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4)
분기점
재훈은 눈을 깜빡였다.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곧 잡힐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순식간에 싸움의 종지부가 지어졌다.
암흑사제의 연속 공격에 피아스는 버티지 못하고 사망했던 까닭이었다.
스타더스트 소속인 김수용 해설, 그리고 임성준 캐스터의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아니, 대체 저 불꽃의 데미지가 얼마죠? 궁극기 버프를 다섯 개나 두르고 있는데 고작 연속기 한 번 맞고 죽었어요!”
“다크니스, 이제 어떻게 하나요? 아, 새로운 전사 직업을 전위로 내세우네요. 저 유저는 랭킹 7위의 전사인 베어실드입니다.”
“그래요, 아직 포기할 수 없죠! 지금 이대로 돌아가면 텔레포트 값도 못 건집니다?!”
“베어실드로 말할 것 같으면 아스리안 최고의 탱커로 명성을 떨친 유저죠… 그런데 잠깐, 저건 뭐죠?!”
해설을 이어가던 김수용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무언가를 포착했다.
가만히 서있던 암흑사제가 갑자기 전신을 태우며 형상을 변화키는 광경이었다.
몸으로부터 불꽃으로 이루어진 귀와 꼬리가 돋아났다.
검디검은 로브는 불꽃에 휩싸인 채로도 타오르지 않는다.
그래, 마치 불의 화신이라는 이프리트처럼… 불꽃 그 자체로 모습을 바꾼 듯했다.
“저건 여우… 인가요?”
임성준의 감상은 길게 이이지지 못했다.
불꽃의 갈기를 휘날리는 여우가 거대한 발톱을 찍어 내린 것이다.
발톱이 박힌 장소에 베어실드의 모습은 없었다. 최고의 탱커라는 유저가 고작 한 방에 쪼개져 버린 것!
캐스터도, 해설도, 방송을 보는 유저들도 소름이 돋아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김수용 해설이 상황을 설명했다.
“이거 큰일 났습니다… 이건 뭐랄까… 그래요, 두 번째 페이즈가 시작되었다고 말해야겠네요. 플레이어가 마지막까지 궁극기를 아껴두듯이 저 보스도 비장의 기술을 감추고 있던 겁니다.”
이어지는 광경은 싸움이라기보단 학살에 가까웠다.
암흑사제 하나가 그 기동력을 십분 활용하여 다크니스의 진형을 휘저으니 그것을 저지할 수단이 없었다.
갑자기 화면의 시점이 바뀌었다.
NFM의 지원 덕분에 암흑사제의 바로 위에 카메라를 달아둔 것처럼 1인칭 같은 3인칭으로 싸움을 관전할 수 있었다.
어지러울 정도의 속도감이 화면을 빠르게 반전시킨다.
흥분한 임성준 캐스터가 목이 쉴 듯 소리를 질러댔다.
“뛰어올랐습니다! 절벽을 타고 달려요! 악, 마법사들이 단체로 습격당해서 전멸해 버렸습니다! 방어해봤지만 방어막까지 통째로 부서졌어요!”
“도적들도 뒤에서 기습해 보지만 안 통하네요! 정말 아무것도 안 통합니다. 일단 저 기동력을 봉쇄해야 뭘 하든 말든 하는데, 상태이상 스킬들도 전혀 맞추질 못하고 있어요.”
“기동력 차이가 어마무시하네요! 저주나 슬로우 같은 상태이상 기술은 없을까요?!”
“네, 디버프 계열 스킬은 100레벨 전직 이후 배울 수 있습니다. 즉, 지금은 아무도 배우지 못했다는 거죠!”
“아, 아쉽습니다! 전직 이후에 퀘스트를 했더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마땅한 대책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엇…! 이번엔 랭킹 2위인 메이데이가 습격당했습니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가 아무리 랭커라고 해도 결국엔 마법사거든요? 전직 안한 기본 마법사는 동료가 보호해주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해요. 아, 말씀드리는 순간 메이데이 역시 사망했습니다.”
“이건 타격이 큰데요?! 메이데이가 최근 굉장한 기세로 레벨 업을 해서 1위인 라티스의 뒤꽁무니까지 쫓아왔었거든요?! 오늘 죽음으로 이틀 동안 접속을 못하게 되면 다시 차이가 벌어질 것 같습니다!”
“네, 정말 아쉽네요. 다크니스 포기하나요? 아, 다크니스 쪽에서 철수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
다크니스 길드가 물러서자 현과 아인도 물러섰다.
추격하면 마지막 한 명까지 쫓아가서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노인의 퀘스트 내용은 아무도 유적으로 들이지 말라는 것이기에 적들을 꼭 전멸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혼란을 틈타 누군가가 잠입한다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휴… 오늘은 조금 많았네.”
궁극기를 해제한 아인이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포기한 모양이야」
“나랑 현이 함께 있는데 질 리는 없지!”
「뭐, 아직은 누구나 초심자니까.」
현은 퀘스트의 타이머를 살펴보았다.
격렬한 싸움 덕에 시간이 금방 지나간 걸까? 퀘스트 종료까진 앞으로 5분 정도 남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4일째 제한시간도 끝날 것이고, 그걸로 노인의 히든 퀘스트는 완전히 마무리된다.
물론, 현은 그렇게 간단히 끝낼 생각이 없지만.
‘슬슬 움직일 때인가?’
수상한 노인의 의뢰.
퀘스트를 주며 노인은 절대로 유적 안으로는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현이 아는 정보에 따르면, 이 퀘스트에는 두 가지 클리어 루트가 존재했다.
첫째는 노인의 말을 따라서 4일간 유적의 입구를 지키고 소소한 보상을 받는 것.
둘째는 노인과의 약속을 어기고 유적에 들어가는 것이다.
‘제한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만나야 했었지.’
하지만 노인과 대면하는 타이밍이 중요했다.
너무 빨리 노인을 만나러 간다면 그의 엄청난 마법에 저항조차 못하고 죽어버린다.
퀘스트 종료시간 직전을 노려야 노인의 힘이 빠져 있어서 안전하게 퀘스트를 끝낼 수 있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어디 가는 거야?”
아인은 자신의 몸이 멋대로 유적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불안한 듯 물었다.
「그냥 나한테 맡겨 둬」
“으음… 수상한데…?”
아인은 호기심이 일었지만 일단은 현이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유적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고, 현은 망설임 없이 내려갔다.
계단은 꽤 깊고 축축했다.
내려갈수록 피부를 찌르는 한기가 덮쳐왔다.
“추워…?!”
아인이 팔짱을 껴며 몸을 감쌌다.
곧장 불꽃을 일으켜 추위에 대항하려고 했지만 현이 스킬을 해제했다.
동화 중 행동의 우선권은 아직도 현에게 있었다.
“뭐야?! 왜 불을 끄는 거야 현!”
「미안… 조금만 참아 주라.」
“윽… 알겠어, 잠깐만이야…!”
아인은 불평했지만 반항하거나 떼쓰지는 않았다.
아인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엘릭서의 효과가 남아있다고 해도 그녀의 불꽃을 ‘지속해서’ 켜둔다면 순식간에 마나가 바닥날 테니까.
계단의 끝에 다다를수록 추위는 강해졌다.
아인은 소름이 돋았는지 좀 더 꽁꽁 몸을 움츠렸다.
마침내 계단이 끝난 곳에는 정체모를 마법진이 빛나고 있었고, 그 위에 노인이 서 있었다.
모든 공간을 먹어치우는 강렬한 광휘!
그 빛은 마법진으로부터 하늘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으하하하, 드디어 완성이다! 나의 몸이 천공의 빛으로 물들어 가는구나!”
노인은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뒤에 발걸음소리가 들려올 때가 돼서야 사납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광기가 들어 있었다.
“뭐냐, 네 녀석…! 유적의 입구를 지키라 말하지 않았나!”
노인은 이쪽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사람을 죽이기 직전의 눈초리.
그러나 갑자기 노인의 목소리 톤이 확 바뀌었다.
차분하게 상대를 타이르는 듯한 어조가 되었다.
“좋아, 스킬 포인트 10개를 보상으로 주마… 지금 빨리 올라가서 아무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입구를 지켜 주지 않겠나?”
스킬 포인트 10개!
추가 스킬 포인트는 단순히 레벨을 올린 것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고레벨이 될수록 점점 스킬 포인트가 간절하게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은 그 탐나는 보상을 앞에 두고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퀘스트의 제한시간을 힐끗 보니 약 20초가량 남아 있었다.
‘지금이면 괜찮겠지?’
현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노인에게로 다가간다.
마법진 위를 걷기 시작하니 강렬한 냉기와 함께 찌릿한 전류가 온몸을 타고 돌았다.
“거기서 멈춰라!”
노인이 대경하여 소리쳤지만 현은 신음이 섞인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미안 할아버지….”
아인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기분 나쁜 끈적거림이 묻어 있었다.
현이 아인의 몸을 통해 목소리를 뱉어낸 것이다.
원래의 목소리에 비해 살짝 어둡게 변조된 느낌이었다.
“당장 물러서!”
화르륵- 현은 노인의 외침에 개의치 않고 손바닥에 불을 붙인다.
비키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위협이다.
하지만 노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술식을 진행하느라 탈진 직전까지 힘을 소모한 상태였다.
앞으로 얼마 안 남았는데! 잠깐이면 되는데…!
“이노오옴!”
노인의 노성과 함께 아인의 불꽃이 노인을 후려쳤다. 하지만 불꽃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노인은 점멸하듯 그 자리에서 사라져있었다.
“도망갔나…?”
아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모종의 순간이동 계열의 마법을 사용해 먼 곳으로 도망친 듯했다.
‘시간은…?’
퀘스트 상태창을 살펴보았다.
히든 퀘스트의 제한시간은 5초에서 멈추었고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다.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구치던 빛줄기도 어느새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
아인이 입을 벌린 채 홀린 표정을 지었다.
빛이 솟아오르던 자리.
그곳엔 아름다운 결정이 발광하며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아인은 깨진 보석 같은 그 결정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으려 했지만.
“웃…!”
도중에 신음을 흘리며 움찔거렸다.
가까워질수록 손가락 끝엔 살을 찢을 듯한 한기가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인은 즉시 손을 빼려고 했지만 현이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통제의 우선권을 가진 현.
결정을 점점 가까이 담아 그대로 움켜쥐었다.
파치칙-!
손에 쥐는 순간 감전된 것처럼 몸이 움찔거렸다.
결정이 몸에 스며드는 동시에 메시지가 함께 떠올랐다.
[천공의 조각에 담긴 힘이 몸에 깃듭니다!] [칭호 ‘천인’을 획득하였습니다!]‘됐어…!’
현은 쾌재를 불렀다.
퀘스트를 처음 받았을 때부터 원했던 목표.
그것에 드디어 다다랐다.
메시지는 끝나지 않고 조금 더 이어졌다.
[유저 중 최초로 ‘천인’의 칭호를 획득하였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일까요?! 하나의 그릇에 두 개의 영혼이 담겨 있습니다!] [두 영혼이 함께 천공의 가호를 획득합니다!] [냉기속성 저항력이 영구적으로 50%만큼 증가합니다!] [전격속성 저항력이 영구적으로 50%만큼 증가합니다!] [추위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특별한 일이 더 생길지도요?]“어…?”
아인의 입에서 열띤 소리가 새어나왔다.
조금 전부터 지속적으로 느껴지던 한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금방 얻은 칭호 덕분이었다.
“후… 후훗… 크흐흑. 크하하하하!”
아인은 갑자기 미친 것처럼 마구 웃어대기 시작했다.
현의 웃음이 아인의 목소리를 통해 새어 나오는 탓이었다.
컥…! 신나서 바닥을 뒹굴던 아인은 근처의 기둥에 배를 부딪쳐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미친 것처럼 웃었다.
진짜 아인은 이 괴상한 행동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통제 우선권이 없기에 자신의 몸인데도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몸으로 바보 같은 짓 하지 좀 마….”
아인의 말에도 현은 한동안 웃으며 바닥을 굴러다닐 뿐이었다.
다크니스 길드의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절반의 인원이 사망했고, 무엇보다도 그 인원 속에는 다크니스가 자랑하던 랭커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피아스, 베어쉴드, 게다가 길드의 최고 자랑거리였던 메이데이까지 사망했다.
“너무 경솔했어.”
길드장인 엑스라지는 침음성을 흘렸다.
지금은 게임 초창기인 만큼 하루가 지날 때마다 막강한 길드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시기다.
치명적 피해를 입고서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니 다크니스의 왕좌도 위태로울 것은 당연한 이치!
띠링-!
알림창이 떠오른 것은 엑스라지가 허탈감에 빠지고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퀘스트를 클리어 하였습니다!]“응?!”
생각지도 못한 알림에 엑스라지가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된 거지?
자신들은 분명히 입구의 문턱도 넘지 못하고 적에게 몰살당하기 직전 후퇴했었다.
그런데 클리어라니?
엑스라지는 정신없이 시스템 메시지를 읽어나갔다.
1위 – 메이데이의 파티 (공헌도 : 4%)
2위 – 베어쉴드의 파티 (공헌도 : 1%)
3위 – 피아스의 파티 (공헌도 : 0.2%)
“뭐야,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래?!”
적에게서 도망치느라 만신창이가 된 레이나 역시 영문을 몰라 물었다.
아니, 대부분의 다크니스 길드원들은 멍하니 퀘스트 완료 메시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문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퀘스트가 클리어된 것이다!
그것은 현과 아인이 노인의 술식을 저지했기 때문이었지만 다크니스의 길드원이 그것까지 알 방도는 없었다.
“뭐지? 우리 이후로 다른 길드가 도전에 성공한 건가?”
“멍청아. 그럴 리가 없잖아. 제한시간이 5분밖에 안 남았었다고!”
“이거 봐! 스킬 포인트가 늘어났어!”
메이데이의 파티에 속해 있던 원거리 딜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드디어 내 에너지 탄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겠군! 하하,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퀘스트는 어떻게 클리어한 걸까…?”
“그러게?”
분명히 실패로 끝났다고 확신한 퀘스트가 어쩐 이유로 클리어된 것인가?
다크니스 길드는 전투가 끝나고 녹화 동영상을 수십 번이나 분석해 봤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48시간이 지나고 피아스, 베어쉴드, 메이데이가 모두 접속했고 그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에엑?! 퀘스트 성공했다고요? 우리 완전 망한 거 아니었어요?!”
“어엇! 내 레벨이 올라가 있다!”
“제 인벤토리에 이상한 아이템이 들어와 있어요! 이건 뭐죠? 태양의 검…?”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누구도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
백작 퀘스트 직후.
더 게임즈는 방송을 종료하자마자 중계했던 해설 영상을 유트브에 업로드했다.
해당 동영상의 조회수는 마치 아이돌 뮤비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각종 언어로 자막이 달릴 정도였다.
게임 전문 커뮤니티들도 오늘의 소동에 관련된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뽑아내기 바빴다.
「신화가 언제부터 한국의 자존심이냐 ㅋㅋㅋ 그냥 돈지랄 하던 애들 모임이지 ㅋㅋㅋ」
「그래도 이번에 다크니스가 큰 교훈을 남긴 듯… 과한 보상을 주는 퀘스트를 함부로 받으면 X된다는걸 잘 보여줌… 난이도가 정말 XX없네요….」
아스리안 관련 커뮤니티들 역시 열기로 과열되어 있었다.
화제는 물론 백작 퀘스트와 암흑사제에 관련된 것이었다.
어떤 유저는 직접 통계자료까지 만들었다.
전사 : 118명
도적 : 92명
마법사 : 91명
사제 : 1027명
해당 글쓴이는 공식 홈페이지로부터 직업 수치변화를 직접 계산해왔다.
국내 신규 유저를 바탕으로 한 시간 전과 후의 스크린샷을 각각 제시한 것이다.
그의 글은 순식간에 커뮤니티의 인기 글에 자리 잡았다.
「사제 뭐임 ㅋㅋㅋㅋㅋㅋㅋ」
「사제 직업 의문의 저출산 현상 해결」
「떡상 ㅋㅋㅋㅋㅋㅋ」
특히 유저들은 ‘암흑사제’에 관해서 광적일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사제의 1차 전직 중 암흑사제란 직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몇몇 아스라 고인물들에 의해 이미 알려져 있었긴 하지만 이처럼 지대한 관심을 받은 적은 없었다.
암흑사제는 포탈 인기 검색어에도 올라갔다.
고작 5%의 인구수를 차지하던 사제가 갑자기 각광받기 시작했다.
「님들… 지금 여론에 혹해서 괜히 직업 고르지 마세요. 암흑사제 원래 저렇게 강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저건 버프를 받았거나, 2차 승급 직업중 하나인 거 같아요.」
「ㄴ 위 글쓴이 사제 50렙 이상」
「꿀빨러들 진짜ㅋㅋㅋ」
「아뇨 전 세계랭킹 582위, 65레벨 전사입니다. 예전에 아스라 온라인 했던 유저이기도 하고요」
「응, 난 라티스야」
“아니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지? 말이 안 통하네 진짜.”
랭킹 582위이며 전사 65레벨인 동시에 아스라 온라인 3년의 경력을 지닌 ‘강철바위’.
그는 집에서 커뮤니티를 하는 도중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한참 동안 키보드 배틀을 벌인 뒤에야 상대를 논리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익명성으로 감춰진 인터넷 세상에선 너도, 나도, 우리 전부가 랭커였으니.
그래, 이게 뭔 짓거리냐. 그는 무의미한 곳에 힘을 빼지 않기로 했다.
강철바위는 다시 그 전투 영상을 틀어보았다.
동영상 속의 암흑사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다들 암흑사제라고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스킬은 암흑사제와 비슷했고, 시커먼 로브는 암흑사제의 복장을 빼다 박았음에도 그것을 암흑사제로 치부하기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데미지가 너무 강해. 움직임도 너무 빠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암흑사제의 스킬 중엔 저 무지막지한 불꽃 발톱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기본 직업스킬이 아닌 스킬을 배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강철바위는 왠지 암흑사제 자체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잘하네.”
강철바위는 동영상을 보며 감탄했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저 움직임은 예술적이다.
수많은 유저를 찢어발기며 도륙하는 장면들에선 시원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졌다.
계속 동영상을 바라보던 강철바위는 문득 이유모를 데자뷰를 느꼈다.
“뭐지…?”
갑자기 그녀의 움직임이 굉장히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같은 영상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걸까?
아니, 조금 다르다.
굉장히 오래 전부터 보았던 것 같다.
머릿속을 간질이는 기분이 떠나지 않는다.
좀 더 화면에 집중했다.
소녀는 그 거대한 발톱을 마음껏 휘두르며 다크니스 길드원들을 썰어대고 있었다.
그 순간, 강철바위의 머릿속에 천둥이 내리쳤다.
“잠깐, 설마…?!”
강철바위는 숨이 거칠어진 채로 바탕화면의 ‘아스라’폴더를 열어 과거의 자료를 뒤적였다.
아스라 온라인 시절부터 그는 자신의 플레이를 동영상으로 기록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
그 중엔 유명한 녀석들과 파티를 이루거나 싸웠던 장면들도 존재했다.
“아니, 진짜로…?”
두 개의 동영상을 나란히 두고 비교해 보았다.
한쪽은 암흑사제고, 또 한쪽은 늑대인간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둘의 스텝이 무려 3초 동안이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페이크가 섞인 특유의 압박 스텝이다.
이렇게 특이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녀석은 아스라에도, 아스리안에도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엉켜있던 실타래가 단번에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인?”
그리고 그와 함께 떠오르는 의문.
“근데 왜 여자냐…?”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자가 아닌 건가?”
아스리안은 가상현실 게임인 만큼 성별을 바꿀 수는 없지만, 외모를 커스터마이징 하는 것은 가능했다.
저 모습은 남자인 아인이 그저 머리를 길게 길렀을 뿐일지도….
“아오, 하나도 모르겠네!”
나중에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던 것인지조차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좀 더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강철바위는 아스리안에 접속해 누군가를 찾았다.
66레벨 도적, 베라드.
그 녀석도 4년이나 아스라 온라인을 플레이해온 고인물이었다.
「뭐야, 잠깐 쉰다고 하더니 바로 접속했어?」
베라드는 강철바위가 접속하자마자 알아채고는 귓속말을 보내왔다.
「하긴, 너도 자극 좀 받았나 보네. 아인이 날뛰던 모습 보고 온 거냐?」
「뭐?」
강철바위는 베라드가 던진 말에 깜짝 놀랐다.
자신이 특별히 눈썰미가 좋아 추측해 냈다고 생각하던 사실을 베라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달리 암흑사제의 정체를 확신하는 말투다.
「너도 알고 있던 거냐? 아니, 그게 진짜 아인이라고…?!」
「뭔 소리야… 하나씩만 말해라.」
베라드는 잠시 후 강철바위가 진정된 뒤에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내가 아인을 못 알아볼 리는 없잖아. 결투장에서 셀 수도 없이 처발렸거든… 당연히 녀석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하고 있지. 나는 딱 생방송으로 보는 순간 바로 알겠더라고.」
「야, 근데 너무 황당하잖아. 아인이 여자였어? 내가 상상하고 있는 이미지는 우락부락한 버서커였는데.」
「뭘 그리 놀라.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베라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아스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유저들은 여기서도 엄청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아인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몇몇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뭐, 그렇겠지….」
「아냐,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 게임은 정보를 기반으로 한 성장 기대치 자체가 완전 달라.」
아스라 랭킹 최고 5위까지 올라가 본 베라드의 말은 제법 신빙성이 높았다.
강철바위는 30위권에도 들어보지 못했기에 그저 베라드의 말에 수긍하며 집중했다.
「아인은 우리랑 같은 시기에 시작했을 텐데, 지금 말도 안 되게 강력하잖아. 무슨 뜻이겠어?」
그렇다. 아인은 아스라 때도 랭킹의 순위가 들쭉날쭉하는 대표적인 유저였다.
어느 날은 10위권 뒤로 밀리기도 했고, 또 어느 날 보면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주 접속하지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2위까지는 올라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 1대1 결투에선 최고 실력을 가졌단 것은 아스라를 플레이했던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스라에는 아인보다 유명한 유저가 한 명 있었다.
몇 년간이나 압도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던 유저가.
베라드의 입에서 그의 아이디가 튀어나왔다.
「만약 ‘현’이 아스리안을 플레이 하고 있다면 지금쯤 어느 정도일까?」
「현…?」
강철바위는 순간 등에 소름이 올랐다.
압도적 랭킹 1위. 현.
독보적이라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단순이 컨트롤이 좋다고 말하는 것으론 표현이 부족했다.
그는 그냥 게임을 제일 잘했다.
일반인과는 완전히 다른 게임 센스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유저가 왜 아스라 온라인이라는 똥겜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현의 존재를 배제하고 있던 이유는 그의 이름이 명예의 전당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걔도 아스리안 플레이 하는 거야?」
「당연히 하고 있겠지.」
「랭킹엔 없던데?」
「멍청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안 올린 것뿐이야! 아인도 이름이 없었잖아?」
그리고 베라드의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현과 아인이 만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가?」
강철바위는 잠깐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두 녀석은 아스라에서도 거의 항상 붙어 다녔다.
정확히 말하면 아인이 현을 따라다니며 결투를 조르고 다녔던 것이지만, 가끔씩은 둘이 파티를 맺기고 사냥이나 퀘스트를 같이 하기도 했다.
결코 불가능할 거라 생각되던 퀘스트들이 순식간에 깨져 나가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돋는다.
「아직은 둘이 따로 노는 것 같지만 말이지.」
「사냥 가자.」
강철바위는 갑자기 중얼거렸다.
베라드가 킥킥 웃었다.
「그러게, 우리도 빨리 성장해야겠지?」
베라드와 강철바위는 각자 사냥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작의 굴욕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한시도 쉴 시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