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verted to being a K-drama genius RAW novel - Chapter 40
40 – 3775133
e
인기는 연기처럼 가벼워요
* * *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래미는 전보다 바빠졌다.
매일 꼬박꼬박 학교에 가는 건 물론이고, 하교 후에는 매일 원더빅 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래미가 학교 수업을 빼먹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래원이 박현만 대표에게 제시한 계약 조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연예 기획사에서 연습생 시절을 보내지만, 그중에 데뷔까지 성공하는 건 극소수다.
래미가 혹시 데뷔에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학교라는 다리를 끊지 말아야 한다는 게 래원의 지론이었다.
오늘은 연습이 늦게 끝난 래미를 위해,
래원이 정류장까지 데리러 나왔다.
“도래미, 레슨은 받을만해? 안 힘들어?”
“힘들어. 힘든데 완전 재밌어!”
“오늘은 뭐 배웠는데?”
“요즘 재즈댄스 배워. 마지막 주에 월말 평가 있어서 연습 많이 해야 해.”
“학교는 어때?”
“이제 애들이랑 많이 친해졌어. 아무래도 비슷한 꿈을 꾸는 애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중학교 때보다 더 좋은 거 같아. 연기 수업도 있고, 바로 옆에 연기에 관한 이야기 할 수 있는 애들도 있고.”
래미는 래원에게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너 소속사 있는 거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어?”
“아니.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그냥, 튀고 싶지 않아서.”
“잘했어. 마음 편한 게 최고지. 선생님한텐 오빠가 이야기할게. 학부모 총회가 다음 달이지?”
“웅, 아마도. 오빠 오게?”
“그럼. 당연하지.”
래미는 싫지 않은 듯 슬며시 웃었다.
“오빠는? 이번 촬영은 어때? 재밌어?”
“재미? 야, 도래미. 너는 오빠가 무슨 일을 재미로 하는 줄 아냐. 힘들다, 힘들어.”
“요새 표정 좋던데 뭘! 민세라 언니는? 실물도 이쁘지?”
“이쁘지. 이쁘긴 한데···.”
“같이 일해 보니까 어때?”
“··· 그냥, 뭐 알려진 거랑 똑같아. 도도하고, 완벽주의로 일 잘하고.”
“그리고 또?”
“또? 글쎄, 뭐··· 별거 없어···.”
래원은 그녀를 캐스팅했던과정을 떠올리자 할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나도 세라 언니처럼 되고 싶어.”
“민세라?”
왜 굳이, 왜 하필 민세라일까 싶다.
“웅. 멋있잖아. 걸 크러쉬.”
“래미야, 민세라 롤 모델로 삼는 건 좋은데···.’
래원은 그다음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 싸가지 만큼은 절대 닮지 마라.’
래원은, 난생처음 롤 모델까지 만들며 자신의 꿈을 좇기 시작한 래미의 환상을 구태여 깨고 싶지는 않았다.
* * *
경기도 화성의 세트장.
1화 촬영을 무사히 마친 팀은 오늘 오전부터 2화 촬영에 돌입했다.
오늘 찍을 씬은 2화의 백미였다.
[노미령]과 [박규산]의 결혼이 다가오면서, 노미령에게 이상한 일이 자꾸만 생겼다.「아무리 귀족 행세를 한대도, 진실을 이길 수는 없지요. 이 혼인을 강행한다면 당신의 앞날에 큰 불행이 닥칠 거요.」
라고 적힌 일종의 협박 편지가 왔었다.
노미령은 이에 반응하지 않았다.
섬뜩하긴 했으나 누군가의 장난이려니 치부했다.
그렇게 노미령의 결혼식이 5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날 밤, 커튼이 휘날리더니 노미령의 침실 창문을 통해 검은 그림자 하나가 노미령의 침대 위로 들어왔다.
“내가 분명히 경고 했을 텐데? 진실을 이길 수는 없다고!”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지난번에 노미령에게 협박 편지를 보낸 이였다.
그가 몸 전체에 걸친 망토와 모자를 벗었다.
이제 두 사람은 비로소, 창문에 비치는 밝은 달빛 아래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다.
둘의 얼굴은 흡사 닮았다.
단지 [노미령]은 긴 생머리를 틀어 올렸고, [연홍]은 단발머리라는 것만 달랐다.
두 여인은 자신과 똑 닮은 서로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관찰하며, 빙빙 돌아 대적한다.
약간의 액션을 가미해 치열한 공방을 벌이기도 한다.
“이 혼인을 무르지 않으면 당신의 운명은 달라질 거야.”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
이는 곧 [연홍]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 결혼 이후에 [박규산]이 자신과 노미령에게 어떤 짓을 할지 대충 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둘은 결국, 서로가 자신의 이부 자매인 줄 모르고,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을 이렇게 끝맺는다.
.
.
“컷! 노미령과 연홍이 서로에게 손을 뻗은 장면 바스트 딸게요.”
래원의 외침대로 배우들과 촬영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그럼 다시 들어갈게요. 레디, 액션!”
.
.
민세라와 유하나가 서로를 향해 손을 뻗은 그림을 만들었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대칭이었다.
이는 곧 [노미령]과 [연홍]의 운명이 뒤바뀌게 될 것에 대한 암시였다.
.
.
“컷! 오케이!”
래원이 기분 좋은 듯 시원하게 외쳤다.
‘좋아. 구도가 생각했던 거보다 더 좋네. 편집실에서 두 커트를 몇 번 교차시키면 꽤 괜찮은 그림 나오겠어.’
신영진 촬영 감독도 래원과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노미령이랑 연홍이 완전 똑같은 얼굴이 아니라, 이렇게 머리 스타일도 다르고 느낌이 비슷한 편이 더 맛이 산다, 래원아. 두 커트 교차시키거나, 두 사람이 같은 화면에 나란히 들어왔을 때 비로소 닮은 게 확 체감되니까 재밌는데?”
뒤이어 남은 오전 촬영도 식사 시간에 맞춰 순조롭게 끝났다.
“수고하셨어요! 2시 반까지 점심시간입니다! 오늘도 수호 팬카페에서 보내온 도시락입니다. 가져가서 드세요!”
그때, 저 건너편에서 누군가 존재감을 빛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오후 촬영부터 합류할 엄하늘이 일찍 현장에 나온 것이다.
민세라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먼저 용기 내 인사했다.
“하늘 언니, 안녕하세요!”
“네에.. 안녕하세요.”
엄하늘의 무표정한 대답에 민세라의 표정도 같이 어색하게 굳었다.
“하늘 언니이! 일찍 오셨네요!”
“하나야아!!!”
엄하늘은 조금 전 민세라에게 차갑게 대꾸하던 것과 달리,
따뜻한 말투로 유하나를 끌어안았다.
민세라가 이를 보고는 분명한 온도 차에 기분이 상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편, 도래원도 멀리 감독 의자에 앉아서 이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엄하늘은 지난 ‘재벌의 세계’ 때도 유하나와 친하게 지냈었다.
“우리 하나, 오늘 왜 이렇게 이뻐?”
“에이, 여신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부끄럽죠. 언니 아직 식사 안 하셨으면 이거 같이 먹어요. 제가 하나 더 받아올게요.”
“이게 뭔데?”
“수호 오빠네 팬분들이 주신 도시락이요. 갈비랑 연어 스테이크 중에 뭐 드실래요?”
“글쎄, 둘 다 맛있을 거 같은데? 우와, 냄새 죽인다! 역시 우리 수호랑 같은 작품 하길 잘했어.”
“언니 이거 먼저 드시고 계세요. 하나 더 가져올게요. 갈비 하나, 연어 하나해서 같이 나눠먹어요.”
유하나는 도시락을 가지러 뛰어가다가,
민세라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서로 별다른 인사 없이 쌩 지나칠 뿐이었다.
민세라는 친구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사람들, 특히 여자들한테 호감 사는 타입이 아닌 듯했고
본인 역시 혼자가 편했다.
평소 같으면 밴 안에 들어가서 조용히 먹었을 도시락이지만,
오늘도 그러기에는 날씨가 유난히 좋았다.
민세라는 도시락을 꺼내와서
촬영 때 대기하던 간이의자에 앉아 혼자 먹기 시작했다.
봄기운과 따사로운 햇살을 밥 친구로 삼았다.
그때,
기다란 그림자가 다가와 민세라 위에 그늘을 만들었다.
“여기 앉아도 되죠?”
고개를 들어보니, 도래원 감독이었다.
“··· 네? 네. 앉으세요.”
래원은 민세라의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도시락을 펼쳤다.
양수호 팬클럽에서 돌린 갈비 도시락이었다.
“세라 씨, 은따예요?”
“네?”
“배우들이랑도 별로 안 친한 거 같고···.”
“제가 먼저 말 안 섞는 거거든요.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서.”
“아···. 그럼 매니저랑 스타일리스트 분들은요?”
“옆에서 고기 냄새 풍기는 거 싫어서 따로 먹으라고 보냈어요.”
“그래요? 그러면 저도 여기 괜히 눈치 없이 앉았네요. 일어나봐야겠···.”
“괘.. 괜찮아요. 그냥 드셔도 돼요, 여기서.”
민세라가 자기도 모르게 래원의 옷깃을 붙잡았고
래원은 피식 웃으며 못 이기는 척 다시 앉았다.
한편, 엄하늘은 유하나와 하하 호호 웃으며 도시락을 나눠 먹다가, 도래원이 민세라와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뚱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래원이 민세라의 도시락을 흘깃 보며 물었다.
“세라 씨가 드시는 건 뭐예요?”
“보면 모르세요? 닭가슴살 샐러드 도시락이요.”
“그걸로 되시겠어요? 오늘 오후 촬영 빡셀 텐데···.”
“괜찮아요. 이 몸매가 그냥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대단하시네요.”
“··· 혹시 지금 비꼬는 거세요?”
“아뇨. 진심인데···. 지난번에 보니까 떡볶이랑 튀김 엄청 좋아하시더라구요. 근데 그렇게 식단 하시는 건 진심 대단한 거죠.”
“이렇게 관리해야만 해요. 사람들한테 계속 사랑받으려면.”
“우린 단막극이라 그래도 낫지만, 나중에 미니 찍을 때도 그렇게 드시면 쓰러집니다.”
“어쩔 수 없어요. 숙명이죠. 인기는 연기처럼 가벼워요. 아등바등 붙잡지 않으면 금방 날아가 버리거든요.”
“··· 그렇게 아등바등 연연하면 잘 붙잡히던가요?”
“네?”
“그냥, 저는 세라 씨가.. 연기처럼 가벼운 인기에, 자기 자신마저 날려 보내고 스스로를 놓쳐버리진 않았으면 해요.”
민세라는 닭가슴살을 씹으며, 래원의 말을 같이 곱씹어보았다.
민세라에게 래원은 보면 볼수록 특이한 사람이었다.
* * *
SBC 신관 앞에 있는 작은 오피스텔.
이곳이 김윤하 작가의 작업실이었다.
드라마국에서 마련해준 것이었다.
래원은 촬영을 일찍 마친 날,
김윤하와 대본 회의를 하기 위해 여기에 들렀다.
“작가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네? 저..저한테요?”
“사실 이건 처음 뵀을 때 여쭤봤어야 하는 건데···. 이 작품 어떻게 쓰시게 됐어요? 동기 같은 거랄까?”
“으음···. 초고를 쓴 건 문창과 시절, 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전 학교 다닐 때 있는 듯 없는 듯 무척 조용한 학생이었고, 친구들은 그런 절 투명인간 취급했죠. 그래도 상관없었어요. 전 관찰자처럼 주변에서 친구들을 파악하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래원은 어느새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친구들을 관찰하면서, 그 애들이 절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게, 걔네가 나쁜 애들이라서 그런 게 아니란 걸 깨달았죠. 인간은 쉽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면 누구나 그런 거더라구요. 저 조차도요.”
래원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깨닫고 나니,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사회 모순을 엮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연홍의 대사 ‘진실을 이길 수는 없지요.’가 결국 제가 이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말이자, 이 대본을 처음 쓰면서 제일 먼저 쓴 대사였죠.”
오늘 김윤하 작가는 평소에 수줍게 말을 아끼던 모습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래원은 그녀가 이 대본을 쓰기 시작한 것이 생각보다 꽤 오래전이었음을 알게 됐고, 이 작품에 꽤 진심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김 작가가 오랫동안 소신과 애정을 가지고 철저하게 준비해온 대본이었다.
이 대화로, 래원은 김윤하에 대한 신뢰가 더욱더 짙어졌다.
그래서 이번 드라마를 더 잘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솟구쳤다.
“맞다. 보내주신 3화 수정고 봤어요. 훨씬 좋아졌던데요? 이제 내가 잘 찍고, 잘 편집하기만 하면 되겠다 싶더라구요.”
“저..정말요? 그..근데 감독님, 다시 보니까 15씬까지는 지금 대본대로 가기에는 좀 무리수인 것 같아서요···.”
“일단 2화 엔딩이, [노미령]이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안승헌]이 그녀의 묘지에 찾아가는 장면이잖아요.”
“네..네, [안승헌]이 노미령의 무덤에서, 단발머리가 된 [노미령]을 마주치고 깜짝 놀라며 2화가 끝나죠.”
“그러고 나서 이제 3화 시작부터 15씬 까지의 흐름이 문제라는 말씀이신데···.”
래원은 다시 한번 대본을 펼쳐 꼼꼼히 살폈다.
사실 [노미령]은 죽지 않고 그간 정신 병원에 감금되어 있었다.
실제로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간 사람은 다름 아닌 [연홍]이었다.
[안승헌]이 1화 밤거리에서 마주쳤던, 의문의 레이스 장갑을 낀 여인이 바로 그녀 [연홍]이었던 것이다.그녀가 자신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음을 염려하여 정신병원에 감금해 두며,
[연홍]의 뒷조사를 통해 그녀에게 이부 자매가 있고 그것이 바로 [노미령]임을 알게 된다. [노미령]과 [연홍]의 친모가 남겨준 재산을 노리던 [박규산]은, 두 여인이 매우 닮았다는 점을 이용하여 [노미령]에게 접근한 후, 두 사람의 신분을 바꿔치기했던 것이다.“이거 아..아무래두 몽타주랑, [노미령]이 [안승헌]한테 설명하는 나레이션으로 처리하는 게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방법 아닐까요?”
김윤하가 먼저 걱정스레 건넨 말.
래원은 잠깐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게 타협하면 너무 재미없잖아요. 이거, 이대로 가도 충분할 거 같은데요?”
“저..정말요?”
김윤하가 래원을 향해 두 눈만 껌벅이자,
래원은 씨익 웃어 보이며 확신에 찬 미소를 머금었다.
“네, 제가 잘 찍어볼게요, 작가님.”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