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65)
초월자의 격
“근데요, 지금 저희도 위험한 거 아니에요?”
“뭐라…?”
어느새 메이데이와 제사장의 곁에도 천공의 기사들이 달라붙었다.
“감히, 천공이 나의 앞길을 막는 것이냐!”
콰아아앙!
제사장이 전방으로 폭사한 마기가 성기사의 검과 맞부딪쳤지만, 성기사들은 조금 밀려났을 뿐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차가운 그들의 눈동자엔 절대 이 늙은 뱀파이어를 보내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아인과 루이즈 모두 뱀파이어의 모습이었으니, 제사장도 그들과 비슷한 위험한 마물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놈들!”
제사장의 마음이 타들어갔다.
자신은 어둠만을 위해 살아온 뱀파이어… 위기에 빠진 어둠을 자신이 지켜내야만 하는데!
궁극기를 사용한 아인마저 버티고 버티다 한계에 달한 상황.
마침내 제사장은 루이즈가 전격 마법의 세례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순간을 목격하고 말았다.
저것은…! 어둠께서 저 번개를 버틸 수 있을까?
‘아… 저건 죽었다.’
메이데이는 혀를 차며 확신했고.
“안 돼-!”
루이즈에게 쏟아지는 뇌전을 지켜보는 제사장은 절규를 내뱉었다.
신성한 빛은 어둠의 협곡을 새하얗게 태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잠시간. 제사장에겐 영원처럼 느껴진 시간이었다.
***
광휘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전격이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순간.
현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고 느꼈다.
한계에 달한 집중력은 짧은 시간에도 여러 사고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피할 방법이 없어!’
기도하는 사제복의 무적 효과는 아까 발동했기 때문에 번개에 직격당하는 동시 루이즈는 소멸할 것이다.
‘귀환 스크롤을 써야 하나?’
하지만 오늘을 놓친다면 루이즈는 자아 없이 공감만 다루는 초월자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자아가 약한 초월자는 곧 공감에 먹혀 무너진다.
루이즈의 마음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다음 기회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당장 죽는 것보단 낫잖아? 어쩔 수 없이 귀환 스크롤을.
「쓰지 마!」
아인의 목소리가 현의 사고에 끼어들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버틸 수도 없는 마법. 루이즈가 맞으면 반드시 죽을 텐데?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 짧은 순간, 현은 자신의 의문을 배재했다.
자신보다 아인을 믿기로 결정한 이유는 그녀의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콰르르르르!
굉음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상당히 멀리서 지켜보던 메이데이도 빛살에 눈을 찌푸렸으니, 현은 정말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안 죽었나…?’
시야는 암전하지 않았다.
귀청을 찢는 듯한 굉음도 선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로그아웃당하지 않았다. 자신과 루이즈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
아인이 대신 맞아 줬을까? 하지만 아인에게도 그럴 여유는 없었을 텐데?
현은 계속해서 의문을 띄웠고, 잠시 후 시야가 회복되었다.
사르르르.
하늘에서 떨어져 빛의 알갱이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아스리안 특유의 사망이펙트란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은빛의 알갱이가 가장 빽빽한 곳에 살아남은 상처 입은 마물들.
우우우- 거무튀튀한 빛이 감도는 유령들이 구슬픈 울음을 흘려댔다.
‘유령…? 대신 맞아준 건가?’
지금의 현은 마물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으니 경배하는 존재를 지키려는 유령들의 의지도 읽어낼 수 있었다.
“아… 나는… 그냥…!”
형언할 수 없는 얼굴의 루이즈가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는 사이, 나머지 유령들마저 성기사들의 검에 찢겨나갔다.
그들의 희생을 뒤로하고, 현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물들의 동태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이제 알겠어….’
전장에 흐르는 공기가 바뀌어 있었다.
수많은 마물들은 그저 살육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달려드는 적들을 막아내다 형체를 잃고 스러져 가는 해골들.
신성 마법사의 캐스팅을 방해하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늑대무리들.
하늘의 사각을 차단하기 위해 안개 위를 배회하는 유령들.
더 멀리, 이전에 보았던 늙은 뱀파이어가 이쪽을 보며 절규하는 모습까지.
천공도, 심연도, 협곡 안의 모든 영혼들은 오직 루이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물은 어둠을 지키려는 거야.’
캬아아아!
갑자기 현의 눈앞으로 검은 형체가 휙 지나갔다.
한 마리의 늑대인간은 한 명의 성기사를 자신의 몸으로 붙잡은 채, 그대로 안개의 벽에 몸을 날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인간의 비명소리. 다음에 늑대의 울부짖음까지.
동화로부터 전해지는 ‘공감’으로, 현과 루이즈는 늑대인간이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지. 공감을 각성한 직후인가?’
현은 자신이 천공에만 눈이 팔린 나머지 심연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마물들은 루이즈가 ‘어둠’임을 깨달았으며, 어둠을 위해 거리낌 없이 목숨을 바치고 있음을.
루이즈의 심장을 찔러대던 고통의 종류도 세세하게 알 수 있었다.
마물들은 그저 죽음을 앞두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절규는 어둠을 지키지 못했다는 한탄.
하하… 현은 무의식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이해한 것들을 루이즈에게도 알려 주고 싶었다.
「야, 보고 있어?」
“…….”
루이즈는 아무 대꾸도 없었지만, 동화는 목소리를 쓰지 않고 상대에게 기분을 전한다.
방금 현이 깨달은 사실들은 루이즈도 머지않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다들 너만 보고 있잖아!」
현은 지금의 루이즈에겐 채찍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어린 소녀에겐 잔인한 이야기일지도 몰라.
하지만 악마. 어둠의 대악마가 되어버린 이상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는 방법은 없었지.
스스로의 공감에 먹혀버린 악마의 말로는 소멸밖에 남지 않는다.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루이즈의 운명은 불 보듯 뻔했다.
「강해지고 싶다고 말했지?」
그러니 지금은 인식을 바꾸는 수밖에.
「그럼 악마의 자격부터 갖춰.」
루이즈가 공감에 침식되어 부서질 바에, 현은 차라리 부담이라는 족쇄를 안겨 주기로 했다.
인간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들을 바라볼 때 초인적인 힘을 얻는다고 한다.
루이즈가 인간은 아니지만… 나사가 빠진 초월자니까. 인간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
「악마는 공감으로 힘을 얻고, 공감으로 힘을 행사하는 존재야. 공감도 못 버텨서야 악마라고 할 수 있겠냐?」
우우우웅.
갑자기 루이즈의 발밑에 마법진이 그려졌고, 현은 정신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마기를 사용하는 모든 스킬이 1 Lv 상승합니다!] [10분간 지속됩니다!]‘버프…?’
옆을 바라보니 리치 하나가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지팡이를 뻗고 있었다.
뼈다귀밖에 남지 않은 몸체엔 기다란 창이 두 자루 꽂혀 있었다.
“어린 어둠이시여… 그대에게 남은 모든… 것을… 바치겠나이다…!”
그렇게 턱을 달그락거리던 리치는 말을 마치자마자 빛의 알갱이가 되어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리치의 중얼거림은 작지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목소리가 공감으로 전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모든 방어력이 200% 상승합니다!] [5000미만의 피해를 모두 무시합니다!] [초당 500의 마기를 자동으로 회복합니다!]다음 순간, 현은 전율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마법들이 차례차례 루이즈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마물 중에도 마법사 계열은 많았고, 그들은 지금 어둠의 아군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디어! 뵙습니다!”
“그, 그대는…!”
한 마리의 늙은 뱀파이어가 루이즈의 곁까지 다가와 있었다.
혼란스런 전장 속에서도 루이즈는 얼마 전 마을에서 만났던 그 뱀파이어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제사장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절망이 아닌 환희의 눈물이었다. 지금을 위해 오늘까지 살아왔다고 믿는 그였기에.
‘꼭 뜻을 이루소서.’
공감으로 마지막 말을 전한 제사장은 붉은 기운으로 녹아내려 루이즈의 전신에 흡수되었다.
수백 년의 기원에 담긴 힘이 이 한순간을 위해 불타올랐다.
[뱀파이어, 하카베른이 그대에게 최후의 제사를 바칩니다!] [어둠이 지닌 힘의 극히 일부분을 되찾았습니다!] [5분간 지속됩니다!]효과를 설명하는 메시지는 고작 한 줄이었지만. 상태 창을 확인해 본 현은 잠시간 말을 잊었다.
‘어둠의 힘?!’
루이즈의 상태 창은 유저의 것이라 보기 힘든 수준으로 바뀌어 있었다.
스탯은 서너 배, 체력과 마나는 수십 배.
하지만 그런 수치상의 것들보다 더욱 큰 변화가 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어둠이란 초월자. 힘을 되찾는다는 것은 초월자에 한 발 가까워진다는 뜻!
루이즈의 공감은 자아와 균형을 이루었다.
일시적이긴 해도,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미량의 자아가 회복되었습니다!]“하… 하아… 하으으…!”
루이즈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자아를 얻는 순간 막혀 있던 자신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걔… 상태가 이상해?!」
루이즈의 격한 반응에 아인이 깜짝 놀라 물었지만.
「아냐, 괜찮아진 거야!」
「나아진 거라고…? 그게…?」
정확히 말하면 해소된 것이었다. 자아를 얻은 루이즈는 공감의 감정보다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두 감정을 완전히 구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초월자로서의 출발선에 서게 되는 것이다.
‘아직 부족해!’
그래도 현은 한 번 더 채찍질하기로 결심했다.
루이즈의 스펙이 상승했어도 아직 기사단을 맞상대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에.
초월자의 능력을 가졌어도, 갖고 있기만 해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아와 공감을 얻은 루이즈는 이제 마물들을 지휘할 만한 악마의 격을 갖춰야만 했다.
「루이즈, 명령해.」
양쪽 볼에 눈물을 흘리며, 현은 지시했다.
「이제 널 보호할 필요 없으니까… 전부 마법사들을 공격하라고 지시해.」
번개의 마법은 쉽게 대응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신성마법사들만 봉쇄하면, 나머지는 지금의 자신과 아인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현은 주어진 정보로부터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명령을…? 내가…?”
「그래.」
현은 루이즈가 무엇 때문에 주저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마물들을 사지로 보내는 것에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 게다가 유저이기도 한 자신은 마물에 대한 루이즈의 기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보통의 악마들이 루이즈와 같지 않다는 사실만은 안다.
「네가 해.」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은 어둠으로 살아갈 루이즈가 극복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이게 악마가 싸우는 방법이야.」
현은 루이즈가 행동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잠시 후, 마물이 진열을 갖추자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낀 것일까? 성기사 한 명이 거리를 좁혀왔다.
‘온다!’
컨트롤까지 맡겨둘 생각은 없었던 현은 직접 루이즈의 몸을 움직였다.
콰아아아-!
검은 바람이 루이즈를 휘감아 도는 순간 현은, 스킬이 이전과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칠흑의 광풍 Lv.4(+2)]-전신의 바람으로 이동 및 공격합니다.
-[마력] X 1.5의 피해를 가합니다.
-마기를 섞으면 위력이 X144배만큼 추가로 증폭됩니다.
‘스킬이 변했다…!’
현은 상태 창을 힐끗 보며 숨을 들이켰다.
보유한 마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팟-!
때마침 루이즈의 코앞에 섬광이 그려졌다.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칼날. 엘리트 성기사의 일격!
이전이었다면 현은 무조건 피하고 봤겠지만,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그대로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빛과 어둠이 서로 얽혔고, 그 뒤엔 어둠밖에 남지 않았다.
성기사는 경악한 눈으로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전 루이즈의 힘을 상정하고 있었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검을 쥐던 자신의 팔 한쪽이 통째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큭…! 이게 무슨…!”
화아아악!
빛이 오밀조밀하게 모이더니 그의 팔은 순식간에 재구성되었다.
중상을 입어도 순식간에 스스로 회복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성기사의 무서운 점이었지만.
“크어억!”
광풍이 다시 한 번 몰아쳤다.
그의 오른팔이 다 재생되기도 전에, 왼팔과 어깨까지 전부 풍압에 뜯겨나갔다.
“라인데르!”
“안 돼, 접근하지 마…!”
동료가 구원하려 나섰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직전 더욱 거대한 마기의 태풍이 그의 전신을 옥죄었다.
마기의 바람은 어느새 아인의 ‘이프리트의 발톱’처럼 거대한 야수의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빛을 모조리 삼켜버리는 어둠의 손아귀. 그것이 자신을 움켜쥐자 성기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빛으로 폭발했다.
마치 안개에 삼켜지듯, 죽음의 이펙트조차 어둠에 묻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전장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
멀리서 모든 광경을 지켜본 천공의 마법사는 순간 턱하고 숨이 턱하고 막힘을 느꼈다.
“저것은, 설마…!”
뱀파이어라고 생각했던 저 어린 소녀가 누구인지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살이 에일 듯한 기운. 마기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존재는 오직 그것 뿐.
“어둠…!”
무엇보다도, 저 불길한 칠흑의 기운은 평범한 마물이 지닐 수 없는 기운이었다.
“어둠이다!”
누군가의 외침을 신호로. 수십의 눈동자가 루이즈를 향했다.
기사단이 목숨을 걸고 지하로 내려온 것은 바로 어둠의 싹을 뽑아내기 위해서였다.
힘을 되찾은 어둠이 지상에 올라오면 세계는 혼돈에 빠질 것이라는 빛의 신탁이 있었으니.
“경계 태세로!”
“섣불리 나서지 마라, 상대는 어둠, 설령 힘을 되찾지 못했어도 위험한 존재다!”
지금 그녀는 온전한 힘을 되찾은 상태일까? 아니면 더 찾을 것이 남았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기사단은 이곳에서 어둠을 죽여야만 한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스킬 화력은 충분하고도 남지만… 마기 소모가 너무 많아!’
한편, 현은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한 때였다.
검은 바람이 바뀌었다. 위력이 굉장해졌지만, 그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를 잡아먹는 것으로.
[파티가 해제되었습니다!]「부탁해 아인!」
그림자 방패가 켜졌고, 그 위에 불꽃이 덧씌워졌다.
[마기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다음 어둠의 검 사거리가 대폭 증가합니다!] [어둠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검에 어둠의 권능이 깃듭니다!] [‘아인’님이 파티에 참여하였습니다!]‘이렇게 항상 마기를 유지해 두는 편이 좋겠지.’
마기를 재충전하던 도중, 현은 스쳐간 메시지에 흠칫 놀랐다.
‘잠깐… 방금 뭐였지?!’
잘못 본 건가? 다시 메시지 창을 올려보았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마기가 충전되는 동시 이전에는 없던 내용이 새롭게 나타나 있었다.
어둠…? 어둠의 검…? 권능? 무언가 연관성이 있는 건가?
그동안 아무런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현은 어둠의 검을 이름만 닮은 별개의 스킬이라 여기고 있었다.
‘제길! 일단 써 보고 아니면 마는 거지!’
자세히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이미 루이즈를 노리는 성기사들이 일제히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현은 어둠의 검을 뽑아 그대로 회전시켰다.
검에 깃드는 어둠의 권능.
그 효과를 알게 된 것은 성기사의 검과 어둠의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이었다.
“웃…!”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려오는 동안, 현은 자신이 일으키는 현상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둠이 빛을 잡아먹었다.
아니, 빛을 삼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빛을 뿜어내는 검도, 검을 들고 있는 성기사의 손과, 팔 몸통까지 빨아들였다.
검의 회전이 끝났을 때 루이즈의 곁에 남아있는 건 파티원인 아인뿐이었다.
시체도, 비명소리도, 모두 함께 검으로 빨려들어 사라진 뒤.
지면의 일부까지 사라져 버린 탓에 루이즈는 흙의 탑 꼭대기에 선 꼴이 되었다.
“…….”
흔적도 없이 동료를 잃은 성기사들은 그야말로 얼이 빠졌다.
놀란 것은 천공의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뭐, 뭐야… 방금?!」
아인마저도 동그란 눈으로 입만 벌렸다.
현은 뭐라 대답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어둠의 힘 : 252초]줄어드는 버프의 지속시간을 확인한 현이 다급히 외쳤다.
「몰라, 일단 싸워!」
「그, 그렇지!」
일행이 움직이자 기사단은 화들짝 놀라 반격했다.
파지지직!
한 줄기의 번개가 기습적으로 날아들었다.
지금의 루이즈라면 맞아도 죽지 않겠지만. 현은 무의식적으로 검을 가로로 눕혔고.
전격마법은 어둠의 검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삼켜져 버렸다.
타르타르의 스킬 중 하나를 ‘블랙홀’이라 이름붙이긴 했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짜 블랙홀이 아닐까?
물체 뿐 아니라 빛, 소리, 마나의 흐름까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대검이니까 말이다.
‘마법까지 흡수한다…!’
콰직!
그 틈에 아인도 발톱으로 적을 내려찍었다.
성기사는 제자리에서 방패로 막았지만….
푸욱! 이어서 어둠의 검이 아인의 복부를 뚫고 튀어나왔다.
파티원 시스템.
아인을 관통한 검이 성기사의 방패를 지나 가슴에 박히자 그의 얼굴은 절망에 물들었다.
“아, 안 돼….”
콰아아아!
아인은 눈앞에서 검에 꽂힌 인간의 신체가 급격하게 검속으로 빨려드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언젠가 현이 자신에게도 저걸 해 주었으면… 그럴 기회가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아인이었다.
“물러서라!”
“맙소사…! 어둠이 지상에 올라선다면 세상엔 종말이 찾아오겠구나!”
“단장님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 단장님이라면 지금의 어둠을 억제하실 수 있을 거다!”
뿔뿔이 흩어지는 기사단을 추격하는 도중, 현은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검이 꺼지질 않아… 왜지?’
기억대로라면 어둠의 검은 [공감력/100]초 동안 지속된다.
‘공감력…? 혹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은 상태 창을 열어보았다.
[공감력 402]스탯 포인트의 대부분을 공감력에 투자한 것은 사실이지만, 4초는 이미 한참이나 지났다.
‘스탯의 효과가 아니라면… 이것도 권능이겠지.’
현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어둠의 힘이 지속되는 시간은 단 5분. 지금은 검이 시들기 전에 움직여야 하는 때였다.
화악!
거대한 대검이 공간을 절단했다.
마치 어둠이 세상을 집어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쩍 벌리는 것만 같았다.
***
“어둠이라고?”
길을 따라가던 도중, 단장 샤크론은 진군을 멈추었다.
그것이 신탁의 내용이었기 때문에 기사단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부관의 보고에 따르면 어둠은 어째선지 유적지가 아닌 다른 장소에 등장했다고 한다.
그것도 이미 기사단이 지나쳐온 길 위에.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부관은 간이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넣자 머지않아 후방으로부터 전송된 영상이 허공에 재생되었다.
뱀파이어인 아인과 루이즈.
샤크론은 우선 아인의 모습에 눈길을 주었다.
“그때 그 뱀파이어?”
그러나 다른 쪽의 소녀가 마기의 바람을 두르고 어둠의 검을 뽑아내는 순간, 샤크론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쩍였다.
“어둠이군!”
빛을 빨아들이는 검… 저 저주받은 능력을 가진 존재는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다.
어째서 어둠의 유적지가 아니라, 중간에 등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어둠임은 확실했다.
“뱀파이어의 탈을 쓰고 있지만… 어둠이 분명하다!”
“지원을 요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라?”
“단장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 위험해 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부관의 말에 샤크론은 빤히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영상에 기록된 어둠은 틀림없이 강했다. 성왕국의 5대 기사라 불리는 자신도 오싹함을 느낄 정도로.
하지만….
성서에 기록된 어둠은 손짓 한 번에 국가를 파멸시켰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어둠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샤크렌은 힘도, 속도도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곧 깨달았다.
그렇다, 저 ‘검’만 조심한다면… 어둠을 쓰러뜨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으리라.
“어둠은 지금 힘을 잃은 상태야. 지원은 필요 없다. 우리 기사단만으로 충분해.”
“네…? 하지만.”
“본국의 신관들도 신성력이 모자랄 테지. 그들에게 부담을 안겨줄 필요는 없다.”
솔직히 말해, 샤크론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만약 자신이 혼자서 어둠을 처단한다면, 그 정도 공이라면 수천 년 뒤에도 자신의 이름은 역사에 새겨지지 않을까?
5대 기사 중 말석이라는 오명도 단숨에 벗어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단장의 뜻을 알아챈 부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평소에도 공을 위해서라면 손속이 잔인해지는 그였지만, 이 중요한 순간에서도 공을 탐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둠이 목표한 바를 이룬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겁니다!”
“…그럴 일은 없다. 자, 보아라.”
샤크론은 탐욕스러운 자였으나, 어리석지는 않았다. 오히려 독사처럼 교활했다.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는 날카로운 감각은 힘이 다른 자들보다 모자람에도 성왕국의 5대 기사로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씨익. 샤크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쉽게 넘길 뻔했던 어떠한 사실을 포착해 냈기 때문이었다.
“어둠이 서두르는 것이 느껴지지 않느냐?”
샤크론은 수정구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어둠이 성기사들을 찢어발기는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웃기만 했다.
“봐라 지금도, 어둠은 양옆으로 지나치는 병력을 죽이지 않았어.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고 있지… 그 이유를 짐작하겠는가?”
부관은 자신의 부하들이 죽어가는 광경에도 태연한 단장의 물음이 오싹했지만, 우선은 답했다.
“그건… 아마 언제든 죽일 수 있으니까….”
“아니. 그 반대다.”
“네…?”
“뒤쳐진 자들을 죽일 만한 여유가 없는 것이지.”
루이즈의 버프엔 지속시간이 존재했으니, 그 추측은 현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샤크론은 어둠이 보이는 행동거지로부터 그녀가 서두르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어둠은 악마, 즉 초월자다.”
샤크론의 중얼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 같은 인간은 힘을 쓰는 데 별 제약이 없지만 초월자들은 그렇지 않아. 탈진 상태에서 회복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그 시간은 사용한 힘의 크기에 따라서 수일, 주… 혹은 수십, 수백 년일 수도 있다.”
샤크론의 웃음기가 짙어졌다.
“자, 이제 어둠을 잡아낼 방법을 알겠지? 나의 기사단의 인원은 약 300명이다. 그들을 전부 죽이기 전에 어둠의 힘이 빠지겠지. 그리고 나라면 힘이 빠진 어둠을 죽일 수 있다.”
“기사단의 전력을… 소진한다고요?”
“그래, 역사에 이름이 남을 희생이야. 그에게도 영광일 테지.”
모두가 죽어서 어둠의 힘을 빼놓으면 그때 자신이 나선다는 것이 샤크론이 세운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둠의 힘이 다하기 전에 기사단이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다. 그 때는 자네의 말대로 지원을 요청할 테니.”
샤크론의 말은 수많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부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장의 뜻에 반발한 이들이 어떤 말로를 맞았는지를 알고 있었으니. 부관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부디 천공의 앞날이, 자신들의 앞날이 무사하기를….
***
화아악!
검은 수평선이 그어졌다.
어둠의 검이 세상을 절반으로 나누는 순간 루이즈의 근처에 있던 자들의 운명은 둘로 나뉘었다.
지면에 붙어있던 자. 그리고 지면에서 뛰어오른 자.
전자는 소리 없는 죽음을 맞았고, 후자는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흩어져, 뭉쳐있지 마라! 한꺼번에 죽는다!”
창공에선 안개의 구름이 이따금 번쩍였다.
하지만 어둠을 마주한 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빛과 소리 모두 어둠의 검에 삼켜져 버리는 까닭이었다.
이번엔 어둠의 검이 하늘을 휘저었다.
높이 도약했던 자들의 운명은 다시 한 번 둘로 나뉘었다.
“크아악!”
하반신이 사라져 고통스러워하는 마법사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바로 옆의 성기사는 상반신이 사라져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었으니까.
격차를 깨닫는 것은 단 몇 초면 충분했다.
눈앞의 존재는 어둠. 과거 세상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대악마의 현신!
전의를 상실한 이들은 싸울 생각도,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아인, 잠깐 안을게!」
「어, 조, 좋아!」
어둠의 사정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생체리듬 가속!’
어둠의 신위에 기사단이 멈칫한 그 틈을 타, 현은 아인을 안아들고 질주를 시작했다.
버프의 지속시간이 끝나기 전에 기사단의 선두를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
패잔병 따위를 상대하기보단 앞을 가로막는 것만 철저히 부수고 지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우우웅-.
순간, 전방에서 발동된 마법.
이펙트만으로 그 마법의 정체를 깨달은 현은 빙그르르 회전했다.
콰지지지직!
땅에서 거대한 얼음기둥들이 솟아올랐지만, 어둠의 검에 닿는 순간 갈라지고, 이내 사라졌다.
「현, 위쪽에…!」
「알고 있어!」
땅울림의 여파로 바로 옆의 절벽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었다.
마법을 사용한 자들은 이것을 노렸던 것일까?
평소라면 무너지는 절벽의 틈새로 지나갈 배짱을 부리진 않았겠지만, 지금의 현에겐 어둠의 권능이 있었다.
콰드드득-!
어둠의 검은 무너져가는 절벽마저 반으로 갈랐다.
쏟아지는 돌멩이들과 안개까지 깔끔하게 소멸한 덕분에 달리는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인, 내 뒤로!」
현의 외침과 동시, 새하얀 광휘가 일행을 강타했다.
대소각.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던 마법.
루이즈의 등 뒤에 숨자마자 아인은 빛과 어둠으로 양분되는 세상을 보게 되었다.
자신이 선 쪽은 어둠의 영역… 뒤편으로 끝없는 그림자가 늘어서 있었다. 대소각의 빛이 어둠의 검에 삼켜지며 대지에 그려진 풍경이었다.
‘이것이… 나의 힘.’
루이즈는 자신이 들고 휘두르는 거대한 대검을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악마의 힘이구나…!’
자아를 찾은 뒤부터 마음이 진정된 그녀였다.
마물들의 고통과 슬픔은 여전히 느껴지지만, 더 이상 그것에 휘둘리지 않았다.
아니, 루이즈의 가슴에 슬픔은 사라져 있었고 희열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앞으로 나아가는 어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물들은 기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가지고 싶다.’
갑자기 루이즈의 욕망이 솟아올랐다.
힘을 추구하는 것은 악마의 본성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악마가 힘을 탐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만을 위해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 무수한 감정들을 외면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초월자로서의 힘을 갖추는 순간 루이즈는 자신과 이어진 모든 영혼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해골이나 유령 따위의 하찮은 마물의 목숨까지도 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거리의 영혼.
‘현….’
그의 것이 가장 크게 느껴졌다. 자신이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그가 자신을 특별히 여기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공감이란 어느 쪽에서 시작된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으니까.
‘그대처럼 되고 싶구나.’
악마의 힘을 깨우쳤다 한들 현이 없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악마의 자격을 갖추라고,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루지도 못하는 힘을 가질 자격은 없다는 거겠지.
루이즈의 안에서 현의 존재는 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다.
[어둠의 힘 : 105초]한편, 현은 전투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냉정하게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역시, 이걸로도 안 되나…!’
현은 신음을 삼켰다.
남은 어둠의 힘 지속시간과 보이는 상황을 토대로 계산한 결과.
적들을 전멸시키는 것도, 적들을 앞지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 절대적인 힘이 지속되는 시간은 무한하지 않으니까.
설상가상으로, 루이즈가 압도적인 힘을 선보인 이후부터 기사단은 교전 자체를 피했다.
원거리 마법만 날리거나, 지형을 파괴하여 전진을 늦추는 등의 소극적인 방법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둠의 힘을 소진하라는 샤크론의 지시가 기사단에 전파되었기 때문이었다.
「현, 우리, 어디쯤이야…?」
아인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현은 인터루프에서 찾아냈던 지도를 힐끗 본 뒤에 답했다.
「모르겠어….」
「방금 지도 본 거 아니야?!」
「봐도 알 수가 있어야지!」
안개가 빽빽한 협곡은 그야말로 미궁. 안개의 바다라는 말이 어울리도록 넓고 광대했다.
지도를 아무리 살펴봐도 현은 자신들의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둠의 힘 : 91초]하지만 버프의 지속시간이 끝나면 루이즈는 원래대로 되돌아갈 테고, 적들이 그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어둠의 힘을 잃은 루이즈는 성기사 한 명을 상대하기조차 벅찰 테니.
「그럼 어떡하게?!」
「도망칠 거야.」
아인은 잠깐 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천공의 진형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사방에 천공이 가득한 이곳에서 어떻게 도망친다는 거야?
「어디로…?」
「위로.」
말을 끝남과 동시, 아인은 자신을 꽉 안아드는 현의 손길을 느꼈다.
루이즈의 모습이었던 탓에 큰 동요는 없었지만.
파아앙-!
직후에 들려온 커다란 파공성. 다음엔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바람의 폭발은 일행을 한순간에 수백 미터 상공으로 도약하도록 만들었다.
창공에서, 아인은 그림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하늘을 향해 곧장 세워진 검. 그것에 닿자마자 빨려드는 검은 안개들.
흡수의 권능은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는다. 현은 구름 위의 안개를 빨아들여 하늘의 길을 연 것이다.
‘괜찮을까?’
깜깜한 허공을 바라보며 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일렁이는 안개의 바다가 자신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 한번 발을 들이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을 거라고… 어둠에 묻혀 덧없이 사라질 것이라 으름장을 놓는 것만 같았다.
‘괜찮기를…!’
파아앙! 재차 파공성이 울렸다.
허공에 만든 바람장벽을 밟은 현은 그대로 어둠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고오오오. 두 소녀를 삼킨 직후, 하늘의 안개는 무서운 기세로 제자리를 찾아갔고, 이내 잠잠해졌다.
***
루이즈가 자아를 얻은 때에도, 메이데이는 멀리서 아인과 루이즈를 뒤따르고 있었다.
갑자기 사라진 뱀파이어에겐 관심도 없었다. 누군지도, 어째서 사라진지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현으로 추측되는 소녀를 따라가는 도중, 메이데이는 안도의 한숨을 터뜨렸다.
‘다행이야! 역시, 퀘스트 스킬이었어! 하핫, 역시, 저 스킬이 유저의 것일 리가 없지!’
엘리트 기사들을 한방에 소멸시키는 경악스러운 대검은 아무리 봐도 유저의 능력이 아니었다.
네임드 보스의 스킬을 사용하던 자신처럼, 어둠의 스킬을 사용하는 거겠지!
만약 유저에게 저런 스킬을 줬다면 메이데이는 게임 밸런스를 언급하며 개발진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래도 아스리안 약관 때문에 별 성과는 못 거두겠지만.
어쨌거나 방금 전 사태로 천공의 적들이 전의를 상실한 덕에 메이데이는 안전하게 현을 뒤따라갈 수 있었다.
‘확실히… 대단하긴 하네.’
어느 순간부터 원래의 목적도 잊고 현의 플레이를 감상하게 되었다.
얼핏 아인과 비슷하지만, 확실히 아인과는 다른 무빙.
메이데이의 실력은 아직 현의 모든 움직임을 이해할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현의 플레이엔 보는 이의 정신을 홀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친하게 알고 지내는 정도만 되도 좋을 텐데.’
확실히 현의 능력이라면 다크니스에 매력을 못 느낄 만도 했다. 다크니스 뿐만 아니라 어느 길드도 영입할 수 없겠지.
최소한의 접점이라도 있다면 좋겠는데, 그것도 아니었으니 메이데이는 아쉬움이 커졌다.
어떻게든 친분을 쌓을 방법은 없을까?
‘이러면 조금 도움이 되려나?’
메이데이는 잠깐 고민하다가 전투불능에 빠져 뒤쳐진 패잔병들을 자신이 대신 마무리해 주기로 했다.
공적치 시스템이 정확하다면… 자신이 죽인 성기사들이 지닌 대부분의 경험치는 그의 것으로 돌아갈 터.
화악! 앞쪽에서 연속으로 터져 오르는 레벨 업의 이펙트에 메이데이는 깜짝 놀랐다.
‘방금 2레벨이 한꺼번에 오른 건가?!’
기사들의 레벨을 350이라 잡고 계산해 보았다… 의외로 현과 아인의 레벨은 생각보다 낮은 건가?
당연히 2차 전직을 마쳤을 거라 추측했지만, 어쩌면 자신보다 낮은 건지도.
자신이나 라티스는 이제 곧 200레벨에 도달하니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메이데이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이러면 내가 도와준 건지를 모르잖아!’
상대가 자신을 인식조차 못해서야 선의는 전해지지 않는다.
‘얼굴이라도 보여야겠어!’
서둘러 둘과의 거리를 좁히려던 메이데이는 귀를 때리는 바람의 폭발과 함께 솟아오르는 두 신형을 보고 경악했다.
‘무, 무슨 점프력이 저렇지…?’
메이데이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리 지나도 둘의 모습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하늘로 솟아버린 걸까?
스스스.
그렇게 둘이 사라진 장소엔 다시 하늘의 안개가 스멀스멀 차올랐고.
뿔뿔이 흩어졌던 성기사들의 인기척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차! 숨어야 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메이데이는 재빨리 근처에 숨었다.
협곡의 안개와 바위의 틈에서 숨죽이는 도중, 바깥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파바바바방-!
갑자기 날아든 사슬 검이 마물들을 줄줄이 터뜨렸다.
전방에서 소식을 들은 단장, 샤크론이 군마를 탄 채 되돌아온 것이었다.
단숨에 전장을 고요하게 만들고서, 근처의 기사에게 물었다.
“어둠은 어디로 갔지?”
“그것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얼핏 보기엔 하늘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늘이라고…?”
샤크론은 안개가 가득한 협곡의 절벽 너머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무능한 것들을 믿었군!’
어둠은 힘이 다하기 직전에 도망친 것으로 보였다.
자신이 조금 더 빨리 도착했어야 하는 걸까? 자신이라면 어둠의 발을 묶을 수 있었을 텐데.
어둠이 이토록 빠르게 힘을 소진하고 꽁무니를 뺄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관의 물음에 샤크론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래, 아직 어둠을 잡아낼 기회는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천공의 신탁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빛께서 말씀하시길 어둠의 유적지를 찾아가면 어둠의 싹을 뽑아낼 수 있을 거라 하셨다.
어둠은 결국 유적지로 찾아온다는 뜻. 그렇다면 기사단도 서둘러야 할 터였다.
“…좀 더 빠르게 진군하라.”
“옛!”
“어둠보다 먼저 도착해야 한다. 반드시!”
두두두두!
말소리, 발걸음소리가 사라지자 안개 가득한 협곡은 정적에 휩싸였다.
숨죽이고 있던 메이데이가 고개를 빼꼼 내민 것은 한참 만이었다.
뱀파이어 제사장에게 받은 버프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나 이제… 어디로 가야 되는 되지…?
현의 일행도, 기사단의 자취도 놓쳐버린 메이데이의 앞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안개 가득한 협곡의 외길을 따라 외롭게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
알 수 없는 곳에 착지한 현.
검을 쭉 뻗은 채,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아무리 가도 계속되는 풍경은 칠흑. 끝없이 펼쳐진 안개뿐이었다.
똑같은 풍경이 반복되자 자신이 어둠에 빨려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일어났다.
마침내 시간이 다하고, 루이즈는 어둠의 힘을 다시 잃게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동화가 해제되었다.
“윽, 뭐야…!”
루이즈의 몸으로부터 튕겨 나온 현이 놀라서 소리쳤다.
강제적으로 동화가 해제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으….”
“괜찮아 루이즈?”
“그냥… 조금 머리가 아프다… 잠깐… 아주 잠깐만 쉬고 싶구나.”
루이즈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동화도 하지 못했기에 현은 제대로 걷지 못하는 루이즈를 업고 움직이기로 했다.
서포터라도 가벼운 여자애 한 명을 업고 움직이는 정도는 가뿐했다.
업적 보너스 덕분에 현의 힘은 30을 넘어가는 상태였으니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인이 나지막이 물었다.
“내가 현보다 힘 센 거 기억해…?”
“뭐…?”
“이럴 때를 위해서 올려둔 거였는데….”
아인이 잠시 입술을 달싹였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이 상황에 말하기엔 바보 같다 생각했는지 곧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어딘지를 모르겠네.”
현은 의미 없이 인터루프에서 찾아낸 지도를 힐긋거렸다.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완전히 맵 바깥으로 나와 버린 거 같아.”
“바깥?”
“레이싱 게임에도 정해진 트랙이 있잖아. 예를 들면… 우린 그 트랙을 벗어나 버렸다는 거야.”
“흐응… 뭐, 현의 추측이 그렇다면 맞겠지.”
현은 쓸모없는 지도를 덮어두기로 했다.
“마물이라도 찾아보자.”
“마물을 왜?”
“말이 통하잖아. 길을 물어볼 수도 있고.”
스멀거리는 안개를 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정상적이지 않은 장소에 떨어진 것 같네.’
길을 따라온 이후로 안개의 밀도가 가장 높은 장소였다.
아니, 이곳은 길이 아니기도 했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위협적인 안개가 하늘까지 차단하고 있으니, 현은 거대하고 복잡한 동굴 안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