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Chinese warlord from Joseon RAW novel - chapter 3
교관들의 불평불만이 심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어찌됐건 학교는 굴러가니까.
그런데 근래 들어 10기생 중 한 명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가 교관들 사이에서 자꾸 터져나왔다.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지만 황족 생도들까지 다이렉트로 불만을 고하니 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양쭝샹은 놈을 호출하였다.
기다리는 동안 대충 신상 명세를 훑었다.
문이 열리고 놈이 들어왔다.
간단한 경례.
앉으라는 말도 안 했는데 소파에 털썩 자리를 잡는 것이 고까웠다.
“한신?”
“예.”
예상과는 조금 다른 용모였다.
들리는 얘기만 놓고 보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시위 한복판에 서 있을 혁명의 투사 같은 놈인 줄 알았는데.
눈앞에 나타난 놈은 그냥 한량 같았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조선 민족의 혈통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서양식으로 짧게 깎은 머리가 거슬렸다.
특별히 건들거리는 건 아니지만 묘하게 여유로운 분위기가 뭔가 보고 있으면 열받는 느낌이었다.
“요즘 네 이야기가 자주 들리더군.”
“···.”
“선생들이고 학생들이고 죄다 한신이란 놈이 어쩌고저쩌고···, 귀찮아 죽겠구나.”
“···.”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 데도 조용히 있으니까 더 열받는 느낌이었다.
“1890년 홍콩 침사추이 출생···. 조선인이 무슨 수로 관비 유학을 온 거지? 그것도 육사의 예비학교인 진무에 입학하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유학을 온건 네놈인데 무슨 남 얘기하듯 말하고 있느냐.”
“학감님이야말로 입학을 허락하신 장본인인데 무슨 남 얘기하듯이 말씀하십니까.”
과연 예의를 밥 말아 먹은 놈이었다.
“확실히 조선인은 건방지구나. 왜 불려왔는지는 아느냐?”
“짐작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네 죄목을 고해봐라. 듣고서 합당한 벌을 내릴 테니.”
“벌이라니요. 뭔가 착오가 있는데요.”
“무슨 착오?”
“저는 벌이 아니라 상을 짐작하고 왔습니다.”
양쭝샹은 일시에 판단이 되지 않아 멍해졌다.
이 가오리방쯔가 뭐라는 거야?
“상이라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간 진무에서 수학하며 학업을 열심히 증진하였으니 마땅히 상을 받으리라 짐작하고 왔지요.”
“허허. 이놈이 정신이 나갔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이놈의 성적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실은 그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10기 중에는 압도적 1등이었다.
하지만 베이징의 명문학당을 졸업한 양쭝샹으로서는 이깟 똥통 학교에서 1등을 하든 말든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조정에서 내려온 지침대로 사상이 문란한 생도를 걸러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직 총장 자리에 대한 미련의 끈을 놓지 않은 양쭝샹이었다.
조정의 지침을 이행하다 보면 보답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으니.
진무의 임기가 언제 끝날지는 기약 없으나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여기 쌓인 건의서를 봐라. 죄다 네놈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너는 벌을 받을 거야.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여 경우에 따라 퇴학 처분을 내릴 수도 있음이야.”
“어떤 사안이 있는지요.”
이놈은 퇴학 운운해도 전혀 겁을 먹지 않는 것 같았다.
양쭝샹은 수북이 쌓인 아무 종이나 집어 보였다.
“자, 봐라. 이건 량(梁) 선생의 건의서로군. 한문 시간에 수업을 거부하고 혼란스러운 말로 학급을 어지럽혔다. 주역에 적힌 선현의 고사를 부정하며 중국의 국체를 부정하였다라···. 이게 정말이냐?”
“예.”
“뭐? 국체를 부정했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을 선생이 멋대로 모함하는 경우는 흔했다.
따라서 건의란 것도 항상 과장되기 마련이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다.
정말이냐는 물음도 단순한 치레였을 뿐 정말로 예라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본국으로 송환할 수밖에 없다. 네 잘난 유학 생활도 끝이겠지.”
“청으로의 송환 말입니까?”
“그래. 네 사상을 의심하는 선생들이 즐비하다. 같은 생도들 사이에서도 계속 말이 나오고 있어. 그중에는 황족까지 있으니 상황에 따라서는 베이징으로 압송될 수도 있다.”
잔뜩 겁을 주었다.
과연 놈이 도리질 쳤다.
그런데 잘못을 비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놈의 입에서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베이징에 갈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따로 있지요.”
“생도들 간의 싸움이냐? 아서라. 다른 생도를 모함한다 해도 먹히지 않을 테니.”
“다른 생도를 말함이 아닙니다.”
“그럼 선생을 모함할 생각이냐? 됐다. 그냥 조용히 처분을 받아들이는 게 이로울 거다.”
“선생님을 말함도 아닙니다.”
“그럼 대체 누굴 말하는 거냐?”
“학감님입니다.”
“나?”
“예.”
나라고?
양쭝샹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무슨 망발을 하는 거냐?”
이놈이 미쳤나.
더 두고 볼 것 없이 놈을 쫓아내려는데.
“학감님은 베이징 경사대학당의 총장 자리를 노리신다고 압니다.”
“···어디서 들었느냐?”
“진무 생도라면 모를 수가 없지요. 소문이 파다합니다.”
뜻밖의 말에 양쭝샹은 당황했다.
이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베이징에 갈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학감님이 가셔야지요. 그리고 저는 어떻게 하면 학감님이 경사대학당의 총장 자리에 오를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네가 안다고?”
“예.”
술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꼭 취한 것만 같았다.
양쭝샹은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놈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저 베이징의 돼지 새끼들, 어떻습니까?”
“뭐?”
“해가 뜨면 대가리에 면도칼부터 들이미는 돼지 꼬리들 말입니다. 종일 하는 거라곤 양이의 문물이 들어와 지배력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것뿐이지요. 민권이 자라나는 새싹을 뿌리째 뽑으려고 온 중원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덤입니다.”
“네, 네놈. 지금 황실을 모욕하는 거냐···?”
놈은 들은 채도 안 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농사도 지어보지 않은 돼지 꼬리들이 넓디넓은 중원 땅에서 새싹을 제대로 골라낼 수나 있겠습니까? 이미 중국은 격동하고 있습니다. 혁명이 머지않았습니다.”
“혁명이라니! 네녀석, 반청 혁명분자였구나. 어떻게 관비 유학생들 사이에 잠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응당한 징벌을 받을 것이야.”
“그리고 혁명이 일어나면 청은 붕괴할 겁니다. 기존의 지배 세력은 완전히 물갈이 될 테고 필요한 고급 관리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겠지요. 예를 들면 경사대학당의 총장 자리같은···.”
“···닥쳐라! 이 혁명분자야···!”
“학감님. 줄을 잘 타십시오. 만조의 동아줄은 썩은 동아줄입니다. 돼지 꼬리들이 줄을 갉아 먹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놈은 별다른 움직임도 없었다.
단지 처음과 같이 가만히 앉아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양쭝샹은 마치 흔들리는 격랑의 바다 위에 있는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평생을 보수적인 중국 관료사회 속에서 자란 그였다.
일시에 쏟아져 들어오는 놈의 말은 단박에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가슴속에서는 의구심이 커져만갔다.
겨우 목소리를 짜내어 외쳤다.
“그, 그 보장이 어딨느냐?”
“보장이요?”
“그래! 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붕괴한다는 보장이 어딨느냔 말이다. 저 반세기 전의 봉기 때도 온 나라에 태평천국기가 나부꼈지만 결국 철저하게 패망하였느니라.”
“그 보장을 보여드리지요.”
“네가 무슨 수로?”
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3년이 필요합니다. 그럼 혁명을 보실 수 있을겁니다.”
“네가 혁명을 일으키기라도 한단 말이냐?”
“혁명은 개인이 일으키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흐름을 예측하고 응당 걸맞은 준비를 하는 거지요. 예를 들면 진무에서도 몇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흥. 무슨 준비?”
“3년의 기한 중 진무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속성과정을 밟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가까스로 조금 진정이 된 양쭝샹은 머리를 굴렸다.
썩어들어가는 줄 대신 새 줄을 붙잡으라는 진언은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양쭝샹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었다.
평생을 황실에 굽실거려 왔는데 조금 전 놈의 말은 전혀 불경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으니.
얼마간 통쾌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어찌 됐든 학감님은 손해 볼 것 없으니 말입니다. 3년의 기한 동안 학감님은 그저 평소와 같이 조정과 연락을 취하시면 됩니다. 대신 원하신다면 물밑에서 중국 동맹회와 교류할 수 있는 연줄을 만들어드리지요.”
중국 동맹회는 양쭝샹도 아는 이름이었다.
이 시대 가장 유명한 반청인사 쑨원이 만든 혁명단체가 동맹회였으니.
정말 손해볼 것 없지 않은가.
앞에서는 만조에 충성하는 척하고.
뒤에서는 혁명 세력에 이름을 올려놓는다.
이후 혁명이 터지면 신정부에 참여하여 고위직을 차지하고.
혁명이 터지지 않으면 매몰차게 손절하면 된다.
워낙 성적이 좋은 놈이니 이례적이긴 하지만 조기졸업을 시킨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계산을 마친 양쭝샹은 고개를 들어 한신을 보았다.
무채색의 까만 눈동자.
그러나 어떤 연유에선지 밤하늘처럼 깊게 보였다.
눈동자 안에서 반짝이는 별빛을 본 것 같기도 하였다.
양쭝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다. 허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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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회의 뱀
햇살이 내리쬐는 주말.
도쿄 시내를 가로지르는 노면전차에 올랐다.
장제스와 함께였다.
기본적으로 합숙생활인 진무학교에서도 주말에는 외출이 가능하였다.
그간에는 눈치를 보느라 나가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는 학생감의 총애를 받는 우등생이다.
누가 내 앞길을 막으리?
목적지는 도쿄에 있는 중국 동맹회의 본부.
일본에 오기 전부터 동맹회에 입당하기로 마음먹었던 장제스가 중얼거렸다.
“좀 떨리네. 가서 뭐라 말해야 하냐.”
“별거 없어. 대충 멸만흥한 외치며 쑨원 선생님께 충성을 맹세하면 어지간하면 다 받아준다.”
도착한 본부는 정원이 있는 일본식 이층집이었다.
망설임 없이 대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이는 안경을 쓴 젊은 사내였다.
비스듬히 선 자세가 어딘가 삐딱해 보였다.
“뭐냐?”
장제스가 긴장한 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아! 저희는 청에서 온 유학생입니다. 지금은 진무학교에서 수학하며 육사 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반청복명과 멸만흥한의 숭고한 기치를 드높이는 지사분들이 이곳에 계신다 하여 흠모하는 마음을 품고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들어가서 이야기를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안경 쓴 사내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외로 차가운 반응에 장제스가 침을 꼴깍 삼켰다.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걸음 내딛지도 않았는데 자욱한 담배 연기가 시야를 흐렸다.
다다미가 깔린 응접실 중앙에 커다란 상이 있고 그 주위에 몇 명의 남자들이 앉아있었다.
상 위에는 갖가지 문양이 새겨진 옥패들이 굴러다녔다.
“뭐야 저 얼라들은?”
“별거 아니야. 견학을 하고 싶다길래.”
“견학? 크흐흐. 여기서 뭐 볼 게 있나. 동맹회 민보(民報)나 몇부 던져주고 읽다 가라지 뭐.”
구석에 처박혀 있던 신문 뭉텅이가 자연스럽게 내 앞에 놓였다.
글자가 잘 안 보여 뭔가 했더니 회색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신문을 건넨 안경잡이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다시 탁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다시 가보자고.”
안경잡이가 옥패를 긁어모아 돌렸다. 옥패의 정체는 마작패.
한창 마작판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마작이라.
나도 참 좋아하는데.
나와 장제스는 곧 잊힌 사람이 되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장제스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치만 보다 속삭여왔다.
“씨발. 이게 그 이름 높은 동맹회의 꼴이란 말이냐?”
“뭘 바랐냐. 저 사람 말대로 신문이나 보자고.”
“흥. 쓸모없는 자식들.”
신문의 내용은 대충 서양의 기술과 학문 등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범람하는 계몽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건성으로 넘겼다. 오히려 신문 뒷장의 사설들이 흥미로웠다.
오늘날 중국의 미래를 근심하며 근대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하늘의 별처럼 많았지만.
그중 단연 이름 높은 두 개의 태양이 있었다.
혁명파의 쑨원과.
입헌파의 량치차오가 그 둘이었다.
혁명파는 청조를 뒤엎고 공화제를 원했으며.
입헌파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다.
한때 쑨원과 량치차오는 일본에서 서로 교류하며 함께 공동의 미래를 구성했던 적도 있었으나 현재는 크게 의가 상하여 서로 죽일 것처럼 물어뜯는 형국이었다.
사상적으로 하도 맞부딪치다 보니 타도해야 할 청조보다 반대편 파벌을 더 미워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
과연 동맹회의 민보에도 입헌파의 논리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사설들이 가득하였다.
그동안 돼지를 배불리 먹였으면 얼른 도살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여야지, 어째 돼지꼬리들이 노화하여 구워 먹지도 못할 때까지 성에 놔둘 이유가 뭐냐는 식의 논리였다.
장제스는 신문을 읽나 했더니 금방 관심을 잃었다.
대신 그의 눈은 응접실 중앙의 마작판에 고정되었다.
“크, 아깝다. 대삼원(大三元)이 코앞이었는데···.”
장제스가 무심코 혼잣말했다.
안경잡이가 코웃음 쳤다.
“마작 좀 치느냐?”
“중국인에게 그걸 질문이라고 합니까? 이래 봬도 고향에서는 알아주는 꾼이었습니다.”
“네 고향이 어딘데?”
“저장성이요.”
“오호. 나도 저장성 출신인데. 잠깐만 어디보자. 어이, 형씨. 어차피 이번 장은 끝난 거나 다름없으니 조기 종료하고 저 친구 실력이나 한번 보자구. 자리 좀 비켜봐.”
안경잡이의 말에 따라 마작을 치던 남자가 일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장제스가 넙죽 앉았다.
“너는? 너도 치나?”
안경잡이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 말만 기다렸다.
“예, 뭐. 규칙은 알죠.”
“그럼. 너도 와라.”
졸지에 판이 꾸려졌다.
나는 은근슬쩍 물었다.
“돈도 겁니까?”
“너희들은 학생이잖나. 코 묻은 돈을 따먹을 생각은 없어. 그렇다고 내기 없이 패를 돌리는 것도 흥이 나지 않겠지. 50전씩만 걸어라.”
***
두 시간 후. 마지막 판.
깔끔하게 깔맞춤된 마작패를 쓰러뜨려 보였다.
혼노두(混老頭)였다.
“더 하실 건지요.”
“···네 녀석 뭐냐? 어떻게 한 거야? 타짜라도 되는 거냐?”
마작패가 어지럽게 흩어진 넓은 탁자.
네 명이 앉아있었으나, 내 앞에만 동전과 지폐가 수북했다.
모조리 따버렸다.
액수를 세어보니 42엔 하고도 50전.
숙련 목수의 일당이 2엔도 되지 않는 시절이니 상당한 거금이다.
우하하.
이게 바로 온라인 리치마작 챌린저를 찍었던 실력이다.
이놈들이 치는 방식은 조악하기 그지없다. 기본적인 조패술(造牌術)조차 생각지 않는 모양이다.
예컨대 처음 패를 받으면 어떻게 역(役, 마작의 족보)을 완성해 나갈 수 있을지 대략적인 전략을 짜야 하는데 하는 걸 보면 그저 모든 걸 운에 맡긴 사람처럼 어설프다.
내가 필요로 하는 패를 견제하고 막을 생각은 않고 휙휙 넘겨준다.
“더 안치실거면 그만 끝내지요. 잘 놀았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경잡이도 따라 일어섰다.
“이름이 뭐지?”
나한테만 40엔 가까이 꼴고 나니 이제 이름을 물어볼 생각이 나셨나 보네.
됐소이다. 이제 볼일 없을 듯.
“한신입니다.”
“전략을 잘 짤 것 같은 이름이군.”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안경잡이가 다시 말했다.
“나는 천치메이(陳其美)다. 회에서 재무 및 회계를 맡고 있지. 암살과에서도 가끔 일하고.”
이 자가 천치메이?
일본의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쑨원의 중화민국 정부에서 비밀경찰 일을 하던 자다.
야사(野史)에는 상하이와 도쿄 암흑가의 온갖 암투에 연루된 지저분한 자였다던데.
볼일 없다는 말 취소.
친하게 지내야지.
“영광입니다. 랴오중카이 선생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동맹회의 돈자루 아저씨.
모두가 좋아하는 랴오중카이의 이름을 팔아 환심을 얻는다.
“그래? 이미 회의 일원이었나?”
“예.”
“발탁의 수고를 덜었군. 너 같은 마작 실력을 지닌 인재를 놓칠 수야 없지.”
“마작을 잘 치면 동맹회원으로 받아주는 겁니까?”
“물론이다. 네 친구 말대로 중국인이라면 마작 실력은 기본 중의 기본.”
입 다물고 있던 장제스가 소리쳤다.
“저도 중국 혁명동맹회의 일원이 되어 멸만흥한의 기치를 드높이고 싶습니다!”
“이름은?”
“장중정입니다!”
“네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환영하지.”
“감사합니다.”
천치메이가 내 쪽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래. 동맹회를 견학한 소감은?”
“주머니가 두둑해져서 기분이 좋군요.”
“그 말을 들으니 쓰라리군. 민보를 제법 열심히 읽던데 소견을 듣고 싶네만.”
마작에만 열중하는 줄 알았는데 과연 눈썰미가 있는 자였다.
“···격하더군요.”
“하! 그렇지. 직접 총을 들고 군대를 모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야. 그전에 이미 수많은 사상가들이 활자 위에서 또 다른 전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지.”
“동맹회의 전황은 어떻습니까?”
“쉽지 않아. 저 입헌파 씹새끼들은 천지가 개벽하는 20세기의 여명에 속 편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어. 그래도 황제는 남겨두자고? 왜? 왜? 남겨야 하는 거냐? 자기 손으로 황제의 목을 따고 싶어 하는 중국인이 수천만이야.”
천치메이가 감정을 드러내며 이빨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중국을 위하는 마음만은 한뜻일 텐데 어떻게든 힘을 합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하! 쑨원 선생님께서 시도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타협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지. 청조타도는 동맹회의 제일 목표이니 절대 포기할 수 없다.”
“그렇군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곤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중국의 정치체제가 민주공화제이든 입헌군주제이든 내게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황제의 목을 두고 혁명파와 입헌파가 벌이는 대립은 그저 감정적인 싸움으로 보일 뿐이었다.
청의 군부에 요원을 잠입시키려는 동맹회의 정책에 따라 장교후보생으로 공부하고는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들과 나 사이의 간격이 느껴졌다.
한족으로 태어나 중화사상을 내재화하고 만조를 증오하는 그 느낌은 나로서는 배우려야 배울 수 없는 민족적인 감정이었다.
“더 질문 없나?”
천치메이가 물어왔다.
장제스가 대답했다.
“동맹회에 입단하면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너희들은 장교 후보생이니 동맹회의 귀한 자원이다. 지금은 학업에 충실하여 육사에 진학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겠지. 이후 중국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때 고등 군사교육을 받은 너희들은 큰 역할을 하게 될 거야.”
“봉기라니! 듣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군요. 거사가 기다려집니다.”
“시도는 계속하고 있다. 황강과 윈난 등 화남 등지에서 재작년부터 일곱 차례가 넘도록 봉기했지. 그러나 성공은 하지 못했어. 그래서 올해부터는 작전을 조금 바꾸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름하여 변경 계획이다. 정예병을 모집해 베이징에서 먼 곳부터 차례로 각 성도의 심장부를 타격하여 점령해나갈 거다. 도시의 주요 간부를 암살하여 방비에 구멍이 뚫린 틈을 노리는 거지.”
아아 안다.
천치메이가 예고한 대로 동맹회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거사를 이행한다.
하지만 여지없이 죄다 실패하지.
1911년의 신해혁명은 소수 지식인이 모인 동맹회가 아니라 민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민중을 우매한 계몽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혁명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동맹회의 혁명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점을 천치메이 앞에서 지적하진 않았다.
말한다고 들을 인간도 아니고.
천치메이와 장제스는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죽이 잘 맞았다.
만난 지 수시간 만에 수년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밀해졌다.
떠드는 광경을 지켜보다 슬슬 돌아갈 채비를 했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데 천치메이가 날 불러세웠다.
“가는 거냐?”
“예.”
“우리는 좀 전에 사상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지. 하지만 사상전쟁은 붓으로만 하는 게 아니야, 총으로도 하는 거다. 한신, 너는 회의 혁명 자금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나?”
“해외의 기부금으로 운영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부금도 중요해. 하지만 랴오중카이 선생님이 아무리 유능하시다 한들 어찌 그것만으로 자금을 대겠나. 상당 부분은 음지에서 충당하고 있다.”
천치메이는 어쩐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음지라면···, 어떤 걸 한다는 겁니까?”
“많은 것들을 하지. 정말 많은 것들을···.”
유리알 너머 깜박이지 않는 그의 눈동자가 마치 뱀의 눈 같았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저의가 뭐지. 바라는 게 있나?
천치메이는 말할 게 있는 것처럼 입술을 들썩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알아두라는 거야. 혹시 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야.”
찝찝했던 천치메이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장제스와 나는 동맹회를 빠져나왔다.
한껏 들떠있는 장제스를 보며 나는 묘하게 뒤숭숭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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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한상극
신주쿠의 느지막한 오후.
골목에 쪼그려 앉아 사쿠라(櫻花) 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싼 맛에 피우는 담배였다.
생활은 순조로웠다.
이대로면 육사 출신의 전도유망한 엘리트가 되어 청에 돌아가자마자 스카우트 세례를 받겠지.
이 시대 청의 군부는 복마전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군벌로 성장할 야심가들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당연히 어떻게든 뛰어난 인재를 채용하려 안간힘을 쓸 터.
퉤.
나도 모르게 침을 뱉었다.
장제스와 오래 지내다 보니 닮는 건가.
아니야.
그보다 사쿠라의 쓴맛 때문이다.
역시 싸구려는 끝맛이 안 좋아.
순조로운 생활과는 반대로 나는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천치메이와의 마작에서 왕창 딴 이후부터였다.
없을 땐 모른다고.
관비로 나오는 25엔. 그중 학비와 기타 생활비로 23엔을 빼고, 남은 2엔으로 잘도 생활해 왔었는데.
단번에 40엔이 넘는 돈을 따니 이걸로 뭘 할지 자꾸 눈이 돌아갔다.
하지만 뭘 해도 애매했다.
단순 군것질거리로 써버리기에는 많은 돈.
그렇다고 사업을 벌이기에는 또 너무 적었다.
자연스레 시대를 한탄하게 됐다.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곤 해도 여전히 20세기 초의 자본주의는 어린애들 소꿉장난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짧은 시간에 돈을 불릴 만한 방안이 생각만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이 미국 월스트리트라면 또 모르겠지만 도쿄의 증권가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뗐을 뿐이었다.
러일전쟁 승전 이후 주가가 치솟았었으나 지금은 안정세에 접어든 지 오래였다.
기업에 가치투자를 하려 해도 일본의 조금이라도 유망한 기업은 죄다 미래에 전범기업이 될 운명.
이게 맞나 의구심이 든다.
자연히 눈이 뒷길로 빠졌다.
자꾸만 도박장을 출입하게 되었다.
평일에는 학업에 충실하다 주말이 되면 신주쿠의 거리로 출근하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다.
아쉽게도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마작이 대중화되기는 이전이나 그것 말고도 돈을 벌 거리는 무궁무진했다.
주사위를 굴리거나 화투 등을 쳤는데 마작만큼은 아니어도 소소하게 벌 정도는 되었다.
가끔 투견에도 걸어보았으나 역시 내 손으로 하는 게 아닌 도박은 승률이 그저 그랬다.
꽁초를 비벼끄고 일어섰다.
쪼그려 앉았던 다리가 저렸다.
“왜 이리 안 와.”
학교로 돌아가기 전에 땅콩이나 좀 사오겠다던 장제스였는데 감감무소식이다.
다음 골목에 있는 구멍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담배나 바꿔볼까.
사쿠라 말고 시키시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