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has become the older brother of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94
94화. 멧돼지는 강하다 (3)
“음…… 봐줄 만하네.”
거짓말이었다.
모두가 지쳐서 그만두고 싶어진 거지, 사실 봐줄 만한 그림이 아니었다.
내가 그린 것만 못했다. 아니, 그것보단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림은 이쯤 하지…….”
나는 지쳐서 포기했다.
“헬리오헬리안 경에게 아직 볼일이 있어. 그 뒤에 귀가하도록. 오늘은 수고했다.”
도망치듯 자리를 옮겨 헬리오를 찾았다. 화가뿐만 아니라, 어떤 물건 하나 또한 헬리오에게 부탁한 참이었다. 남몰래 그 물건을 받아야 했다.
헬리오는 그림이 완성될 동안 공작성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지쳐서 터덜터덜 손님방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낄낄 웃었다.
내가 찾아올 걸 예상했는지, 그의 손에는 벌써 고급스러운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표정이 안 좋은데? 화가의 실력이 마음에 안 들었어? 다른 화가를 구해줄까? 추가금은 물론 받을 거지만.”
“됐습니다. 됐어요…….”
“벌써 수도에 소문이 퍼졌어. 글러토니 공작이 슬럼가를 쑤시고 다닌다는 거.”
“상자나 주시죠.”
헬리오가 내민 상자를 확 낚아채 열었다. 그 안에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팔찌가 곱게 모셔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늘어 금빛 머리카락을 엮어 만든 듯했고, 보석이 군데군데 박혀 화려한 인상을 줬다.
딱 보기에도 귀한 물품이었다.
‘요정 아리아의 팔찌.’
보통 물건은 아니고, 마법 아이템이다. 마력을 주입하면 착용한 상대의 위치와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게임 속에서는 여주인공이 후반부에서나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아이템을 판매하는 상인도, 그의 위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덕분에 상단의 헬리오를 통해 이 귀한 아이템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돈은 꽤 깨졌지만, 쓸모는 확실할 것이다.
“난 또 도적단을 잡기 위한 아이템을 찾아달라는 줄 알았지. 그런데 이 아이템은 사랑을 담은 선물용이잖아.”
헬리오가 능글맞게 웃으며 팔찌에 손을 댔다. 나는 헬리오의 손을 찰싹 쳐내며, 이 비싸고 귀한 물건을 뒤로 물렸다.
“만지지 마시죠.”
“꼬맹이 도련님이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야?”
“꼬맹이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헬리오는 연신 키득키득 웃으며 나를 놀리려 들었다.
나는 정색하고 팔찌를 노려봤다. 이 아름다운 장신구는 아네모네의 인생을 저당 잡을 족쇄가 되어줄 것이다.
아네모네의 마력을 뺏은 뒤에도 사후 관리가 필요했다. 아네모네의 마력이 혹시나 회복되면 곤란해진다. 마력을 가진 자는 평민이어도 아카데미에 갈 수 있다. 아네모네가 운명처럼 알라타 교수의 눈에 띄면 곧장 아카데미에 갈 것이다.
그랬다간 다시 아네모네의 행복한 연애 게임이 시작되겠지. 아네모네를 찾아 마력을 뺏은 내 노력이 물거품으로 날아간다는 소리였다.
이 팔찌는 아네모네가 마력 없이 지내는지 확인하기 위한 감시용 도구다. 아네모네를 발견하면 다짜고짜 팔찌부터 채워놓을 것이다. 마력 주인이 아니고서야 풀 수 없으니, 아네모네는 평생 이 귀한 팔찌를 하고 다녀야 할 것이다. 팔이 잘리기 전까지는.
“설마 끊어지진 않겠죠?”
팔찌도, 아네모네의 팔도 끊어져서는 안 된다.
여주인공의 팔이 몸뚱이에 잘 붙어 있기를 바라는 삶이라니. 좀 기괴하다.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흙에 묻힌 진주를 찾아내 상품으로 내는 것. 상인으로서 자부심 넘치는 일이지. 오히려 이런 상품을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운걸.”
헬리오가 활짝 웃었다. 놈의 호감도에 남아 있던 마지막 검은색 하트가 사라졌다.
“기쁘시다니 다행이군요…….”
나는 상자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헬리오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듣자 하니, 화가한테 어떤 여자를 그리게 했다며? 이 팔찌를 줄 상대야?”
“너무 관심 갖지는 말아주세요.”
“쑥스러워하기는. 하지만 잘 생각해. 평민이랑 결혼해서 좋은 꼴을 본 귀족은 없어.”
“그래요. 이 정도면 애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네모네 알라타. 게임을 수십 번 반복하며 한때 나의 선택을 대변했던 캐릭터였다.
증오스럽기만 하냐면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동생을 위해서…….
‘지금은 달리아가 더 중요해.’
우리 달리아를 위해서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어쭙잖은 정이 아니라, 정말 현실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내 동생이 마지막까지 하던 게임, 마지막까지 동정하던 캐릭터.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자리한 새로운 동생 달리아.
달리아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해야 했다. 그게 동생을, 주영이를 지키지 못한 한심한 오빠로서 내가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아네모네 그 여자를 찾아낼 겁니다. 그리고 인생을 망가뜨릴 거예요.”
“귀족의 구혼을 받으면 인생이 망가지긴 하지…….”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날이 밝으면 다시 슬럼가로 가서, 완성된 벽보를 붙여가며 아네모네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이 팔찌도 끼워야 하지.
“좀 힘들긴 하네…….”
나의 바보짓은 이제 다시 시작이었다.
***
나, 피핀, 코카 셋은 그로부터 며칠째 슬럼가를 방문했다. 이젠 슬럼가에서 아는 체를 해오는 사람도 생길 정도였다.
“어이, 도련님, 또 왔네?”
“오늘도 말도 안 되는 벽보를 붙이러 왔군.”
나는 술주정뱅이들에게 대강 인사해주며, 벽마다 벽보를 새로 붙였다. 지금 이 순간 슬럼가 곳곳에 공작가의 하인이 숨어들어 있었다. 그들도 나를 도와 도적단 수장을 찾는다는 벽보와 함께, 한 여자애를 찾는다는 벽보를 같이 붙이는 중이었다.
하인들만 시키면 편했겠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직접 나서야 했다. 이 벽보를 보고 혹시 아네모네가 모습을 드러내 주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아네모네에게 수갑, 아니 팔찌를 채워야 한다는 사명이 있는 나로서는 집안에 엉덩이만 붙이고 있을 수 없었다.
슬럼가의 벽은 더럽고, 벽보는 매일 헤졌다.
“나으리.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다녀야 하나요.”
피핀이 벽에 풀을 바르며 입을 삐죽거렸다.
“도적단의 수장을 벽보로 찾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미끼 작전이라도 써야죠. 보석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그걸 훔치러 오도록…….”
웬일로 멀쩡한 소리를 하는 피핀이었다.
나라고 그런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다.
안 할 뿐이다.
사실 나는 오로반체가 부탁한 도적단이니 하는 건 관심도 없었다.
오직 아네모네. 아네모네 그 녀석을 잡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도적단을 잡는다는 건 슬럼가에 오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혹여 공작이 슬럼가에 여자만 찾으러 어슬렁거린다고 하면 모습이 웃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도적가에 인질로 잡힌 여자를 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이 바보짓을 계속하고 있는 거라고. 내 깊은 뜻을 몰라보다니. 진정한 바보는 너다, 피핀.
“조용히 하고 계속 일해.”
벽보를 한참 붙이며 게걸음을 걷다 보니, 두 사람과 멀어졌다. 나는 풀이 든 양동이와 종이 묶음을 들고 일어섰다. 일행에게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쉿, 시에라. 뭔가 기척이 느껴져.]라기아가 진동하며 내 발을 묶었다.
“기척?”
뒤를 돌아보니 평범한 슬럼가의 풍경만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그냥 평범하게 더럽고 추접스러운 거리잖아.”
“헛짓거리라니. 나는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거야. 아마도…….”
종이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주변을 사악 둘러봤다. 거리는 더럽고, 지저분하고, 흉측했다. 비틀거리는 사람과 구걸하는 사람, 욕하는 사람과 시비 거는 사람이 비빔밥처럼 뒤섞인 지옥이었다.
나에게 적의를 보일 정신머리가 있는 사람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도대체 누가 날 싫어한다는 거야? 여기서 날 싫어할 만한 사람은…….”
나는 내가 지금까지 벽에 일렬로 붙여온 아네모네 수배지를 쳐다봤다.
날 싫어할 만한 사람. 지금의 내게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을 수는 있었다. 아네모네나 도적단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나를 눈엣가시로 여길 만했다. 벽보를 붙여가며 요란을 떨고 있으니.
“라기아. 그 적의라는 거, 어디서 오는지 방향을 알 수 있어?”
[글쎄. 눈이 없어서 방향을 봐줄 순 없는데! 하하하핫! 하지만 굳이 찾자면 음…….]라기아가 수맥 찾는 막대기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단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멈췄다.
[저쪽.]라기아가 가리킨 방향에는 어둑한 골목이 있었다. 골목 안쪽으로 누군가 스르륵 자취를 감추는 게 보였다.
“따라갈까.”
“내가 보통 도련님인 줄 알아?”
나는 들고 있던 물건을 와르르 내려놓으며 팔을 걷어붙였다.
“나는 귀신도 잡는 도련님이야. 가보자.”
[나야 활약할 기회가 생긴다면 감사할 따름이지! 좋아!]“믿는다, 라기아!”
정체불명의 인물이 사라진 골목으로 곧장 따라 들어갔다. 놈은 처음부터 나를 유인할 작정이었는지 기척을 남기며 요리조리 자리를 옮겼다. 나는 라기아를 단검에서 중검 크기로 바꾼 뒤 놈을 쫓았다.
얼마나 따라갔을까. 바깥의 소음이 차단된 공간에서, 작은 발소리가 멈췄다.
“…….”
막다른 길. 나는 라기아를 앞으로 겨누며 한 걸음 한 걸음 놈에게 다가갔다.
“너, 뭐 하는 놈이지?”
나를 이곳까지 이끈 자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작고 왜소했다.
하지만 기백이 장난 아니었다. 뒷모습뿐이었지만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갈색 머리카락은 지저분했고, 입고 있는 옷이 누더기 같았는데도 그랬다.
“대답해. 넌 뭐냐니까?”
내가 물어봄과 동시에 놈이 뒤를 돌았다. 나는 놈을 알아보고 입을 벌렸다.
“너는?”
처음 슬럼가에 왔을 때, 내가 은화를 건네줬던 식당 꼬맹이였다. 녀석이 건방진 자세로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나야말로 묻고 싶다. 네놈이냐? 멧돼지 같은 그림으로 날 찾는 애송이가.”
“멧돼지 같은 그림이라니!”
나는 라기아를 휘저으며 항변했다.
“그게 얼마짜리 그림인데!”
씩씩거리며 상태창을 열었다. 뭐 하는 놈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분명 보잘것없는 바보천치가 무슨 쓸데없는 오해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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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네모네
직업 : 도적단 수장
성격 : 정의 -자신이 선택한 정의로움을 위해 최대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특성 : 폭풍 -공격의 범위가 크면 클수록 위력이 증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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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뭔가 의심스러워서 상태창을 한 번 더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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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네모네
직업 : 도적단 수장
성격 : 정의 -자신이 선택한 정의로움을 위해 최대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특성 : 폭풍 -공격의 범위가 크면 클수록 위력이 증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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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모네…….
아네모네, 아네모네, 아네모네.
도적단 수장.
“뭐?”
더러운 깡촌 소년이 아니라, 아네모네 본인이었어?
도적단 수장은 또 뭔데? 왜 직업이 여관 종업원이 아니고 도적단 수장인 건데?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입이 떡 벌어졌다. 어찌나 황당한지 턱까지 저렸다.
그때였다.
“카악, 퉤. 뭘 봐?”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