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97
197.
‘여전히 발은 빠르군.’
곽천영은 제 수하를 납치해 간 이린의 뒤를 따르며 혀를 찼다.
얼마나 빠른지 따라잡으려면 힘겨울 정도였다.
‘유영을 붙잡고도 저 정도 속도라….’
옆에 따라오는 남궁청휘도 결코 뒤떨어지는 인물이 아니건만 이린을 따라잡질 못했다.
“쯧,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보이질 않는군요.”
이린의 돌발 행동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겪은 바가 있는 남궁청휘는 반쯤 포기한 듯한 얼굴이었다.
“의외로 걱정은 안 하는군?”
“…어지간해서는 제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만.”
“보기보다 보는 눈이 있군.”
“곽 공자야말로요.”
입으로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을 하면서도 두 사람은 사라진 두 여인의 흔적을 쫓았다. 다행히 반납치당한 상태일 유영이 뒤따라올 천영을 위해 약간씩 남겨 놓은 흔적이 있어 두 사람은 길을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쓰러진 시체가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유영!”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니 숲속에서 흑의인 하나와 대치하다 목을 공격하는 유영의 모습이 보였다.
“대공자, 이쪽입니다!”
방향이 바뀌는 곳이었다. 뜻밖에도 추격이 계속되자 저들은 일행을 하나씩 버림패로 떨구고 있는 듯했다.
“이린을 혼자 보낸 거냐?”
“송구합니다. 저는 연 소저의 경공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쯧.”
혀를 차기는 했으나 곽천영 역시 알고 있었다. 유영이 이린의 발을 따를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안내하라는 말도 필요 없이, 세 사람은 달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산길이었으나 멀리 작은 불빛이 보였다.
남궁청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전력을 다해 달렸다.
“연 소저!”
“이린!”
“아. 조심해요!”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린의 태평한 목소리가 두 사람에게 경고했다.
이린을 둘러싸고 있던 흑의인들 중 몇몇이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앙!
차앙!
그리고 아쉽게도 두 사람은 그리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어리고 이름도 없는 이린보다는 단연 이번 용봉지회에서 이름을 날린 남궁청휘를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남궁청휘와 곽천영에게 사람이 몰렸다.
“쯧, 걸리적거리게!”
곽천영은 드물게 제 도를 뽑아 들었다.
남궁청휘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자들을 상대하면서도 곽천영의 패도적인 무위에 감탄했다.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야. 대체 정체가 뭐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휘두르는 천영의 도에 흑의인들은 맥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유영은… 의외로 권사(拳士)였다.
이린이 지금 어떤 상태일지 알 수 없어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애써 다잡으며, 청휘는 일단 눈앞의 적에 집중했다.
화르르륵―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이 쓰러짐과 동시에, 이린이 간 방향에서 뜻밖의 커다란 화염이 발생한 것을 본 청휘와 천영은 경직된 얼굴로 달려갔다.
“연 소저!!”
“이린!”
방금 전의 불길 덕분에 이린이 어디에 있는지는 물을 것도 없었다.
청휘는 이린에게 청아와 홍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달려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이린이 낭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말 그대로, 이린은 탁탁 옷을 털고 있었고 그 앞에는 흑의인 몇 명이 쓰러져 있었다.
바닥에는 나무 상자 하나가 불타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들이 빼돌리려고 한 물건은 꺼내려 하면 불이 붙도록 되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들은 본래 여기서 몰래 숨어 있던 동료에게 물건을 전달하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갈 예정이었던 듯했으나 재수 없게 붙잡힌 셈이었다.
“그럼 저 상자가?”
“제갈세가의 비고에서 빼돌린 물건 같아요. 저것 말고도 뭐 몇 개 더 있는 거 같긴 한데….”
이린은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책자와 상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견물생심으로 챙긴 것인지 아니면 위장용으로 챙긴 것인지는 몰라도 저것들 역시 제갈세가의 비고에서 나온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곽천영은 이린이 제압한 자들을 확인하고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거참, 곱게 자란 아가씨같이 생겨서는 보기와 다르다니까.”
흥미롭다는 듯 자신을 향하는 곽천영의 목소리에 이린이 눈을 부라렸다. 곽천영이 킥킥 웃으며 말을 아꼈다.
“뭔가 물어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이쪽은 다들 자결한 거 같아요.”
죽이지 않으려고 꽤 노력했지만 헛수고로 끝났다. 잘 싸우는 것 같더니 이기지 못할 거란 사실을 깨닫자마자 입안에 든 독약을 깨물었는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린이 어떻게 막아볼 틈도 없었다.
“이쪽은 하나 산 채로 잡긴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곽천영은 자신이 붙잡은 사내 하나를 끌고 왔다.
곽천영에게 당한 사내는 무슨 일을 당했는지 너덜너덜해져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이상하다? 분명히 도를 들고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패 놨지?
“…곽 공자는 독특한 특기가 있으시군요.”
“왜, 부럽나?”
“그… 글쎄요.”
이린은 곽천영이 제압한 흑의인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곧 포기했다.
‘붙잡아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가득이지만 여기가 제갈세가이니 내가 심문하긴 어렵겠지.’
이린이 한숨을 쉬며 제 소매를 쓸었다.
끼이―?
“괜찮아. 아무 일도 아냐.”
꼬물꼬물 머리를 내미는 뱀들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며 이린은 검을 갈무리했다.
“…남궁 공자. 괜찮다면 이들을 처리한 사람이 남궁 공자라고 해 주시겠어요?”
“네?”
“괜히 주목받고 싶지는 않거든요.”
“아뇨. 그래도 그건 좀….”
“부탁할게요. 네?”
이린이 난처한 얼굴로 소매를 잡아당기자 청휘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옆에서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곽천영이 비뚜름하게 말했다.
“왜 나한테는 부탁 안 해?”
“…곽 공자한테는 아무도 안 물어볼걸요.”
“뭐?”
둘이 붙어 있어도 늘 티격태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아는데 곽천영이 남궁청휘와 다른 말을 한다면 과연 누가 믿어 줄지. 게다가 본인인 이린까지 아니라고 하는데 곽천영만 이상한 사람이 될 뿐이었다.
“나중에 한턱 쏠게요. 네?”
“좋아.”
이린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곽천영은 그제야 얼굴을 풀었다.
일행이 온 방향에서 소란과 함께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제갈수원이 제갈세가 사람들을 이끌고 뒤쫓아 오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만… 그냥 불태워 버리는 게 더 좋았을까.’
이린은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린이 흑의인들을 따라잡았을 때, 그들은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상자를 버리고 내용물만 들고 도망치려다 상자에 불이 붙어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덕분에 이린은 당황하는 흑의인들을 손쉽게 제압했고, 불타 버릴 뻔한 상자 역시 이린의 개입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청아의 활약 덕분이지만.
청아가 불이 붙은 상자를 그대로 얼려버리자, 이린은 상자를 부숴 안에 들어 있는 장보도를 빼내고 다시 홍아를 시켜 상자를 불태웠다. 한 번 얼린 것이라 습기가 있어 잘 타지 않았지만 쇠도 녹일 수 있는 홍아에게 그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길이 커져서 당황했지만 덕분에 제갈세가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오고 있으니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놓칠 바에야 그냥 불태워 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다행이지.’
소매 속에 넣은 종이의 감촉을 몰래 확인하던 이린은, 자신이 원래 입고 있던 옷에 넣어 둔 종이쪽지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 *
“언니. 괜찮으세요?”
“조금 놀랐을 뿐이니 걱정하지 말렴.”
큰일을 겪은 것치고 세원의 분위기는 의외로 담담했다. 하지만 집 안 분위기가 어수선해서일까, 늘 차분하던 지원의 시비 주아까지 내내 안절부절 초조해 보였다.
“연 소저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뭐 기억나는 건 없으세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구나.”
동생이 건네주는 차를 마시며 제갈세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리 요란스러운 것이냐.”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아무도 이곳에 오질 않네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뿐인 남동생은 납치된 누이가 돌아왔다는 말에 달려오지 않을 아이가 아니었다.
“제가 나가서 알아보고 올게요.”
“되었다. 우리가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
그동안도 제갈세가에서는 중요한 일에 대해 딸들에게 무언가 알려 준 적이 없었다.
“나중에 수원이 와서 알려 주겠지.”
이런 상황에서도 덤덤한 언니를 보며 지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정말 연 소협과 혼인을 거부하시는 거예요? 집을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인걸요.”
“그렇게 연 소협이 마음에 들었으면 네가 시집을 가면 되지 않니?”
“마음에 들었다기보단… 좋은 사람이라는 거죠.”
제갈세원은 이미 혼기가 지난 나이였다. 다른 여협들처럼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니고, 대외적으로 볼 때 제갈세가의 직계 영애라는 것 외에는 특별히 좋은 조건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제갈세가에서 딸들을 딱히 아끼는 기색도 보이지 않으니 그 역시 장점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정혼자가 혼례식 날 사망한 재수 없는 신부를 과연 어느 집안에서 반길까?
‘낮춰 보고 있지만 인품은 인정한다는 건지.’
혹은 눈에 차지는 않아도 연을 맺어둘 가치는 있거나.
제갈세원의 짝으로 연이현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자신까지 그런 일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초아가 보이질 않는데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느냐?”
“아… 그게.”
지원은 아까 이린이 초아를 찾아야 한다며 서둘러 나갔던 것을 떠올리곤 말을 흐렸다.
어쩌면 이번 납치에 초아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그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제갈세가는 외인이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니 협력자가 필요할 터….’
세원이 충격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원은 화제를 돌렸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우선 좀 쉬어. 언니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래.”
자신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동생의 손을 꼭 잡은 세원의 눈에는 지울 수 없는 아쉬움이 스쳐 갔다.
“큰아가씨, 차를 좀 더 드릴까요?”
“그래. 고맙구나.”
지원은 주아에게서 받은 찻잔을 세원에게 건네며 지금 언니가 평소 옷차림과는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참, 언니. 그 옷은….”
“아, 아까 연 소저가 빌려주신 옷인데 내가 계속 입고 있었구나. 감사 인사를 드릴 때 직접 돌려 드려야겠다.”
“어쩐지 언니 옷은 아닌데 눈에 익다 싶었어요.”
“그래도 이 옷을 계속 입고 있을 수는 없으니 네 옷을 좀 빌려주겠니?”
세원의 말에 그제야 언니의 세간이 다 타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지원이 몸을 일으켰다.
“언니, 잠깐 쉬고 계세요.”
“그래.”
지원에게 대답하며 비워진 찻잔을 내려놓던 세원은 옷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
툭―.
“?”
바닥에 떨어진 것은 종이를 접은 작은 종이쪽지였다.
“뭐지?”
“어머, 제가 주울게요. 아가씨.”
주아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세원에게 건네는데 옆방에서 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아! 한동안 언니가 입을 옷이 필요할 테니 좀 도와줘.”
“네. 작은 아가씨. 잠시만요.”
주아가 후다닥 사라지고, 종이쪽지를 집어 든 세원은 무심결에 열어 보려다 손을 멈췄다.
“혹시 연 소저의 것인가…?”
옷에서 떨어졌다면 당연히 원주인의 것이니, 함부로 열어 볼 순 없었다.
‘어쩌면 연서(戀書)일지도 모르고.’
연이린이 잘생긴 두 명의 청년에게 구애받고 있다는 사실은 워낙에 유명해서 지금 제갈세가에 있는 이들 중에 모르는 이가 없지 않던가.
하지만 조심스레 갈무리해 넣어 두려던 세원의 눈에, 종이에 찍혀 있는 희미한 뱀 비늘 무늬가 들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