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94
194.
강호의 무인들은 여염집과는 달리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들 말하지만 아무래도 동성끼리가 편한 법이라 비무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사이 어느새 사내는 사내들끼리, 여인은 여인들끼리 몇 명씩 모여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연이현과 남궁청휘 역시 눈치 없이 이린이 다른 소저들과 대화하는 것을 방해하는 대신 또래 젊은이들과 모여 한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이린은 문득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곽 공자가 보이질 않는데. 어딜 간 거지.’
성격이 사교적인 사람 같지는 않지만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곽천영뿐만 아니라 그의 수하들도 보이질 않았다. 의심하고 싶지 않지만 가끔 수상쩍은 것은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어요.”
“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옆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한 이린이 되묻자 이린에게 말을 걸었던 여협이 친절하게 다시 말해 주었다.
“저런 오라버니가 계셔서 좋겠다고요. 아까부터 걱정스러운 듯 이쪽을 보고 계시네요.”
“아, 하하. 오빠가 조금 과보호 기미가 있어요.”
이린과 대화하다 여동생을 살피던 이현과 눈이 마주친 여인들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눈이 마주치면 연이현은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데 그야말로 사람을 설레게 하는 자태였다.
화제는 자연히 연이현에 관한 것으로 기울었다.
“연 소협께서도 슬슬 혼인을 생각하실 때 같은데 정해진 혼처가 있으신가요?”
“연 소협이라면 당연히 정인이 있으시겠죠?”
“아뇨. 오빠는 아직… 그런 분은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이린의 말에 여인들의 눈이 반짝였다.
“어, 어떤 여인이 취향이신 것 같아요?”
“그런 것까지는 잘….”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연이현의 벗들은 웃는 얼굴로 철벽을 치거나 퉁명스럽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 질문에 대답해 주는 이가 워낙에 없으니 이린의 존재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아. 하지만 연하보다는… 연상이 취향인 거 같았는데.”
이린의 작은 중얼거림에 모여 있던 여인들의 얼굴에 희비가 갈렸다.
멀리서 관심 없는 듯 이야기를 나누던 여인들조차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럼 연 소저는 어떤 분이 오라버니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해요?”
“으음. 오빠는 조금 무리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끄덕끄덕.
“오빠를 지켜 줄 수 있는 능력 있고, 포용력 있는 언니가 좋지 않을까요. 본인들이 좋다면야 나이는… 좀 많이 연상이어도 오빠는 신경 쓰지 않을 거 같죠?”
이린은 이현이 제갈윤위에게 유독 약했던 것을 떠올리며 말끝을 올렸다.
그리고 이린의 자유로운 발언은 남 일이라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연상의 여협들을 자극했다!
“연 소저, 정말 귀여운 아가씨네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언니들을 찾아와요.”
“네? 아하하. 감사합니다.”
이래도 되나.
자신의 발언이 불러올 파장이 두려워 난감해하는 이린에 비해 이현은 의외로 이린의 발언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음… 나이 차? 별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린아 또래는 확실히 너무 동생 같아서 좀 그렇지.”
비무를 끝내고 내려온 이현은 조금 지친 얼굴로 동생이 건네주는 차를 마시며 웃었다.
어제 이미 30명까지는 정해져 있는 상태로 시작했으나 이현이 나선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덕분에 1승으로 이미 10명 안에 들어 있었다.
“마지막 한 명까지 가리는 거야?”
“본인이 원하면.”
안타깝게도 노악이 하필 청운진인과 맞붙어 패배하는 모습을 보며 이린과 이현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차피 나이도 있으신 분이 좀 져 주시지.”
“피차 사문의 명예가 달려 있는 몸 아닙니까? 노 소협이야말로 여유 있는 나이니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지 않습니까.”
“다음이 언제일 줄 알고요!”
다음 용봉지회쯤에는 서른을 넘길 가능성이 높아 더는 참가하지 못할 사람들의 대화였다.
살랑살랑 부채를 부치며 내려오는 청운진인의 여유 있는 모습에 지켜보는 여인들은 아쉬운 한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청운진인은 내내 담담했다.
비무라고는 하나 사상자가 나오는 것을 지양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제한이 있어 시간을 많이 소요하진 않았다.
그러나 짧은 비무 중에도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면 이름을 남기는 법이었다.
“창천검룡!!”
“과연 검황의 아들이군!”
옆에서 들려오는 감탄의 목소리에 청운진인이 말을 얹었다.
“남궁 소협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과연 또래에 비길 사람이 없군요.”
“정해진 수순이지.”
먼저 떨어진 심여준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명문정파의 직전 제자가 아니면 용봉에 오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확실히 오빠가 드문 경우구나.’
지금 남녀 합쳐 20명쯤 남은 상태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사람이 아닌 건 기껏해야 서너 명. 그나마도 구파일방에 꼽히지 않을 뿐 대부분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곳들이었다.
‘검성이 용봉지회에 참가했음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것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하지만 연화문이 검성이 되었기에 지금 제 실력만으로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세상을 바꾼다는 건 어쩌면 이런 걸까?’
검성에 대해서는 정말로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그 존재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 * *
내일이면 용봉지회가 끝난다.
‘아직까지도 조용한 걸 보면 오늘이나 내일이 가장 유력한데….’
뭔가 바뀌어서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은 거라면 다행…이 아니라 그건 그것대로 불안했다.
모두들 들떠 있는 가운데 이린만이 불안해하며 사람이 없는 어두운 정원을 서성거렸다.
“답답했지?”
끼이?
끼이이?
사람 많은 곳에서는 청아와 홍아를 가방 안에 가둬 두다 보니 답답해하는 것 같아서 이린은 사람이 없을 때 아이들을 꺼내 바람을 쐬게 해주었다. 뱀들은 익숙하게 이린의 팔 위로 꾸물꾸물 자리를 잡았다. 이젠 익숙해져서 여기가 가장 편한 모양이었다.
“미안, 사람 많은 곳은 좀 위험해서 그래.”
무인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니 뱀들이 실수로 돌아다니다 눈먼 칼에 맞아 그대로 세상과 작별하게 되는 수도 있었다.
오늘 사실상 오룡삼봉은 정해졌고 내일은 남은 이들끼리 실력을 겨루는 자리가 마련된다.
당연히 실제로는 지금까지보다 내일 있을 비무가 더 흥미진진할 것이다. 실력이 검증된 이들의 싸움이니까.
하지만 마음 편히 지켜볼 처지가 아닌 이린은 하루하루 불안에 떨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비고는 대체 어디람.’
이린이 지켜보고 싶어도 어딘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 곳의 위치를 외부인에게 발설할 리가 없으니 혈교가 비고의 위치를 알았다면 분명 제갈세가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제갈세원 덕분에 전체적 구조는 얼추 파악했지만 당장 크게 도움 되지는 않았다.
‘아는 얼굴도 없었고 말이지.’
이린이 죽기 전 남궁청휘 일행과 함께 찾아온 구파일방의 제자들은 이린의 등에 칼을 꽂은 혈교의 간자였지만 오늘 이곳에 온 이들 중에는 보이지 않았다.
‘촉망받은 인물들조차 아니었다는 뜻이지.’
노악이 데려온 아이들도 형산파에서 가장 촉망받는 제자들이다. 작은 문파도 아니고 규모 있는 문파에서는 이런 곳에 선별된 제자들만을 보낸다. 용봉지회는 각 문파에서 자존심 싸움을 하는 곳이나 다름없었으니 어설픈 아이들을 보내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들어오는 것조차 시험을 통과해야 했고.
빙글빙글 돌며 생각을 정리하던 이린은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섰다.
“곽 공자? 여긴 뭐 하러 왔어요?”
“이린? 너야말로. 혼자 이런 인적 드문 곳에서 뭐 하는 거야?”
이린은 곽천영에게 말 대신 팔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끼이?
끼이이
이린의 팔에 매달려 있는 뱀들이 흐느적흐느적 흔들렸다.
“아, 가리고 다니던가?”
“사람이 많은 곳은 아무래도 좀 그렇죠.”
혈교에 관한 서한을 보낼 때 뱀 비늘 무늬를 남긴 것이 좀 걸리기도 했고.
사실 누군가 의혹을 품는다 해봤자 세상에 뱀이 어디 한두 마린가. 이린이 데리고 있는 뱀이 좀 남다르긴 하지만 딱히 비늘 무늬까지 특별한 편은 아니었다.
나중에 누가 왜 뱀을 가리고 다니냐고 하면 희귀한 뱀이라 그랬다고 하면 그만이고.
곽천영이 손을 내밀자 홍아는 홱 머리를 돌리고, 청아는 콕콕 손을 두드리며 장난을 쳤다.
“빨간 녀석은 여전하네.”
“낯을 가리거든요.”
괜히 홍아에게 장난치다 둘이 싸울까 봐 이린은 얼른 손을 떼며 물었다.
“그런데 왜 이런 곳까지….”
“곽 공자, 여기 있습니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둘 다 고개를 돌렸다.
“남궁 공자?”
“연 소저?”
“뭐야, 또 따라왔냐?”
남궁청휘가 나타나자 곽천영이 짜증스럽게 투덜거렸다. 누군가 이렇게 집요하게 자신을 쫓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왜 두 분이 함께 있습니까?”
묘하게 경직된 목소리에 이린은 괜히 찔려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 아이들 때문에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는데 곽 공자가 오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이린은 곽천영에게 그랬듯 소매에 매달려 있는 뱀들을 내보였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달리 홍아가 남궁청휘에게 살갑게 다가가자 곽천영이 삐딱한 얼굴을 했다.
“뱀이 사람 차별하네.”
“낯가린다고 했잖아요.”
이린도 홍아가 왜 유독 청휘를 좋아하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얼굴이 취향인가.’
이린이 멍하니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안 두 남자는 영양가 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곽 공자를 찾는데 늘 어디로 사라지는 겁니까?”
“내가 뭘 하든 뭔 상관이야.”
“용봉지회에도 관심이 없고, 다른 후기지수들과의 교류에도 관심이 없으면서 대체 여기에 왜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걸 너에게 보고해야 하나?”
변함없는 곽천영의 태도에 진력이 난 듯 남궁청휘는 한숨과 함께 이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 소저. 이런 곳에 계시면 곽 공자와 단둘이 만나기로 한 거라고 오해받을 겁니다. 가시죠.”
“난 이린과 단둘이 있어도 상관없는데?”
“단둘도 아니지 않습니까?”
“호오.”
남궁청휘의 말에 곽천영이 의외라는 듯 피식 웃었다.
혼자 휘적휘적 걸어온 듯 보이지만 곽천영은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제갈세가까지 온 호위들이 주변에 은신하고 있었다. 남궁청휘가 그걸 알아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곽천영은 뜻밖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런 곽천영의 반응에도 남궁청휘는 별다른 반응 없이 눈썹만 살짝 찌푸릴 뿐 이린에게 홍아를 돌려주며 함께 나갈 것을 권했다.
‘뭐, 여기 계속 있을 것도 아니니까.’
이곳이 제갈세가에서 그럭저럭 중앙에 위치해서 무슨 일이 생겨도 이동하기 좋은 곳이긴 했지만 일단 방에 들어가서 쉬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안심하지 못 하는 분이 계시니 그만 들어가 봐야 했다.
‘제갈 소저에게도 들러 봐야지.’
이린이 청휘를 따라 발길을 돌리자 뜻밖에 곽천영도 따라 나왔다.
“곽 공자는 이곳에 볼일이 있던 거 아닌가요?”
“아니, 나도 같이 가지.”
산책을 즐기는 성격 같지는 않았으니 수하들과 조용한 곳에서 할 얘기가 있어 이곳으로 왔을 텐데. 곽천영은 그대로 이린과 청휘를 따라나섰다.
“아 참, 축하해요. 남궁 공자. 이번 용봉지회에서 단연 눈에 띄시니 명성이 더 높아지시겠군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데 부끄러울 뿐입니다.”
“어, 확실히 쓸 만한 놈은 별로 없더라. 내일이나 돼야 뭐 좀 볼 게 있겠던데.”
“그럼 곽 공자도 출전하지 그랬어요?”
“시시해.”
심드렁한 얼굴에는 진심으로 재미없다는 기색이 역력해서 이린도 그저 피식 웃었다.
“저는 안채 쪽으로 가서 제갈 소저한테 들렀다 돌아갈게요.”
“그사이 많이 친해지셨나 보군요.”
“곧 떠나면 다시 보기도 힘든걸요. 남궁 공자는 두 사람을 알고 있죠?”
“일단은 친척이니까요. 어릴 적 이후로 얼굴 보기는 힘들지만요.”
잡담을 하며 두 남자는 이린을 안채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이들은 남궁청휘의 얼굴을 알고 있었으므로 묘한 얼굴을 했지만 이린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부, 불이야!!!”
이린이 안채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불길이 치솟아 오른 곳은, 제갈세원의 처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