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363
704화 담을 넘다 (2)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임완아가 입꼬리를 올려 비웃으며 말했다.
“황태자 저하나 2 황자 저하 중 누가 황제가 되든 어머니께는 상관치 않으시잖아요. 도대체 뭘 하고 싶어서 이러시는 겁니까?”
“이 어미가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는 것이냐?”
장 공주가 고개를 들어 광신궁 담장 중 어느 부분을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말했다.
“나는 천하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는 남자가 없는 상황에서 비범한 일을 할 줄 아는 여자들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딸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사실 남자가 없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범한이 죽으면 너는 지체가 높은 군주가 되는 거란다. 그러니 슬퍼할 필요가 있겠니?”
“저는 제 남편이 죽은 뒤에 제가 뭐가 되든 슬픔을 억누르기는 힘들 것 같네요.”
임완아가 갑자기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숙이고는 옆에 있는 대보의 통통하고 보들보들한 왼손을 끌어 잡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남편을 가지지 못하는 바람에 미쳐버리셨다는 건 알겠어요. 그래서 대신 이런 짓을 벌여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임을 드러내고 싶으신 거지요.”
“버릇없이!”
장 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요?”
임완아가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외삼촌이 저 담장에서 어머니를 목 졸라 죽이려 하셨지요? 그런 외삼촌이 어머니의 계략에 돌아가셨으니 어머니께서는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울적해 자신 스스로를 해치고 싶으신 게 아니십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이 아니에요.”
임완아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다만 이런 일들이 역겨워서 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요. 어머니는 애써 숨기려 하시지만······· 실은 남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가련한 사람일 뿐이에요. 그걸 굳이 숨길 필요가 있나요?”
순간 침묵이 흐르면서 공기가 무거워졌다. 장 공주가 자신의 딸을 차갑게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어쨌든 내 딸이야. 항상 도움이 되어 주지는 못할망정 나에게 원망만 퍼붓지만 내가 어찌 너를 죽일 수 있겠니?”
“하지만 네 말에는 살기가 묻어 있구나.”
장 공주가 한숨을 쉬며 약간 핼쑥해진 딸의 뺨을 어루만지며 다정히 말했다.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다 보니 내 딸이 대단한 사람으로 자란 걸 미처 몰랐구나.”
임완아가 차분히 장 공주의 두 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는 힘없는 사람일 뿐이라서 말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죠. 어머니께서 설사 계획에 성공하신다고 하더라도 저에게는 조금의 존경도 받으실 수 없을 거예요.”
입술을 앙다문 임완아의 얼굴은 침착하면서도 거만하고 자신감이 넘쳐났다.
그때 그녀 옆에 있던 대보가 끙끙 소리를 내다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누이가 손을 너무 꽉 잡아서 아파.”
그 말을 들은 장 공주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딸아, 벌써부터 그렇게 화내선 안 돼. 이 어미가 네 앞에서 범한을 죽이면 그때는 더 화내야 할 테니까.”
그녀가 임완아의 얼음처럼 차가운 뺨을 가볍게 토닥였다.
* * *
범한의 자신이 현재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사람이라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경도 백성 중 8할은 그가 누명을 썼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2할은 그가 다른 나라와 결탁해 황제를 암살한 반역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도는 워낙에 넓고 사람도 많다 보니 2할에 불과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모이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온갖 야단법석을 떨면서 관부 아속들과 군사들에게 자신이 도망간 방향을 가리키며 잡으라고 말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큰 거리와 작은 골목을 오고 가며 분주히 도망치는 범한은 생각 같아서는 나팔이라도 들고 자신을 시선이라 신봉했던 경국 백성들에게 이 몸이 정말 찢어 죽일 반역자라면 뭣 하러 경도에 돌아왔겠냐고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다만 그는 감찰원이 궁정의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는 와중에도 1처 밀정들이 일부러 소란을 일으켜 자신을 돕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도움이 있었어도 그는 여전히 장 공주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십여 명의 군대 측 고수들도 정말 골치가 아팠지만, 그보다 더 성가신 건 경도부 아속과 형부 관차들이었다. 경도 안에서 평범한 백성들과 뒤섞여 사는 이들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추격을 해냈다. 그래서 한 장소에 15분 이상 잠복해 있는 게 불가능했다.
담장 아래 기대고 서서 갈수록 어두워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던 범한은 하늘 끝에 걸려 있는 밝은 달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경도의 맑은 하늘에 삿대질하며 욕을 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씩씩거렸다.
밝은 달빛 아래서 경도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수를 동원한 치밀한 수색 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도 빼곡하게 밀집된 민가 속으로 숨어 들어가 종적을 감출 자신이 있었다.
약간 차가운 담장에 기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던 범한이 기침을 했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패도의 정기를 썼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군사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또 애국심이 넘치는 시민이 그가 도망친 방향을 관부에 알린 모양이었다.
범한은 이대로 계속 도망치는 건 자신 있었다. 심지어 경도 안에서 보름은 너끈히 장 공주에게 잡히지 않고 도망칠 자신도 있었고, 중요한 적들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암살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아내와 가족이 황궁에 갇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궁 밖에서 이대로 시간을 끄는 건 무리가 있었다. 최대한 빨리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를 찾은 뒤 자신의 세력과 연락하고 중요한 정보를 파악해 다음 계획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장 공주 세력이 끈질기게 추격하는 한 안전한 은신처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상황이 워낙에 급박하다 보니 행적을 누가 노출했을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말발굽 울음소리도 어디선가 들렸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골목 끝을 바라봤다. 그가 왼손으로 담장을 잡더니 정기를 움직여 돌덩이를 떼어 내고는 골목 끝에 있는 담장에 던졌다.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골목 끝에 담장에 누군가 기어 올라간 듯한 흔적이 생겼다.
범한이 손가락을 굽히고 큰 새처럼 날아올라 옆에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그는 이미 자신이 기대 있던 담장 뒤에 괜찮은 저택이 있다는 걸 파악해둔 상태였다. 잘 꾸며진 걸 보니 아무래도 관리의 저택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일단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본 뒤 없으면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담장을 뛰어넘은 뒤 가짜 산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간 그는 책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밖에서는 군사와 말이 움직이는 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책장을 돌던 범한이 순간 검은색 비수를 빼 들고 서재에 있던 사람의 목을 겨누었다.
그가 항상 좋다고 자부하는 운은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경도 안에서 믿을 만한 관리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운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책 냄새를 맡은 그는 자신이 서재에 들어왔으며 안에는 저택의 주인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그의 검은색 비수 아래서 겁먹은 토끼 눈을 하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여자였다.
어느 집 규수인지 모를 아가씨가 옅은 피비린내가 나는 검은 색 비수 아래서 벌벌 떨고 있었다. 양미간에 살짝 주름이 지고 입술이 들썩이는 것이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모양이었다.
겁에 질려 가련한 몸을 벌벌 떨고 있는 낯선 여자를 바라보면서도 범한은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자가 입을 열고 비명을 지르려 하자 그가 재빨리 왼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경맥을 눌려 잠시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경맥을 누르기도 전에 처음 보는 낯선 낭자는 앵앵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당황한 범한이 재빨리 낭자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진맥했다. 낭자가 거짓이 아니라 정말로 기절한 걸 확인한 범한이 그녀를 의자에 잘 눕혀 두었다. 그가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손가락에 미약을 바른 것도 아닌데 낭자가 갑자기 기절한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범한의 미간이 드리운 주름이 더욱더 깊어졌다. 그때 저택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온 신경을 집중해 저택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자신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과 대치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을 깨고 저택 밖은 금방 다시 조용해졌다. 대문 앞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누고는 그를 추격하던 관병들이 저택을 떠난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범한이 창가 옆으로 다가가 저택 정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 저택 안에 누가 살고 있길래 장 공주 쪽 세력들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물러났으며, 경도부의 수색을 피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저택은 규모는 작지 않았지만, 규격을 볼 때 황족이 아니라 대신의 거처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인상을 구기고 한참을 생각해 봐도 장 공주 쪽 대신 중에서 이 거리에 사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범한은 비록 이 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군사와 관병들의 추격을 따돌렸다는 사실 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가 비로소 여유를 가지고 방안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찬찬히 방안을 둘러보던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서재라고 착각했던 방은 사실 규방이었는데, 평범한 규방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왜냐하면······· 이 규방 안에는 책장 가득 책이 꽂혀 있었고, 평범한 규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책상 양측 기둥에 범한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련이 붙어 있었다.
‘꿈에 어리는 쌀쌀한 추위는 봄날의 한기인가, 자욱한 꽃다운 향기는 술 향기인가.’
범한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기절해 의자 위에 누워 있는 낭자를 바라보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규방에 적혀 있는 대련의 문구는 사실 이전 세계에서 송나라 학사 진관(秦觀)이 지은 것이었다. 그러니 이 낭자의 규방에 저 문구가 대련으로 쓰여 있다는 것은 이곳에 범한이 베껴 쓴 《홍루몽》에 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이 대련은 원래 《홍루몽》에서 진가경(秦可卿)의 방에 적혀 있는 거라서 범한은 더욱더 대련이 여기 적혀 있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홍루몽》에서 이 대련을 적어 놓은 진가경은 아름답고 뛰어나지만, 봄날 꿈처럼 덧없이 젊은 나이에 요절해 버린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인물을 상징하는 대련이 앳된 낭자의 방에 걸려 있는 건 어울리지 않은 일이었다.
의문을 품은 채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보던 범한은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이 방 책장에는 규수의 방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열녀전이나 여학(女學)과 관련된 책은 한 권도 없었고,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시가나 전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은······.
《반한재 시집》이었다. 《반한재 시집》의 각종 판본이 꽂혀 있었는데, 장묵한 대가가 직접 주를 단 판본도 있었다.
그리고 책장 세 칸을 차지하고 있는 건 범한이 1년 전에 직접 교정하고 태학에서 공을 들여 출판한 장판 경사자집이었다. 이 책은 범한이 마차에 가득 싣고 가지고 온 서적 중 일부를 정리해 만든 성과였다.
이처럼 이곳에는 범한과 관련된 다양한 책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책장의 공간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책은······· 《홍루몽》, 또는 《석두기》라 불리는 책이었다.
크기가 크거나 작거나 표지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거나 단조롭거나 하는 등의 차이만 있는 각양각색의 판본으로 출판된 《석두기》가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담박서국에서 지난 3년 동안 출판한 것이었고, 몇몇은 이름이 없는 작은 책방에서 출판한 책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