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2
12.
“그러고 보니 아직 얘 이름도 모르네.”
“아가씨도 참.”
어려도 여자아이라 이린과 자영이 옷을 갈아입히고 얼굴을 닦아 주는데, 때마침 아이가 부스스 눈을 떴다.
“배고파.”
“식욕이 있다니 다행이네.”
아까 그렇게 피를 흘렸으니 배가 고픈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혹시 몰라 이린은 자영에게 일러 평범한 식사 대신 죽을 가져오도록 했다.
자영이 나가자 이린은 아직 비몽사몽인 아이를 붙잡고 얼굴에 묻은 피를 마저 닦아 주며 이름을 물었다.
“민아는 민아야. 아빠는 민아를 민아라고 불러.”
“민아는 애칭 아니고? 아빠가 부르는 이름 말고 성이랑 같이 부르는 이름은 그럼 뭐야?”
“서문민영.”
“서문민영? 그래서 민아구나?”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니, 자영이 죽을 들고 들어왔다. 민영은 뭐가 들었는지 몰라도 희멀건 죽을 내려다보곤 고개를 저었다.
“이거 말고 아까 먹은 거.”
입맛이 살아 있는 걸 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극적인 음식을 주기엔 피를 쏟던 모습이 너무 강렬했다.
“이거 다 먹으면 생각해 볼게.”
“선녀 언니 치사해.”
“선녀 안 해.”
자영은 아이들이 아웅다웅하는 귀여운 풍경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죽을 떠먹여 주기 시작했다.
민영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자영이 주는 죽을 받아먹었다. 하긴 피를 흘린 만큼 보충하려면 많이 먹어야 했다.
“참, 이 아이 이름 민영이래.”
“어머. 뒷글자가 저랑 같네요.”
“그렇지? 아가야, 밥 다 먹으면 약 먹고 좀 씻자. 언니가 씻겨 줄게.”
“아가 아니야. 민아야.”
“민아가 갈아입을 옷이 있을까요?”
“내가 어릴 때 입던 옷이 어디 있지 않을까?”
여자아이 셋이 까르르 웃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던 그때, 연가장의 연무장은 갑작스러운 불청객으로 소란스러워졌다.
“대체 연가장에 무슨 볼일이오!”
닫혀 있던 장원의 문을 부수고 들어온 이는 6척(1척=약 30.3cm)이 넘는 장신의 사내였다.
그는 터질 듯한 근육질의 팔로 거대한 도를 휘두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다짜고짜 외쳤다.
“내 딸을 찾으러 왔다!!! 이 유괴범들!”
연적훈은 약간 난처했다. 어디서 오해가 생긴 건진 몰라도, 저러고 다니다 장원 식구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냥 놔두면 안 되겠지?”
“싸우기 싫으시면 장주 그만두시든가요. 도련님도 다 크셨고.”
“나도 그러면 좋겠는데 걔가 아직 열다섯이라.”
“지금 나를 우롱하는 거냐!!”
장 총관과 가벼운 말투로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연적훈을 발견한 사내가 달려들었다. 어느새 장 총관은 슬그머니 뒤로 빠지고, 연적훈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카앙!!
“나는 이곳 호남 연가장의 장주인 연적훈이라 하네. 자네는 누구인가?”
어느 샌가 검을 뽑아 든 연적훈이 빙긋 웃는 얼굴로 사내의 도(刀)를 막으며 물었다.
사내는 자신의 도가 가볍게 막혔다는 사실에 당황한 듯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취했다.
“유괴범에게 알려 줄 이름은 없다!”
“오해일세. 유괴범이라니.”
“내 딸을 여기서 데려갔다고 들었다! 부모에게 아무 말도 없이 아이를 데려가는 게 유괴가 아니고 무엇인가!”
둘 다 아무 어려움 없이 대화하고 있었지만, 손은 쉬지 않고 공방이 오가는 중이었다. 공방(攻防)이라고 하지만 연적훈은 공격하는 대신 방어에 치중하고 있어 얼핏 보기에는 연적훈이 밀리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호남 군자검이 생각보다 무위가 만만치 않구나.’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몸이지만, 자신의 도를 이리도 가볍게 막아내는 이는 흔치 않았다.
워낙에 인품으로 유명하다 보니 군자검의 경지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바가 없어 그리 대단치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대로 계속하면 다칠지도 모르네.”
연적훈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사내의 도를 모조리 막아내며 온후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비가 어찌 딸을 포기할 수 있겠소.”
“그건 맞는 말인데―.”
그러니까 그거 오해라고, 말하려던 연적훈은 사내의 다음 움직임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사내의 도가 살기를 띠고 있는 것을 보며 그 역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무래도 말로 한다고 쉽게 들을 인물이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합을 맞출 만한 상대를 만났으니 이 기회를 놓치는 것도 아까운 일.
서로의 빈틈을 살피는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잘 좀 데리고 다니시든가요.”
그리고 그 사이를 긴장감 없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빠!”
“민아!!!”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본 적 없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행복한 얼굴로 당호로를 우물거리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씻고 나왔는지 물방울이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옆에 있는 여자아이가 열심히 수건으로 말려 주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유괴당한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었어! 민아 배고팠는데! 있잖아, 선녀 언니가 맛있는 거 줬어!”
“선녀?”
딸아이의 엉뚱한 말에 절로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주위를 살피자 연가장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뭔가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에게 민아의 곁에 있던 옅은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다가왔다.
“이 아이의 아버지 되시나요?”
“그런…데?”
“애를 두고 갈 거면 제대로 된 보호자를 찾아야지, 남의 주루에 방치라니. 술주정뱅이나 이상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쩔 생각이었습니까?”
“그게, 다른 방도가 없어서……. 그런데 넌 누구냐?”
“아저씨가 애타게 찾으시던 유괴범이요.”
“?!”
상황은 빠르게 수습됐다.
올해 여섯 살인 민영은 말을 곧잘 하는 아이였다. 주루에서 이린을 만나 밥을 얻어먹었으며, 갑자기 아파서 쓰러졌다 눈을 뜨니 여기였고, 방금 또 죽을 먹고 목욕도 시켜 줬다고 종알종알 설명했다.
아이의 말이 끝나자 사내는 시뻘게진 얼굴로 연적훈에게 고개 숙여 사죄했다.
“제가 제대로 된 사정도 모르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오해했습니다. 딸을 구해 주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 소리 말게. 자식이 납치되었다는데 눈이 뒤집히는 게 부모 아니겠나. 게다가 아픈 아이니 어찌 걱정되지 않겠나.”
“군자검께서 도량이 넓고 온후하신 분이라는 말씀은 많이 들었건만, 소문에 한 치의 과장도 없음을 이 서문제우가 어리석게도 오늘에야 깨닫습니다.”
“서문제우? 자네가 연위도수 서문제우인가?”
강호 경험이 풍부한 아저씨들이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능숙한 사교성 대화, 아니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는 것을 지켜보던 이린은 익숙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위도수 서문제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 같은데.’
민영에게 이현이 가져온 따뜻한 차를 먹여 주던 이린은 기억을 더듬다 숨을 삼켰다.
“헉!”
“린아야?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냐.”
연위마도 서문제우. 10여 년 전 갑자기 나타나 정파를 도륙 내고 다닌 걸로 유명한 마두(魔頭)의 이름이었다. 저 덩치와 거대한 검까지, 이린이 알고 있는 인상착의와 대강 일치했다.
‘원한을 갚을 뿐이라며 여러 백도문파를 찾아다니고 피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 저 사람이야?’
확실히 인상은 좀 험악했지만, 지금 연적훈에게 사죄하는 정중한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지요. 민아도 밖에 있는 건 좋지 않고요. 이것도 인연인데 기왕 오셨으니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시는 게 어떨까요?”
“예? 그게…….”
“괜찮으시다면 저기 저분들도 같이요.”
이린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부서진 문의 잔해 너머로 아까 본 화산파의 윤승재와 아까는 보지 못한 초로의 승려 하나가 서 있었다. 아마도 소림사의 승려인 듯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연가장에서 싸우지는 말아 주세요. 세 분 다.”
“아미타불. 어린 시주께서 참으로 총명하십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딸아이의 말대로 연가장에서 싸울 생각이 없으시다면 두 분도 들어오시지요.”
서문제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화산도 소림도 강호에서 빠지지 않는 세력이다. 연가장주에게 오늘 처음 본 자신을 위해 그들을 적대해 달라고 뻔뻔한 부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지금 딸 민영은 한 번 쓰러졌던 상태인지라 섣불리 도망칠 수도 없었다.
빤히 들여다보이는 대치 상황을 살피며 이린은 머리를 굴렸다.
‘일단은, 자초지종을 들어 볼까.’
일이 꼬이면 자신 때문에 연가장이 전에 없던 화를 입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후일 마두가 되어 피바람을 일으킬 인물을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라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이현과 마찬가지로 온후한 인품과 공정한 성격으로 유명한 연적훈이다. 장주가 되어 직접 장원을 운영해 봤기에, 이린은 아버지가 무공 이외의 부분에서도 의외로 대단한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딸의 자리에선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 뒤를 잇고 난 후에 보였으니까.
“허허. 제가 장원 일로 바빠 요새 강호의 일에 그리 귀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세 분께서 제 견문을 좀 넓혀 주시지 않겠습니까. 안으로 드시지요.”
그리고 예상대로, 연적훈은 서문제우에게 먼저 사정을 듣기로 했다. 그 후에 왜 정파에서 서문제우를 쫓고 있는가를 듣겠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제삼자의 입장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연적훈은 탁자에 서문제우와 윤승재, 그리고 금혜 선사라 스스로를 소개한 소림승을 마주 앉히고 자신은 가운데에 앉았다.
그는 일부러 아이들까지 대동했다. 감정이 격해지더라도 아이들이 있는 앞이니 자중하라는 의미였다.
서문제우는 아이의 부모였고, 윤승재와 금혜 선사는 각각 도문과 불문에 있는 정파인이니 세 사람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문제우는 이린에게 안겨 칭얼거리고 있는 민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