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05
105.
“여기선 말을 타기 힘을 거 같으니 내려서 가자.”
산길이라 길이 좋지 않다는 이현의 말에 동의한 일행은 도중에 말에서 내렸다. 동정호는 그리 멀지 않고 일행 중 체력이 떨어지는 이는 없으니 사실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일행이 적당히 주변을 살피며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멈춰라!!”
갑자기 나타나 길을 막아선 낯선 사내들을 본 일행은 깜짝 놀랐다.
일행 중 눈에 띄는 무기가 없는 청운진인을 빼도 검을 들고 있는 장신의 사내가 셋, 그중에서도 거대한 덩치의 노악을 보고도 달려들 만한 강심장들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희가 호위받는 부잣집 아가씨로 보인 거 아냐?”
“나는 왜?”
백리한의 추측에 반발한 이현을 제외한 일행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린과 나란히 면사로 얼굴을 가린 비슷한 행색에 노악 옆에 있기까지 하니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다는 걸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
그렇게 실없는 소릴 주고받는 가운데 이린만이 신기한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우락부락 험악하게 생긴 십수 명의 아저씨들과 중구난방인 무기들, 일행을 막아선 모양새.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게다가 저 진부한 대사. 그야말로 이야기에서나 들어 본 전형적인 산적의 모습 그 자체였다.
“와, 오빠. 나 산적 처음 봐!”
난생처음 산적을 만난 이린의 해맑은 반응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한 이린이 당황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어. 산적 아닌가? 산적이……지?”
“산적입니다. 맞으니까 실망하지 마세요.”
“맞아. 산적이야. 저런 대사를 읊으며 무기를 들고 나오면 거의 10할은 산적이라고 할 수 있지.”
“어디서 나오느냐에 따라 산적(山賊), 수적(水賊), 해적(海賊) 등으로 분류하거나 그냥 도적(盜賊)으로 총칭할 수 있긴 하지만.”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가는 목소리에 얼른 긍정해 주며 친절한 해석을 덧붙이자 이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의 순박한 반응에 다들 피식피식 웃음이 터졌다. 곱게 자란 아가씨라는 티가 이상한 곳에서 나고 있었다.
친구들이 동생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훈훈한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이현의 귓가에 텁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금 우릴 무시하는 거냐!”
일행의 느긋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산적들이 존재감을 과시하려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대단하네. 보통 노악아저씨만 봐도 뒷걸음질 칠 거 같은데.”
“숫자가 많잖아. 나름 실력에 자신도 있다는 거고.”
그렇게 말하며 백리한과 심여준은 느긋하게 검을 뽑아 들었고, 방금 전까지 농담이나 주고받던 것이 거짓말처럼 동시에 산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어, 왜?”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들고 뛰어들려는 이린을 이현이 붙잡았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해하는 이린을 보며 난처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겁이라고는 없는 동생이었다.
“진검으로 싸우는 건 처음 보는 거지? 연가장 외의 다른 문파 사람들의 무공은 별로 본 적이 없을 테니 한번 찬찬히 살펴보렴. 산적들은 무기도 다양하고 수법이 교모한 자들이 많으니 공부가 될 거란다.”
오빠의 조곤조곤한 말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이린은 이현을 따라 남겨진 말들의 고삐를 잡으며 싸움을 관전했다.
‘으음.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해.’
죽기 전까지도 연가장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린은 타 문파의 무공을 직접 볼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 당시에 많은 문파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당연히 싸우는 건 금지되어 있었고, 연가장에 투신한 무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궁청휘가 나에게 경험이 부족하다며 걱정했던 것도 비슷했지. 지금 상황은 그렇게까지 걱정할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산적들을 상대하는 심여준과 백리한, 노악의 모습을 보며 이린은 눈을 반짝였다. 확실히 여러모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사내놈들 생긴 걸 보니 잡아서 팔면 돈 좀 받겠군.”
안 싸우고 뭐 하나 했더니 견적 계산을 하고 있었는지 속으로 주판알을 튕기는 산적의 목소리에 이린이 다시 수군거렸다.
“오빠, 노악 아저씨를 팔겠다는데.”
“취향이 특이하군요.”
“세상엔 다양한 취향이 있으니 존중해야지.”
다양한 취향을 존중한다는 이현의 말에 이린의 따가운 시선이 심여준을 향했지만, 여준은 억울하게도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오해에 대해 항변할 틈이 없었다. 홀로 여러 명의 산적과 대치 중이었으니까.
산적들에게 비전투 인원으로 찍혀 있는 이린과 이현, 청운진인이 느긋하게 농담 따먹기를 하는 동안 달려드는 산적 하나를 쓰러뜨린 백리한이 빽 소릴 질렀다.
“야! 왜 다 놀고 있어!?”
“셋이면 충분하지 않나.”
“버거운가 보군요. 할 수 없군요. 제가 가서 좀 거들도록 하죠.”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청운진인이 부채를 살랑이며 앞으로 나가자 이현이 뒤늦게 이린의 정신 건강을 염려했다. 멀쩡해 보이긴 했지만.
“린아 놀라지는 않았니?”
“뭐 보고 놀랄 만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산적들의 행색이 비위생적이고 털과 노출이 많은 것 정도?
게다가 앞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조차 이린을 의식해서인지 가능한 피를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덕분에 이린이 놀랄 만한 일은 없었다. 좀 미안해서 그렇지.
“우리 린아 대범하기도 하지.”
산만 한 덩치의 산적이 청운진인의 부채에 맞아 쓰러지는 것도 보고 재밌긴 한데 자신을 신경 쓰느라 너무 고생들 하는 것 같아 약간 찔려 왔다.
“나는 괜찮으니까 오빠도 합세하면?”
“뒤에서도 올 수도 있고, 말도 챙겨야 하고.”
원래 청운진인이 남아 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하도 툴툴거려서 가세했지만.
이린도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고, 오빠 친구들이 잘 싸우고 있는데 괜히 어린애가 끼어들면 자존심 상해할 거 같아 그만뒀다.
“그래, 그 말대로다!”
“와.”
그 와중에도 마치 이현의 설명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뒤에서 나타나는 산적들을 보며 이린이 감탄했다. 여전히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비슷비슷한 용모의 산적들 서너 명이 제법 커다란 대도(大刀)를 들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순순히 따른다면 거칠게 대하지는 않으마.”
“이미 거친 거 같은데.”
“린아.”
자꾸 말꼬리를 잡는 이린을 제지하는 이현을 본 산적의 눈이 가늘어졌다. 멀리서 봤을 때는 여인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본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두 사람의 차림이 부유해 보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보아하니 돈깨나 있는 집 자제들 같은데 부르는 게 값이겠지?”
“파는 게 더 돈이 될지도 모르죠.”
킬킬 웃는 산적들의 시선이 이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린의 옆에서 서늘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릉-
“린아, 잠시만 기다리렴. 금방 끝날 거란다.”
“어, 응.”
처음 겪는 일도 아니라 비교적 무심하게 넘기고 있던 이린은 이현의 반응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보기엔 어린 여동생이 밖에 나와 처음 이런 취급을 당했으니 화가 나겠지.’
오빠가 화내는 걸 별로 본 적이 없는 이린은 이현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면사를 쓴 데다 자신을 등지고 있으니 알 수가 없었다.
유정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용하고 빠른 이현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이린은 흡족하게 웃었다. 아무리 허접한 산적이라도 숫자로는 열세인데도 거침없이 산적들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흠. 산적은 보통 이 정도인가.’
걱정할 수준도 아니었다. 이현의 벗들도 어린애 앞이라 피를 보지 않으려 자중하느라 시간이 걸렸을 뿐 차례로 정리되고 있었다.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면 벌써 여기저기 피를 뿌리며 쓰러져 있을 대단찮은 실력들이었다.
‘어디 이름난 산채의 산적은 아닌가 보네.’
무공을 익힌 이들이 산적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으니, 산적에게 고전하는 이들이야 얼마든지 있을 만 했지만 지금 이들은 아닌 듯했다. 쓰러져 꿈틀거리는 산적들을 뒤로한 이현이 어느새 이린에게 돌아가 안색을 살폈다. 사정은 앞쪽도 비슷했다.
“린아. 많이 놀랐지?”
“괜찮아.”
안절부절못하는 이현을 보며 심여준이 어이없는 듯 딴지를 걸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멀쩡하구먼, 쓸데없이.”
“여준. 당신이 그러니까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겁니다.”
“뭣!?”
여인과 인연이라곤 없는 도사의 말에 발끈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심여준도 할 말이 없는지 쳇, 하고 혀만 찼다.
이린은 쓰러져 있는 산적들을 살피며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정말 위험한 산적이 아니라 다행이기도 하고 좀 아쉽기도 하고, 이 정도 산적은 딱히 위협이 되질 않으니.’
연가장을 맡고 있을 때 겪은 신변의 위협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천산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수상쩍은 놈들도 있었고.’
아버지도 오빠도 장원의 무인들마저 대거 빠져나간 후 이린은 마음 놓고 잠들 수 없었다. 때문에 수년간 손에서 놓고 지내 와 익숙하지 않은 검을 끌어안고,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는 옷을 입고 잠들곤 했다.
‘그나마 남궁세가에서 무인을 보내 준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시합 때문에 지형은 대외비라며 그 핑계로 비천산의 경계까지 부탁했으니 참 알차게 부려 먹긴 했다.
이린이 잠시 옛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였다, 이린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달려들었다.
“!!”
“린아!!”
이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린의 경공과 신법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었지만, 경험이 부족한 이린이 갑작스런 기습에 반응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미지수였기에 이현은 서둘러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일동의 시선이 집중된 그 때, 정작 이린은 알고 있었다는 듯 눈 하나 깜짝 않고 뒤에서 달려드는 산적의 칼을 피했다. 그러고는 검을 뽑지 않고 검집째로 휘둘러 산적의 명치를 찍었다.
“아악!!”
급소를 맞은 산적이 숨이 멎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순간, 이린은 멈추지 않고 빙글 돌아 산적의 턱을 올려 찼다. 비명을 지르던 중 갑작스레 턱을 맞아 비명 대신 이가 부딪치며 으드득, 딱,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곳에 그를 동정해 줄 이는 없었다.
“컥!!!!”
단련된 각력(脚力)에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지는 산적을 다시 한 번 걷어차 멀리 치워 버린 이린이 놀라서 다가온 이현과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방심하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