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06
106.
“어, 응. 미안.”
뭐라 말해야 좋을지 답을 찾지 못한 이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린아 괜찮니? 안 놀랐어?”
“뭐 이 정도로 놀라겠어. 걱정하지 마.”
놀라서 달려온 이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린이 오빠를 달랬다.
“이현이 동생 호쾌해서 좋구먼.”
“뒤처리 제대로 못한 우리 탓도 있으니 웃어넘길 일만은 아닙니다만.”
한숨과 함께 기절해 있는 산적들의 옷을 벗겨 묶으며 청운진인이 일침하자, 백리한은 못 들은 척 이린의 발차기에 맞아 쓰러진 산적의 머리를 다시 한 번 후려차고 나무에 꽁꽁 묶었다.
“쓰러진 척하고 기회를 노리다 인질을 잡아 도망칠 생각이었나 본데. 일관성 있게 보는 눈이 없는 산적들이군. 그런데 우리 별로 필요 없는 거 아냐?”
“잡일 담당은 필요할걸?”
“지금처럼?”
이런 산적들을 딱히 살려 두려 노력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싫어할 만한 사람이 셋이나 되다 보니 본의 아닌 추가 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번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동생을 안심하고 놔둬도 될지 어떨지 저 녀석도 확신이 서겠지. 나이 차가 많이 나서 그런가 머리로는 혼자 놔둬도 걱정 없다는 걸 알아도 계속 어린애처럼 느껴질걸.”
다친 데가 없나 집요하게 확인 중인 이현과 어지간히 하라고 귀찮아하는 이린을 보며 백리한과 심여준이 피식피식 웃었다.
“저 녀석 좋다고 꺅꺅거리는 여자들한테 저 모습 좀 보여 주고 싶은데”
“더 좋아할 수도 있어.”
“…….”
말문이 막힌 심여준이 생각났다는 듯 이현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산적들은 그거 안 하냐?”
“그거가 뭔가?”
“왜 산적이 되었나, 다른 재주는 없나, 처자식은 있나, 뭐 이런 거 늘 확인하지 않았나?”
심여준에 말에 이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질문은 정말 먹고살기 위해 농사짓던 쇠스랑 들고 나온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지. 사람 죽이려고 칼 들고 나온, 인신매매에까지 손대고 있는 자들에게까지 베풀어 줄 자비는 없네.”
“흐음.”
이현의 칼 같은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심여준은 히죽 웃으며 어디선가 꺼내 온 밧줄로 산적들을 칭칭 묶고는 풀숲에 굴렸다.
“…….”
“서너 명이면 몰라도 십여 명이 넘는 걸 어떻게 끌고 가. 부상자들이니 제압해 두고 신고만 해 두자고.”
이린의 시선이 뭔가 떨떠름했는지 열심히 변명하는 여준을 보며 이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했어요. 우리 오빠하고 너무 붙어 계신 거 외에는.”
“……진짜, 아니라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이린의 의혹어린 눈동자를 뒤로하고 일행은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자, 자. 동정호는 이쪽.”
“여기는 길이 간단해서 좋네.”
이린 일행은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지금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고 있는 그곳은 얼마 전 한 일행이 길을 헤매기 시작한 불운한 장소였다.
“신기하게 동정호에 가까워지니까 바로 산적이 나왔네.”
산적 좀 봤다고 살짝 상기된 얼굴로 감탄하는 이린의 반응에 일행은 첫눈을 보고 들뜬 강아지를 보는 듯한 따스한 눈으로 웃음을 삼켰다.
“원래 이런 곳에 산적이 많긴 하지.”
“호남은 원래 산적이 많은 곳 아냐? 녹림 십팔채나 뭐 그런 성가신 놈들은 없더라도.”
“어? 하지만 장사를 오갈 때 산적을 만났다는 사람은 못 봤는데.”
관도(官途)라서 산적이 안 나왔나?
백리한의 말에 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연가장과 연가상단을 오갈 때는 연가장 마차를 타지?”
“응. 그렇지.”
상단에서 쓰는 마차와 연가장에서 쓰는 마차는 동일하게 연가장의 표식이 붙어 있어 별 차이는 없었다.
“다른 데는 몰라도 적어도 호남에서는 연가장의 마차를 건드리는 산적은 드물거든.”
“어째서?”
마치 손녀에게 옛날 얘기해 주는 할머니처럼 인자한 이현의 목소리에는 슬쩍 즐거움과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연가상단이 산적 떼에 습격당한 적이 있었거든. 그 얘길 듣고 분노한 연가장 무사들이 산적들을 끝까지 쫓아가 토벌하고 물건을 찾아왔다고 해.”
“보통 상단은 그냥 통행세를 주고 지나가지 않아?”
백리한의 질문에 이현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당시에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그 이후로 아예 상행을 함께하며 습격해 오는 산적마다 토벌하고, 쫓아가서 산채를 불태우고, 보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싹을 자르는 걸 몇 번 반복하면서 아예 호남에 있는 산적들은 연가장의 마차가 보이면 몸을 숨기곤 했다더라고.”
“와아.”
감탄하는 이린의 옆에서 심여준이 불신의 눈빛을 보냈다.
“진짜냐.”
“연가장의 전성기였지.”
“아빠는 그런 얘기 안 해 줬는데.”
“나도 어머니한테서 들은 거야.”
연적훈은 먼저 간 부인에 대해 떠올릴 때 외에는 아이들에게 그리 예전 얘기를 해 주는 편이 아니었다. 이현에게서 처음 듣는 이야기에 이린은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다.
“굉장하다. 연가장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니 꽤 오래된 이야기지. 그때 소탕한 산적들 중 죄가 가벼운 산적들은 나중에 상단에 일꾼으로 받아 주셨다니, 상단에서 오래 일한 일꾼들 중에는 아직 당시 경험자들이 남아 있을 거야.”
“아.”
아빠와 오빠를 보면 어쩐지 있을 법한 얘기였다.
“그런데 그럼 굉장히 오래전 일인데 산적들이 지금까지 피해?”
“아무래도 그때의 산적들이 지금의 일꾼이기도 하고. 애초의 산적이 생기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빈곤이니까 구휼에 재물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거든. 물론 상단과 장원을 계속 오가야 하니 아무래도 지속적으로 안전에 신경 쓰고 있기도 하고.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겠지.”
“으음. 그런가.”
생각해 보면 자신이 장주일 때도 산적 걱정을 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그때처럼 연가장이 위력을 떨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앞으로 고수를 많이 배출하면 되지.”
“응응, 그렇지.”
가문의 청사진을 그리며 의욕 충만해 있는 사이좋은 오누이를 일동이 따끈따끈한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린은 이현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심여준을 경계하며 이현을 옆으로 슬슬 밀었다.
“오빠 이쪽으로 와.”
“응?? 왜? 같이 타고 갈까?”
“아니야, 괜찮아.”
그리고 이린이 자신을 경계하듯 쳐다보며 이현을 끌고 가는 것을 본 심여준은 조용히 뒷목을 잡았다.
“대체 뭔 짓을 했기에 저 얌전한 애가 저렇게 경계한대?”
“얌전? 얌전하긴 뭐가 얌전해. 날뛰는 망아지 같은데.”
이현의 오랜 친구인 만큼 이린을 어릴 적부터 봐 온 노악의 말에 심여준이 도끼눈을 떴다.
“얌전한데?”
“얌전한 거 같습니다만.”
그리고 누구의 동의도 얻지 못했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여자애들을 접해 볼 일이 없으니 뭘 알겠습니까.”
“하긴.”
그동안 살면서 여자에게 관심을 안 가진 게 무슨 죄인지. 청운진인과 백리한이 한심하다는 듯 시선을 돌리자, 안 그래도 이린에게 이상한 견제를 당하느라 미치고 팔짝 뛰겠는 심여준은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린에게 다가갔다.
“어이, 꼬마. 네가 자꾸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거 같은데. 충고 하나 하지.”
“뭔데요.”
“네 오빠를 무사히 장가보내고 싶으면 나보다는 청운진인을 주의하는 게 좋을 거다.”
“아저씨.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그러면 안 돼요. 그것도 출가한 도인을.”
“진짜다. 난 경고했으니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뭐라는 건지.
이린이 어이없어하며 슬슬 피하는 것을 보고 노악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애랑 뭐 하는 거요. 진짜…….”
이린과 심여준 사이에 있었던 소소한 다툼에 대해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인 노악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에 괜히 억울해진 심여준은 떽떽거렸다.
“아니, 내가 뭐.”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다니니 그런 소릴 들을 만도 하지요.”
“!!”
당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다 들은 청운진인이 다가오자 심여준이 슬슬 물러났다. 이미 맞아 본 경험이 그의 몸을 저절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린을 둘러싸고 뜻밖에 즐거워 보이는 자신의 벗들을 돌아본 이현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렸다.
“그만들 하시지요. 드디어 동정호에 도착했는데.”
“정말?!”
“응. 여기만 넘어가면 보일 거야.”
이현이 가리킨 방향으로 좋아라 말을 몰고 달려가는 이린의 모습에 삐딱한 심여준조차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심여준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현이 웃었다.
“린아랑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보면 모르나? 최악 아냐.”
“방금 왜 웃고 있었는데.”
“촌뜨기 꼬맹이가 동정호 보고 놀라 나자빠질 거 생각하니 흐뭇해서 그런다, 왜.”
“그러니까 이린이 동정호를 보고 놀랄 모습을 생각하니 흐뭇해진다고?”
“으아아아……! 아니라고!”
이현의 긍정적 해석이 영 다른 말은 아니라 여준이 머리를 쥐어 싸맸다. 듣고 보니 그런 해석도 가능했다. 아니라고 꽥꽥거리던 심여준은 이현이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에 움찔해 슬쩍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딱히 네 동생 괴롭힐 생각 같은 건 없다.”
“그 정도는 내가 아니라 린아도 알걸.”
화낼 기운도 사라지게 만드는 이현의 마냥 다정한 얼굴에 여준도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오빠, 오빠! 굉장해! 저게 정말 호수야??”
먼저 앞쪽으로 달려갔던 이린이 이쪽을 돌아보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자 예상 범위 내의 질문에 하나같이 웃음을 터트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얼핏 보면 바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크지만 일단은 호수야.”
“아마 저 안에 어지간한 도시 몇 개는 들어갈 겁니다.”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별로 와 닿지는 않지?”
눈을 깜빡이며 열심히 설명을 듣던 이린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바다는 어떻게 달라요?”
그 질문에 일행의 시선이 유일하게 바다를 본 적이 있는 백리한에게 집중되었다.
“글쎄, 보기보다 별거 없어.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소금기 때문에 공기가 좀 텁텁하고 끈적거리는 거 외에는……. 더 크고, 더 위험하고, 맛있는 게 많지.”
“와.”
“대체 어느 부분에서 감탄하는 거니.”
“맛있는 거?”
이린의 대답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백리한을 중심으로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며 왁자지껄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린 누이동생이 함께하는 것은 귀엽다 보니 동정호에 도착한 일행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오늘은 우선 숙소부터 잡고 쉬자. 아, 마련야장께서 말씀하신 취선루부터 가 볼까?”
“응!”
장사에 살고 있는 제갈윤위가 추천했다는 건 장사에서 동정호로 갔을 때 가까운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단 뜻이기도 했다.
맛있는 음식을 마다할 이는 없어 모두 이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