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has become the older brother of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228
228화. 기억하지 못해도 기억하는 것들이 있다 (1)
덜컥. 열쇠가 맞아 문이 열렸다. 아네모네는 마치 뭐에 홀린 사람처럼 양손으로 문을 열었다. 나는 다만 아네모네가 선택한 문이 정답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이 헛된 바람이 이뤄질 모양이었는지 열린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일단 책이 많이 보였다.
“도서관인가……!”
마수는 보이지 않았고 비틀거리는 환영이나 괴상한 인형 또한 보이지 않았다. 도서관치고는 책이 적었으나, 평범한 방치고는 책이 많았다. 애매했다.
“도대체 뭐 하는 방이지?”
혼란스러워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괴물도 딱히 나오지 않고, 책은 많고. 혹시 도서관이 아니라 데미안의 방을 바로 찾은 건가?”
“…….”
아네모네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아직도 뭐에 홀린 것처럼 발길을 옮기는 녀석을 툭툭 건드리자, 아네모네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어, 어?”
“아까부터 왜 그래? 혹시 와 본 곳이야? 아니면 뭔가 훔치고 싶은 물건이라도 보여? 정신을 어디에 빼고 다니는 거야.”
“이상하게 눈에 익은 공간 같아서 그래. 이런 곳에 와본 적은 난생처음인데 말이야.”
정말 난생처음인데…….
아네모네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내 옷을 잡고 무작정 달렸다.
“이쪽에 길이 있을 것 같아!”
“어어?”
모른다면서 아는 듯이 행동하는 걸 보니 미친 게 분명하다. 성격 못지않게 미쳐버린 악력에 이끌려 나는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꽃밭처럼 이어지는 책장을 잔뜩 지나자 응접실처럼 꾸며진 공간이 나왔다. 그곳은 아까 본 방처럼 거인을 위한 공간 같았는데, 이번에는 살짝 현실성이 있는 거인이었다. 유달리 키가 큰 농구선수를 위한 호텔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 한 번 만난 적 있는 진짜 거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네모네.”
온화한 목소리가 아네모네를 불렀다.
“알라타…….”
나는 흠칫 물러섰다. 달리아의 가정교사로 삼아볼까 했다가 빠르게 포기한 바로 그 사람. 아네모네의 구원자 알라타 교수였다.
이 또한 환영인가?
“아아, 아네모네! 이곳에 오다니. 역시 기억이 모두 돌아온 모양이구나.”
알라타가 반가워하며 아네모네에게 다가오려 했다. 아네모네는 흠칫 물러서며 나까지 뒤로 보냈다.
“뭐야, 저 여자는. 키가 왜 이렇게 커?”
아네모네는 당연하게도 알라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알라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곳까지 제 발로 찾아왔다면, 이제야 정신이 든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벼락같은 노성에 건물이 흔들렸다. 아네모네의 건방진 태도에 화가 단단히 난 알라타는 쉽게 넘어가줄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가 두 팔을 쭉 들어 올리자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갈라진다!”
아네모네가 다급히 소리쳤다. 바닥은 흔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젠 갈라지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가구가 하나둘 무너지더니, 바닥이 솟구쳐 거대한 골렘이 세 마리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구조의 집구석인지. 바닥을 뚫고 골렘이 튀어나오다니.
골렘이 몸을 일으키자 천장까지 무너지려 했다. 아네모네가 다급히 마법을 이용해 천장을 지탱하다가, 알라타 쪽으로 무너지는 잔해를 집어던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버럭 화를 내는 아네모네를 향해 골렘들이 엉거주춤 다가오기 시작했다.
알라타가 팔짱을 끼고 오만한 자세로 우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는 제대로 혼이 나야겠지!”
그 말을 신호로 골렘들이 우리를 무작정 공격하기 시작했다. 패턴이고 뭐고 없는 단순한 공격이었다. 놈들은 팔다리가 달린 돌덩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러스트의 성이 어찌 되든 상관없는지 무조건 주먹을 날려대기만 했다.
아니, 이곳이 러스트의 성 내부에 있는 공간이 맞기는 한가?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우리는 일단 공격을 피하기 급급했다.
쿵! 쿵!
묵직한 공격이 바닥을 칠 때마다 땅이 흔들려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달려서 도망치면 좋았겠지만, 무너지는 바닥의 틈을 타고 작은 돌덩이가 또 다른 골렘이 되어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완전히 발이 묶였어…….”
나와 아네모네는 골렘의 공격을 피해 점점 궁지에 몰려 서로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네모네는 그때까지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왠지 심각한 표정이길래 의미 있는 작전이라도 짜고 있는 건가 했는데…….
“있잖아, 도련님.”
“왜?”
“여기 도서관 아닌 것 같지?”
“그걸 이제 알았냐고!”
역시나 헛소리다.
“그럼 아까처럼 저 돌덩이를 빠르게 처치하고 다른 방으로 넘어가자. 저 키 큰 아줌마를 때려눕히면 열쇠가 나오지 않을까?”
아네모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주먹에 마법을 둘러 땅을 박차고 골렘을 향해 날아갔다. 내가 말릴 새도 없었다.
“간다!”
기세 좋게 소리치며, 아네모네는 골렘의 몸뚱이를 주먹으로 공격했다. 그렇다, 주먹으로.
아무리 마법을 둘렀다고는 하지만 주먹이다. 돌로 된 마수의 몸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빠르게 돌아온 아네모네는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나와 눈을 맞췄다.
“아파…….”
“당연하지, 이 멍청아! 주먹으로 골렘을 패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어! 아, 내 눈앞에 있네!”
“그럼 다른 방법 있어? 있냐고!”
“방법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고 나서야 할 것 아냐!”
잔소리를 오래 할 틈도 없었다. 아무 타격도 입지 않은 골렘들은 다시 우리를 향해 묵직한 주먹을 휘둘렀다. 공격 속도가 느린 게 다행이었다. 생쥐처럼 달려서 피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야, 도련님! 넌 똑똑하잖아! 뭔가 작전 같은 거 생각해봐! 작전회의! 작전회의!”
“조용히 해! 생각할 시간을 좀 주란 말이야!”
나와 아네모네가 쓸데없이 다투는 동안, 혼자서 씩씩거리고 있던 알라타가 버럭 화를 냈다.
“아네모네, 이 어리석은 아이야! 어서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와야지! 언제까지 인간 놀이에 취해 있을 셈이야! 초월자에게는 초월자에 어울리는 역할이 있는 법! 너는 심연의 주인께서 선사한 숭고한 임무를 지닌 채 태어났어!”
알라타는 마치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어서 눈을 떠! 네 실력을 보여주렴! 이 모든 것을 부수고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거야!”
“저 아줌마가 뭐라는 거야. 당신이나 바닥을 제대로 돌려놔! 바닥들이 지금 주먹다짐하고 있잖아!”
알라타가 뭐라고 말하든 아네모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건방진 것!”
“그러니까……. 아네모네, 저 건방진 것…….”
이상하게 나는 알라타의 편을 들게 됐다.
원작의 아네모네는 알라타 교수의 가르침과 사랑으로 반듯하게 자라났다. 알라타가 가르친 마법으로 사람들을 도우며 항상 ‘교수님이 가르쳐주신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고, ‘교수님처럼 되고 싶다’고 눈을 빛내는 게 매력 포인트였다.
그런 소중한 스승님을 막 대하는 아네모네라니, 이렇게 나의 팬심이 또다시 무너진다.
“너는 진짜……. 네가 여주인공일 리 없어.”
“또, 또, 헛소리한다. 가만 보면 너도 이상한 소리 많이 한단 말이지.”
고개를 갸웃갸웃하던 아네모네가 다시 한번 주먹을 고쳐 쥐었다.
“다시 한번 패볼까.”
“미쳤어?”
나는 아네모네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머리를 써야지, 왜 자꾸 주먹을 쓰려고 해!”
얘는 진짜 연애 게임 주인공 아닐 거다. 격투 게임에서 잘못 빙의해 온 게 아닐까? 진짜 아네모네는 어디 다른 격투 게임에 빙의해서 알아서 고통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언제까지 도망만 칠 순 없잖아!”
“…….”
나는 당장이라도 골렘에게 부딪치려고 꿈틀거리는 아네모네를 온몸으로 막아섰다. 동시에 골렘에게 약점이 없는지 살폈다.
보통 골렘이라는 몬스터에게는 두드러지는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몸에 보석이 박혀 있다든지,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든지. 주영이가 하던 게임마다 골렘이라는 몬스터는 자주 등장했는데 그때마다 이런 놈들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분명 이번 골렘에게도 약점은 있을 것이다.
“약점을 찾아야 해.”
“당연한 소리 하고 있네.”
“…….”
우리는 잠시 몸을 낮추고 골렘을 샅샅이 살폈다. 골렘이 이제 와서 ‘사실 제 약점은 여기랍니다’ 하고 알려 줄 리 만무하지만, 어쨌든 보고 있으면 도망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해서.
“…….”
“…….”
골렘을 빤히 쳐다보며 우리는 침묵했다. 알라타는 그새 자취를 감췄고, 골렘 셋과 우리만 남은 상태.
“나, 두 가지 사실을 알았어.”
침묵을 깨고 내가 말했다.
“뭔데?”
“일단 첫째. 보기만 해서는 약점 같은 건 모르겠다는 거야.”
“에라이…….”
“그리고 중요한 둘째.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니까, 골렘도 움직이지 않아.”
“…어?”
아네모네가 흠칫하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동안 미친 듯이 도망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니 골렘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껏 골렘이 날뛰었던 건 우리의 움직임에 반응했다는 뜻이 된다.
“지금껏 우리한테 반응해서 움직였다는 말이야?”
“골렘을 물리치는 건 어려울지도 몰라. 하지만 이 녀석들을 피해 달아나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녀석들이 우리가 움직이는 대로 쫓아오는 거라면, 다른 움직이는 물체로 시선을 끌 수도 있을 거 아냐!”
“오오!”
아네모네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바람을 이용해 근처의 돌을 움직여 굴렸다.
덜거덕! 돌 소리가 나자 골렘들이 움찔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근처에서 소리가 나니 의아해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예상대로야! 아네모네, 바람을 이용해서 골렘들의 정신을 흐트러뜨릴 수 있겠어?”
“가능하지! 그다음엔? 그다음엔 어떻게 하지?”
“뒤를 돌아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원래 있던 문은 사라진 지 오래다. 너무 깊숙이 들어온 탓인가.
어쩌면 이 방 안의 ‘보스’로 보이는 알라타를 물리쳐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거 난감한데…….”
다음 계획을 세우지 못해 망설이는 동안, 골렘들이 삐걱삐걱 몸의 부속품을 굴리기 시작했다.
“쟤네들 왜 저래?”
“글쎄, 나야 모르지.”
“그런데 저 녀석들의 마력…….”
아네모네가 개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마치 마력을 냄새처럼 코로 맡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어쩐지 익숙한 냄새가 나.”
“돌바닥 냄새?”
한참 킁킁거리던 아네모네가 눈을 번쩍 떴다.
“소리. 소리 안 들려?”
“무슨 소리?”
아네모네가 덥석 내 입을 막았다. 숨소리도 가라앉히고 침묵하고 있던 그때.
내 귀에도 아주 작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돌끼리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의 목소리 같기도 한 가느다란 목소리가.
“설마…….”
아네모네를 알아보는 듯, 골렘이 육중한 몸을 점점 낮췄다. 철없고 순진한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네모네,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