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151
492화 치기 부리기 (2)
범한이 등 대가 아내에게 완아에게 평소 먹이던 약을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그러자 그녀가 난처해하며 말했다.
“아씨 마님께서 안 드시려 합니다. 어쩌죠?”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일단 준비되면 내게 말해주게. 내가 먹여보겠네.”
등 대가의 아내 얼굴에 기쁜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합니다’를 몇 차례 읊조린 후 대단히 기쁜 기색으로 약을 준비하러 갔다.
바깥 대청으로 오자 사주 서쪽으로 임완아를 마중 나갔던 등자월 일행이 돌아와 있었다. 등자월은 범한에게 문안 인사를 올린 후 오는 길에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현재 강남 수채는 얌전히 있는 중이었고, 사주에는 강남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임완아 일행은 순조롭고 무탈하게 강을 타고 강남까지 올 수 있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더니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옅게 드리워져 있었다.
등자월은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상사 대인께서는 경도에서 2 황자와 대적할 때도, 강남에서 한밤중에 살인할 때도 저런 심각한 표정을 드러낸 적이 없으셨는데. 대체 왜 저러시지?’
이에 등자월이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설마 범씨 가문의 본처 자리를 놓고 벌써 싸움이 시작된 거야?’
등자월은 순간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범한은 등자월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아까 임완아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는 중이었다.
‘비개 스승님의 약에······ 정말로 그렇게나 심한 부작용이 있는 걸까?’
담주에서 경도로 와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 경묘에서 임완아를 만나기 전까지, 범한은 자신의 아내 될 사람이 폐병을 앓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현 세계에서는 임완아가 앓고 있는 폐병은 불치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두 젊은 남녀는 무한한 용기로 병마와 맞서 싸웠다. 그래서 당시에는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공포심을 강제로 억누르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행해 화촉동방을 밝히는 날 천신만고 끝에 동이성에서 돌아온 스승 비개가 폐병을 치료할 기이한 약을 전해 주었다. 약의 이름은 일연빙. 스승 비개는 이 약을 구하기 위해 장장 4년이란 시간 동안 공을 들였다고 했다.
혼례를 올리기 4년 전부터 황궁에서 이미 범한과 임완아가 혼례를 올릴 거란 소문이 돌기 시작해서였다.
4년이란 시간과 정성을 들여 구해온 약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혼인 후 임완아는 계속 그 약을 복용했고, 복용할 때마다 환약의 겉 표면을 조금 긁어내 탕약과 함께 먹는 방식을 취했다. 그 결과 몸은 점점 좋아졌고 더 이상 기침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황궁의 태의들은 군주 마마의 폐병이 기적처럼 치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작용이라니?
“귀갑을 조제했었지.”
범한이 환약의 성분을 다시 되새김질 해 보았다.
“지황, 아교, 봉랍······ 이게 아이를 갖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그러다 혼례를 올린날 밤, 비개가 말을 건넬 때 지었던 표정이 떠올랐다.
* * *
“약을 복용한 후, 한 달 간 부부 합방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 * *
분명 장난으로 하신 말씀일 텐데. 범한은 기억을 되짚어 보던 중 스승님이 무언가 숨기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줄곧 이상한 게 있기는 했다. 비개 스승님과 어지간해서는 만날 일이 없었는데, 그게 왜 자기를 피하는 것처럼 느껴진 건지.
‘설마······ 일연빙의 진짜 부작용이 환자의 출산 기능을 손상시키는 거였어?’
의자에 앉아 있던 범한이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완아가 완치 되고, 폐병이 재발이 안 되어서 건강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야. 아이를 낳고 안 낳고가 뭐가 중요하겠어!’
범한은 이전 생에서, 텔레비전이나 소설에서 산부인과 의사가 잔뜩 신중한 얼굴로 등장해 산모 가족들에게 산모가 난산이고 하나만 구해야 하는 상황인데 산모와 아이 중 누구를 살리겠느냐고 묻는 장면이 종종 등장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범한은 세상에서 그 상황이 제일 이해가 안 되었다.
‘산모와 아이 중 누구를 살리겠냐고? 그게 굳이 물어봐야 하는 문제인가?’
범한은 그게 제일 똥멍충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똥멍충이의 정점을 찍는 질문 말이다.
그래서 범한은 똥멍충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늙다리 까까중 놈!”
범한이 앞쪽에 놓인 돌바닥을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음험하게 말했다.
“야이 똥멍충아!”
등자월은 순간 멍했다. 똥멍충이란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제사 대인의 화가 극한까지 치달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에 그가 서둘러 범한을 다독였다.
“대인, 고정하세요. 고정하세요!”
하지만 범한은 계속 욕을 해댔다.
“고정은 무슨, 염병할!”
범한이 손바닥을 내리치는 바람에 탁자가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그런데도 범한은 계속 험한 말을 입에 담았다.
“뒈질 늙다리 까까중 놈! 대체 무슨 심보로 그런 거야!”
범한은 스승 비개의 약이 부작용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내의 몸이 정말로 많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임완아는 약 복용을 멈춘 후부터 눈에 띄게 몸이 허약해지고 있었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를 지경으로 말이다! 임완아가 약을 끊은 건 고하의 말 때문이었는데······ 대체 고하는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범한이 봤을 때 고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천하 백성들을 가련히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니 범한의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마음을 써줄 놈은 아닐 테고······.
고하의 말 때문에 아내에게 옛 병이 재발했다는 생각이 들자, 범한은 분노가 치밀어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그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도무지 억누를 수 없었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등자월을 노려보며 말했다.
“소문무와 하서비에게 명을 전해요. 올해 북쪽으로 보내는 화물의 등급을 한 등급씩 내리라고 말입니다!”
“아-!”
등자월이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생각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저러시지?’
북제와 교역에서 쌍방은 줄곧 잘 지내던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물품의 등급을 낮추면 큰일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등자월이 참다못해 설득에 나섰다.
“대인,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사오나, 물건의 품질을 한 등급 내리면 북제에게 은전 몇십만 냥에 달하는 손해를 입히는 거라······ 그건 너무 큰일입니다.”
등자월이 개인적 원한 때문에 공적인 일을 망치지 말라는 뜻으로 말하자 범한이 싸늘하게 받아쳤다.
“나는 원한은 갚고야 마는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내 가족을 죽이려 했으니 나도 그 나라에 손해를 입혀야겠어요. 은전 몇십만 냥이 뭐 대수라고! 남의 부인을 십여 일 동안 기침하도록 만들었는데, 그 정도면 싸게 쳐준 셈이지!”
대인의 말 속에 찬바람이 쌩쌩 돌자 등자월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조심스럽게 질문은 던져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십니까?”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인, 방금 말씀하신 까까중은······ 대체 뭡니까?”
그러자 범한이 싸늘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북제 고하가 머리털 하나 없으니 까까머리 늙다리 아닙니까!”
등자월의 말수가 아까보다 더 줄어들었다. 너무 놀라 감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대신 속으로는 ‘제사 대인은 길거리에서 대놓고 사고검도 욕하시는데, 이 정도는!’,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기 집에서 고하를 늙다리라고 욕하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물론 그때 욕한 게 사고검은 아니었지만.
범한이 싸늘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왕계년에게 소식을 발표할 준비를 하라고 서한을 보내놔요.”
“알겠습니다.”
등자월이 명령을 수행하겠다고 대답했다. 한데 대답을 해놓고는 세부 사항에 대해 다시 물었다.
“어떤 식으로 대략 언제 하라고 할까요?”
“어떤 식이요?”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3일 이내에 북제의 모든 사람이 그 소식을 알도록 하라고 해요. 사람들이 그 소식을 믿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은, 내 지시를 기다리라고 해요.”
“네.”
범약약이 고하의 제자로 들어가 있지 않다면 범한은 오늘이라도 당장 고하가 인육을 먹었다는 소식을 풀어버렸을 것이다. 물론 범한도 알다시피, 그 정도 소문으로는 고하의 명성에 아무런 손해를 미치지 못할 것이고, 범한으로서는 제대로 된 이익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범한의 입장은 지금은 그 소식을 풀어버릴 최적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범한은 참을 수 없었다. 지금 고하를 죽여 버릴 수 없다면 다른 무언가를 해서라도 보복을 해야 했다. 대개, 범한은 남들 눈에 침착하고 음험한 사람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그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들이 연루되면 그는 사자처럼 변했다. 분명 고기 몇 점 먹지 못하고 손해만 날 거란 걸 알지만, 그래도 범한은 크게 울부짖어 자기 영역을 지켜야 했다.
고하의 의도가 뭐였든, 아무튼 임완아는 그의 말에 약 복용을 멈추었다. 그래서 범한은 북제에게 손해를 입혀야만 했다.
이건 치기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범한의 인간미는 대개는 이런 치기에서 나왔다.
* * *
‘사주 별장’의 큰 나무들은 재수가 옴 붙어버렸다. 천자의 검이 범한의 손에서 왕의 기운을 기운차게 뿜어내며 무수히 많은 나무에 상처를 내서였다. 우리의 젊은 흠차 대인은 정말로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한데 아내 앞에서는 차마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북제 상경으로 쳐들어가 누이 범약약의 스승에게 욕을 날려 줄 수도 없었다. 이에 나무에게 화풀이를 하게 된 것이었다.
범한이 부하들을 때리고 욕하면서 기분을 푸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전생에 침대에 누워서 눈물을 흘리며 읽은 문학잡지 속 짠한 남자 주인공의 행동을 이번 생에서 따라하고 있는 중이었다.
발 씻은 물을 버리는 걸 좋아했던 남자 주인공이 있었다. 그는 아내가 모욕을 해도 몇 년 동안 참기만 했다. 대신 밤마다 몰래 밖으로 나와 강가에 가서 나무를 작살내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범한은 나무를 작살내지는 않았다. 대신 유명한 사고검의 검법을 이용해 나무의 껍질이나 벗겨냈다. 미워하는 마음을 잔뜩 담아 이를 악물고 나무껍질을 벗겨냈다.
이에 하룻밤 사이에 정원의 나무들은 대머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범한 일행은 사주 장원의 나무들이 볼품없는 알몸이 된 후에야 사주를 떠나 서호 주변에 자리 잡은 팽씨 장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 *
서호 근처에서는 적지 않은 이들이 흠차 대인과 군주 마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주성의 총독과 순무는 직접 와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범한이 은근히 아끼는 항주 지주는 범한 일행의 마차가 진입하기 쉽도록 서호 주변의 길과 제방의 3분의 1을 모두 막아버렸다. 그리고 높으신 두 분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하실 걸 염려해 부하들에게 사방에서 시중을 들도록 해놓았다.
이 정도의 아부는 범한도 편히 받아들였다. 임완아가 몸이 좋지 않아 한적한 분위기가 필요하던 차였다. 장원 안에서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자 사사와 등 대가의 아내는 자연스레 임완아를 모시고 쉬러 갔다. 범한은 시간을 내서 항주 지주와 잠시 만나 부드러운 말로 그를 격려를 해주었다. 하지만 다음 날, 범한의 명령으로 고위 관료들의 부인들은 호위 고달 등에게 막혀 장원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범씨 가문의 아씨 마님께서 손님을 만나지 않으시겠다고 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