학생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주변을 에워쌌다.
내 쪽에는 안 서고 시비 거는 놈의 편에만 주르륵 서는 걸 보니 자기들끼리는 아는 사이인 모양.
벌써 얼마간 편이 짜인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얕잡아 보이면 안 된다.
나는 짐짓 거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어디 사람이냐?”
“베이징이다.”
“한족?”
“당연하지.”
놈의 뒤로 찰랑거리는 꽁지머리가 보였다.
변발한 한족이라.
놀려주기 어렵지 않지.
“위대한 대명(大明)제국의 후손이셨구나.”
“그래. 이 가오리방쯔야.”
“근데 그 꼴사나운 변발은 뭐냐. 쯧쯔. 영락제(永樂帝)께서 지하에서 통곡하시겠다.”
“뭐? 금전서미(金錢鼠尾)는 마땅한 국가의 법도인데 감히 동이 주제에 법도를 모욕해?”
“멍청한 새끼. 네가 모시는 만주족도 동이인 건 모르냐? 아이고 폐하. 당당한 대명의 후예가 돼지 꼬리를 자랑스러워합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놈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이 빵즈가!”
불끈 쥔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털 나고 두 발로 걸어 다닐 때부터 홍콩의 뒷거리에서 허구한 날 싸움판을 벌였던 나에게는 익숙하디익숙한 상황.
그 나날들에서 나는 절대적인 싸움의 법칙을 배웠다.
선빵 필승.
놈이 주먹을 뻗기 전에 먼저 휘둘렀다.
“컥!”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녀석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이러한 조절도 나름의 숙련된 솜씨였다.
뒤로 넘어졌다가 뒤통수가 깨지면 골치 아프니까.
“뭐야?”
“빵즈가 미쳤나.”
“이 새끼 주먹 쓰는 거 봐라.”
한족 놈들이 위협적으로 주위를 빙 둘러쌌다.
하나, 둘, 셋, 넷···, 아홉인가.
어려서부터 이방인의 삶을 살며 배운 건 결코 약세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아홉 명한테 다구리를 당하면 존나게 처맞겠지만 또 그거 이상으로 죽어라 패주면 된다.
그럼 다음부터는 감히 덤비지 못한다.
두 주먹을 꽉 쥐고 결전을 준비하는데.
“아냐. 자빠진 놈이 먼저 주먹을 휘둘렀다. 조선인은 정당방위였어.”
웬 놈이 건들건들 다가와 내 편을 들었다.
콧물을 삼키며 갑판에 가래침을 뱉는 꼴이 양아치 같았다.
“뭔 개소리야? 빵즈가 때리는 걸 내가 봤는데.”
“개소리는 멀쩡한 머리카락을 돼지 꼬리처럼 자르라는 법도가 개소리고. 야, 너희 다 화북(華北) 출신이지? 시발. 배알도 없냐? 한족이 뭐가 아쉬워서 만주족 흉내를 내고 다니냐?”
오···.
내가 얼굴까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새로 나타난 양아치의 정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서구식으로 깎은 머리에 잘생긴 외모가 한눈에 들어왔다.
훗날 국민당 정부의 수장이 되어 군벌 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한 효웅.
장제스(蔣介石, 장개석)였다.
“너는 청나라 국민 아니야? 변발은 국가의 법도인데 오히려 지키는 사람을 매도하다니!”
“청나라 국민이 아니라면?”
“뭐?”
“청은 시발. 난 태어났을 때부터 만주의 윗대가리 새끼들이 마음에 안 들었어.”
“그, 그런 반역적인 언동을! 인솔관님께 이를 거야!”
“븅신. 그 나이 처먹고 우쮀쮀 이를 거야 이 지랄. 꼬우면 덤비던가.”
혼자인 주제에 아홉을 도발하는 꼴이 용맹하다 해야 할지.
만용을 부린다 해야 할지.
기백만큼은 바로 그 장제스가 맞았다.
변발을 한 화북 출신 한족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 외쳤다.
“야! 조져!”
한꺼번에 여러 개의 꽁지머리가 흩날리며 평범한 체구의 장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장제스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호기롭게 외쳤다.
“아예 겁쟁이들은 아니었구나. 자, 조선인! 가보자구!”
우리 같은 편인 거야?
자연스레 장제스의 편이 된 내게도 변발족이 주먹을 뻗어왔다.
까짓거 보여주지.
홍콩 삼합회 조직원의 박투 실력을.
***
“부당합니다! 저희의 싸움은 정당방위였습니다!”
독방에 갇히고도 장제스의 텐션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지치지도 않는지 방문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오히려 머릿수로 비겁하게 집단구타를 가한 건 화북 놈들이란 말입니다!”
한동안 떠들어대도 반응이 없자 장제스는 터벅터벅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씨익 웃었다.
“주먹 좀 쓰던데. 이름이 뭐냐?”
“한신.”
“군신의 이름이군! 조선에서 홍콩으로 이민 온 거냐?”
“우리 부모님이. 나는 홍콩에서 태어났고.”
“어허허. 사연 꽤나 있었겠어. 나는 장중정(蔣中正)이다. 저장성(浙江省, 절강성)에서 왔다.”
널리 알려진 장제스라는 이름은 그의 자(字).
본명은 장중정이었다.
“어어. 반갑네.”
“아까는 말을 참 잘해주었어. 만주 떼놈들의 풍습을 지킬 필요는 없으니까.”
“뭐, 그야 그렇지.”
만주족의 풍습이 차라리 귀두컷이었으면 흐린 눈으로 따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변발은 에바잖아.
“이 나라는 틀려먹었어. 관료들은 부패했고 백성들은 노예근성에 젖었다고.”
“그래도 너나 나나 어떻게든 뭐라도 해보려고 외국으로 유학까지 가는 거잖아?”
“허! 저 화북놈의 새끼들은 그런 의식 같은 건 전혀 없을걸. 요즘 조정에서 한창 신군(新軍)을 창설하는 중이잖아. 저놈들은 그저 외국에서 대충 놀다 돌아가서 만조(滿朝)에 아첨해 신군에 장교 자리 하나 꿰찰 생각밖에 없다고.”
그 자리 나도 하나 먹을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아첨이라면 자신 있으니까.
문득 장제스가 문 쪽을 힐끔거렸다.
밖이 조용한 것을 확인한 장제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좋아. 너는 믿을 수 있는 것 같으니까 말해도 되겠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돼.”
“뭔 얘기를 하려고?”
“중국의 미래가 걸린 일.”
“해봐.”
“청조는 위태위태하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굳건하며 황실의 군대는 비록 이빨 빠진 호랑이일지라도 그 세는 무시할만한 것이 못돼. 반면 고통받는 백성들의 산발적인 반항은 오래가지 못하고 진압되어 버리지.”
“서론이 왜 이리 기냐.”
“그런데 그런 청조를 직접적으로 무너뜨리려는 비밀 세력이 있다면 믿겠냐? 그들의 목적은 현의 곳간을 턴다거나 관리를 암살하는 따위가 아니야. 청조의 멸망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실현할 힘을 지닌 무장혁명세력이라고!”
뭐야.
난 또 뭔 얘기를 그리 장황하게 하나 했네.
“그 비밀 결사의 본부가 우리가 가고 있는 도쿄에 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중국 동맹회.”
“어?”
장제스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알고 있었냐?”
“응.”
“어떻게?”
“거기 회원이거든.”
장제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가 동맹회원이라고?”
“그래. 홍콩은 청의 감시가 덜해 동맹회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거든. 랴오중카이 선생님 앞에서 직접 인장을 찍었지.”
“말로만 듣던 혁명의 열사를 직접 마주하다니!”
장제스가 흥분하여 부들거렸다.
“그럼 그 이름 높으신 쑨원 선생님도 뵌 적이 있냐?”
“아니. 그분은 홍콩에 오신 적은 없어서.”
나보다 세 살 위인 장제스는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동맹회의 행사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 역시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일개 회원일 뿐이었지만 동맹회가 벌인 각종 봉기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장제스의 눈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똘망똘망해졌다.
여객선의 독방에 갇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동시에 이 장제스란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했다.
내 편으로 둔다?
충동적이며 야망에 찬 자였다.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위해서라면 어떤 잔악한 과정이든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된 자.
시대를 타고나기에 따라 자유의 등대가 될 수도, 철과 피를 숭상하는 학살자가 될 수도 있는 자가 장제스였다.
그렇다면 적으로 둔다?
적이라면 간단하지.
성장하기 전에 처리한다.
열정적으로 중국의 미래를 논변하는 스물 한살의 장제스를 보며.
나는 도착할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
***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아시아의 희망으로 떠오른 이후.
청에서 일로 향하는 사관(士官) 유학은 눈에 띄게 급증했다.
하지만 선발시험까지 쳐서 뽑힌 인재라 해도 무작정 일본육사에 진학했다가는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 리 만무.
예비 학습이 필수적이었다.
몰려드는 청의 유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도쿄진무학교(東京振武學校).
일본의 학제에서 육군유년학교에 해당하는 과정을 배우는 학교였다.
육사 진학을 위해서는 먼저 진무의 졸업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도쿄 신주쿠의 진무학교.
간소한 입학식을 마치고 진무의 건물에 발을 디딜 때까지만 해도 본격적인 시작인 것 같아 두근거렸으나.
그 기대는 며칠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진무는 상상 이상의 똥통이었다.
영국의 학제를 따르는 홍콩의 중학교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는데 진무가 돌아가는 꼴을 보니 선녀에 양반이었다.
위치가 일본에 있고 이것저것 서양 과목들을 누더기처럼 땜질한 커리큘럼이 다를 뿐.
학교의 기본적인 골자는 중국의 학당을 그대로 옳겨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일본인 학교장은 이름만 걸쳐둔 채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중국인 학생감이 학교의 모든 행사를 주재했는데 아주 제멋대로였다.
입학 날짜에 따른 기수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쳐도 동기간 반 배정에까지 계급이 나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말로는 수준별 학습을 위해 반을 나눈다 했지만 돌아가는 방식이 중국식 관료사회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다.
“이름이 한신? 너는 3급반이다.”
“왜 3급입니까? 유학생 선발시험 성적은 양광(兩廣)에서도 상위권이었다고 아는데요.”
“선발시험 성적으로 반이 나뉘는 게 아니야.”
“그럼 뭐로 나뉩니까?”
“말이 많느냐! 3급반이라면 3급반이라고 알아들어라!”
저장성에서 15등을 했다는 장제스도 3급반으로 쫓겨 들어왔다.
반면 여객선에서 내게 시비를 걸던 한족들은 1급이나 2급반에 배정되었다.
유학생도들의 반배정이 끝나자 그 기준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1급반의 생도들은 팔기군(八旗軍) 출신의 만주족이 대부분이었다.
팔기군은 만주족 직계의 군정 조직. 청조가 흔들리는 중에도 황실에 충성하는 군대였다.
2급반은 화북에서 온 생도들이 많았는데 신식육군, 즉 북양군(北洋軍) 군부 출신의 한족들이었다.
팔기군의 배후에 청 황실이 있다면 북양군의 배후에는 청의 군권을 틀어쥔 위안스카이가 있으니 2급반 놈들이 기세등등 활개 치며 다니는 것도 당연했다.
3급반은 나와 장제스를 포함하여 대체로 화남 출신이었지만 그보다는 1급반과 2급반에 들지 못한 떨거지들을 몰아넣은 성격이 강했다.
대단한 재력이 있는 것도, 뒤를 봐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진무학교에서도 3급반은 찬밥신세였다.
반의 급수 차이는 모든 차별의 근거가 되었다.
관비에서 학비를 제하고 용돈이 나왔는데, 그 액수부터 달랐으며.
숙소의 책상과 의자 개수, 침상 너비까지 무엇하나 차등이 없는 곳이 없었다.
아침점호가 끝나면 1급반부터 순차적으로 배식에 들어갔는데 3급반의 차례가 올 때쯤이면 맛난 반찬들은 죄다 털려 새똥 같은 고기 조각을 놓고 전투적으로 쟁취해야 했다.
이 중국놈들은 소유의식 자체가 희미한지 식판에 반찬을 담는다고 내 것이 되는 게 아니었다.
조금만 주의를 딴 데 기울이면 서슴없이 젓가락이 건너와 내 고기 조각을 강탈해가곤 했다.
자연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집단에서의 생존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공공연한 차별.
자연스레 파벌이 나뉘었다.
만족을 중심으로 팔기파가 학교의 패권을 쥐고 그걸 북양파가 견제하는 모양새였다.
반면 떨거지들이 모인 3급반은 지리멸렬하여 파벌이라 부르기도 민망하였다. 서로 다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번잡스러운 진무의 초반 학기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은 별다른 소란을 일으키지 않은 채 조용히 있었으나.
슬슬 진무라는 아사리판에서 두각을 나타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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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의 선지자
진무학교의 수업은 일본의 여타 구제 중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어와 한문, 과학과 수학, 역사와 지리 등을 주로 배웠다.
반면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라는 인식과는 다르게 군사학 수업은 별것 없었다.
기껏해야 일본인 무관 교관이 들어와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읊으며 사상적으로 주입하려고 떠드는 식이었다.
청에서 온 유학생도들을 위한 학교이다 보니 역시 가장 주가 되는 것은 일본어 수업.
생전 다른 나라의 외국어를 배우는데 취미가 없던 유학생들은 생고생이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영국령 홍콩의 자유항에서 온갖 나라의 상인들과 부대끼며 외국어 실력을 길러온 내게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표준 중국어와 광둥어, 영어가 홍콩인의 기본이라면.
조선어는 당연하고 육사 입학을 염두에 두어 특히 일본어도 열심히 공부해온바.
그 외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의 언어도 기초적인 회화는 가능한 수준이었다.
물론 일어는 유학생도 들이 맞닥뜨린 첫 번째 고비일 뿐. 진짜 관문은 따로 있었다.
자연과학이나 기하, 대수 등의 수업은 장제스도 무슨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대는 거냐고 한탄할 만큼 이질적이었다.
평생 학당에서 팔고문이나 시첩시 따위를 지어오던 유학생도들로서는 경험과 증명에 의거한 합리적 사고 자체가 낯설 터.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 생도들이 그나마 할만해 하는 과목이 한문이었다.
중국인 교사가 들어와 고서를 가르쳤는데 그 방식이 아주 전통적이었다.
비록 진무학교가 일본에 자리하고 있다고는 해도 청 정부의 입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덕분에 청의 한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선생 노릇을 하며 옛 서당교육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학당에서 공부했던 놈들은 자기들이 잘할 수 있는 수업이니 좋아라 했으나 나로서는 지루할 따름이었다.
한문 시간에는 항상 작문을 시켰는데 그 주제가 하나같이 해괴하기 그지없었다.
운종룡풍종호론(雲從龍風從虎論,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르는 논리)이나.
파교풍설중려자상론(灞橋風雪中驢子上論, 파교 위를 걸어가는 당나귀 위에서 시를 읊는 논리) 따위의 글귀를 가지고 장문의 글을 써 내려가야 하는 지루한 수업이었다.
어김없이 찾아온 한문 시간.
작문 주제를 내건 교사가 잠시 나간 사이, 장제스가 여느 때처럼 투정을 부렸다.
“씨발. 언제까지 이런 엿 같은 옛날 옛적 고사나 붙잡고 있어야 돼. 당나귀 위에서 시를 읊는 거에 무슨 대단한 이치가 있다고 아무거나 죄다 론(論)을 갖다 붙이냐고!”
“장중정. 저 새끼 또 투덜댄다.”
“투덜댈만 안 하냐? 이 시간에 서양의 신식 학문을 한 글자라도 더 공부하는 게 낫지.”
“지랄. 그런 새끼가 쉬는 시간마다 마작을 쳐대고 온종일 여자 얘기밖에 안 하냐?”
“야 씨. 쉬는 시간에 쉬는 게 잘못이야?”
일전에 여객선 위에서 다투었던, 베이징에서 온 변발족이 장제스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1급반과 3급반이 같이 듣는 과목이라 무슨 말만 하면 3급반을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푸하하 새끼. 언제는 중국의 미래니 뭐니 늘어놓더니 요즘 조용하더라? 야, 그냥 솔직해져라. 네 작문 실력이 형편없고 수업도 제대로 못 따라가겠으니까 허구한 날 하는 게 불평인 거잖아?”
“뭐? 뒤질래?”
“쳐보든가. 학교에서 폭력을 휘둘렀다가 어떻게 될 줄 알고? 3급반이 1급반을 쳤다가 뒷감당 가능하겠어?”
“이, 이 새끼가···!”
장제스는 당장 달려들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었으나 덤벼들진 못하였다.
상대는 상급생들과 학교의 비호를 받는 팔기파 소속이었다.
이전 여객선에서와 같이 마구잡이로 주먹을 올려붙일 수가 없었다.
분에 차 책상을 내리치는 장제스를 보는 돼지 꼬리들이 무리 지어 깔깔 비웃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장중정의 작문 실력이 병신인 건 맞지.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주제가 병신인 것도 맞다.”
돼지 꼬리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빵즈는 닥쳐라. 니가 주역(周易)을 알아?”
“내가 주역을 모른다면, 나보다 한 번도 성적이 잘 나온 적이 없었던 네 점수는 뭐냐?”
“그, 그건 니가 저번 시험에 운이 좋았던 거다! 다시 시험을 치면 내가 질 리가 있냐!”
“그러시겠지.”
“젠장! 중국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는 조선놈이 주역의 고사를 모욕하다니.”
“아무렴 뭘 골라도 호랑이 똥구멍을 따라가는 바람보다야 낫지 않겠냐.”
벌컥.
문이 열리고 교사가 들어왔다.
“왜 이리 시끄럽느냐.”
“선생님! 한신이 작문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답니다!”
“뭐라? 정기위물유혼위변론(精氣爲物遊魂爲變論, 정기는 물질이 되고, 떠돌아다니는 혼은 변화의 근본이 된다는 논리)은 우주만물 삼라만상의 원리를 축약한 이치일진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무슨 소리냐?”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아무 주제를 골라도 훨씬 좋은 작문 주제를 발제할 수 있답니다!”
“그런 오만한···! 한신, 저 말이 사실이냐?”
학급 생도들과 교사의 눈이 내게 쏠렸다.
한문 교사는 진무학교에서도 특히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한학자였다.
게다가 청의 주일공사(駐日公使)와도 연줄이 있어 잘못 보이면 자칫 유학 생활이 크게 꼬일 수 있었다.
장제스가 날 보며 작게 도리질했다.
나는 그런 장제스를 무시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네.”
장제스를 포함하여 변발족도 눈이 동그래졌다.
되는대로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어 날 모함할 작정이었는데 설마 내가 인정할 줄은 몰랐겠지.
“고얀 녀석. 지난번 작문이 훌륭하여 내가 그토록 칭찬했건만! 역시 오랑캐의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반항하는 건 아니었다.
정반대. 나의 우수함을 각인시킬 작정이었다.
신해혁명 이전까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려면 일반적인 코스로는 불가능했다.
시간이 문제였다.
첫 단계에 불과한 진무학교 조차도 수업연한이 3년이었으니.
여기서 특별히 배우는 거라도 있으면 모를까.
구몬수학 따위에 내 천금 같은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3년의 기한을 최소 반 이하로 줄인다.
목표는 진무의 조기졸업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시험성적을 잘 받는 따위의 수동적인 행동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대신 한신이라는 홍콩에서 온 이방인이 얼마나 똘똘한 놈인지.
얼마나 반짝반짝 빛이 나는 놈인지 증명해야만 했다.
그래야 진무라는 똥통에서 최대한 빨리 건져내 줄 테니까.
“오랑캐 핏줄이라니요. 그럼 지금 오랑캐의 나라에 건너와 임시 교사직을 맡고 계신 선생님은 뭘 하시는 겁니까?”
“뭐라?”
“오랑캐의 밑에서 월급을 받아서 깨끗한 옷도 사 입고 비싼 시키시마(敷島) 담배도 피우시잖습니까. 설마 아직도 천조의 나라에서 시혜를 베푸느니 뭐니 하는 장광설을 늘어놓진 않으시겠지요. 전통적인 중화의 논리대로라면 이젠 청이 오랑캐가 되어버린 꼴이니까요.”
교사가 어이없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켰다.
“한신···. 네놈 정신이 나갔느냐?”
“양무운동이 일어난 지 벌써 반세기가 다 되어가지만 처참하게 실패해버린 이유를 아십니까? 여전히 판에 박힌 구시대적 교육 때문입니다. 중체서용(中體西用). 뜻은 좋습니다, 중국의 체제를 지키며 서양의 기술만을 배운다니요. 하지만 선생님. 세계는 그리 물렁하지 않습니다. 국체(國體)를 포기할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어요.”
한문 교사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얼굴의 주름이 가늘게 떨렸다.
억눌린 음성이 들려왔다.
“국체를 포기한다고? 네놈은 중국의 정신을 부정할 셈이냐?”
“중국의 역사는 언제나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생각하십시오. 그들이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하였습니까? 중국이 언제부터 비대한 몸뚱아리에 집착하며 분열을 겁냈습니까? 중국에 진정 국체가 있다면 그건 고지식한 옛 말씀 따위가 아닌 거리낌 없이 신세계에 발걸음을 내딛는 도전정신일 겁니다.”
“허!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부는구나! 네놈이 말하는 개혁은 보나 마나 천륜을 저버리는 양이놈들의 방식이겠지. 그 말은 곧 성현의 도를 저버려도 상관없다는 얘기렷다!”
“안될 것 없지요.”
교사는 날 노려보다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난폭하게 끌고 가 교단 위에 세웠다.
“그럼 거기서 네가 가르쳐보아라! 모두 집중해! 위대한 조선의 선지자께서 우매한 중국인들을 계몽하러 납시었으니!”
많은 학생 앞에 다짜고짜 세우면 내가 겁에 질려 아무것도 못 할 거라 생각하나?
하지만 이를 어쩐다.
이 상황이야말로 바라 마지않던 그림인데.
나는 망설임 없이 분필을 들고 칠판 앞에 섰다.
영문과 한문을 혼용하여 큼지막하게 썼다.
「Clausewitz論(클라우제비츠론)」
다음엔 작은 글씨로 각론을 적었다.
전쟁의 본질.
1. 전쟁은 자국의 의지를 적에게 관철하기 위한 폭력 행동이다.
2. 전쟁은 정치성, 개연성, 폭력성의 삼중성을 띤다.
3.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며 따라서 정치의 연속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서유럽에 나폴레옹이라고 하는 희대의 군략천재가 나타났다. 은 그러한 나폴레옹의 전법을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가 학문적으로 일반화한 논리다. 클라우제비츠는 절대전쟁과 현실전쟁을 구분하면서 정치와 연관하여 전쟁의 본질을 설명하였다. 폭력성을 강하게 띨수록 절대전쟁에 가까우며 개연성을 띨수록 현실전쟁에 가깝다. 그가 정의한 전쟁의 이치에 관해 각론을 참고하여 추측하고 논해라.”
짧은 강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연필을 들었다.
바로 필기하여 들어가는데.
학생들이 모두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전지식이 있는 사람도, 전혀 없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우리는 지금 배우는 위치. 지식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논리를 솔직하게 작성하면 된다.”
장제스가 연필을 들었다.
무작정 써 내려가는 모습이 기특했다.
장제스를 시작으로 하나둘씩 끄적거리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삽시간에 서걱거리는 필기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그 한복판에서 한학 교사만이 얼이 빠진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
한문 수업을 시작으로 몇 개의 수업에서 더 날뛰었다.
일어 시간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를 두고 일본인 문학교사와 비평 대결을 벌여 승리하였다.
어떻게든 고양이의 내레이션에서 교훈적인 내용을 찾아내려는 교사의 시도를 하나하나 모두 분쇄해버리자 점점 얼굴이 시뻘게지던 그는 종래에는.
“그래 자네 말이 맞네···. 이 털짐승은 그저 비열하고 뻔뻔하게 생을 이어 나갈 뿐이야···! 더럽고 불결한 주제에 자기 좋을 대로 자유만을 탐하는 빌어먹을 칙쇼란 말이야···!”
라고 폭주하고 말았다.
과학 시간에는 멘델의 유전법칙에서 모호하게 사용되던 몇 가지 용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였다.
다 좋았는데 과학 교사가 수업이 끝난 뒤에도 자꾸 질척거리는 게 영 불편했다.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초과학이 중요한 법.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 아는 교수가 있는데 자네 같은 실력 있는 인재를 애타게 찾고 있다네. 자리를 마련해 볼 테니 언제 같이 식사를 함께하는 건 어떤가?”
아 대학원 안 가요.
이어진 수학 시간. 일본 학제의 진도를 3년을 뛰어넘어 미적분을 선보였다.
누구에게, 어디서, 어떻게 예습했냐는 교사의 질문에 쿨하게 답해주었다.
“그냥 되던데요.”
진무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10기의 3급반에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저 초한지의 한신이 조선인으로 현신해 중국의 대장군이 되려 한다는 괴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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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의 선지자2
“에이. 엿 같은···.”
진무의 학생감 양쭝샹(楊宗祥)은 입맛이 썼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욕이 나왔다.
양쭝샹은 야심이 있었다.
베이징에 있는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총장이 목표였다.
목표를 위해 베이징의 정치판에서 굴렀다.
조정의 권력자들과 매일 같이 술자리를 벌이며 뇌물을 바쳤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가능할 줄 알았다.
그래서 머나먼 타국으로의 발령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가서 몇 년만 고생하면 총장 자리가 주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진무의 학생감으로 재직한 지 벌써 6년.
술자리에서 어깨동무하고 호형호제하던 대신들이 연락이 뜸하다.
얼마나 더 있으라는 얘기도 없다.
기약 없이 기다릴 뿐이다.
양쭝샹은 자신이 순진했음을 깨달았다.
괜히 고관들이 어떻게든 베이징에 붙어있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진 순간부터 자신의 자리는 벌써 다른 놈이 꿰차고 있는 것이다.
비정한 중국 관료사회의 참맛을 일본에 와서야 깨닫게 된 것이었다.
어쩌다가 내려오는 지령은 항상 같았다.
유학생들이 타국에서 공부하며 자칫 서양의 자유주의에 물들지 않도록 감시라하라는 내용.
혹은 만주족 유학생 중 누가 누구의 자손이니 잘 대접하라는 식의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자연히 학생감의 업무 따위 제대로 할 리가 없다.
그래도 자신은 양반이라 생각하는 양쭝샹이었다.
일본인 학교장은 일주일에 한 번이나 출근하면 다행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