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3
13.
“저는 본래 사천성 출신으로, 낭인으로 떠돌던 중 인연이 닿아 하남을 중심으로 서문 표국이라는 표국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표국은 그럭저럭 잘 운영되어 벌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불운하게도 그의 부인은 아이를 낳고 먼저 세상을 뜨게 되었다. 거기다 하나뿐인 딸, 서문민영마저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이미 아이의 발작을 보셨다니 아시겠지만, 아이의 병세는 범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의원을 모셨지만 완쾌는 힘들고 그저 증상을 진정시킬 뿐이라 했습니다.”
“마음고생이 심하셨겠구려.”
“후우. 그래도 부인이 남긴 하나뿐인 자식이라 의원을 불러 딸아이의 병을 돌봤지만, 아이에게 드는 치료비가 만만치 않았지요. 이 일에 대해선 근방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서문제우를 동정하여 선의로 의뢰를 연결해 주는 고마운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민영의 병은 쉽게 나아지는 병이 아니었다. 잘 지내는 듯하다가도 갑자기 쓰러지고, 피를 쏟는 괴이한 병질에 아비의 속은 타들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서문표국을 찾아온 어떤 손님이 자신의 의뢰를 무상으로 받아 주면 딸을 고쳐 주겠다고 제안했다. 서문제우는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건을 운반했고, 산적들을 뚫고 무사히 표물을 전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혈교의 물건이라며, 무림맹의 사람들이 저를 혈교의 잔당이라 부르더니 쫓기 시작했습니다.”
결백하다고 설명하려 해도 아무도 듣지 않았다. 다짜고짜 공격해 대며 무작정 혈교의 사람이라 몰아가니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정파에 몸담고 있는 지인들은 그가 무림맹에 쫓기고 있다는 말에 모두들 몸을 사렸다.
“그래도 어찌어찌 딸과 함께 도망쳐 믿을 수 있는 지인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호남에서 지인에게 서신을 전해 달라 부탁한 이에게 배신당해 거처를 들키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도망 다니기는 어려워 할 수 없이 잠시 주루에 아이를 숨겨 둔 것입니다. 뜻밖에 연가장과 연이 닿아 민영이 무탈했으니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거듭 연적훈에게 인사를 하는 서문제우의 눈은 누가 보아도 진심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윤승재와 금혜 선사는 침음을 흘렸다.
“우리는 서문 표국이 혈교의 잔당으로 위험한 물건을 운반했다는 정보를 듣고 국주를 쫓고 있었소.”
“저는 혈교와는 아무 관련도 없습니다! 혈교는 마교에서조차 너무 잔혹하다고 쫓겨났던 집단이 아닙니까. 잘못 엮이면 아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어느 부모가 혈교와 연관되려 하겠습니까.”
“아미타불.”
어른들이 논쟁을 시작하는 동안 이린 역시 머리를 굴렸다.
‘서문제우는 원수를 다 갚고 더 이상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흐름과 이어서 생각해 보면, 누군가가 서문제우를 이용하기 위해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었을 가능성이 컸다.
“오해라면 사실을 밝혀야 할 걸세. 하지만 혼자서는 불안할 테지. 나도 같이 가겠네.”
“감사합니다. 장주님!! 한데 오늘 처음 보는 제게 어째서 그렇게까지…….”
호남 연가장의 장주라면 정파에서도 그 인품으로 유명한 인물. 그런 이가 함께해 준다면 결백을 증명하는 일은 한층 쉬워질 것이 분명했다.
“우리 린아가 벌써 민아를 여동생처럼 귀여워하니 어쩌겠나. 이것도 인연이겠지.”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반짝이는 소녀에게 꼭 달라붙어 있는 자신의 딸이 보였다. 익숙한 듯 아이에게 간식을 주고 입가를 닦아 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서문제우는 이린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기다리느라 지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자신을 쫓는 무림인들에게 붙잡혀 갈 뻔한 아이를 구해 주었다.
그뿐인가. 아픈 아이에게 의원을 불러 주고, 보살펴 주기까지 했다. 어리다고는 하나 분명 딸의 은인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곰 같은 아저씨가 고개를 숙이자 이린은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네? 아니, 왜 이러세요.”
“아빠?”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전 딱히 뭔가 한 게 없는데요. 그냥 아이가 아프니까 의원을 부른 것뿐이에요. 저희 아빠도 아저씨가 억울하다고 하시니 도와주시려는 것뿐이고요.”
이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윤승재와 금혜 선사는 이린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린은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서문제우의 모습을 찬찬히 관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탕한 인물이네. 이런 사람이 거대마두로 불리며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녔다니.’
사람 일은 참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럼 저희는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이 이상은 아이들에게 들려줄 얘기가 아니지요.”
“린아, 오늘 피곤했을 테니 어서 저녁 식사 하고 들어가서 쉬자.”
“응, 오빠.”
이린은 아버지와 함께 별채로 들어가는 서문제우의 뒷모습을 보며 민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분명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었던 거겠지.’
쫓기는 몸으로 다짜고짜 연가장에 쳐들어온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딸을 아끼는지는 알 수 있었으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결론이 난 모양이었다.
연적훈이 당장 서문제우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무래도 늦어질수록 단서를 찾기 어려우니 서두르는 게 좋다고 생각했겠지.
“그럼 민아는 저희가 데리고 있을 게요. 몸이 약한 아이니 같이 가기는 어려울 거예요.”
정파 측에서도 그러는 편이 안심될 테고.
하지만 어른들이 결정하는 것보다 이린이 사심 없이 말을 꺼내는 것이 훨씬 모양새가 좋았다.
‘서문제우가 혹 딴 맘을 품더라도 아이가 여기 있으면 섣불리 다른 생각은 못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럼요. 민아, 언니랑 같이 있자? 여기서 아빠 기다리자.”
“민아 좋아!”
원체 표국 일로 바쁜 아빠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던 민영은 또 아빠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별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곳이긴 하지만 놀아 주는 언니들이 있고,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빈승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네? 두 분께서?”
윤승재와 금혜 선사는 본디 서문제우를 쫓아 호남까지 온 입장이었다. 함께 간다면 부담스럽긴 하겠지만, 서문제우를 잡으려는 이들도 한발 물러서 줄 것이다.
‘게다가 만약 서문제우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 해도 저 세 사람을 제압하기는 힘들겠지. 함께 가 주신다면 안심이야.’
두 사람이 동행한다는 말에 이린은 은근히 느껴지던 불안을 떨쳐 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정파에 혈교의 간자가 많다 해도, 소림과 화산에 배분이 높은 제자로 침투해 있기는 어려웠으니까.
그런 이린을 보던 윤승재가 부담스럽게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장주께선 참으로 훌륭한 따님을 두셨습니다. 부끄럽지만 아이가 쓰러진 것을 봤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아이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의심받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따님께선 기세등등한 무인들을 앞에 두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아이만을 살피셨습니다.”
“아미타불. 빈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황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알려진 소문만으로 서문 시주를 쫓았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불가에 든 몸으로 억울하다 호소하는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거늘. 연 장주와 연 장주의 따님 덕분에 어리석은 노승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허허. 저는 한 것이 없는데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저 딸아이가 너무 착해서 걱정이지요.”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고 있는 이린은 얼떨떨한 얼굴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으응? 그랬나?’
이린의 입장에서는 밥 먹다 미아 하나 주워서 아빠 찾아준 것에 가까운 감각이었지만…….
‘좋게 보면 좋은 거지, 뭐.’
다른 곳도 아니고 소림과 화산. 긍정적인 관계를 맺어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곳이었다.
떠나기 전 윤승재와 금혜 선사는 서문제우에게 사죄하고, 서문제우 역시 사과를 받아들였다.
세 사람은 연적훈에게 감사와 치하의 말을 건네며 화기애애하게 길을 떠났다.
같은 시각, 꾸벅꾸벅 조는 민영을 자영에게 맡긴 이린은 비칠비칠 침실로 들어섰다. 이린이 지금 어린아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완전 피곤해.’
생각해 보니 정말, 정신없는 하루였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눈물을 쏟느라 진을 뺐는데, 기분 전환 하러 나간 외출에서 뜻밖에 저런 짐 덩어리를 안고 들어오게 될 줄이야.
‘하지만 확실히… 민아의 병세는 심상치 않아.’
서문제우는 딸을 위한 영약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구하기도 힘들고, 겨우 구한 영약은 질이 떨어져 아이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서문제우의 말에, 이린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동굴 속에 있는 영약, 그리고 그곳에 있던 비급들 중에 분명 기혈을 바로잡아 주는 심법에 대한 책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동굴 안에 있던 영약은 2개였다. 그때 분명 하나는 자신이, 다른 하나는 남궁청휘가 취해 내공을 늘렸다.
‘분명히 지금도 있겠지.’
남궁청휘의 것을 빼앗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에서 피를 흘리는 아이를 못 본 척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민아를 구해서 서문제우와 민아에게 은혜를 입혀 두는 건 나쁘지 않아.’
서문제우가 또다시 아이를 위해 약을 구하다 혈교에게 낚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당시 그가 정파에 입힌 피해는 심각했고, 무림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인들이 다쳤다.
또한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 혈교에 의한 피해가 줄줄이 터져 피를 본 문파 역시 적지 않았다. 막을 수만 있다면 막아야 했다.
‘그래도 하나는 오빠에게 주고 싶은데.’
오빠는 결국 마지막까지 집 안에 있던 영약을 먹지 않았다. 이린 역시 그것을 딱히 취할 마음이 들지 않아 방치했으니, 아마 장원이 불타던 날 사라졌거나 누군가가 빼돌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을 진작 오빠 입에 강제로 물려 줬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하지만 나도 일단은 필요해.’
내단을 더 구할 방도는 없을까?
“아. 그 붕어.”
“붕어?”
동굴에서 거대 붕어를 보았던 석실을 떠올린 이린은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