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4
제74화. 뜻밖의 습격
울창한 나무와 잎들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 협곡.
바위 이끼로 인해 한 남자가 넘어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뒤따르던 사람들이 줄줄이 엉키며 쓰러졌다.
쿠웅!
“으아아악!”
“조심해요!”
“거참, 앞에 좀 잘 보고 걷지!”
“으이구, 쯧쯧. 이봐요. 괜찮아요?”
삼삼오오 모여 이루어낸 행렬은 끝과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상단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돈을 지급하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기 위해 의탁한 자들도 만만치 않게 있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한 남자가 쓰러진 여인의 팔을 잡고 일으켜줬다. 머리를 위로 틀어 올려 두건으로 가린 모습. 전형적인 하완 왕국의 여인 차림새였다.
단원이 어수선한 줄을 재정비하며 소리쳤다.
“계속 쭉쭉 가시오! 뒤로 갈수록 정체가 심해지오!”
“예예. 갑니다요. 이거 언제 빠져나갑니까?”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 일주일은 족히 걸려.”
“여기 바퀴 걸렸다! 뒤에서 같이 밀어줘!”
사람만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수레에 못 얹은 상자는 일일이 끈으로 잡아끌어야 했으며, 철창에 갇힌 희귀 짐승들, 이국의 가구, 무거운 원석 등은 행렬에 확실한 부담이었다.
여인은 손을 탈탈 털며 속으로 구시렁댔다.
‘하. 정말…. 신나서 고기 먹은 내가 등신이지.’
앞으로는 카칸티르가 내려주는 고기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먹지 않으리라. 수는 입을 앙다물며 주머니에 챙겨둔 굴라 가루를 매만졌다. 하완 왕국에서 출발한 지 이제 이틀째. 대충 상단 행군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몸으로 익힌 참이다.
‘식사는 하루에 세 번. 그중 저녁에는 무조건 이전에 먹다 남은 것을 모조리 넣어 끓인 스튜.’
식중독 증세를 일으킨다는 굴라 가루와 노란전갈의 독까지 챙겼다. 이것으로 최대한, 행렬을 협곡에 묶어두는 것이 수의 목표였다. 되돌아간다면 아예 고맙고.
“벌써 해가 지는군.”
오지에 가까운 곳인지라, 일몰이 진다 하면 무섭게 어둠이 치고 올라왔다. 부단장은 시계를 확인하며 혀를 차댔다. 이대로라면 일주일 안에 못 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만!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겠소. 저녁을 준비하지.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고, 각자 알아서 잠자리를 준비하시오.”
“아구구. 나 죽네. 나 죽어.”
“이거 대체 누가 주문한 거야? 콱 씨!”
“누구겠나. 저기, 이름 모를 귀족이시겠지.”
휴식 명령이 떨어지자, 다들 짐을 내려놓으며 앓는 소리를 해댔다. 수는 의탁한 외부인이라 들것이 없었지 만은, 단원들은 제 몸만 한 것들을 하나 이상씩 담당하고 있었다.
“저기…….”
수는 식사를 준비하는 곳으로 다가가며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커다란 냄비에는 오늘 먹다 남은 것들이 죄다 담겼다.
“도와드릴 게 없을까요? 아무리 돈을 냈다지만, 다들 너무 힘들어하는데…….”
속내는 당장이라도 저딴 것을 먹으라는 것이냐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수는 최대한 나근나근하게 친절함을 베풀었다. 이것이 바로 카칸티르가 그녀를 선택한 이유였다.
‘카칸께서는 네가 책임감 있다는 걸 잘 알고 계신다. 분명 춥고 고된 일이 될 것이야. 다른 전사들은 성격이 불같아서 인내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만, 너라면 말이 달라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발 빠른 건 천려에서 네가 최고 아니겠니? 혼자 투입되는 작전이라, 문제가 생기면 대응하지 말고 탈출하여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 외에는 모르겠구나.’
미친 게 분명했다. 이안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서는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다니. 하완 왕국으로 가는 것도 그렇지만, 상단과 같이 움직이는 게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도와준다고? 흐음.”
“너무 개의치는 마시고요.”
“그럼 잠시만 이걸 들어 주겠어?”
단원이 수를 슥 훑어보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으나, 이내 너무 피곤한 탓인지 호의를 받기로 했다. 무엇보다 저쪽에서 사타구니 벅벅 긁어대는 사내놈들보다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무겁지 않겠어?”
“하나도… 아니, 조금 무거운데 괜찮아요.”
“기다려봐.”
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냄비를 받치고 있었다. 요리를 담당하는 단원들이 수를 힐끔거리는 것도 잠시, 이내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저녁 식사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스윽.
그녀는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어 굴라 가루를 찾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용물을 냄비에 털어 넣었다.
조미료를 가져온 단원이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내려놓아도 돼. 계속 들고 있었나?”
“어머.”
‘시발롬아…. 들고 있으라며.’
수는 미간에 주름이 가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웃어 보였다. 사내는 여인이 힘도 좋다며 감탄한 다음, 주걱으로 내용물을 대충 휘저었다. 온갖 잡탕 속으로 굴라 가루가 섞여 들어갔다.
“배식을 시작하지! 오늘 당번은 누구야?”
“몰라. 네가 한 번 더 하든가.”
“이 새끼가, 나 어제저녁에도 굶었어!”
“제가 할게요. 저는 배가 별로 안 고파서.”
“뭐? 자네가?”
수가 팔까지 거들며 지원하자, 단원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흔쾌히 국자를 넘겼다. 배식 당번은 음식이 남아야지만 밥을 먹을 수 있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땅땅땅!
“자자. 다들 한 줄로 서세요!”
“쟤는 누군데?”
“하완에서 합류한 의탁인.”
수는 붙임성 좋게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냄비를 휘휘 내저었다. 차마 덜 풀린 굴라 가루 덩어리가 보이면 국자로 세심하게 으깨주기도 했다.
“이봐, 간이 좀 덜한데.”
“그래요? 잠시만요. 이것 좀 뿌려보시겠어요?”
간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굴라 가루까지 뿌려주는 능청스러움도 보였다. 그는 굴라 가루와 함께 잡탕을 떠먹더니,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헉, 설마 눈치챘나?’
“…왜, 왜 그러세요?”
“간이 딱 맞아. 고마워요.”
엄지까지 치켜들며 돌아서는 남자. 수는 한심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국자를 연신 휘저었다. 다들 배를 앓아야 저가 사막으로 돌아갈 텐데…….
“으하하! 오늘 밥맛이 꿀맛이구먼!”
“한 그릇 더 먹을 수 없나? 꺼어억.”
수의 마음도 모르고, 피로를 푸는 자들의 웃음소리가 연신 숲을 뒤흔들었다. 아우우-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 *
메렐로프 영지.
“엄마, 배고파.”
“이거 물고 있어. 씹지는 말고. 조금만 있으면 저녁 먹을 거야.”
아이의 칭얼거림에 어미는 길게 말린 고기를 꺼내주었다. 쭙쭙 빨던 것도 한두 번, 아이는 감칠맛에 저도 모르게 잘근잘근 씹고 말았다.
“얘가 정말, 씹지 말라니까!”
“으아아앙!”
어미의 호된 호통에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비단 이 집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옆집도, 앞집도, 뒷집도 모두 그러했다. 흉작 중의 흉작을 지낸 대가가 이리도 컸다. 이국의 교역지가 주된 경제이긴 했으나, 그래도 그렇지…….
“망했군.”
“그러게. 머리털 나고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봐.”
“작년에도 이러지 않았나?”
“이 정도는 아니었지. 강물에 피가 섞이면서 이 지랄 났잖아. 브라츠에 보상금 내놓으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서시게. 못 들었나? 메렐로프 영지민 중 누가 이안을 죽이려고 했대. 그것 때문에 관계가 영 어색하다는데?”
역대급 흉작이다. 굶주림을 대비해 작년에 쌓아두었던 식량은 모두 거덜 나기 일보 직전. 그렇다고 메렐로프 백작에게 자비를 요청할 수도 없었다. 괜히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간 조세를 더 내라 할 수도 있었으니.
“브라츠 사람들이 굴라가 그리 맛있다 하던데…….”
“짐승이 되고 싶은 겐가? 그러면 내 친히 구워 먹어주지. 낄낄!”
“아니, 진짜라니까. 거기 황궁에서 온 자문관이 있는데 그 작자도 평소에 자주 먹었대. 여기가 변방이라 소식이 느린 거라 하더군. 위쪽에서는 이미 황족이고 귀족이고 모두 굴라를 먹는다더만.”
“등신아, 그걸 믿어?”
“그래서 굴라를 모아 달라고 돈까지 내걸었잖아.”
“아니…….”
뭐라 반박하고 싶지만, 딱히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잡풀을 돈 주고 모은 것도 모자라 땅에 빈틈없이 심고 재배하고 있다 들었다. 외부인을 철저히 막는 바람에 뜬 소문처럼 들었지만.
“아 몰라, 굴라고 뭐고, 빨리 상단 좀 들어왔으면 좋겠네. 이러다가 손가락만 빨게 생겼어.”
누군가의 말에 다들 깊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이 오면 그들에게 잠자리나 편의시설을 제공하고 돈과 음식을 받을 수 있을 터다. 그뿐인가? 그걸로 다시 상단에서 음식을 사 먹을 수도 있다.
매년 해왔던 일이니, 그들은 찬 바람 불 때면 언제나 북쪽을 바라보곤 했다. 하완 왕국이 있는 방향이었다.
타닥타닥!
그때였다. 마을의 대로변을 내지르는 말 한 마리. 옷으로 보나, 깃대로 보나 이국 사람이 분명했다. 그는 말고삐를 잡으며 영지민들에게 물었다.
“대저택으로 올라가는 길이 어딘가?”
“왼쪽 길로 나가서 쭉 올라가시면 됩니다. 그런데, 하완 왕국에서 오시는 상단 분이신가요?”
“그렇네만.”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영지민들은 바쁘게 떠나려는 그를 붙잡으며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상단이 협곡에서 발이 묶였네. 다들 뭘 잘못 먹었는지 식중독 증세가 심해서 꼼짝도 못 해. 의사들도 다 자지러지는 바람에 방도가 없어 먼저 달려왔지. 이만 비키게나.”
사내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재빨리 저택으로 향했다. 멍하니 뒷모습을 지켜보는 영지민들. 계속 뇌리에 맴도는 말이 있었느니.
“거기서 발이 묶였다고?”
그렇다면, 언제 온단 말인가? 아니, 오긴 오는 게 맞나? 다들 허망한 시선으로 메렐로프 대저택만 올려다봤다.
한편.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나?”
메렐로프 백작 역시 믿을 수가 없어서 연신 되물었다. 100여 명이 훌쩍 넘는 대상단이다. 그런데 단체로 식중독이 발발하여 묶여 버렸다니?
“아무래도 저녁 식사가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만 증세가 있다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 절반 넘게 꼼짝도 못 하고 드러누웠습니다.”
아주 장관일 것이다. 그 울창한 숲에서 쓰러진 인간들이라. 메렐로프가 수염을 매만지며 놀란 마음을 잠시 가라앉혔다.
“쯧쯧. 그러니 돼지 꿀꿀이죽처럼 한꺼번에 끓여 먹는 것 좀 그만하라니까!”
바다를 건너고 땅을 헤집는 상단의 사정을, 백작이 알겠는가? 행군 중인 상단에 식중독은 종종 있는 일인 것은 맞으나, 이처럼 다들 극심하게 앓아눕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배탈이나 좀 나고 말지.
“아무튼, 의사를 차출하여 보내주시죠. 준비한 약이 하루 만에 동났습니다.”
“치료비는 어떻게 지불할 셈인가?”
“상단원들은 상단에서 지불할 것이고 외부인은 개인으로 의뢰할 것입니다.”
“위치는 어디쯤이지?”
“이쯤입니다.”
“거리가 좀 먼데. 출장비를 두 배로 받게 할 것일세.”
메렐로프 백작은 남자가 짚은 지도를 보며 한껏 탐욕스럽게 덧붙였다. 위치상으로 보니 산맥 입구를 겨우 벗어난 참이다.
“상단주께서 뜻대로 하라 하셨습니다. 일단 사는 게 우선이니까요. 하지만 하완 왕국에도 사람을 보냈으니,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잠시 기다리지. 밖에! 집사!”
“예에. 주인님.”
“영지 안에서 걷는 게 불편한 노인들 제외하고, 의사를 모두 부르게.”
이내, 집사가 의원들을 모았다는 전언을 해왔고, 메렐로프는 그들을 호위할 병사를 붙여 보냈다.
의사를 태운 말들이 일렬로 영지를 빠져나갔다. 영지민들은 심란한 마음으로 그들의 그림자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