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45
00042 나의 신부 =========================================================================
이주는 내내 재영의 실종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경찰에서 재영의 실종을 놓고 단순 가출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재영은 큰 키에 덩치도 작은 편이 아니었고, 학교 육상부에서 육상 선수로 뛸 정도로 체력도 좋았다. 그런 재영이 갑작스럽게 실종된 것이 범죄에 연루되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 발로 집을 나갔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집안도 부유했고 부모들은 평판이 좋았다. 물론 집안일이야 내부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고는 하지만, 재영은 비틀린 곳 없고 성정이 밝았다. 재영의 형인 차영 역시 일본 동경대 유학을 다녀와 총독부 건축부의 설계 부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엘리트로 주변에서는 머리 좋고 성품 모범적이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때문에 사교 모임에서는 가경상회에 매파들이 드나드느라 문턱이 닳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두 형제가 모두 그런데 부모에게 문제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혹시 무슨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해경을 찾아갔던 것인데 마침 해경이 부재중이었던 것이다.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이주는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파주댁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도련님, 아래층에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이요?”
저녁 시간에 자신을 찾아올 손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주가 문을 열며 묻자 파주댁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의아한 표정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간 이주는 거실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재영의 형 차영이었다. 차영이 인기척에 이쪽을 돌아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퇴근하고 온 듯 양장 차림에 넥타이까지 그대로 매고 있는 모습이었다. 차영은 재영에 비해 키도 작고 외모가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지적인 분위기가 있어 사교 모임에서는 제법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형이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놀란 이주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물론 사업가 집안끼리다 보니 집안끼리의 친분도 있었고, 이주 역시 형제와 안면은 있는 사이였으나 차영이 이렇게 개인적으로 이주를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차영은 재영과는 달리 내성적이고 조용한 편이어서, 마찬가지로 낯가림이 있는 이주와는 의례적인 인사를 제외하면 사적인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런 차영이 왜 자신에게 찾아왔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차영이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사무실로 찾아왔었다면서?”
“네? 아, 네.”
병문안 핑계를 대고 상회로 찾아갔던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이주가 속으로 조금 뜨끔하며 대답하자, 차영이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초조하게 손끝을 만졌다.
“어머니께서 좀 경황이 없으셔서, 음……그러니까, 아마 눈치를 챘을 수도 있겠지만 재영이가…….”
말을 잇기 어려운 듯 답지 않게 조금 더듬거리던 차영이 긴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문질렀다.
“……재영이가 실종됐다. 경찰에서는 단순 가출일 거라면서 신고를 받아 주지 않고 있고, 어머니께서 오늘 경찰서에 다녀오신 게 세 번째야. 여태까지는 숨겼지만 이제는 숨겨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아까 낮에 네가 들렀다기에 혹시 뭔가 아는 게 없을까 하고 온 거야. 내가 아는 재영이 친구라고는 너밖에 없기도 하고.”
차영의 입에서 실종이라는 말이 나오자 이미 예측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 한켠이 덜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주가 선뜻 뭐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앉아 있자 차영이 애써 웃는 표정을 했다.
“재영이가 혹시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니?”
이주는 차영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는 한 그런 일은 없었다. 차영이 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두어 번 문질렀다. 크면서 가족들의 속 한 번 썩인 적 없는 재영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을 터였다. 이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재영이가 실종된 게 정확히 언제지요?”
차영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사흘 전 아침에 학교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에 그렇게 말없이 늦는 녀석이 아닌데, 한밤중까지 돌아오지 않으니 어머니가 몹시 불안해하셔서……그날 밤 집에 들어오지 않아 어머니가 학교에는 아파서 결석한다고 연락을 하고 바로 경찰서에 신고를 하러 가셨어. 혹시 몸값이라도 요구하지 않을까 사무실과 집에도 사람을 상시 두고 있는데 사흘째 아무 연락도 오지 않고 있어.”
항상 침착하던 차영의 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등교하는 길에 재영이 혹여 무슨 불의의 사고를 당해 누군가 골치 아파질까 봐 재영을 어딘가로 끌고 가 처리했다든지, 혹은 평소 의협심이 강했던 재영이 어떤 사건에 휘말려 자취를 감췄다든지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재영이 스스로 사라졌다는 게 가장 나은 선택지기는 했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차영이 이주를 보았다.
“혹시 교제하던 여자가 있는지 같은 건 알고 있어?”
“제가 알기로는…….”
이주는 고개를 흔들며 말끝을 흐렸다. 간혹 학교 대항 체육대회나 문예부의 시 전시회, 음악부의 합주회 같은 행사가 있으면 여학교 학생들이 찾아오는 일도 있었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다 러브레터를 전해 주고 가는 여학생들도 있기는 했다. 재영 같은 경우에도 러브레터를 심심치 않게 받는 멤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주가 듣기로 재영은 그런 것을 받으면 반드시 정중한 거절의 편지를 써서 돌려주곤 했다고 했다. 친구들이 재영에게 그러지 말고 연애라도 한 번 걸어 보라며 부추기면,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고 자기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고 싶다며 거절한다는 것이었다. 차영이 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알겠다. 혹시 동무들에게 무슨 이야기라도 듣게 되면 알려주렴. 우리도 사람을 써서라도 재영이를 찾으려고 하고 있으니까, 응?”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재영이는 꼭 돌아올 겁니다.”
차영이 대답 대신 힘없이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께도 안부 전해 드려. 갈 테니 나오지 마라.”
이주가 따라 일어나자 차영이 손짓으로 이주를 막고는 현관을 나섰다. 이주는 거실의 창으로 집을 나가는 차영의 뒷모습을 보았다. 차영이 저렇게 찾아올 정도라면 상황이 심각하기는 한 것이 분명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간 이주는 저녁도 먹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내내 재영의 행방을 생각했다. 그 때문에 잠까지 설친 이주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학교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해 자기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던 이주는 불현듯 무슨 생각인가가 떠올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2반 교실로 향한 이주는 창 너머로 교실 안을 보았다. 2반 교실도 비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교실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이주는 재영의 자리를 찾았다. 복도 쪽 가장 뒷자리의 책상 위에 禹材營(우재영)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주는 몸을 숙여 재영의 책상 서랍 안을 보았다. 서랍 안에는 책 두어 권과 편지들이 가득했다. 이주는 서랍 안의 편지들을 꺼내 봉투의 이름을 훑었다. 대부분이 여학생들의 이름이었고, 정말 편지를 읽어 보지도 않는 듯 거의 모든 편지가 봉해진 그대로였다.
이주는 서랍 안을 다시 더듬어 보았다. 책 밑에 무언가가 깔려 있는 것이 잡혔다. 꺼내 보니 흔히 볼 수 있는 신문 조각이었다. 아마 버린다는 것을 잊고 그냥 그 위에 책을 두었거나 한 모양이었다. 이주는 서둘러 편지를 서랍 안에 다시 넣어 두고 책을 빠르게 넘겨보았다. 서랍 안의 책은 수학 교과서와 노트로, 모범생인 재영답게 꼼꼼하게 필기가 된 채였다.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교과서였다.
실망한 이주는 책을 덮으려다 문득 교과서의 여백에 드문드문 쓰인 숫자를 보았다. 다섯 자리, 혹은 여섯 자리의 숫자는 규칙성이 없었으며 앞자리가 바뀌기도 했고 바뀌지 않기도 했다. 수학책이니 무슨 문제를 풀어 놓은 흔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숫자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냥 낙서일지도 몰랐다. 누가 오기 전 바로 책과 노트를 다시 덮어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둔 이주는 교실로 돌아와 자기 자리에 앉았다. 재영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지금으로서는 사라진 재영 외에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수업이 시작되고 교실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이주는 내내 여러 가지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탐정 소설을 아무리 탐독했다 해도 막상 현실에 부딪치자 소설 속의 탐정처럼 멋지게 사건의 전말을 추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주는 수업을 마치자마자 친구들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을 정도로 빠르게 가방을 챙겨 학교 밖으로 나섰다. 전차를 타고 명치정에 내린 이주가 찾아간 곳은 해경의 사무실이었다. 문을 두 번 두드리자 소화가 안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저…….”
이주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뒷말을 흐리자 소화가 아, 하고는 안쪽을 가리켰다.
“네, 들어오셔요. 선생님께는 이야기를 해 두었습니다. 지금 안에 계시니까요.”
안경을 쓰고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한참 읽고 있던 해경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더니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해경이 이주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주가 그 손을 잡았다 놓자 해경이 가만히 이주를 내려다보다 웃어 보였다.
“좀 말랐군요. 잘 지냈습니까?”
“네, 덕분에…….”
“소화 양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친구가 실종돼서 찾고 있다고요. 일단 저쪽에 앉아서 얘기하지요.”
해경이 소파를 가리켰다. 이주가 한쪽 소파에 앉자 소화가 찻잔을 가져다 해경과 이주 앞에 놓았다. 해경은 그 맞은편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실종된 사람이 가경상회 우병진 사장의 아들 우재영 군이라던데 맞습니까?”
“네.”
이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해경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실종된 건 언제지요?”
“사흘, 아니 그러니까 나흘 전이라고 합니다. 학교에 간다고 나갔다가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는군요. 학교에는 장티푸스에 걸려 결석 중이라고 해서 전혀 몰랐는데, 다른 친구가 제게 우재영이 실종됐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가경상회에 잠시 들러 병문안을 왔다고 하니 재영이의 어머니께서 제게 재영이에게 연락 받은 것이 없냐고 하셔서……저녁에는 재영이의 형까지 집에 찾아와 재영이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그러면 일단 실종된 건 확실하군요.”
“네.”
흥미롭다는 표정을 한 해경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경찰에서 실종 신고를 받아 주지 않은 까닭은 뭐라고 합니까?”
“재영이는 평소 체격이 상당히 좋고, 학교에서도 육상 선수로 활약할 정도로 운동도 잘 합니다. 그래서 아마 그런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리 없다고, 단순 가출이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것 참 재미있군요. 종로서에서 인력난이라고 난리를 칠 만도 합니다.”
해경이 미묘하게 웃는 듯한 표정을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해경의 말에 눈만 깜빡였다. 해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 그러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요. 평소에 가출을 할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이주는 그 말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사실 매우 절친한 편은 아니라서 확실히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집안끼리 같은 사교 모임에 나가고 있어서, 거기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재영이의 가족은 무척 화목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별 문제는 없어 보였고요.”
이주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며 책상 위의 종이에 메모를 하던 해경이 종이를 보며 말했다.
“집안에 별 문제는 없는 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등교하던 길에 사라졌군요. 한밤중도 아니고 아침인 데다, 종로통에서 경성제이고보까지 가는 길은 한적하지 않습니다. 체격이 좋고 운동을 잘 하는 남학생을 그런 길에서 누군가 납치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요. 간혹 이렇게 한창 나이의 아들이 사라졌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저 같은 사람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집안 사정이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면 사랑의 도피입니다.”
“재영이는 아무와도 교제하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이주가 급히 해경의 말을 끊자, 해경이 한쪽 눈썹을 약간 치켜 올렸다. 이주는 그 순간 해경에게 말을 해도 좋을지 아닐지 망설였다. 어쨌든 남의 책상 서랍을 몰래 뒤진 것은 사실이었기에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해경은 이주가 망설이는 동안 참을성 있게 이주를 기다려 주었다. 한참 망설이던 이주는 겨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저, 재영이는 인기가 많았습니다. 여학교와 함께 행사를 할 때도 그렇고, 교문 앞에서 러브레터를 받는 일도 많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항상 재영이는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고 싶다고 편지를 받는 족족 모두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게, 음……제가 오늘 아침에 재영이의 교실에서 책상 서랍을 몰래 보았는데, 받은 편지는 거의 다 봉투도 뜯지 않고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더군요. 누군가와 교제를 하고 있었다면 친구들이 알았을 겁니다.”
“서랍을 몰래 보았다고요?”
편지 이야기보다 해경이 더 관심을 가진 건 다른 부분인 모양이었다. 해경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이주를 보았다. 그리고는 곧 재미있어하는 얼굴을 했다.
“이주 군 같은 사람이 매우 절친하지도 않은 친구가 실종된 일로 남의 서랍을 몰래 뒤졌다? 이주 군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주는 해경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하는 것이 고작 탐정 흉내를 내는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자각한 탓이었다. 해경 앞에서 민망한 꼴이 된 것 같아 귓가가 화끈거렸다.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주를 유심히 보던 해경이 짧게 웃었다.
“좋습니다. 물론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될 테고 멀쩡한 사람의 물건을 몰래 뒤지는 일도 곤란하겠지만 이건 특수한 상황이지요. 그런 것이 탐정의 기본자세기도 하고요. 이주 군에게 소년 탐정의 자세가 완비된 것 같으니, 더 알아낸 것이 있다면 지금 말해 주지 않겠습니까?”
소년 탐정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이주가 해경을 마주보았다. 마치 속을 꿰뚫린 것 같아 얼굴이 달았으나, 해경이 자신을 야단치거나 황당하다는 반응을 돌려주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이주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 그, 그러니까, 서랍 안에는 뜯지 않은 편지와, 대부분이 다 여학생들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학 교과서와 노트가 있었고요. 재영이는 공부를 잘 하는 편이어서 필기가 무척 꼼꼼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이주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탐정 소설에서는 항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한 것도 모두 증거가 된다는 것이 떠올랐다. 해경에게 비웃음을 살까 싶어 두려운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해경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이주는 눈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신문지 조각 하나와……아마 버리려던 것이 잘못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수학 교과서에 드문드문 숫자 같은 것이 있었는데, 여백에 문제를 풀다 적은 것 같기도 했고요.”
이주의 말을 듣고 있던 해경이 손에 깍지를 끼어 입가에 대며 무슨 생각인가를 하다가 이주에게 말했다.
“만약 재영 군이 오늘 안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일 재영 군의 서랍 안에 있었다는 물건들을 이리로 좀 가져와 줄 수 있겠습니까?”
“아, 네.”
“먼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두 가져와 주십시오. 제가 직접 가볼 수도 있지만 지금은 다른 일 때문에 좀 바빠서요.”
이주는 그 말에 역시 자신이 찾아온 것이 바쁜 해경에게 실례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정작 해경은 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해경은 종이 위에 방금 이주의 말을 메모한 것을 보고 있다가 흠, 하고 짧게 숨을 뱉었다.
“별 일 없이 돌아온다면 좋겠군요.”
“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소화가 문을 열기 무섭게 누군가 문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바람에 소화가 뒤로 떠밀리며 비틀거렸다. 해경이 얼굴을 찌푸리며 소화 양, 하고 부르다 문 안으로 들어선 사람의 얼굴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주 역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풍채가 좋은 중년의 남자였다. 이주는 그 얼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해경이 잠시 단정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그에게 말했다.
“연락도 없이 송 사장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일이 어찌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와 봤소.”
이주는 어쩐지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해경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아, 저, 손님이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내일 이 시간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해경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이주는 소화에게도 목례를 하며 서둘러 해경의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 문을 나서 몇 걸음 걸어가기도 전 이주는 문득 그 자리에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해경의 사무실로 들어섰던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이 난 탓이었다. 사교 모임에서 그를 몇 번 본 기억이 있었다. 동신금융의 송광만 사장이었다. 모임이 있을 때면 아버지나 조부가 굳이 인사할 필요 없다며 자신을 그의 근처로 가지 못하게 해, 이주에게 그의 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그가 해경에게 무슨 일로 의뢰를 했을까 궁금해져 한동안 해경의 사무실 문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이주는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