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84
00077 거리의 등불 =========================================================================
금복의 집은 찬용의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런 것조차도 우연일까. 해경은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을 생각하며 금복의 집 앞에 도착했다. 대문 안쪽은 어두웠다. 해경은 대문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금복 씨, 안에 계십니까? 정해경입니다.”
그러나 집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해경은 대문에 바짝 붙어 서서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화를 한 번 돌아본 해경은 조심스럽게 대문을 밀었다. 놀랍게도 대문은 그냥 열린 채였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전연 없었다. 해경은 발소리를 죽여 현관 앞으로 다가섰다. 소화가 창가에서 발돋움을 하며 안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아무도 안 계신 것 같아요.”
“그렇지요?”
해경은 무심코 현관문을 당겨 보았다. 그러자 현관문의 손잡이가 저항 없이 돌아갔다. 해경은 미간을 좁혔다. 대문도 현관도 열어 둔 채로 외출을 한 것일까? 여자가, 그것도 상당한 재산가의 아내가 혼자 살며 이처럼 문단속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했다. 더구나 금복처럼 꼼꼼해 보이는 여자라면 더욱 그랬다. 해경은 소화에게 손짓을 하며 현관을 살짝 열었다. 집 안은 온통 어두웠다.
“이금복 씨?”
해경이 금복의 이름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섰으나 안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 덥다 싶을 정도로 훈훈한 공기가 훅 끼쳤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인 것을 감안해도 그랬다. 어두운 거실 안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어른거렸다. 해경은 벽면의 스위치를 눌러 등을 켰다. 그 붉은 빛의 정체는 페치카였다. 불은 거의 사그라졌으나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집에서 사람이 나간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페치카를 뚫어지게 보고 서 있던 소화가 갑자기 그리로 달려가더니 타들어가고 남은 재를 손으로 헤쳤다. 깜짝 놀란 해경은 소화의 손목을 낚아챘다.
“화상이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맨손으로…….”
“이것 보세요, 선생님!”
해경이 나무라는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소화가 손에 움켜쥔 것을 내밀었다. 해경은 멈칫해서 소화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화가 찾아낸 것은 타들어가다 만 사진이었다. 이미 절반 정도는 타들어가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고, 남은 것은 가슴 아래 부분이었다. 해경은 다음 순간 사진 액자가 세워져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저 사진이군요.”
해경은 소화의 손에서 사진을 받아들고는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막대로 재빨리 아직 남은 불씨를 가장자리로 치웠다. 급히 던져넣고 간 듯 타들어가다 만 편지 뭉치나 사진 따위가 드러났다. 해경은 막대로 그것들을 모두 끄집어냈다. 거실에 잿가루가 풀풀 날리는 바람에 소화가 콜록대며 손부채질을 했다.
“무엇을 이리 다 태운 걸까요?”
“잠시만 여기 있어요.”
잠깐 생각하던 해경은 소화에게 당부를 하고는 재빨리 집 밖으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어스름이 완전히 내린 골목에는 인적이 없었다. 해경은 골목 어귀에서 큰길로 나섰다. 와사등이 밝혀진 큰길은 지나다니는 차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해경은 근처 가게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금복에 대해 물었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다시 골목을 통해 금복의 집으로 돌아온 해경은 대문을 열려다 말고 웬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봐, 거기 총각 지금 뭐하는 거요?”
중년의 남자가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해경은 주위를 돌아보고는 자신뿐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남자가 해경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낡은 옷차림의 남자는 한눈에도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해경은 의아한 얼굴로 남자에게 물었다.
“저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댁 말고 누가 있소?”
“무슨 일이십니까?”
“이 집엔 무엇 하러 들어가려고 해?”
남자의 말에 해경은 눈썹 사이를 약간 좁혔다.
“왜 그러시지요?”
“이 댁 마님이 내일 짐을 모두 빼시기로 했는데 무엇 하러 외간 사람이 드나드냔 말이야.”
“짐을 빼시기로 했다고요?”
해경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남자는 해경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오히려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알고 온 게 아니오?”
“짐을 갑자기 왜 빼신답니까?”
“아드님께 일이 생겨 함께 계셔야 한다며 급히 일본으로 떠나셨소.”
“언제요? 언제 말입니까?”
뭘 이리 꼬치꼬치 묻는 건가 싶은 표정을 한 채로도 해경의 기세에 눌린 탓인지 남자가 순순히 대답했다.
“그것이, 오늘 점심 드시고 오후에 부산항으로 가실 거라며 짐은 내일 일단 모두 빼서 대화정으로 옮겨 달라 하셨소.”
“대화정이면…….”
“사장님 댁 말이오.”
해경은 그 말에 금복이 이미 자신보다 한 발 앞서 모든 것을 준비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것이다. 일본으로 가는 표를 미리 준비한 뒤 보험금을 타내자마자 찬용의 몫으로 보상금을 떼어 주고, 자신은 나머지 보험금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 버린 것이 분명했다. 페치카에 남아 있던 온기로 미루어 보아 몇 시간만 더 빨리 이곳으로 왔다면 아직 금복이 떠나기 전이었을 터였다. 해경이 이마를 짚자 남자가 해경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오? 사모님과는 무슨 관계요?”
“……아, 저는 사장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일 때문에 잠깐 들렀는데요.”
“그래요?”
남자는 되물으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떨치지 않았으나, 경두의 이야기가 나오자 더 이상 함부로 다그치기는 어려워진 모양이었다. 반쯤 열린 대문 안쪽을 건너다 본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짐에는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시오. 알겠소?”
“네, 그럼요.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한 해경은 남자가 뭐라고 더 말을 붙이기 전 대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현관을 지나 집 안으로 돌아간 해경은 거실에 흩어진 편지 뭉치와 타다 만 사진 따위가 널려 있는 것을 보고는 소화를 찾았다. 소화는 부엌에 선 채 무언가를 뒤적이고 있었다. 손이며 뺨이 온통 재투성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어 재미있는 것은 좀 있었습니까?”
해경의 목소리에 그때까지 해경이 돌아온 것도 몰랐는지 소화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디에 갔다 오셨어요?”
“이금복 씨를 찾으러요.”
“어디에 갔는지 찾으셨어요?”
“일본으로 갔답니다.”
“네에?”
소화 역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짐은 모두 내일 아침 처분해 달라고 말하고, 아들에게 일이 생겼다며 오후에 부산으로 떠났다는군요.”
“세상에, 그럼 처음부터…….”
소화가 입을 틀어막았다. 어차피 형사도 아닌 이상 금복을 뒤쫓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경두에게 의뢰받은 일은 폭발 사고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었으니, 임무에 충실하기로 작정한 해경은 소화에게 물었다.
“아마 그런 모양입니다. 무어 색다른 내용이 좀 있던가요?”
“아, 저어, 이것 좀 보셔요.”
소화가 식탁 위를 가리켰다. 처음 발견했던 사진이 그 위에 있었다. 해경이 그 사진을 내려다보자 소화가 사진을 뒤집어 뒷면을 가리켜 보였다. 소화가 가리킨 곳에는 사진을 찍은 날짜와 함께 中央高等普通學校(중앙고등보통학교) 曺璨勇(조찬용)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미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나 찬용의 사진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해경은 그 옆에 거의 온전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찬용과 비슷해 보이는 청년의 사진이었는데, 해경은 그 사진을 뒤집어 보고는 삼 년 뒤의 날짜로 京城高等普通學校(경성고등보통학교) 許陽奕(허양혁)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해경은 다시 한 번 사진 속 청년의 얼굴을 확인했다. 금복과 눈매가 몹시 비슷한 맵시 있는 청년이었다. 해경이 눈썹을 좁히는 것을 본 소화가 자신이 방금 보고 있던 것을 가리켰다.
“그리고 버섯이요.”
“버섯?”
“허경두 사장님이 경찰서에서 풀려나신 날 이곳에 들러 저녁을 드셨다고 하셨잖아요?”
해경은 금복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금복은 분명 찹쌀을 섞어 한 밥에 미역국과 조기, 버섯 무침을 내었다, 저녁에 먹은 밥에 조기만 따로 구워 올렸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관계인지 알 수가 없어 가만히 소화를 마주보자, 소화가 한쪽으로 비켜서 조금 전까지 자신이 보고 있던 것을 가리켰다. 작은 나무 상자였는데, 말린 버섯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해경은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살펴보았다. 지극히 평범한 흰 갓의 버섯이었다.
“이건 갓버섯이 아닙니까?”
“갓버섯과 독버섯이 섞여 있어요. 이것…….”
소화가 상자 안의 버섯을 뒤적이더니 다른 버섯을 하나 꺼내 들어 보여 주었다. 갓버섯과 몹시 비슷하게 생겨 거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소화는 자신의 손에 들린 버섯을 뒤적이다 찢어진 부분을 발견하여 해경의 눈앞에 내밀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갓버섯을 찢었을 때 찢은 면이 흰 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색이 변하면 독이 있는 것이라고요. 독이 있는 갓버섯은 모르고 먹었다가 다음날 죽는 이들이 많답니다.”
해경은 소화의 말을 듣고 두 개의 버섯을 번갈아 보았다. 소화가 내민 버섯에는 분명 갈라진 틈이 변색된 채였으나, 육안으로는 쉽게 구별할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한 해경은 소화의 손에서 버섯을 받아들어 살피며 물었다.
“이렇게 비슷한데 구별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 제가 기사를 보았어요. 이금복 씨의 아버지가 궁내부가 없어진 뒤 한 것이 은광 개발과 식용 균종 재배였답니다.”
“버섯 농사를 지었단 말입니까?”
해경이 놀라서 되물었다. 조선의 버섯은 일본인들도 상품으로 치는 것이어서, 식용 균종 재배는 상당히 유망한 부업으로 권장되는 것 중 하나였다. 그것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고 했으니 일반 농민들이 하는 것처럼 소규모로 소일거리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궁내부가 없어진 뒤 균종 재배를 시작했다면 금복 역시 상당히 오랫동안 균종 재배에 대해 들은 지식이 쌓였을 것이고, 그랬다면 날이 오랫동안 가물어 농사가 망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다는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허경두 사장은 구별할 수 없었겠지요?”
해경이 묻자 소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로 만들어 놓았으면 아마 거의…….”
“독이 있는 갓버섯을 먹으면 어찌 됩니까?”
“보통 하룻밤이 지나면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고, 내버려두면 의식을 잃고 마비가 온다고 합니다. 처치를 받지 못하면 죽기도 하고요.”
“청산 중독 증상과 상당히 비슷하군요.”
고개를 끄덕인 해경은 마치 찢어진 그림을 이어 붙이듯 머릿속에서 한 조각 한 조각 알아낸 사실을 맞춰 보았다. 금복은 경두의 지병인 기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고, 행인수를 많이 마시면 청산 중독과 같은 증상을 보인다는 것 역시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청산에 중독되면 복통과 전신 마비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기에 대부분이 경두의 증상을 음독(飮毒)으로 본 것도 당연했다. 사람이 음식을 먹은 뒤 위에서 완전히 소화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고작 서너 시간 정도라고 했다. 전날 저녁 먹은 식사가 원인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애초에 경두가 보험 사기극을 벌였다는 투서를 넣은 것도 금복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조사하면 거짓임이 밝혀질 투서를 일부러 넣은 까닭은 무엇일까. 목적은 단 하나였다. 시간을 벌기 위한 것.
“애초부터 이 일을 꾸민 건 이금복 씨가 확실하고, 궁금한 건 그 이유로군요. 조찬용 씨와 대체 무슨 관련이 있었을까요?”
소화가 그 말에 거실 쪽을 가리켰다.
“저어, 편지를 한 번 읽어 보시면……남의 편지라 제가 읽어도 될지 모르겠어서 읽지 않았어요.”
해경은 그 말에 거실로 돌아가 재투성이인 편지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소인도 보낸 사람도 받는 사람도 없는 백지 봉투는 반쯤 타다 만 채였다. 해경은 안에 든 편지를 끄집어내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는 곧 이 편지가 중국어로 쓰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해경은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소화에게 내밀었다.
“저보다 소화 양이 더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군요.”
“네?”
소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편지를 받아들더니 곧 아아, 하는 얼굴을 했다. 편지도 이미 군데군데 타들어간 채였으나 끊긴 내용이라도 읽어 보는 편이 나을 터였다. 재를 털어내고 편지를 더듬더듬 손으로 짚어 읽어 보던 소화가 곧 얼굴이 빨개진 채 안절부절못하며 해경의 눈치를 보았다.
“다, 다른 것을 읽어 볼게요.”
바닥에 쭈그려 앉은 소화가 남은 편지를 하나하나 뜯어 읽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그리 길지는 않았다. 많이 타들어간 것도 있고 덜 탄 것도 있었으나 다행히 내용이 드문드문이라도 남아 있었다. 한참 편지를 읽어 보던 소화가 읽은 편지들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편지 아래 쓰인 날짜대로 정리한 것이었다. 마지막 날짜의 편지를 가리킨 소화가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해경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다 연애편지예요, 선생님.”
해경은 그제야 소화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 까닭을 알았다. 연애편지의 내용이 상당히 노골적이거나 했던 모양이었다. 해경은 자세히 캐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누가 누구에게 보낸 것입니까?”
“이름은 우란(友蘭)이고 성은 적지 않았어요. 이 분이 이금복 씨에게 보낸 편지예요.”
해경은 순간 처녀 시절 상해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던 금복의 말을 떠올렸다. 우란이라는 자는 중국인일 수도 있었다. 소화가 조금 망설이는 표정을 하다 입을 열었다.
“저는 한문만 조금 읽을 줄 알고 중국어는 잘 몰라서 제대로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마지막 편지를 보면……이 우란 씨라는 분은 이금복 씨에게 내당가(內当家)라는 말을 썼는데, 제가 알기로 이 말은 부인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우란이 경두가 아님은 거의 확실했다. 무엇보다도 경두라면 굳이 중국어로 금복에게 편지를 쓸 이유가 없었다. 해경은 소화를 내려다보았다.
“우란이라는 자가 남편이다?”
“편지에 아이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요. 타 버려서 중간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금복 씨가 조선에 아이를 데리고 있었나 봐요. 아이를 보러 가고 싶다는 이야기 같지만 이게 마지막이에요. 나머지는 타 버렸거나 아예 없는 것 같고요. 저어…….”
소화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몇 번을 망설였다. 해경이 괜찮다는 듯으로 손짓을 하자 소화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조찬용 씨는 업둥이로 버려져 길러졌답니다. 그런데 어쩐지 시기를 맞추어 보니 이 편지와 맞는 것 같아서……그럴 리 없지만, 혹시나…….”
“조찬용이 이금복의 아들이다?”
해경은 계속해서 저어하는 소화의 말을 끊으며 내뱉고도 스스로 놀랐다. 그러나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궁내부 칙임관의 집안이라면 대대로 양반 가문일 가능성이 높았는데, 그런 집안에서 여자가 혼전에 아이를 뱄다는 것은, 더더군다나 조선인도 아니고 중국인의 아이를 뱄다는 것은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금복이 중국에서 아이를 낳았거나 혹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조선으로 도망쳐 아이를 낳아 남의 집 앞에 버린 것이라면. 그렇게 생각한다면 찬용에게 금복이 그토록 이해할 수 없는 호의를 베풀었던 것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망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해경을 보던 소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그냥 제 생각일 뿐이에요, 선생님.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면 아니 되는 것이지요?”
해경은 대답 대신 몸을 숙여 소화가 바닥에 놓아 둔 편지를 한데 모았다. 그리고는 식탁 위에 있던 사진이며 버섯이 담긴 상자 따위를 죄다 가져와 그것 전부를 페치카 안에 던져 넣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사그라지던 불씨가 살아나며 종이 더미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소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해경은 꼼짝도 않고 페치카 안의 편지며 사진, 상자가 모두 타들어갈 때까지 그 불을 지켜보았다. 노랗고 붉은 불꽃이 넘실거리며 그것들을 모두 태워 한 줌의 검은 재로 만들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페치카 속에 남아 있던 재들 위로 새로 만들어진 재가 차곡차곡 쌓였다. 해경은 페치카 안의 물건들이 완전히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돌렸다. 소화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해경을 보았다. 해경은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조선에서는 이미 이금복 씨를 잡을 수 없어요.”
“하지만…….”
“돌아가지요.”
해경은 거실의 스위치를 끄며 금복의 집을 나섰다. 소화도 어쩔 수 없이 종종걸음으로 해경을 따라 나섰다. 택시를 잡아 향운정으로 먼저 돌아가는 동안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해경은 머릿속으로 자신의 앞에 엎드려 울던 찬용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증거를 없애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 증거들을 남겨 두었다면 분명 금복의 짓임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건 여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업둥이를 친자식처럼 기른 부모와, 그들을 친부모로 여기고 살아온 자식,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며 산 그의 부인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해경은 자신의 그런 마음을 소화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창밖으로 경성의 밤거리가 소리 없이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