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has become the older brother of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82
82화. 게임에서 이긴 사람은 말이 많다 (4)
상태창만 보고도 알 수 있는 정보를 나열하자, 코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지! 나는 호감도 정보도 알고 있거든. 별것 아닌 내용이지만, 이 분위기에서는 마치 내가 네놈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를 어지간히도 싫어하면서 말을 걸어오는 용기가 가상해.”
“……!”
코카의 눈빛이 두려움에서 경계로, 또다시 두려움으로 수차례 뒤바뀌었다. 나는 그런 놈을 여유롭게 내려다보며 웃었다.
“네놈이 게임에서 이긴 보상. 이제부터 제대로 이야기해볼까?”
코카가 철창 안쪽에서 바짝 엎드렸다.
“시에라 공작님!”
코카의 목소리는 진심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간절했다.
“한 번만 봐주세요! 저는 정말 무고합니다. 공작성에서 일하며 사소한 실수는 분명했지만, 위해를 끼칠 만한 일은 맹세코 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러셔.”
“제가 이대로 해고당한다면 아버지가 크게, 크게 화를 내실 거예요.”
아버지를 언급하며 코카가 목소리를 떨었다.
“형제들도……. 죽은 형제들을 볼 면목이 없어집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공작님.”
“사정이 있다 이건가?”
나는 턱을 괸 채 코카를 찬찬히 훑어보고, 씨익 웃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는 게 빠른 법이지.”
“예?”
“네가 어떤 놈인지 눈으로 봐야겠어.”
나는 마력을 모아 코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업보. 네 업보를 보고 싶다.”
코카의 주변에서 먹물 터지는 듯한 이펙트가 펼쳐졌다. 지하 감옥의 철창을 사이에 두고, 철창 뒤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했다.
세상은 어두컴컴해서 빛 한 점 없었고, 바닥에 자박하게 깔린 것은 분명 피였다.
‘뭐야, 초보 스파이라면서 업보가…….’
코카의 뒤로 시체 더미가 이어졌다. 죽은 이들은 죄다 나이 어린아이들이었다. 생각한 것보다 악질인 녀석이었잖아? 나조차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뒤로 슬금 물러서는데, 시체 중 하나가 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코카, 너는 살아남아야 해. 이건 모두 오로반체의 죄…….’
[색칠할 마력이 충분합니다.]상태창이 반짝임과 동시에, 업보의 장면 저편에서 시커먼 존재가 등장했다. 거대하고 음침한 사람이 코카에게 다가왔다. 그는 코카의 어깨를 붙잡으며 속삭였다.
‘살아남는 것은 대가가 필요한 법…….’
그때 코카의 뒤에서, 그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소년이 나타났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어린 시절의 코카였다. 놈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칼을 잡은 손은 덜덜 떨렸다.
‘아버지. 아버지. 저는 이제 아버지의 아들인가요?’
‘아직 부족하다. 네 쓸모를 증명해 보여.’
어두운 그림자가 어린 코카의 목을 졸랐다. 코카를 잠식하는 건 목을 조르는 손이 아닌, 음침하게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쓸모 있는 아이만 나의 아들이란다.’
‘다… 다른 아이들은 그러면…….’
어린 코카가 눈물 콧물을 죄 흘리며 흐느꼈다.
‘다른 아이들은 쓸모가 없어서 죽은 거죠? 제가 죽인 게 아닌 거죠? 제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모두…….’
코카의 입 모양이 일그러졌다.
‘사랑받는 아이가 되기 위해서니까.’
[색칠이 끝났습니다.]환영은 끝났다. 상태창이 색칠을 운운하는 걸 보면, 이것도 달리아와 연관이 있는 일이겠지. 달리아가 놀다 간 자리여서 그런가, 업보를 읽는 것뿐인데도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
코카는 울적하게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내게 빌고 있었다. 놈은 불안한 듯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아버지에게…….”
혹시. 업보에서 본 크고 시커먼 인물이 코카의 아버지인가? 추측하건대 그 시커먼 인물이 코카를 우리 집에 파견한 장본인일 것이다. 딱 봐도 뭔가 악당 같잖아?
스킬을 쓴 덕분에 녀석에게 엄청난 과거사가 있다는 건 알았다. 업보 속 시체는 분명 ‘오로반체’를 언급했다.
오로반체라면 이 게임에서 황태자의 배드엔딩을 만드는 데 일조한 후작이다. 프라이드 후작과 정반대의 노선을 걷는 친귀족파. 황태자를 퇴위시키고 4황자를 꼭두각시 황태자로 만드는 게 목적인, 게임 내의 순수 악. 권력욕에 미친 사나이.
그는 이 게임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순수하게 악랄한 인물이었다.
지금 보니 코카 녀석, 오로반체 후작의 아들인 모양이다. 성씨가 다른 걸 보니,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한 서자겠지.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겠는걸.’
코카의 나이는 어림잡아 내 또래. 대충 10대 중반으로 보인다. 본래 20대 후반의 삶을 살았던 내가 보기에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인데, 곤란한 삶 처지에 놓였구나. 불쌍한 놈. 성정을 보아하니 아버지하고는 딴판인 것 같은데.
오로반체 후작은 황태자 노선을 타고 있는 글러토니 공작가를 견제하기 위해 코카를 스파이로 파견했을 것이다. 업보를 보아하니 사람 죽이는 실력도 대단한 모양이고. 정신은 살짝 불안정해 보였지만 말이야.
참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 나이부터 이렇게 이용당하고, 남의 집으로 버려지듯 스파이 노릇을 하러 오고.
‘그래서 어쩌라고.’
남이 불쌍하든 말든 나는 관심이 없다. 나는 나랑 달리아만 불쌍하게 여기면 된다.
지난 ‘쿠키’ 사건은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바로, 귀찮아질 조짐이 보이는 일은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오로반체 후작과는 사뭇 다른 성격의 순진한 코카. 이런 녀석은 살살 달래주면 이쪽에 달라붙을 수도 있다.
사양이다.
내가 아네모네도 아니고 지금은 황태자를 내 편으로 공략할 생각이 없다. 오로반체 후작과 동맹을 맺었으면 맺었지 척을 질 생각은 없다는 뜻.
괜히 코카의 사정을 들어주며 부둥부둥 달래주다가 오로반체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다.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어. 네 처우는 나중에 생각할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로반체 후작이라면 황태자를 엿 먹일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은 살려두는 게 좋겠지.
하지만 스파이는 스파이. 순순히 돌려보낼 수는 없고, 데리고 있으면서 인질극이라도 벌여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게임도 오늘이 끝이야. 지하 감옥은 앞으로 더 철저히 닫아놓겠어.”
“자, 잠시만요! 고, 공작님! 모든 걸 말하겠습니다! 모든 걸 말하겠어요! 믿어주세요!”
“싫어. 안 듣고 싶어졌어.”
귀찮아질 게 뻔한데, 내가 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덥석 발목이 잡혔다. 코카가 철창 밖으로 손을 뻗어 내 발목을 확 끌어안은 것이다.
“시에라 공작님! 한 번만 들어주세요! 공작님도 제 얘길 들으시면 제 입장이 이해되실 거예요!”
“놔.”
다리를 탈탈 털어내는데 이 녀석 집념이 장난이 아니었다. 놈은 몸이 위아래로 흔들려도 끄떡없이 내게 매달렸다.
“솔직하게 다 말하겠습니다! 진짜예요! 이번에는 진짜니까 제발 저만 여기에 버리고 가지 마세요!”
“말하지 마, 듣기 싫어. 생각이 바뀌었어.”
“싫어요! 홀로 버티는 감옥은 지옥이라고요!”
내가 다리를 확 젖혔다. 붙들려 있던 코카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놈이 다시 허우적거리길래, 나는 재빨리 몇 걸음 떨어져 섰다.
“더 이상 혼자는 싫어요!”
코카가 콧물을 훌쩍이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괜히 마음 한구석이 콕콕 따가워졌지만, 강하게 마음먹어야 했다.
저런 말에 넘어가서 또 이상한 퀘스트를 수행하게 되면 어떻게 해? 그러다 오로반체 후작과 싸운다면…….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황태자가 내 편을 들어준다는 보장도 없고, 그놈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다.
“저는 본래 엄하신 아버지와 다정하신 어머니 슬하에…….”
“들을 생각 없으니까 과거사 얘기하지 마.”
나는 놈의 말을 끊어냈다. 저놈이 멋대로 불행하고 안쓰러운 과거를 나열하면, 내가 못 참고 은근슬쩍 도와주게 되는 상황이 올 게 뻔했다. 나도 조금은 인정하는 바다. 내 마음은 조금 약한 편인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 말이야.
하지만 시에라 글러토니의 돈과 권력은 선한 일을 하라고 주어진 게 아니다. 이기적으로 살라고 주어진 기회지.
그러니 참아야 한다.
착한 일을 참아야 해!
“너를 다시 우리 성의 시종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 그렇다고 죽일 생각도 없다. 그러니 안심해.”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게임에서 졌으면서!”
“게임은 게임이고 현실은 현실이지.”
코카가 다시 팔을 뻗었다. 여유롭게 피했는데, 놈이 오랑우탄처럼 팔을 쭉 뻗자 바짓단이 잡혔다.
“이 자식이 팔은 왜 이렇게 길어서!”
나는 코카를 다시 한번 힘껏 떼어내며 말했다.
“너는 그저 너를 인정해줄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잖아. 나한테 진짜 충성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시에라의 관통 특성 발동]관통 특성이 발동한 걸 보니 내가 말한 게 진짜구나. 나한테 충성할 생각은 딱히 없다고.
그런데 코카가 눈을 크게 뜨더니 왁왁 소리쳤다.
“아뇨! 충성하겠습니다!”
“뭐?”
[코카의 동화 특성 발동] [관통을 회피합니다.]“시에라 공작님의 충실한 개가 되고 싶어요!”
특성을 회피할 수도 있단 말이야? 황당해서 호감도를 확인했다. 여전히 검은색 하트 네 개였다. 보통 특성이 발동되면 호감도가 올라가기 마련인데, 지독한 녀석.
나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거야.
“귀찮은 녀석…….”
오로반체 후작한테 그냥 돌려줄까? 과거를 보아하니 부자간의 애정 같은 것도 없어 인질로 써먹지도 못할 것 같은데.
그때 지하감옥을 향해 퉁퉁 성급한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돌아올 사람이라면 한 명뿐이다.
“나으리!”
피핀이 지하 감옥으로 후다닥 들어왔다.
“역시 걱정돼서 돌아왔습니다. 달리아 아가씨는 지금 유모 뮤리엘 님과 함께 계세요.”
“마침 잘 왔어. 피핀, 이 자식 좀 나한테서 떨어뜨려놔 줘.”
내가 다리를 덜렁거리며 부탁했다. 피핀은 팔을 걷어붙이고 철창으로 다가가 코카의 팔을 가볍게 떼어냈다. 귓가로 얼핏 뚜두둑 소리가 난 것도 같은데, 그건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피핀 경! 피핀 경은 제 얘기를 들어주실 거죠? 제가 공작가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얘 딱 봐도 배신할 것처럼 생겼다. 이야기 들을 필요도 없어.”
“지하감옥에 혼자 남느니 차라리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혼자 남는 건 정말 싫다고요! 싫어요!”
코카가 엎어져 엉엉 울었다.
“연기 아냐?”
덤덤한 나와 달리 피핀은 흔들리는 눈치였다. 피핀이 불쌍한 강아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하지만 나으리.”
“안 돼.”
“얘기만 들어보죠.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하지 않아요? 저는 궁금해요. 정체가 뭔지, 정말 스파이인지…….”
나는 단호하게 피핀을 말렸다.
“안 돼. 그랬다간 불쌍하게 여겨서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못 이기는 척 도움을 주다가 배신당하기 딱 좋다고.”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현명한 거야.”
피핀은 건방지게 내 말을 무시하고는 코카를 향해 쭈그리고 앉았다.
“이야기만 들어보자. 너, 정말 스파이야?“
진지해진 표정의 피핀이 그와 눈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