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67
00063 악몽의 밤 =========================================================================
오 선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러 갔던 환이 돌아온 건 십 분쯤 후의 일이었다. 환은 돌아오자마자 기노시타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경성제대 병원에 연락을 넣었더니, 직원이 기노시타가 방금 퇴근했다는 대답을 주었다고 했다. 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해경은 시계를 보았다.
“기노시타는 분명히 라 세느로 갈 겁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경성제대에서 라 세느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해경에게 손짓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원군을 요청했으니 바로 이동합시다.”
해경을 데리고 서둘러 정문으로 나선 환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해경과 환이 서 있는 길가에 두 대의 차가 섰다. 누군가가 운전석에서 뛰어내려 차의 뒷문을 열었다. 서천욱이었다. 환이 경찰 대신 운현궁의 경호원들을 부른 모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은 사병(私兵)에 더 가까웠겠으나 어쨌든 그런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충분히 경찰처럼 보였으며, 그 정도면 적어도 기노시타가 경찰서나 경무국에 사실을 확인하기 전 혼을 빼놓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해경과 환은 바로 그 차에 올라탔다. 환이 운전대를 잡은 천욱에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라 세느로 갑시다. 전화로 이야기했던 것은 가져왔습니까?”
“뒷좌석에 두었습니다.”
천욱이 차를 출발시키며 대답했다. 귀가 떨어질 정도로 경적을 울려 대며 달리는 차 속에서 좌석 근처를 살피던 환이 검은 가방 하나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가방을 열어 안의 내용물을 해경에게 건넸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든 해경은 잠시 멈칫했다. 환이 자신에게 준 것은 권총이었다. 해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총을 살폈다. 미국 콜트(Colt)사에서 나온 브라우닝 자동권총으로, 상당히 최신식의 물건이었다. 환이 권총을 만지고 있는 해경에게 물었다.
“이런 것도 쓸 줄 압니까?”
“같은 것은 아니지만 써 본 적은 있습니다.”
해경의 대답에 환이 하하, 하고 웃었다.
“정 선생이 못하는 게 뭔지 슬슬 궁금해지는군. 어쨌든 그럼 사용 방법은 아실 테고, 만일의 경우가 생긴다면 쓰도록 해요.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환은 잠시 말을 멈췄다. 불미스러운 일이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만약 이 총으로 기노시타에게 중상을 입히거나 죽이게 된다면, 을 함축한 말일 터였다. 환은 곧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소유로 된 총이니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겁니다.”
“일반인이 아니라 제대 교수라 상당히 부담이 되실 텐데요.”
해경이 총신을 살피며 대답하자 환이 가방 안에서 탄창을 하나 꺼내 해경에게 주었다.
“일본에서도 민간인에 대한 인체 실험이 알려지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을 거요.”
환의 말은 옳았다. 만약 기노시타가 잘못되어 총독부에서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기노시타의 실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고, 어느 쪽이 파장이 클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해경은 탄창을 바로 장전하고는 주머니 속에 권총을 집어넣었다. 라 세느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노시타가 먼저 도착했을지 아니면 자신들이 먼저 도착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바로 진입해 안에 갇혀 있을지 모르는 소화를 찾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라 세느 앞에 차가 멈추기 무섭게 해경은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건물 뒤쪽으로 달려가자 송란이 이야기했던 대로 조리실과 연결되는 듯한 뒷문이 보였다. 때마침 누군가 그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담긴 통을 든 소년이었다. 소년은 끙끙대며 문 앞의 부대 안에 쓰레기를 쏟아 넣다가 해경이 뒷덜미를 움켜쥐자 기절할 정도로 놀라 펄쩍 뛰었다.
“누, 누구야!”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소년의 뒷덜미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준 해경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노시타의 실험 장소가 어딘가?”
“그, 그게 무슨…….”
기노시타의 이름을 대자마자 쥐고 있는 목덜미가 바짝 경직했다. 소년이 그 장소를 알 거라고 확신하고 떠본 것은 아니었으나, 소 뒷발에 쥐를 잡은 격이라 해도 성공적이었다. 해경은 짐짓 협박하는 투로 소년을 을렀다.
“다 알고 왔으니 발 뺄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때 해경의 뒤를 따라 경호원들이 무리지어 달려왔다. 무장을 한 것이 분명한 여러 명의 사내들을 보고 영락없이 경찰이라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사색이 된 소년이 무릎을 꿇고 해경의 앞에 엎드려 빌었다.
“저, 저,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 정말입니다. 저,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음식만 날라 주었어요. 저는 기노시타가 무얼 하는 자인지도 모릅니다.”
“기노시타가 오늘 여기에 왔나?”
해경은 몸을 숙여 엎드린 소년의 머리칼을 잡아 고개를 들게 하며 물었다. 소년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방금, 지금 막……조금 전에 들어갔습니다.”
“앞장서.”
거두절미하고 내뱉은 해경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소년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벌떡 일어났다. 해경은 주머니에 넣은 총을 꺼내 쥔 채 소년을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갔다. 환과 경호원들은 일부는 문 밖에 남아 동태를 살피고, 일부는 약간 거리를 둔 채 두 사람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벌벌 떨며 앞서 가던 소년이 걸음을 멈췄다. 앞에 조리복을 입은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서 있었다.
“뭐야?”
사내가 소년에게 턱짓으로 해경을 가리키며 물었다. 상당히 고압적인 태도였다. 해경은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소년의 관자놀이에 댔다. 소년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힉, 하며 얼어붙었다. 해경의 손에 들린 권총을 본 사내가 방금 전의 태도는 어디 갔는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 두 손을 들었다. 남자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요? 당신들 누구요?”
“낭비할 시간이 없어. 어서 가!”
해경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소년이 침을 삼켰다. 뒤를 따르던 경호원들이 사내에게 총을 겨눴다. 사내가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묶여 있는 사이 소년은 거의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얼굴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뛰다시피 어두운 복도로 해경을 안내했다. 한참 소년을 따라가던 해경은 소년이 막다른 복도에 도착한 것을 알고 눈썹을 좁혔다. 설마 자신을 속인 건가 싶어 권총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던 해경은 소년이 벽에 튀어나온 못을 누르더니 있는 힘껏 벽을 미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벽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런 구조로 지하 공간을 숨겼다면 어떤 방식으로 호텔을 수색하더라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소년이 얼른 열린 벽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전등을 켰다. 복도가 밝아지자 해경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섯 개의 방이었다. 문이 잠긴 것은 네 번째의 방 하나뿐이었다.
“열어.”
해경의 말에 소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열, 열쇠가 없습니다. 가져와야 해요.”
해경이 고개를 까딱하자 소년이 바로 돌아서 바깥으로 열쇠를 가지러 달려갔다. 해경은 총을 든 채 잠긴 방문에 바짝 붙어 안쪽에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 쓰러지는 듯 둔탁한 소리가 났고 남자의 낮은 신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해경은 잠긴 문고리를 돌려 보았으나 문이 열릴 리 만무했다. 열쇠를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해경은 손에 든 총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총으로 쏘았다. 폭발음 같은 총성이 복도 전체를 울리며 문고리가 떨어져나갔다. 있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연 해경은 눈에 들어온 그림자를 향해 총을 겨눴다.
“꼼짝 마.”
하얗게 일어나던 먼지가 가라앉으며 어른거리던 형체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기노시타였다. 한쪽 알이 깨진 안경을 쓴 채 놀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기노시타의 발치에는 주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기노시타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해경을 뚫어지게 마주보다 자신을 겨누는 총구에 두 손을 들었다. 해경은 기노시타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기노시타는 자신을 경무국 직원으로 알고 있을 터였다. 기노시타가 천천히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기노시타의 등 뒤에 놓여 있던 침대에 누군가 묶여 있다가 자신을 보았다. 해경은 눈을 슬쩍 내리깔아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소화였다. 소화가 핏물로 새빨갛게 물든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선생님. 해경은 그 입모양을 알아보았다. 소화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해경은 심장 언저리에 무언가 응결했던 것이 퍽 터지듯 뜨겁게 번지는 것을 느끼며 총을 내리지 않은 채 내뱉었다.
“그 자리에서 손끝 하나라도 움직이면 죽일 거다, 기노시타.”
기노시타가 침을 삼켰다. 조선말을 알아듣는 것이 분명했다. 해경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기서 무슨 짓을 해 왔는지 알고 있어. 인체 실험을 했다는 논문도, 네 실험으로 사망한 사람의 시신도, 여기서 도망친 증인들도 있지. 지금 네 뒤의 그 아가씨도 포함해서.”
해경의 말을 들은 기노시타가 잠시 굳은 듯 서 있다가 입꼬리를 억지로 말아 올렸다. 해경은 그 입매가 경련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노시타가 해경을 뚫어지게 보았다.
“경무국에서는 보고를 받지 못했나? 총독부와 이미 이야기가 된 것이다. 이곳은 대일본제국의 신민들을 위해 천황 폐하께서 직접 내게 허가하신 신성한 실험 공간이란 말이야. 그런데 겨우 경무국에서 나를 잡아 가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해경은 눈썹을 좁혔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기노시타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해경은 총구를 돌리지 않은 채로 되물었다.
“그럼 천황과 총독부가 공조하여 네가 조선인을 납치 감금한 뒤 검증되지 않은 균과 약물을 주사하고 살해 유기하는 것을 방조했다고 인정하는 건가?”
기노시타가 깨진 안경알 너머로 눈을 가늘게 떴다. 뱀 같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방금 해경이 천황을 지칭하는 것을 듣고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해경을 물끄러미 마주보던 기노시타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네놈은 경무국 소속이 아니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기노시타가 움직이는 바람에 소화가 묶여 있는 침대의 철제 다리가 약간 밀려나 바닥에 긁히며 끼긱대는 소리가 났다. 놀란 소화의 몸이 움찔하며 튀었다. 다음 순간 해경은 망설임 없이 총을 쏘았다. 탕, 하고 방 안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기노시타가 비명을 질렀다. 총알은 기노시타의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벽에 꽂힌 채였다. 총알이 꽂힌 벽 주변으로 가느다란 금이 거미줄처럼 번졌다. 해경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얼어붙은 기노시타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손끝 하나라도 움직이면 죽이겠다고 말했지. 이건 경고야. 내게 두 번째는 없다.”
기노시타가 앉은 자리가 짙게 젖어들었다. 해경은 서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겁에 질린 나머지 오줌을 지린 모양이었다. 한 걸음 다가선 해경은 기노시타의 정수리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기노시타가 신음도 흐느낌도 아닌 소리를 내더니 축축하게 젖은 바지를 갈무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기 오줌으로 젖은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죽어가는 목소리로 빌었다.
“살, 살려주시오, 목숨만…….”
해경은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을 참기 위해 이를 물었다. 한 방이면 기노시타를 여기서 깨끗하게 죽여 버릴 수 있었다. 이 방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노시타에게 살려달라고 말했을까. 그 뱀 같은 눈을 한 채, 살고 싶다고 애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꺼이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여기서 머리를 날려 버려도 시원치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이 암흑의 지하 속에서 마치 신처럼 군림하던 그가 자신이 싼 오줌 위에 머리를 박고 제발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우습고도 비참한 마음이 함께 밀려들어왔다. 타인의 목숨은 그토록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자신의 목숨은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것인가. 해경이 말없이 기노시타의 정수리에 댄 총구를 누르자 기노시타가 흐으으, 하고 우는 소리를 내었다. 다음 순간 복도에서 바쁜 발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를 듣고 환의 경호원들이 달려온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얼마나 급히 왔는지 천욱이 약간 숨이 찬 목소리로 문가에서 물었다. 해경은 총을 거두며 바닥에 엎드린 기노시타를 가리켰다.
“데려가십시오.”
경호원들이 기노시타의 왜소한 몸을 들어올렸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 기노시타가 연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경호원들의 손에 끌려 나갔다. 해경은 들고 있던 총을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침대에 묶여 있던 소화에게 달려갔다. 얼굴을 맞았는지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었고 입가에는 말라붙은 피딱지까지 엉긴 채였다. 손목을 묶은 끈을 풀어 준 해경은 손수건을 꺼내 소화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더 빨리 왔어야 하는데……괜찮습니까?”
걱정하는 해경의 얼굴을 본 소화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었다. 소화가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오실 줄 알았어요. 정말로요. 꼭 오실 줄 알았어요.”
해경은 그 얼굴을 가만히 마주보았다. 소화의 커다란 눈에서 초점이 흐려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험한 일을 당한데다 긴장이 풀려 의식이 가물거리는 모양이었다. 해경은 그제야 절반이나 찢어진 치맛단이며 손바닥과 발목을 묶은 천을 보았다. 천을 동여맨 쪽의 손을 잡아 들여다보자 손을 다쳤는지 피가 잔뜩 배어나온 채였다. 해경이 얼굴을 찌푸리자 소화가 어깨를 움츠렸다. 해경은 말없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소화를 감싸 주고는 그대로 소화를 들쳐 업었다. 깜짝 놀란 소화가 등 뒤에서 선생님, 하고 뭐라고 웅얼거렸으나 해경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소화를 업은 채 복도를 되짚어 나가던 해경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위험한 일은 절대 하지 말라 했지요.”
“……죄송해요.”
조그마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잠시 침묵하던 소화가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선생님께 꼭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저는 자꾸 빚만 늘리고 있지요?”
해경은 그 말에 대답 대신 웃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자꾸만 저어, 저어, 하던 소화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해경의 등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셔츠의 한 겹 천 사이로 작은 숨소리가 색색대며 스며들었다. 해경은 업고 있는 소화를 추슬러 올렸다. 너무나 작고 가벼운 몸이라, 이 작은 몸으로 그렇게 다쳐 가면서도 자신이 올 때까지 살아 있어 준 것이 새삼 고맙고 놀라운 생각이 들었다. 곧 소화의 고개가 한쪽으로 떨어졌다. 정신을 잃은 것인지 잠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숨소리는 고르게 잦아든 채였다. 해경이 소화를 업고 바깥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환이 달려왔다.
“정 선생, 괜찮…….”
다음 순간 환은 해경이 누군가를 업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말을 멈췄다. 해경의 등에 업혀 죽은 듯 늘어져 있는 소화를 본 모양이었다. 해경의 등에 업힌 소화를 잠깐 물끄러미 보던 환이 한숨처럼 웃는 소리를 내었다.
“기노시타는 일단 경무국으로 송치하게 했소. 그런데 소화 양이……괜찮은 겁니까?”
환의 물음에 해경이 고갯짓으로 소화를 살짝 가리켰다.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모셔다 드리지요.”
환이 세워 둔 차로 향했다. 직접 뒷문을 열어 준 환은 해경이 소화를 뒷좌석에 눕히는 것을 도와주었다. 엉망이 된 얼굴에 온통 상처투성이인 소화를 보던 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재미있는 아가씨요.”
소화의 위에 겉옷을 덮어 준 해경은 차 문을 닫으며 말했다.
“강한 아가씨입니다.”
해경의 말에 환은 잠깐 놀란 듯 해경을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해경을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정 선생은 일전에 내게 궁의 담장 안에 들꽃을 꺾어 심으려 하지 말라 했지요. 그 까닭이 궁금하군요.”
들꽃을 꺾어 궁의 담장 안에 심으려 하지 말라. 환이 소화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눈치챘던 자신이 언젠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해경은 차의 창 너머로 안쪽에서 죽은 듯 잠든 소화의 얼굴을 한 번 슬쩍 보고는 대답했다.
“높은 담으로 둘러쳐서 보호하려 하면 그 그늘에 꽃이 시들 테니까요.”
환이 그 말에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했다. 잠시 그 말을 곱씹어 보던 환이 조수석에 해경을 타게 하고는 운전대를 잡은 천욱에게 말했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모셔다 드려요. 곧 따라가지.”
“네.”
천욱이 대답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해경은 차의 좌석에 몸을 묻었다. 등 전체에 아직도 소화의 체온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희망은 어떤 경우에도 헛되지 않다……해경은 눈을 감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