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verted to being a K-drama genius RAW novel - Chapt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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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드라마의 대모 (2)
* * *
이튿날, SBC 드라마국의 회의실.
“여깄습니다.”
조연출 유찬이, 첫 2주간 촬영해야 할 씬을 장소별로 정리해서 내밀었다.
메인 연출인 A팀 임장호 PD와 B팀 래원은, 이를 토대로 함께 촬영 스케줄을 짜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메인 연출인 임장호가 스케줄 배분에 주도적으로 나서겠지만, 그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자기 손에 더러운 것 묻히긴 싫고, 대신 남들이 알아서 자기 비위를 맞춰주길 바라는 까탈스런 성미의 소유자였다.
이를 잘 아는 래원이 먼저 슬쩍 운을 띄웠다.
“아무래도 선배가 밤 씬 위주로 찍으시고, 낮에는 실내 셋트장 위주로 돌리시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어떠세요?”
지혜영이 귀띔해준 대로 였다.
임장호의 안면근육이 씰룩거리며 웃지 못해 안달이었다.
“뭐, 나쁘지 않네. 도 피디가 그렇게 제안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제 사견일 수도 있고 그냥 제 취향일 수도 있지만, 선배는 밤 씬에 유독 강하신 거 같아서요. 저번에 도 감탄하면서 본 밤 씬은 전부 선배가 찍으신 거더라구요. 밤 씬에 영상미 그렇게 뽑아내기 쉽지 않은데···. 아, 그렇다고 선배가 낮 씬이 약하단 이야기는 아니구요, 비교우위랄까. 남들이 힘들어하는 걸 선배가 잘하시니까요.”
모든 윗사람은 아랫사람이 자기 입안에 혀처럼 구는 걸 마다할 리가 없다.
지금 임장호가 그랬다.
“좋아. 그럼 나는 밤 씬에 야외 나가고, 도 피디는 낮 씬에 야외 나가는는 걸로 정리할게.”
“편하게 이름 부르세요, 선배.”
“그래, 래원아. 잘 부탁한다. 잘 찍어줘.”
“네.”
“유찬이는 스케줄러한테 막방까지 이런 식으로 짜달라고 전달하고.”
“네!!!”
유찬의 우렁찬 대답을 끝으로, 오늘 촬영 일정 배분 회의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간단하게 끝났다.
‘역시 내 선택이 탁월했어. 도래원을 내 B팀에 앉히길 잘했단 말이지.’
임장호는 래원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그는 래원이 자신의 손안에, 발아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와 정반대였다.
지금 주도권이 당연하게도 메인 연출인 임장호 선배한테 있는 것처럼 보이나,
이는 래원의 큰 그림이었다.
B팀 감독이 처음부터 튀어서 메인 연출 감독을 자극해봐야 경계심만 키우는 꼴이 될 것이다.
‘지난 한 작품 만에 조연출을 벗어났어. 곧바로 지금 B팀 감독으로 메가폰을 쥐게 됐고. 그럼 그다음 작품은···?’
래원은 혹여 너무 무리한 목표인 건 아닌지, 자신이 너무 서두르는 건 아닌지 자문해보았다.
B팀 감독 바로 위.
뻔하지만 절대 쉽지 않은 목표다.
입사 2년도 안 돼서 자기 이름을 건 드라마로 연출 입봉을 한 PD는 적어도 SBC 안에서는 창사 이래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단 한 작품 만에 조연출 옷을 벗고 B팀 감독을 꿰찬 것도 지금처럼 래원이 유일했다.
그러니 그다음 목표라고 불가능할 것도 없어보였다.
게다가.
얼마 전 SBC 배미란 사장과 황태수 부장의 관계를 알게 된 후로,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래원을 신뢰하고 있음을 안 후로,
래원은 금 동아줄을 쥐고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충분히 가능한 목표야.’
래원에게 이번 드라마 와 임장호 선배는 그다음 목표를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 * *
끼룩- 끼룩-
서해안 제부도의 드넓은 갯벌 위,
파란 하늘에 갈매기들이 목청을 높이며 활주하고 있었다.
질퍽- 퍼억- 퍽퍽-
푸욱푹- 푹푹-
“작가님, 정말 여기서 찍길 원하세요? 이 진흙탕에서?”
옥영임 작가를 향해 기가 막힌다는 듯 묻는 임장호 PD.
그리고 둘 사이를 어쩌지 못해 서 있는 도래원.
세 사람은 지금 질퍽거리는 갯벌 속에서 씨름하고 있었다.
드라마 1화의 포문을 열고, 마지막 16화의 대미를 장식할 로케이션의 후보 헌팅지 답사를 나왔다.
1화에 바다에서 처음 만난 세 주인공 ‘재성, 린화, 강민’은
결국 마지막 화에 그들이 처음 만난 바로 그 바다에서 이별하게 된다.
작가들이 헌팅지 답사에 참여하는 경우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지만,
이 같은 로케이션 헌팅지 답사 만큼은 작가들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곤 했다.
그래야 대본에 디테일하게 녹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후보지는, 강원도 고성의 삼포해변.
임장호 감독이 그곳 동해안 바다와 모래사장을 추천했다.
두 번째 후보지는, 이곳 제부도 갯벌과 서해안 바다로 옥 작가가 적극 추천한 곳이었다.
“재벌들의 진흙탕 싸움을 표상화 한 거죠! 제 대본 의도가 그렇잖아요.”
“하아···. 작가님, 이건 진짜 너어무! 막장입니다.”
“모르셨어요? 저 막장 드라마만 쓰는 거? 임 감독님도 ‘탐욕의 민낯’을 화면에 담겠다고 하셨잖아요. 문자로도 진흙탕 싸움을 잘 표현해보고 싶다고 하셨으면서···. 그럼 질퍽한 갯벌에서 개싸움 벌이는 게 딱 이죠!”
“거 참, 답답하십니다! 제가 ‘진흙탕 싸움’이라는 표현을 쓴 건, 진짜 진흙탕에서 싸우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죠! 비유! 상징! 글 쓰시는 분이 너무 일차원적인 사고방식 아닌가요? 꼭 진흙탕에서 싸워야만 진흙탕 싸움입니까?”
프리 프러덕션부터 서로를 향해 씩씩대고 있는 임장호 PD와 옥영임 작가.
질퍽- 퍼억- 퍽퍽-
푸욱푹- 푹푹-
두 사람이 서로에게 발끈하면 발끈할 수록 그들의 발은 더욱더 깊은 진흙의 수렁으로 빠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진흙탕 속에서 진흙탕 싸움 중이었다.
해당 씬 들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할 만큼 중요한 터라, 두 사람 모두 이번 로케이션 헌팅지를 선정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는 듯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옆에는 이를 가만히 지켜보는 도래원이 서 있었다.
“게다가 누가 일출을 서해안에서 찍습니까, 작가님! 안 그러냐 래원아? 너도 말 좀 해 봐.”
“······.”
“그럼 일출 대신 일몰을 찍으면 되죠!!! 정말이지 그렇게 유도리가 없어서 어떻게 드라마를 찍겠다는 건지···.”
제부도 갯벌의 진흙은 그들의 양 발을 더욱더 옥죄며 휘감기 시작했다.
끼룩- 끼룩-
래원은 시끄러운 두 사람 대신 갈매기 소리에 집중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과거에도 두 분 사이가 이렇게 안 좋았나? 그땐 신기중 음주 운전, 류소현 잠적 이슈가 너무 커서 이건 쉬쉬하면서 덮어졌나 보네. 하인혁 그 새끼는 보나 마나 B팀 감독이 앞뒤 분간 못하고 하이에나처럼 굴었을 거고···. 과거에 이 드라마는 여러모로 망할 수밖에 없었던 거였군’
지이이이잉 –
그때. 래원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는 폰.
이를 꺼내 확인해보니 황태수 선배의 메시지였다.
[황CP] 래원아, 장호랑 옥 작가 심상치 않지? 내가 못 산다 진짜! 그래도 그 팀에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중재 좀 해줘. 괜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게 처신 잘하고!작가와 메인 감독이 싸운다.
그리고 책임 프로듀서(CP)는 개입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다.
B팀 감독 래원에게로 자연히 주도권이 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건 래원 역시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황 선배, 이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건··· 왠지 새우가 아닐 거 같은데요?’
* * *
옥영임 작가의 작업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우리한텐 연애가 그런 거잖아. 일종의 비지니스.”
그녀와 임장호 PD, 도래원이 긴 테이블 한쪽에 앉아 있었고
건너편에는 배우 ‘류지현’이 자리해 대본을 읽고 있었다.
“우리 남은 인생도 지금 같은 품위, 생활 수준···. 계속 누리면서 살아야 하잖아?”
지정 대본 리딩을 마친 류지현을 향해
상기된 옥 작가가 물었다.
“딱 우리가 찾던 린화예요! 언니랑 이미지는 비슷한데, 목소리는 좀 중성적인 편이네요?”
“아, 네. 제 목소리가 허스키하죠? 그런 말씀들 많이 하세요.”
“나는 그래서 오히려 좋은데요? 린화가 내유외강 캐릭터라, 그런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철벽 치는 게, 굉장히 린화다워요.”
옥영임은 진심이었다.
래원은 가장 큰 산이었던 그녀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에 기쁘기 그지없었다.
“이것도 한 번 읽어보시겠어요? 상대 남자 ‘강민’에게 하는 대사예요.”
임장호가 앞에 있는 류지현에게 A4 한 장을 더 내밀었다.
류지현은 지그시 대본을 보다가, 잠시 눈을 감고 감정을 잡았다.
“내가 갖고 태어난 것들! 어릴 때부터 누려온 것들! 그냥 지키겠다는 것뿐이야 그게 대체 뭐가 그렇게 나빠? 너야말로 분수 지키면서 살아! 어디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린화 그 자체였다.
임장호는 양옆의 옥영임과 래원을 쳐다보았고,
셋은 만족스럽다는 듯 눈빛을 교환했다.
“더 볼 것도 없을 것 같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지현 씨. 우리 같이 하죠. 린화.”
“감사합니다. 드라마에 누가 되는 일 없게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긴장한 듯 보였던 류지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류지현이 나간 자리에, 이번에는 두 명의 남자 배우가 들어왔다.
김규민과 구민준.
“안녕하세요, 김규민 입니다.”
“안녕하세요, 구민준 입니다.”
“두 분, 반갑습니다. 그럼 앞에 있는 대본 읽어주시겠어요? 규민 씨부터요.”
김규민은 호흡을 고른 후, 대사를 시작했다.
“서민이 왜 서민인 줄 알아? ··· 주제넘게 가질 수 없는 걸 욕망하니까! 그러니까 평생 서민에서 못 벗어나는 거야!”
구민준도 아까 전 인사할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대본을 읽었다.
“진짜 나쁜 건 내가 아니라, 너처럼 원랜 자기 것도 아니었던 걸 탐하는 사람들 아니냐? 뭘 쳐다 봐! 아프냐? 네가 아픈 건 나 때문이 아니라 팩폭 때문이라는 거 알아둬라.”
대사 배틀이라도 벌이는 듯 치열한 두 배우.
“좋습니다. 두 분 다 충무로의 떠오르는 샛별이라는 소문 들었어요. 정말 잘하시네요.”
“솔직히 저한텐 두 분 초면이었는데, 기대 이상입니다. 앞으로 브라운관이든 스크린이든 자주 뵙게 될 거 같은데요?”
임장호와 옥영임은 두 배우를 마음에 들어 했다.
“다음 장도 읽어주세요. 이번에는 민준 씨부터.”
“내 심장도 뛸 수 있다는 걸 알려준 게··· 너야.
처음부터 내 심장은 너한테만 뛰었다고!”
“재성이한테 가면, 나 진짜 죽어버릴 거야. 나 이제는 너 아니면 안 돼.”
둘 다 대학로의 베테랑답게 연기는 곧잘 했다.
하지만 캐릭터 해석에서 차이가 있었다.
김규민의 강인은, 전반적으로 귀엽고 달달했다.
전반부에 서민 친구들에게 화풀이를 일삼는 망나니 캐릭터도 찌질했고, 중후반부에 ‘린화’를 꼬드기고 이용하다가 정말로 사랑에 빠져버리는 캐릭터도 로맨티스트였다.
반면 구민준의 강인은, 전반적으로 서늘하고 매서웠다.
물불 안 가리고 덤비기도 하고 감정 표현에 서툴렀다.
임장호와 옥영임은 막상막하인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두 분 정말 수고 많으셨구요. 얼른 결정해서, 내일까지는 연락 드리겠습니다.”
김규민과 구민준은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나갔다.
문이 닫히자,
임장호가 먼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저는 구민준이 조금 더 괜찮았어요. 감정 표현에 서투른 게 뭐랄까, 더 순수해 보이는 느낌의 강인이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김규민이 더 마음에 드는데? 살짝 느끼한 대사 톤을 의도해서 선뜻 미워할 수 없는 망나니, 린화에게 애처롭게 매달리는 로맨티스트가 잘 그려지는 강인이랄까.”
임장호와 옥영임의 의견이 갈렸다.
“작가님, 지금 제가 구민준이 좋다니까 일부러 이러시는 거죠?”
“아뇨! 제가 누구처럼 공과 사도 구분 못 하고 그렇게 유치한 줄 아세요?”
“옥 작가님!!!”
“그만 소리치시고, 우리 도 피디님 의견도 들어보죠.”
래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번 로케이션 헌팅지 답사 때 진흙탕 싸움에 이은 후반전인가 싶다.
“저도 두 분이랑 같은 의견입니다.
전반부에 망나니 캐릭터는 구민준이 더 잘 어울리고, 후반부에 로맨티스트는 김규민이 더 소화를 잘하네요.”
“래원아!” “도 피디님!”
“한 명만 골라! 이러다 오늘 퇴근 못 한다.”
“양시론은 이 상황에 아무 도움 안 돼요!”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자 말을 잇는 래원.
“하하하, 말씀을 좀 끝까지 들어주세요.”
임장호와 옥영임은 래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저는. 구민준한테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두 배우 다 연기도 잘하고 매력 있지만, 인지도는 부족해요. 좋게 말해서 신선하긴 해도, 그만큼 초장에 사람들을 확 사로잡고 한 방에 각인이 돼야, 시청자들을 계속 끌고 갈 수 있어요.”
“그래서 초반 망나니 캐릭터에 강한 구민준이다? ··· 음, 뭐, 일리 있는 말이네요.”
“그리고, 구민준이 허스키 보이스의 류지현 린화와도 더 케미가 살 것 같습니다. 외모도 주혁재의 재성과 완전 대조적인 비주얼로 카메라에 보기 좋게 잡힐 거 같구요.”
반대 의견에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던 옥영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임장호가 볼멘소리를 냈다.
“옥 작가님 너무 하시네요! 아까 제가 말했을 땐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더니!”
“누가 말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설명과 이유가 합당한 지를 따진 거예요!”
틈만 나면 서로를 물어뜯는 두 사람.
래원은 이 상황에 자신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그럼, 두 배우한테 연락 바로 넣을게요. 둘 다 다른 작품 들어온 거 잠시 보류시키고 온 거라더라구요.”
“그래, 마무리 좀 해줘.”
옥영임은 계속 상기된 어투로 말했다.
“류지현, 구민준. 둘 다 너무 괜찮네. 너무 맘에 들어! 도 감독님, 아녔으면 우리 팀 어떡할 뻔했어 내가 처음에 사람을 한참 잘못 봤나 봐.”
“하하, 그냥 제 할 일을 한 겁니다.”
“드라마 감독의 눈썰미랑 센스는, 아무래도 경력이랑은 저언혀! 상관없나 봐. 그쵸, 도 감독님?”
옥영임 작가는 임장호를 매섭게 한 번 쏘아보고는,
기분이 좋은 듯 도래원을 향해 호호거리며 웃었다.
임장호의 인상이 팍 구겨졌고
그럴수록 옥 작가는 더욱 신나했다.
“우리 오늘 캐스팅도 잘 정리됐는데, 처음 회의 때 못 했던 회식 어때요? 제가 괜찮은 곳으로 모실게요.”
막장 드라마의 대모 옥영임 작가.
래원이 그녀의 신임을 얻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듯했다.
두 고래 싸움에 서로의 등이 터지면서, 아무래도 새우가 의도치 않게 덕을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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