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verted to being a K-drama genius RAW novel - Chapter 203
기자들의 요청대로 어깨동무를 다정하게 하며 포즈를 취해보았다.
래미의 몸이 차가웠다. 떨고 있는 게 분명했다.
브라이트 걸스로 수없이 무대에 서 보고, 한국 드라마로 브라운관 역시 이미 익숙한 래미였지만,
오늘 시사회는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시사회가 열리는 극장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몇몇 보였으나, 시간이 다 되어가는 관계로 일단 지정 좌석에 착석했다.
이윽고, 영화가 시작했다.
암전되자 옆자리에서 래미가 낮은 심호흡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남편이 있는 여자 주인공에게 접근하는 젊은 남자 주인공.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하며 욕망에 불타오른다.
그렇게 하룻밤의 열정으로 끝난 줄 알았던 두 사람의 관계가, 회사에서 다시 재회하며 멈출 수 없는 사이로 발전한다.
래미가 맡은 사라 킴의 등장.
‘래미의 매력이 잘 살았네.’
래원의 얼굴에 절로 아빠 미소, 아니 오빠 미소가 그려졌다.
커다란 화면에 가득 찬 래미의 미소는 화사했다.
여자 주인공과 다른 색채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사라는 남자 주인공의 오랜 친구이지만, 카메라가 사라의 얼굴을 수시로 비추어주며 그녀가 가진 감정이 우정 이상임을 관객들에게 공유해준다.
‘래미가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당시, 런던에서 움직임과 감정선 사이의 밸런스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래미가 생각났다.
런던 배우들과 연기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 밸런스를 잘 찾는 것이 중요했다.
결국 중요한 건 배우가 움직임의 크기에 집중하기 보다, 해당 감정선을 깊고 진실되게 품는 것임을 깨닫고 연기적 성장을 이뤄냈던 래미의 모습을, 화면 속 사라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청순하고 맑은 매력으로 나타난 사라가, 자신의 커지는 마음을 남주에게 표현하기 시작한다.
점차 감정의 수위가 높아지고,
순수하기 그지 없었던 사라의 얼굴에도 점점 욕망이 서린다.
제목처럼 이번에는 사라의 ‘눈 먼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래미가 저런 눈빛도 만들어낼 줄 아네?’
래원은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고,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라가 남자 주인공을 자극하면 자극할수록, 그는 여자 주인공과의 아슬아슬한 관계에 더욱더 타오른다.
이들의 관계를 알게 된 남편이 이혼을 통보하자, 죄책감과 후회에 시달리는 주인공에게 내연남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며 영화는 다음 국면으로 전환된다.
‘연출을 잘했네. 원작 소설보다 더 긴장감을 잘 살렸어.’
래원은 래미의 연기뿐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감독의 연출력에 주목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곧 영화감독으로서 메가폰을 잡아야 하는 처지라 그랬다.
이어지는 시퀀스는 주인공 남편의 문제였다.
사실 남주인 내연남은 여주 남편의 외도를 일찍이 알고 있었으며, 이를 알리기 위해 여주에게 접근했다가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자신의 실수를 덮으려고 먼저 이혼 통보를 한 남편.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는 여주.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남주.
그런 남주를 사랑하는 사라.
이들 사이에 얽히고 설킨 관계가 서서히 실타래를 풀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와중에,
감독은 관객들을 끝까지 화면으로 붙들어 놓는 연출력을 보였다.
‘결국 관객의 집중력은 연출의 능력이야.’
래원은 래미를 응원하러 왔다가 생각 이상으로 영화적 문법에 대해 많이 배우는 중이었다.
100분이 순식간에 흐르고, 엔딩 크래딧이 올라갔다.
극장 안이 밝아지자 래원은 옆자리 래미를 보았다.
시원하다는 듯 맑은 얼굴이 되어 있었고,
래원은 그런 래미를 향해 씨익 웃어줬다.
수고했다고, 잘 해냈다고, 축하한다고 말이다.
“래미야, 기특해. 너무 잘하더라! 잘 봤어!”
가장 먼저 다가와 래미를 꼬옥 껴안아 준 것은 민세라였다.
이재윤도 어느새 다가와 무언의 눈빛으로 응원을 보내며 래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구태여 묻진 않았으나 래미의 초대로 온 것 같았다.
래원이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조민 기자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 래원은 가볍게 묵례를 건넸다.
그도 일행이 있는 모양인지 손을 흔든 후 묵례하는 것으로 인사를 그쳤다.
원더빅 엔터의 박현만 대표와 래미의 트레이너들, 그리고 이선필과 강채령을 비롯한 래원의 지인이자 영화 관계자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방금 전 세계 최초 공개된 영화에 대해 말을 아끼는 눈치였으나, 들뜬 표정이 느껴졌다.
그때,
“도래원.. 감독님?”
돌연 한 남자가 래원의 앞에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니 배우 소기중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기중입니다.”
5년 전, 드라마 으로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역의 여심을 훔쳤던 슈퍼스타.
그 이후로는 그렇다 할 히트작을 내지는 못했어도 여전히 모든 드라마의 남자 주연 캐스팅 0순위에 랭크되는 배우였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곧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될 예정이었다.
“도래원입니다.”
래원은 소기중이 내민 악수를 받았다.
그러자 그가 래원의 가까이 바짝 다가서며 나지막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요즘 영화 준비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이 말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직은 대외비였으니까.
허나 이 바닥에 절대적인 비밀은 없다는 것을 래원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촌스럽게 출처를 물을 필요도 없었고, 그저 빙긋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느 탑스타의 일기장’⋯. 외람되지만 우연한 기회에 기획안을 접했거든요. 욕심이 났습니다. 그래서 여기 온 거예요. 감독님 뵙고 직접 인사드리고 싶어서요.”
대외비라도 이런 식의 정보 유출은 대환영이었다.
래원은 자꾸 치솟으려는 광대를 애써 내리고 평정심을 챙기며 답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작사 통해서 조만간 자리 한 번 만들도록 하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두 사람.
소기중의 두 눈은 배역을 향한 욕망으로 빛나고 있었고,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래원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 * *
시사회 이후의 네트워크 파티도 끝이 나고,
“이렇게 데려다주는 것도 며칠 안 남았다, 도래미.”
“그러게. 헤헤. 이사 언제랬지? 1월 첫 주?”
래원이 래미를 성수동의 브라이트 걸스 숙소로 데려다주는 길.
“어. 3주도 채 안 남았네.”
“아아, 인테리어 기대돼!”
안정원 실장을 통해서 이사 준비는 척척 진행 중이었다.
래원의 차가 성수대교를 북단 방향으로 건너는데,
래미가 손가락을 뻗어 아파트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랬나?”
“아니, 그 바로 옆이야.”
래미가 이사할 집을 찾아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래미의 얼굴에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좋아?”
“좋지 그럼. 우리 숙소도 좋긴 한데, 오빠랑 사는 게 더 좋아, 난.”
래미가 좋다면 래원도 좋았다.
엄마의 사랑도 많이 못 받아본 주제에 일찍 엄마가 되어 고생만 하던 전생의 래미보다,
지금처럼 자기 꿈을 찾아 반짝반짝 빛나는 래미라서 더 좋았다.
“우와아!! 오빠, 반응 장난 아니야!”
휴대폰을 확인하던 래미가 탄성을 지르며 래원에게 헤드라인과 댓글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기사를 올리고 있었고,
[도래미, “오늘은 영화배우예요.” 성숙해진 연기력 뽐내며 역량 증명!] [도래원-도래미, 영국까지 접수한 K남매의 레드카펫] [“피카좌는 잠시 잊어주세요.” 도래미, 으로 런던 영화계의 블루칩으로 떠올라]뿐만 아니라 시사회를 본 업계 관계자들의 SNS 반응 또한 기사화되면서,
관객들의 기대감과 관심 또한 치솟고 있었다.
[ 민세라, 오늘은 응원 모드 “영화 ‘눈 먼 사랑’ 꿀잼이에요. 대박 예감!” ] [ 브라이트 걸스의 영화관 나들이 “전세계 관객을 만날 래미, 많이 사랑해주세요!” ] [ 이재윤, ‘엄지척!’ 충무로의 샛별도 극찬한 영화 ] [ 류소현X류지현이 본 ‘눈 먼 사랑’ – “이 영화 잘 될 거 같아요!” ]평론가들도 자신의 블로그와 포털 사이트 후기란에 감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운전하는 래원을 위해 하나씩 읽어주는 래미의 목소리가 달뜬 게 느껴졌다.
– ★★★★★ 체온에 비례하는 어른의 멜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열병에 시달린 듯 달아올랐다. (이동민)
– ★★★★☆ 어떤 영화는 관람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내가 주인공이 된다. 나는 오늘 눈 먼 사랑을 경험했다. (김혜미)
– ★★★★★ 사랑이란 무엇인가? 부부 관계란 무엇인가? 내숭없이 솔직하고 직설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 덕분에 보는 이들도 내숭을 벗고 생각해볼 수 있었던 영화. (조민)
“뭐어? 조민??”
“웅. 천하일보 조민 기자님. 아는 분이야?”
“알지⋯. 피디들 사이에서는 유명하거든.”
“좋은 분 같아! 좋은 말 해주면 다 좋은 사람!”
래미의 말에 래원은 대꾸 대신 그저 피식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정말로 나중에 조민한테 밥이나 한 번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 * *
며칠 후,
“그래도 영화는 처음이시잖습니까?”
스튜디오 다이아에는 대형 손님이 행차했더랬다.
바로, 배우 소기중과 그가 속한 매니지먼트의 고 대표.
“아무리 드라마에서 날고 기신 분이라 해도 영화 문법이라는 게 드라마랑은 또 완전히 다르거든요?”
“그야 그렇죠⋯.”
소기중과 고 대표를 앞에 두고,
이선필은 몹시 곤혹스러운 듯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두 사람의 연락을 받았고, 바쁜 사람들이 먼저 시간을 내겠다는 통에, 이선필은 일언반구없이 버선발로 마중 나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소기중이 래원의 작품이 마음에 든다며 먼저 의욕을 보인 것 같았다.
반면, 고 대표는 작품에 대한 의구심을 한가득 안고 와서 검증을 하겠답시고 이것저것 물어오는 중이었다.
“아이⋯. 대표님, 이번에는 나 믿고 밀어줘 봐요. 지난 5년 내내 대표님이 권유하는 작품들 위주로 했는데⋯.”
소기중이 인상을 쓰며 자기네 대표를 설득하려 들었으나, 고 대표는 완강했다.
소문대로 황소고집이었다.
그 앞에서 이선필은 더욱더 진땀을 빼기 시작했다.
한편,
문밖에서 안정원 실장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제발 성사돼라, 제발! 소기중!’
사실, 래원의 차기작 기획안과 초고를 소기중 측에 슬며시 흘린 것은 안정원의 작품이었다.
영화는 드라마보다도 캐스팅이 중요했으니까.
드라마는 시청자가 채널을 돌리다가 재밌으면 계속 보는 게 가능했지만, 영화는 배우가 마음에 안 들면 아예 극장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는 게 관객들이기 때문이다.
“뭐하고 계세요?”
안정원의 연락을 받고 간만에 사무실에 출근한 래원이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래원은 의아해하며 물었고,
“안에 소기중 배우랑 매니지먼트 대표님 와 계세요.”
“벌써 오셨다고요?”
그래도 여전히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안정원을 보며 래원은 안쪽 상황을 눈치챘다.
“고 대표가 또 뒤집어 놨나봐요?”
“네? 네⋯. 도 감독님 고 대표님이랑 안면이 있으신가 봐요?”
순간, 안정원의 낯빛에 기대감이 띄워졌다.
고 대표와 안면이 있긴 했으나 그것은 전생의 인연에 불과했다.
하지만 래원은 굳이 그녀의 기대를 꺾고 싶지 않았기에
똑.똑.똑—
더 이상 뜸 들일 필요 없이 문을 두드렸다.
“도래원 감독님 오셨습니다.”
래원을 보는 안정원의 눈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니,
당혹스러운 표정의 이선필이 먼저 눈에 띄었고, 반갑게 쳐다보는 소기중과, 못마땅한 듯 팔짱을 단단히 낀 고 대표 또한 보였다.
“크흠⋯.”
“안녕하세요, 도래원 입니다. 소기중 배우님과는 며칠 전에 뵈었었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고 대표님.”
래원이 건넨 인사에 고 대표도 묵례를 건네왔다.
소기중과 고 대표는 일반적인 배우와 매니지먼트 관계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유대 관계로 이어진 사이였다.
고 대표는 소기중의 이모부였고,
일찍 세상을 떠난 소 배우의 아버지를 대신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부친 역할을 해주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여느 한류 스타들과 달리, 소기중은 차기작을 고를 때마다 고 대표의 의견을 구하고 검증받는 것이 익숙한 듯했다.
계속해서 을 고집하는 소기중.
그런 그에게 합당한 이유를 대어 타이르는 고 대표.
마치, 떼쓰는 어린아이와 보호자 같달까.
업계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기는 했다.
“이 영화 기획안과 시나리오 초고가 우리 기중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잘 알겠습니다. 도래원 감독님이 내로라하는 드라마 감독님이 신 것도 알고요.”
모두가 고 대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선필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옆자리 래원에게까지 들렸다.
“문제는 그 외의 것들입니다. 하아⋯. 먼저, 제작사 스튜디오 다이아도 영화 제작은 처음 아닙니까?”
“모회사인 JC ENM이 투자나 공동 제작에 참여한 경험이 많은 만큼 노하우나 인력은 충분합니다.”
버거워하는 이선필을 대신하여 래원이 차분히 입을 뗐고,
고 대표는 질 수 없다는 듯이 다른 의문을 연달아 제기했다.
“게다가, 각색으로 붙는 작가님도 크레딧이 하나도 없는 초짜시라면서요?”
“국내 탑 3위 안에 드는 대학교 영화과에서 시나리오 전공하셨고, 각종 공모전에서도 가능성을 인정받은 신예 작가님이십니다. 지금은 높이 떠 있는 태양이라도 언제 저버릴지, 운 나쁘면 곧바로 저버릴지도 모르는 게 이 업계입니다. 하지만 조민시 작가님은 이제 막 뜨기 시작하는 태양이죠.”
래원에게 이 정도는 타격감도 없었다.
고 대표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기에 지체 없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도래원 감독님은요? 드라마 업계에서는 높이 떠 있는 태양인데, 갑자기 방향을 틀어 영화를 하시겠다는 거잖아요. 이 영화로 영영 저버릴지 누가 압니까? 그 내리막길에서 우리 기중이 멱살을 잡고 같이 떠내려갈지 누가 아냐고요!?”
격양된 고 대표에게 래원이 조곤조곤 반박을 건넸다.
“현상 유지는 퇴보다. 이게 제 모토거든요. 국내 드라마 업계에서는 더 높이 오를 곳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해외 드라마 작업도 해보고, 영화도 찍어보려고 하는 겁니다. 제가 얼마만큼 높이 떠오를 수 있을지, 제 천장은 제가 결정하려고요.”
신념이 느껴지는 당당한 태도.
고 대표는 눈을 껌벅이며 방금 래원이 한 말을 곱씹어보았다. 반격이 쉽지 않았다.
래원의 말이나 태도에서 빈틈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
래원이 계속해서 덧붙이자,
“저에 대해 찾아보셨다면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안주하는 걸 싫어합니다. 드라마 할 때도 매 작품 장르나, 캐스팅, 포맷, 협업의 방식 등을 변주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왔습니다.”
소기중과 고 대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