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64)
공감이란
현은 가만히 루이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지상의 인간들은 자신을 배척하고 증오하고, 거기다 어느 순간부터 마물들의 고통도 함께 느끼게 되었다면?
천공으로부턴 증오를, 심연으로부턴 괴로움을 받는다.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변의 일에 휩쓸려 버리는 것에.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단 사실에. 루이즈는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쉽진 않겠지만.’
이 상황은 어쩌면… 자신이 충분히 바꿀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단순히 퀘스트를 비롯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도, 현은 루이즈에게 힘을 쥐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냥 나만 따라오면 돼.」
“그대를…?”
「웬만한 걸 혼자 할 수 있을 때까진 키워줄 테니까.」
“그대의 품에 또 들어가라는 말이구나… 하지만 그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무슨 얘기야, 나한테도 말해 줘!”
혼자만 듣지 못하는 탓에 아인이 소리쳤지만 묻혔다.
바로 다음 순간, 현에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 몸을 맡기도록 하겠다.”
어둠의 의지는 그대로 자신의 그림자인 쉐이드 링커에게로 전해졌다.
[어둠의 조각이 공명을 시작했습니다!] [‘루이즈’의 공감이 개방됩니다!]갑작스런 메시지 창이 떠오르는 가운데.
두근. 두근.
현은 심장이 튀어나갈 듯 세차게 뛰어오름을 느꼈다.
‘뭐지…?’
유저인 자신도 살짝 기분이 들뜰 정도였으니 NPC인 루이즈가 더 큰 감각을 느낄 것은 당연했다.
현은 당황하여 물었다.
「괜찮아?」
“…잠깐 놀랐지만 괜찮아졌다.”
「쉬고 싶어…?」
“아니, 나 때문에 계획을 바꿀 필요는 없어. 현, 그대의 맘대로 해도 좋으니라.”
루이즈는 아직 어리지만, 아스리안에서 현의 능력을 가장 잘 아는 NPC이기도 했다.
여태껏 그가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고,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냈다.
절망밖에 보이지 않던 순간에도… 자신이 약해빠진 소리를 내뱉던 때에도 현은 언제나 해답을 찾아냈으니.
루이즈의 믿음은 이제 맹목적인 것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뿐.
현은 동화를 통해 루이즈의 모든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래….」
무의식적으로 빨라졌던 발걸음을 늦췄다.
동화를 다시 해제했다. 이런 상태에서 감정이 얽히면 더욱 힘들 테니까.
“대신 더 힘들어지면 말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초조함과 긴장감 속에서 자잘한 실수들이 나오는 법. 수많은 경험으로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인. 너도 그만하고 집중해. 곧 전투가 일어날지도 몰라.”
“물론, 집중하고 있다고!”
“지금보다 더.”
“어…?”
“아직 정신 못 차렸잖아.”
순간, 아인은 몸을 떨었다.
어둠의 가호로 인한 효과와 더불어 여태 본 것 중 가장 단호하고 차가운 현의 시선을 마주한 까닭이었다.
찰칵-.
그리고 갑자기 들리는 스크린 샷 효과음.
“…?”
현은 잠깐 의아해했지만, 머지않아 아인의 눈빛도 진지하게 바뀌었으니 별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천천히, 하지만 차분하게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해골 공작, 스코타나토스는 자신의 영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공의 유저들이 어둠의 땅에 넘어왔을 때에도, 은빛 갑주의 성기사들이 들이닥쳤을 때에도, 공작은 침착했다.
마물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전장이 혼란에 빠져도, 냉철한 시선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다음의 수를 생각했다.
“오호라… 또 넘어 오는구나…!”
유저, 성기사들의 이후에도, 천공은 계속해서 침입해 왔다.
후속부대인 금빛 문양 제복의 신성 마법사들까지 들이닥쳤고, 그제야 스코타나토스는 만족스럽게 해골을 달그락거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전쟁이란 판단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수 싸움과도 같다. 상대의 패를 먼저 볼 수만 있다면 그만큼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슬슬 움직일 때로군….”
스코타나토스는 다음 한 수로 천공의 의도를 무위로 돌리리라 결심했다.
천공의 병력, 질과 규모, 위치가 모조리 드러난 지금, 자신이 직접 영지의 마물들을 이끌고 기사단을 협공한다면 적들을 몰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코타나토스는 느긋하게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그렇다, 어둠이 공명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아니… 이것은…!’
루이즈의 심장이 거세게 뛰어오르는 순간, 상황은 돌변했다.
천공의 침입에도 침착하기만 했던 공작의 안광이 마구 번쩍였다.
“대지가 울고 있다… 어째서…?”
공작은 뼈마디까지 웅웅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토록 강렬한 공명이라니… 이 현상을… 어둠을 모시는 자라는 이명을 가진 스코타나토스가 모를 순 없었다.
“오늘… 어둠이 찾아오셨다는 말인가?”
그는 스치듯 만났던 소녀, 루이즈가 어둠이라는 사실까진 깨닫진 못했다.
어딘가에 미약한 어둠의 본신이 있다는 사실만을 알 뿐. 그것만으로도 해골 공작의 마음은 미친 듯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효율을 찾을 때가… 아니야.”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처럼 느긋할 여유가 없었다.
어둠의 뜻이라면 반드시 이루어내야만 하는 일이다. 부하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전력을 쏟아야 하겠구나…!”
어둠의 성소가 파괴되기 전에. 이 땅에서 천공을 몰아내야한다. 부활을 위한 제사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절대로 있으면 안 된다.
화르륵!
불꽃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그려진 것은 결심을 마친 공작이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짙은 마기가 일렁였다.
마기는 거대한 마수의 형상을 이루었고, 잠시 후 그로부터 날개가 펼쳐졌다.
스코타나토스는 또다시 놀라 안광을 번쩍일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등장한 것의 정체는 틀림없는 악마. 하지만 스코타나토스가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어둠의 권속인 악마의 얼굴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이 악마는 어둠의 권속이 아니라는 뜻일까? 어째서 어둠을 모시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인가?
“듣기만 하여라.”
이름 모를 악마는 스코타나토스에게 통보하듯 말을 내뱉었다.
“인과가 맞춰지는 중이다. 나서지 말도록.”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는 뜻이다.”
지고한 초월자의 말인데도 스코타나토스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둠께서 직접 땅에 들어선 순간에 지켜보기만 하라니… 아무리 악마라도,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존재의 뜻에 곧이곧대로 수긍하긴 어려웠다.
그런 기색을 깨달았는지, 악마는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나의 이름은 디조니알. 기만의 말씀을 전할 뿐.”
“기만… 께서…? 지켜보기만 하라고 말하신 것입니까…?”
“맞다.”
악마, 디조니알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서번트 급의 악마인 그에겐, 이곳에 잠시 현현하는 것도 상당히 벅찬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 또한 어둠을 위해서라 말씀하셨으니. 그대의 선택을 믿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디조니알은 마기를 흩으며 사라졌다.
불꽃의 마법진이 꺼지고 나서도 스코타나토스는 한동안 생각에 빠졌다.
‘그저 지켜보라는… 것인가?’
어둠과 기만은 공존할 때에 더욱 큰 힘을 얻는다.
부하세력들끼린 다툼이 있더라도 악마들끼리 분쟁을 일으킬 이유는 없다. 하물며 대악마 사이의 갈등이란 있을 수 없다.
정말로 기만의 뜻이라면 그 말은 의심의 여지 없이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과…! 어떠한 인과를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스코타나토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미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인과란 어둠의 각성을 뜻하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말하는 것인지, 모호한 단어를 곱씹을수록 더욱 이해가 힘들어졌다.
대악마의 지고한 뜻을 고작 해골인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가?
두개골에 뚫린 두 개의 구멍만 쉴 새 없이 번뜩거릴 뿐이었다.
***
스르르르.
안개가 움직였다. 안개가 스멀거릴 때마다 하늘이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태양도 그다지 일행의 시선을 끌진 못했다. 갑자기 루이즈의 기색이 확 변한 탓이었다.
이러한 메시지와 함께.
[‘루이즈’의 공감이 개방됩니다!]현은 항상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초월자는 자아 또는 공감으로 힘을 행사하지만, 같은 초월자인 루이즈는 기도를 받을 수 있는데도 왜 힘을 사용할 수 없을까?
아마도 불완전한 악마이기 때문에. 현의 그런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공감 Lv.0(+1)]-당신을 섬기는 자들의 감정을 함께 느낍니다.
-또한, 그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공감은, 수많은 초월자의 힘들 중 하나.
그것은 이제 루이즈의 스킬 창에 나타나고 있었다.
마음의 변화를 겪은 어둠은 절반의 각성을 마치고 한 발짝 진정한 초월자에 가까워진 것이었다.
‘심경의 변화로 각성을 일으킨 걸까?’
현은 쓰게 웃었다.
이렇게 약해빠진 녀석이 어둠의 대악마라니.
갑자기 루이즈가 대단한 존재처럼 달리 보이진 않았다.
그보단 녀석이 혼란스러워하진 않을지… 그 새가슴으로 타인의 감정을 여과 없이 받아들일 수나 있을지가 더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자아는 아직 각성하지 못했어!’
지금 이 상태로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먹혀버릴 것이다.
나중엔 어느 것이 자신의 감정인지조차 모르게 되겠지.
루이즈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초월자의 나머지 힘. ‘자아’를 갖추는 수밖에 없었다.
스르르.
검은 구름들이 끊어지고 새롭게 이어졌다.
어느 순간, 현은 루이즈에게 여러 감정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죽음의 감각… 먼 훗날의 루이즈는 세상 모든 곳과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근처의 것들밖에 느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근처에서 마물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뜻. 어느새 일행은 기사단의 후미를 따라잡은 모양이었다.
안전하게 나아가려면 잠시 멈추는 편이 좋을 테지만, 현은 오히려 발걸음을 서둘렀다.
루이즈나 자신이 변할 때마다 메인 퀘스트가 갱신되었으니 어쩌면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띠링-!
-자아를 되찾기 위해 어둠은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해야 합니다.
-어둠의 ‘심장’으로 향하세요. 적들보다 먼저!
-만약 천공이 유적지를 파괴한다면 공감의 압박을 버텨내지 못하는 어둠은 결국 소멸할 것입니다. 다음의 어둠이 깨어나기까진 수백 년이 걸리겠지요.
잠시 후. 현은 자신의 예감이 정확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퀘스트 설명엔 “유적지를 찾아라.”라는 애매모호한 내용이 사라지고, 대신 가장 명확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바로 루이즈의 죽음이다.
진실, 기만, 빛, 어둠, 질서, 혼돈.
아스라의 지식대로라면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초월자들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설령 사라진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음 대(代) 로 넘어갈 뿐이다.
다시 태어날 다음 어둠이 과연 루이즈일까?
그것은 현의 지식으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얼굴도, 성격도 다른 타인일 것이다. 어둠의 이름은 영원할지 몰라도 육체와 기억은 끊임없이 소멸하는 것이니까.
‘이럴 것 같더라니.’
메인 퀘스트란 아스라의 역사를 바꾸는 것.
원하는 때에만 골라서 할 수도, 잠시 쉬었다 할 수도 없었다.
필연적으로 시간제한이 붙으며 기회는 단 한번 뿐인, 극악의 난이도를 지닌 퀘스트였다.
‘안일하게 생각했나…?’
단순히 어둠의 유적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사단보다 먼저 그곳에 도달해야만 했다.
처음엔 퀘스트가 간단해 보여서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시간이 촉박할 줄 알았다면 그때부터 서두르는 게 좋지 않았을까?
‘아니, 안개가 열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늦은 건 아니야.’
현은 바히미르와 스코타나토스의 말을 떠올렸다.
어둠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는 것은 한 달에 하루.
아무리 빨리 마을에 도착했어도 나아가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기사단과 맞닥뜨리는 것은 확정적인 미래라는 거겠지.
현은 상황을 냉정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이게 최대한 서두른 거겠지… 유적지로 향하라는 메인 퀘스트를 받은 지 한 달도 안 지났으니까.’
쾅! 콰아앙!
선명한 전장의 소리가 일행의 귓가를 때렸다. 마물의 잔당과 기사단의 후미가 전투를 벌이는 소리였다.
적들이 가까이 있다는 뜻. 아인이 깜짝 놀라 물었다.
“우리는… 몰래 뒤따라가는 계획 아니었어?”
「계획을 바꿨어.」
“그, 그래…?!”
바뀐 메인 퀘스트의 설명대로라면 루이즈는 ‘심장’이라 불리는 장소. 아마도 유적지가 있을 그곳에 기사단보다 먼저 도착해야만 했다.
「다시 다 따라잡아야 돼.」
“어디까지?”
「전부 다.」
현은 바람장벽을 밟고 하늘을 뛰어가는 방법을 떠올렸지만 곧 포기했다.
기류가 불안정한 하늘은 검은 안개의 지옥. 하늘의 길을 뚫으려는 것은 자살하기 딱 좋은 행위였다.
「정면으로 부딪쳐야 할 거야.」
고위 성기사들은 신관들과 마찬가지로 천공과 심연을 구분하는 능력을 지녔다. 손등의 룬을 바꾸는 것으로 속이기란 불가능했다.
결과가 어찌 되든 정면 돌파할 수밖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일행은 어둠 가득한 협곡을 따라 질주하는 중이었다.
콰르르르-!
양 측면이 안개의 절벽으로 둘러싸인 협곡. 사방에선 전투의 굉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기사단의 후미와 곧 마주칠 것이다.
‘통하면 좋겠는데….’
아인을 떠나 다시 루이즈에 동화한 현은 전방으로 튀어나갔다.
상대는 최소 350레벨의 엘리트. 정직한 방법으로는 한 명조차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방법이 있다면, 한순간의 허점을 노려 모든 가능성을 쏟아 붓는 것!
‘되든 안 되든 해보는 수밖에!’
투명화, 생체리듬 가속이 발동되는 동시.
어둠의 협곡에는 작은 태풍이 일어났다.
“…!”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성기사는 깜짝 놀랐지만 대응은 빨랐다.
방패를 들고 있는 그에게 루이즈나 아인의 공격은 아무런 피해를 입힐 수 없을 테지만….
바람이 노린 것은 성기사가 아니라 그의 뒤편에 놓인 어둠. 안개로 이루어진 어둠의 절벽이었다.
콰아아아아!
강풍과 안개가 마주치자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세상 모든 것을 어둠속으로 삼켜 버리는 안개… 어둠의 권속인 바히미르조차 버티기 힘들다고 말했던 안개를 그보다 약한 성기사가 버텨낼 리 만무했다.
“웃? 크흐으윽…!”
성기사의 온몸이 번쩍거렸다.
대부분의 성기사들이 지닌 재생의 능력.
안개에 갉아 먹히는 그의 전신이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는 탓이었다.
그리고 그 몸부림은 고작 10초도 지속되지 못하고 멈추었다.
[레벨 업!]마기와 안개가 섞인 태풍은 마치 흑룡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의외로 약한데?”
뒤늦게 달려온 아인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현은 계속 달리며 짧게 설명했다.
「안개에 응축된 힘이 강한 거겠지… 너도 안 닿게 조심해.」
“안개? 그럼 다 같은 방법으로 잡으면 되는 거 아냐!”
「글쎄….」
같은 방법이 몇 번이나 통할지 현은 회의적이었다.
성왕국의 기사단은 동료의 죽음에 민감하다.
지금도.
주위를 둘러본 현은 경계의 눈초리를 번뜩이는 나머지 성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크레이어가 죽었다.”
“뭐지? 뒤쪽에 위험한 마물이 있었나?!”
두 소녀 중 마기를 흩뿌리는 루이즈의 모습에 그들은 즉각 누군가를 떠올렸다.
어둠과 관련되어 있으니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그 마물 말이다.
“검은 뱀파이어…?”
“그 녀석이로군.”
마을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했던 마물이 아직 살아있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상해. 저 뱀파이어. 천공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 소녀 중 아인의 기운을 느끼고선 의문을 표했다.
늑대인간을 비롯한 수인은 종종 천공의 세력에 속하는 경우가 있지만 뱀파이어는 아니다.
엄연히 심연의 권속인 것들이 천공의 기운을 품고 있다니?
어쨌든 둘 다 평범하지 않은 마물들. 성기사들은 아인과 루이즈를 바짝 경계하기 시작했다.
「역시, 똑같이는 안 되겠네.」
특히, 그들이 안개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현은 같은 방법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정면으로 싸우면, 몇 명까지 상대 가능해?”
「두 명.」
어쩌면 하나일지도 몰랐다.
어둠의 땅이었을 안개의 협곡은 이미 성기사단에 점령당한 상태.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주위엔 다섯의 성기사들이 따라붙으며 진형을 갖춘 채였다.
“그럼 여기서 죽는다는 거잖아?!”
「조용히, 생각 중이잖아!」
현은 곧 적들이 안개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좋아, 안개 바로 옆에서 달리자!」
검은 기운이 옷자락에 스칠 만큼 가깝게! 합공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큿… 잠시 호흡이 꼬였다.
어째선지 갑자기 루이즈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어올랐다.
주위를 둘러본 현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길, 하필 이런 상황에서…!’
일행은 기사단의 후미를 너머 협곡의 중앙에 접어들었다.
그곳은 아직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는 장소. 천공은 심연의 패잔병을 도륙하고 있었고, 마물들의 죽음에 따라 루이즈의 ‘공감’이 발동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마물들의 절규 섞인 감정은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루이즈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두근, 두근!
한 마리의 죽음 당 하나씩, 송곳이 심장에 박힌다.
“흐윽…!”
루이즈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지만, 현은 그녀를 신경 써줄 겨를이 없었다.
지켜보기만 하던 성기사들이 빈틈을 노려 일제히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칫, 그림자 질주!’
루이즈의 신형이 주욱 늘어났고 그 직후에 신성력이 가득 담긴 검기가 쏟아져 내렸다.
파삭, 파사사삭!
조각난 대지가 들썩이는 가운데, 현은 상공에서 재차 자세를 잡았고.
적들의 위치를 머릿속에 담고서 그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아인, 같이 들어와!」
「맡겨 둬!」
아인도 현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시선을 분산시키는 역할이다.
화신의 걸음으로 따라붙으며 불꽃으로 성기사들의 시야를 가렸다.
그렇게 합을 맞춰 생겨난 잠깐의 틈.
저레벨 구간에선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지금의 적들을 상대론 그 찰나가 유일한 기회였다.
‘어둠의 검. 반탄.’
두 스킬을 함께 사용하여 현은 최대치의 마기를 터뜨렸다.
파아앙!
바람의 폭발과 함께 어둠의 검을 잡아 돌렸다. 아인과 성기사들을 포함한 모든 것을 가르며.
티리리링! 성기사들의 반격에 부딪친 대검은 몇 바퀴 만에 회전력을 잃고 멈추었지만 반탄의 효과는 확실히 들어간 뒤였다.
「역시 현이야!」
스턴에 빠져 허물어지는 성기사들의 모습을 확인한 아인이 감탄했다.
각성 퀘스트에서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들을 안개 속으로 처넣으라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아인은 다음 순간 탄식 섞인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콰아아아아-!
마력의 폭풍이 발산되는 순간 모든 적들의 스턴이 해제되었기 때문이었다.
정화의 포효.
350레벨이 넘는 성기사들은 대부분 그 디버프 해제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얼핏 절호의 수가 무위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기에 아인은 순간 당황했다.
「뭐, 다 풀렸잖아!」
「괜찮아.」
현의 차분한 목소리.
아인은 곧이어 루이즈의 손에 거대한 대검이 생겨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마기도 다 썼고, 재사용 대기시간도 안 된 스킬을 재차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왜일까?
‘환영 질주!;
연유를 알 수 없는 것은 같은 스킬을 마주하는 성기사들 뿐이었다.
“위험하다! 피해!”
그들은 다급히 외치며 필사적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공간을 마구잡이로 휩쓰는 어둠의 폭풍!
허나, 이번의 대검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일 뿐. 재사용 대기시간도 고작 5초인 환영이었다.
적들이 좀처럼 다가오지 못하는 모습을 확인한 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후… 이 틈에 속도를 높이자.」
「이 녀석들은 안 처리하고?」
「지금은 무조건 앞으로 가야 해. 뒤쪽의 적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야겠지.」
현은 환영을 사용해 꾸준히 적들의 접근을 견제했다.
검은색의 마기와 그림자가 안개와 섞이니 마치 안개 자체가 협곡을 따라 달리는 것처럼 위협적으로 보였다.
‘당분간은 이걸로 버틸 수 있어.’
후방에 적을 남겨두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었다. 자칫 협공을 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
그럼에도 지금, 적진 한가운데를 가로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루이즈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악마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뭐…?」
“현 그대라면 알 것도 같아서 말이다….”
일행이 나아갈수록 더욱 많은 마물이 ‘공감’ 스킬의 범위 내로 들어오게 된다.
그에 따라 강렬해지는 죽음의 감정, 메스꺼운 느낌들.
루이즈가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것도, 자신의 마음이 점점 먹혀 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몰라. 똑같겠지….」
사실, 약간 다른 점이 있긴 했다.
악마는 죽으면 다음 대의 존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 별 의미는 없으니 루이즈에게 말하진 않았다.
새로운 어둠은 더 이상 루이즈가 아닐 테니까.
「쓸데없는 생각할 여유 있으면… 집중이나 해.」
루이즈가 지닌 자아의 크기는 어둠의 이름값에 비해 보잘 것 없다.
모든 부정(不淨)을 그대로 받아내야 하는 루이즈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서걱, 캬아아아-!
지금도, 근처의 마물들은 기사단의 화력에 저항조차 못 하고 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절규를 공감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유저의 감각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루이즈의 창백한 안색과 떨리는 목소리는, 마치 죽음을 앞둔 병자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처음 동화의 계약을 맺을 때를 기억하는가…? 그때는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이라 생각해 두려워했다. 헌데 지금은 그대가 악마의 영혼을 지켜 주는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파치치칙!
갑자기 날아든 전격의 줄기에 현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틀었다.
그림자 방패를 사용하고 빗겨 맞았는데도 1/5의 체력이 단숨에 소진되었다.
‘정화의 천격….’
현은 번개가 날아든 곳을 바라보았다.
사슬 갑주를 입은 마법사들. 치직- 치직- 불길한 소리와 함께 지팡이의 끝으로부터 거대한 뇌전의 구슬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마법사까지…!’
신성마법이 등장했다는 것은 기사단의 본대와 더욱 가까워졌다는 뜻.
번개는 완벽하게 피할 수 없다. 전기는 가까이의 인간을 따라붙으니까!
루이즈를 겨냥하고 있는 수많은 지팡이들의 머리에 형형색색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것들이 일제히 번쩍이려는 직전.
‘소멸의 각오!’
말을 전할 틈도 없었다.
현은 아인에게 동화하여 그녀의 궁극기를 발동시켰다.
화르르륵!
아인의 전신에 불꽃의 털이 돋아났고, 새빨간 불꽃이 휘감겼다.
피지지지직!
늑대 형상의 화신이 루이즈의 앞으로 튀어나가는 것과 함께. 십 수 가닥 전격의 줄기들이 몸에 따라붙었다.
가히 상상도 되지 않을 위력. 거대한 번개의 기운은 땅조차 녹여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굉음이 그친 뒤 누구도 살아있지 못할 것만 같은 땅 위엔 한 마리의 불꽃 늑대가 서 있었다.
“뭐야…?!”
「미안, 급해서 몸 좀 빌렸어!」
잠시 후, 다시 루이즈에게 동화한 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아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 내 몸을?!”
-활성화된 동안 (불/냉기/전격/바람) 계열 피해를 무시합니다.
화신은 네 가지 속성이라면 설령 천사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 엘리멘탈 버서커로 전직하고 궁극기의 레벨이 1로 오르며 새롭게 생겨난 효과였다.
미처 흡수되지 못한 번개가 아인의 발끝부터 머리카락까지 스파크를 튀겨댔다.
물론 그렇다고 적들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원거리 공격은 유효하다.”
“접근하지 말고 멀리서 공격하라!”
마법에 이어 투창 세례가 날아들었다.
“우웃…!”
아인이 빗겨낸 창대가 후두둑 바닥에 꽂혔지만, 신성력이 실린 창은 화신 상태로도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없었다.
흡! 순식간에 절반의 체력을 소진한 아인이 신음을 흘렸다.
「괜찮아?!」
“오래 못 버틸 것 같아…!”
파치치칙-!
다시 한 번, 적들로부터 번개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마법의 경로를 미리 읽어낸 아인이 간신히 루이즈의 앞을 가로막아 모든 데미지를 흡수해 주었다.
다만, 곧바로 이어지는 투창의 데미지까지 흡수할 수는 없으니 아인은 몸을 비틀며 쏟아지는 공격을 빗겨내야만 했다.
[3921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4116의 피해를 입었습니다!]숨 돌릴 틈도 없이 쏟아져 내리는 공격.
‘언제 뒤편으로 돌아갔지?!’
파지지지지-.
현은 후방에서 신성 마법사들의 마법이 완성되어가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마법사의 수는 다섯. 일제히 쏟아지는 다섯 개의 번개를 루이즈가 버텨내기란 불가능했다.
「현, 그거 내가 못 봐줘!」
아인이 소리쳤다.
그녀 역시 전방의 성기사들에게 붙잡혀 뒤로 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우우웅. 우웅. 루이즈를 겨냥한 지팡이들의 끝에선 발사를 신호하는 마법진이 그려졌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스킬 재사용 시간들을 확인한 현은 이를 악물었다.
‘못 피한다!’
막거나 버티기는 당연히 불가능한 마법.
모든 공간이 빛으로 물든 직후, 루이즈를 향해 푸른 전격이 날아들었다.
***
“저… 좀만 천천히 가 줘요!”
마을을 빠져나와 어둠의 길로 들어선 메이데이는 곤혹스러운 듯 물었다.
늙은 뱀파이어 제사장을 따라온 것까진 좋았지만, 그의 발걸음이 너무 빨라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흥, 이 정도도 못 따라온다면 애초에 필요 없는 녀석이란 뜻이야!”
“으으, 그런…!”
제사장의 강경한 태도에 메이데이는 눈물을 머금고 마나 회복 상승 엘릭서를 마셔야만 했다.
위험한 안개 가득한 길을 혼자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염력 비행으로 그를 따라가려면 상당한 마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제사장은 끊임없이 탄식을 흘렸다.
“천공이 작정을 했구나.”
“무슨 말이에요?”
제사장은 산맥과 이어지는 어두운 협곡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파괴된 흔적을 보거라 녀석들은 어둠의 성소와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고 있지 않느냐?”
“어둠의 성소요?”
메이데이는 문득 궁금해졌다.
아까부터 성소라는 곳이 자꾸 언급되네… 대체 그게 무얼 뜻하는 걸까? 굉장히 중요한 정보 같은데.
“어둠의 성소가 뭔데요?”
“뭐, 심연에 속하는 놈이 어둠의 성소를 몰라?”
“아니… 전 그냥….”
NPC에게 중요 정보를 얻기 위해선 뇌물을 바치거나, 호감도를 얻거나, 퀘스트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 대가없이 정보를 듣게 된 메이데이는 운이 좋다 말할 수 있었다.
“흠… 하긴, 아무것도 모르던 뱀파이어 녀석도 있었으니까… 유저가 모르는 건 그리 이상한 게 아니려나?”
제사장은 혼자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성소란 어둠께서 강림하는 장소다. 원래는 그래야 하지만 지금은 계시지 않으니… 그래, 지금의 성소는 남들이 보면 ‘유적지’와 다르지 않겠지.”
어둠? 유적지?
순간 메이데이의 귀가 솔깃해졌다.
메이데이도 어둠이란 단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숨죽인 가운데 제사장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도… 나처럼 어둠을 섬기는 자들에겐 영원히 성소야. 언젠가 어둠이 부활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지.”
“부활…?”
“그래, 성소에는 어둠께서 생전에 남겨둔 힘의 조각이 잠들어 있어. 언젠가 그분께서 되찾아 가실 게다. 그 순간을 위해, 나는 이 마을에 아직까지 남아있던 거였지.”
메이데이가 이해한 설명은 이렇다.
지금의 어둠은 과거의 힘을 잃은 상태. 하지만 성소에서 그 힘의 조각을 되찾을 수 있다는 듯하다.
“성소에 가면 완전히 어둠이 부활하는 거예요?”
“그건 아니야. 성소는 그분의 안식처였을 뿐이니… 그곳에선 과거의 흔적 일부만을 찾으시겠지.”
하지만 완전한 힘을 되찾는 것은 또 아닌 모양이었다.
초월자로 가는 최소한의 자격을 얻는 과정이래나 뭐래나?
자아, 공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오자 메이데이는 도중에 이해하기를 관뒀다.
‘어둠이라면 분명 대악마였을 텐데, 힘을 찾는 걸 도와주면 나중에 부활한 어둠한테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실없는 생각에 웃음이 나오던 도중.
메이데이는 한 가지 사실이 궁금해졌다.
“근데요, 어둠은….”
“어둠께선!”
“어, 어둠께선 어째서 성소에 돌아오지 않으시는 걸까요?”
메이데이의 물음에 제사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모른다.”
“네?”
“나 뿐만 아니라 어둠을 섬기는 이들 아무도 모르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려는지도….”
어둠께서 제사에 답하지 않은 지 8년이 지났다.
마을의 뱀파이어들이 모두 떠나간 이유다.
8년이란 초월자의 기준에서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어둠에 대한 믿음이 깊은 제사장에겐 한없이 긴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어둠께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네.”
“때요…?”
“고향의 속담 중엔 이런 말이 있지. 힘없는 자는 그림자에서 힘을 기른다… 아직 그림자를 나갈 때가 아닌 거야. 최소한의 힘을 갖추는 것인지, 충실한 신하를 찾고 계시는지… 확실한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지.”
“그렇군요….”
“어쨌든 그 때를 위해 우리에겐 성소를 안전하게 보호해야만 할 의무가 있다. 이제 왜 천공이 성소를 노리는 걸 막아야 하는지 알겠는가?”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전진하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제사장의 가슴에 커다란 불꽃이 폭발했다.
쿵!
“흡…!”
처음의 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작은 그 탄성은 곧 울음이, 절규가 되었다.
아아- 아아아-
난데없이 걸음을 멈추고 소리만 뱉어내는 제사장의 모습에 메이데이는 당황해 물었다.
“뭐, 뭐에요 갑자기…?”
메이데이는 몰랐다.
어둠과 그녀를 섬기는 마물들의 영혼이 일순간 이어졌다는 사실.
제사장의 심장에도 방금 어둠이 답했다는 사실도.
이 모든 사건은 루이즈가 공감을 각성한 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각성이 현과의 대화를 계기로 일어났다는 사실은 메이데이도, 제사장도, 어둠을 섬기는 어느 마물도 알지 못했다.
“어둠께서 오셨다….”
“네?”
“으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제사장은 자신의 영혼에 새로운 끈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은 갓난아이처럼 미약한 떨림. 하지만 어둠이 지닌 색깔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크, 이럴 때가 아니지…!”
환희에 젖어있던 제사장은 곧 정신을 차렸고.
“천공의 놈들이 왜 저리 서두르는지 알겠구나! 어둠께서 돌아오셨는데 불경을 저지를 수는 없다. 나의 심장을 바쳐서라도 성소를 지켜낼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제사장은 발 빠르게 성소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기, 잠깐…!”
제사장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메이데이를 아랑곳 않고, 영혼이 이끌리는 방향으로 달렸다.
“어둠… 어둠께서 지닌 영혼이 느껴진다!”
안개 가득한 협곡에 들어서자 그 느낌은 더욱 선명해졌다.
거리가 가까워져 ‘공감’의 범위에 들어서자 그녀의 감정까지 알 수 있었다.
아…!
제사장은 다시 한 번 탄식을 흘렸다.
어둠께선 혼란스러워 하고 계신다! 방금 막 공감을 각성한 탓에 쏟아지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인가?
제사장의 좀 더 발걸음을 서둘렀다.
평생 어둠을 섬겨온 자신이 그분을 도와드려야만 하니까!
“잠깐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요!”
“무슨 소리야! 더 빨리 달려야 하거늘!”
제사장은 다급히 이동속도를 일시적으로 가속하는 버프를 걸어 주었다.
온몸이 붉은 기운에 휩싸이자 메이데이도 붉은 자취를 남기며 제사장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고, 고마워요…!”
“흥, 너도 심연인 이상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할 것이야!”
붉은 빛의 두 인영은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를 빠르게 지나쳤다.
어둠의 길을 지키는 마물들, 천공의 성기사들. 파괴된 흔적들… 여러 풍경이 스쳐갔지만 그 어느 것도 제사장의 눈길을 끌진 못했다.
마음은 오로지 어둠의 안위만을 살피고 있었으니까.
“저곳, 바로 앞에 계신다!”
“후우, 다 온 건가요?!”
“그래, 나는 오늘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어둠이 눈에 잡힐 듯한 거리까지 도달했지만, 제사장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천공이 전장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 기사단은 어느새 서서히 협공을 위한 진형으로 바뀌고 있다.
누구를? 설마, 어둠을 향해 검을 겨누려는 것인가?
그렇게 놔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제사장은 발에 불이 나도록 달렸지만.
‘잠깐….’
목적지의 코앞까지 도착했을 때 제사장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위기에 빠진 두 소녀. 한쪽은 불꽃. 한쪽은 마기에 감싸인 채였다.
간단히 생각하면 마기를 두른 쪽이 어둠일 테지만.
‘설마… 둘 다 어둠은 아니시겠지?’
제사장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렸다.
왜나면, 지금 자신의 영혼은 두 개의 끈과 이어져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멀리서는 몰랐지만 가까이 오니 자신이 두 개의 영혼과 공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어둠은 둘이나 존재할 수 없는 법인데…! 무언가 잘못되었음이 틀림없다.
‘이럴 리가 없다… 둘 중 어느 쪽이지? 내가 나설 기회는 한 번 뿐일 터인데…!’
제사장은 루이즈의 몸에 두 영혼이 들어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함께 있던 메이데이가 먼저 정확한 결론에 도달했다.
‘아인이잖아…!’
한쪽의 얼굴은 이미 알고 있으니, 소거법을 사용해 어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 저 꼬마가 어둠일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일루나에서 여러 방송을 탔던 루이즈는 제법 유명한 NPC에 속한다.
하지만 마기로 새까매진 루이즈를 메이데이가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어떤 사실에 정신이 팔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저 이펙트는…!’
언제나 아인의 발밑에 맴돌던 정체 모를 문양들이 다른 쪽 소녀에게 옮겨 가 있었다.
현이 상시로 켜두는 파장 계열 버프들.
메이데이가 세웠던 가설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아인은 현과 함께 있던 거였어!’
페스티벌에서 본 현은 남자. 아스리안은 성별을 바꿀 수는 없으니, 저 소녀가 현은 아닐 것이다.
놀라웠다.
이 뱀파이어의 말대로라면 현은 어둠과 동화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대체 얼마나 커다란 퀘스트를 하고 있는 걸까?
자신도 대악마 퀘스트를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기만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저건 검은 마을 퀘스트가 아니야…! 다른 퀘스트다!’
메이데이는 문득 케이지의 말을 떠올렸다.
“피지컬, 스펙, 정보력, 그런 것들이 현의 전부라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아스라 평균 랭킹 5위였고, 지금은 다크니스 간부진으로 활동하는 그의 말이었다.
RPG게임에서 그것들을 빼면 뭐가 있냐고 누군가 되물었을 때의 대답도 기억하고 있었다.
“똑같은 스킬의 응용력. 똑같은 정보의 활용법. 그런 것들이 일반인과 다르지.”
같은 조건으로도 불리한데 아스라 시절엔 같은 조건조차 아니었으니 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며 케이지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악마의 퀘스트를 받은 유저는 나랑 라티스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메이데이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커뮤니티 바깥의 세계는 자신이 여기던 것보다 훨씬 거대할지도 몰랐다.
현이 벌써부터 어둠과 접촉한 것은 케이지의 말대로…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 덕분이겠지.
숨겨진 이벤트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가장 빠르게 특정 루트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까지… 메이데이는 약간의 질투를 느꼈다.
전투 및 컨트롤은 자신 있지만,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에 관해선 메이데이 스스로도 부족하다 여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투는 나도 자신 있어! 염력술사는 마법사 치고 근접전도 조금 되니까… 일대 일로는 현이나 아인에게도 버틸 수 있을지도.’
하지만 메이데이는 몇 초 만에 자신의 생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전방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투.
최근에 부쩍 실력이 상승한 메이데이에게도 보는 눈이 생겨났다.
예전에도 아인의 움직임은 놀라웠지만, 한 계단 올라서서 바라본 지금… 현과 아인의 움직임은 말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스킬 활용도가 다르다는 케이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실감이 날 만큼.
만약 이 전투의 동영상이 공개된다면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라 확신이 들 정도였다.
‘대체 뭔 직업이야, 저건!’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어둠이라 추정되는 소녀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마기의 폭풍.
빠르게 검을 회전시키는 것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광역 마법처럼 보였다.
‘무슨 스킬이지…?’
끊임없이 지속되는 폭풍 때문에 천공의 기사들은 쉽게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제발… 제발 저건 퀘스트 스킬이기를! 퀘스트 때만 쓸 수 있는 스킬이어야 해…!“
한눈에 봐도 300레벨 엘리트 기사들이 경계할 만한 기술을 유저가 난사하고 있었다.
만약 그 스킬이 ‘어둠’이 아닌 ‘유저’의 것이라면…? 메이데이는 도저히 현이나 아인을 따라잡을 엄두가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쨌든, 현과 적대하면 안 된다는 건 확실해’
얼마 전 케이지는 유니크 아이템을 바쳐서 관계를 개선하자고 말했다.
다크니스의 간부진들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지만, 어쩌면 그 말은 틀리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니지! 메이데이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자존감이 낮아져서야 아무리 지나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알아냈다!”
갑작스런 목소리가 메이데이의 상념을 깨웠다.
“에?”
“저쪽… 저 분이 어둠이시다!”
제사장은 루이즈를 가리키며 외쳤다.
현이 동화의 대상을 변경했던 찰나였다.
일순간 루이즈의 육체에는 하나의 영혼만이 담기게 되었고, 제사장은 그 순간의 느낌을 잡아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