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
2.
이린과 청휘는 동시에 대치하고 있던 검을 한쪽으로 밀어내며 몸을 빙글 돌렸다.
당연히 온전히 대처할 거라 생각하고 검을 내리치던 청휘는 황급히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손을 뻗어 이린을 붙잡았다.
키이잉! 키이!
쿵!!
던져진 검들이 바닥에 긁히는 소리와 함께 뭔가 구르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동굴 내에 울려 퍼졌다.
단단한 동굴 바닥과 충돌한 탓인지 등에서 느껴지는 둔통과 함께 한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에서 낯선 온기가 느껴졌다.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청휘는 잠시 의식을 놓은 듯 멍하니 품 안에 있는 온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제정신이 돌아온 듯 눈을 크게 떴다.
“괜…찮으십니까, 연 소저?”
품 안에 이린이 무사히 안겨 있는 걸 확인한 청휘의 가슴은 여전히 쿵쾅거리고 있었다.
“하아.”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던 이린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긴장 때문인지 이린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가슴을 쓸고 지나가는 감각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다치지 않았어요??”
“괜찮…습니다.”
다친 곳은 없는지 서로의 몸 상태를 확인한 두 사람은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던 청휘가 주저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소저께 결례를……!”
쉬익―.
“청아!”
“청아!”
청아의 기척에 그제야 생각난 듯 동시에 소리친 이린과 청휘가 서늘한 한기가 도는 청아의 몸통을 붙잡았다.
“정말! 비무 할 때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는데!!”
“다치면 어쩌려고 겁도 없이!”
끼이이―.
다친 곳을 확인하는 두 사람의 무지막지한 손길에 괴상한 소릴 내며 버둥대던 청아가 철썩철썩 꼬리로 두 사람을 때렸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그 정도로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다친 곳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겨우 풀려난 청아가 이린의 어깨 위에 올라가 몸을 돌돌 말았다.
두 사람 다 한숨을 내쉬다 말고 눈을 마주치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말 안 듣는 어린애 키우는 기분이네요.”
“정말 비무 때마다 어디 묶어 놓을 수도 없고.”
청아가 두 사람의 비무를 훼방 놓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다.
“앞으로는 뒤에 뭐가 있어도 어지간하면 그냥 밟아 버리세요. 다치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끼이―.
단호한 청휘의 말에 청아가 항의하듯 소리를 냈지만, 스스로 지은 죄를 아는지 평소보다 기죽은 상태였다.
“하하. 네, 조심할게요.”
“오늘 비무는 여기까지 하지요. 소저의 성취가 빠르니 곧 제가 소저의 성취를 따르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검을 집어 든 남궁청휘가 검의 상태를 살핀 후 검집에 넣어 갈무리했다. 이린 역시 마찬가지로 내던져진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며 애지중지 끌어안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늘 즐거워 보이셔서 놀리시는 건가 했는데요.”
“이런 상황이라도 검을 나눌 수 있는 호적수가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요.”
“과찬이세요. 백대 고수로 꼽히는 창천검룡(蒼天劍龍) 남궁청휘 대협과 호적수라뇨.”
“저는 이런 일에 거짓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넉살이 좋은 사람은 못 됩니다.”
검부터 챙기고 옷을 털던 두 사람은 이젠 너덜너덜해져 있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걸치고 있던 옷 그대로 이곳에 갇힌 지 몇 개월, 덕분에 두 사람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어서 통로를 찾아야겠어요.”
“반박할 수 없는 말씀이십니다.”
호숫가에서 찬물로 세수한 후 이린은 벗어 두었던 담비 갖옷을 집어 들었다. 이젠 너덜너덜해진 흰색 옷은 땀에 젖으면 조금 민망했기에, 걸칠 것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제갈 공자…….’
자신에게 이 담비 갖옷을 넘겨준 이를 떠올린 이린은 가슴이 무거워져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일과는 비무로 끝이 아니었다.
거대한 공동(空洞)의 여기저기에 뚫려 있는 수많은 동굴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주머니에 물과 벽곡단을 챙겼다.
“제가 아무리 강해져도 역시 남궁 대협에게 이기는 것은 어렵겠지요?”
“저는 운 좋게 세가에서 태어나 많은 영약을 받았고, 수년간 강호를 떠돌며 적지 않은 실전을 겪었습니다. 제가 뒤늦게 무공을 익힌 연 소저에게 쉽게 진다면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남궁청휘는 정파(政派)의 오대세가(五大勢家) 중 으뜸으로 꼽히는 남궁세가의 직계 중 하나였다.
어릴 적부터 무(武)에 재능을 보인 그에게 가문에서 얼마나 정성을 쏟았을지는, 호남 지역의 중소문파 중 하나인 연가장(燕家莊)의 여식인 이린 역시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남궁 대협은 역시 좀 특이한 분이군요. 명문세가의 제자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은 많지 않을 텐데요.”
“다들 상황이 다른 법이니까요.”
담담히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이린은 이전에 그가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 언급했던 것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세가의 공자로 태어나 호의호식한다 해도 그 나름의 고충이 있을 터였다.
“이곳에 영약이나 내단이 더 있었다면, 지금처럼 제가 소저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을 겁니다.”
빙그레 웃던 청휘의 시선이 이린의 어깨에 닿았다.
“어쩌면 영물의 내단은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청휘의 시선이 아까 혼난 것은 잊었는지 이린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장난치고 있는 푸른빛 비늘의 백사에게 닿았다. 그리고 이를 눈치챈 이린과 청아의 시선이 동시에 청휘에게 향했다.
그럴 리 없건만 청아까지 이린과 마찬가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것처럼 보여 순간 웃음이 나왔다.
“딱히 그런 뜻은 아닙니다.”
“오늘 밤에 청아가 남궁 대협을 물어도 전 모르는 일이에요.”
“저도 그간 청아에게는 정이 들었으니 그런 짓은 안 합니다.”
“정말이죠?”
두 사람의 말을 알아들은 듯 이린의 등 뒤로 슬슬 몸을 숨기는 청아를 보며 청휘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저렇게 어린 영물의 내단은 별 도움이 안 될 겁니다.”
“너무해요!”
쉬익―.
이린과 청아가 동시에 항의하는 것을 본 청휘가 웃음을 터트리며 둘에게 사죄했다.
“송구합니다. 그저 이 산 어딘가에 청아 같은 영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씀을 드리려던 것뿐입니다.”
“20년 넘게 이곳에서 살면서도 발견하지 못했는걸요.”
이린은 오늘 탐색하기로 한 동굴 입구 부근에 옷감에서 풀어내어 만든 실을 묶은 후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한 도구였다.
“최근에는 조금 정체된 느낌이에요. 늘 함께 비무를 하니 느끼고 계시겠지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연 소저의 성취 자체가 이미 놀라운 일입니다. 그 비급이 무엇이든 보통 이렇게 빠른 성취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아마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검을 익히셨다면, 지금쯤 소의신녀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계셨을 겁니다.”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았던 연이린이 유일하게 일류 고수들을 발아래에 두었던 것이 바로 경공(輕功)이었다.
흰 옷자락을 흔들며 자신을 잡으려는 사내들을 농락하듯 잡힐 듯 말 듯한 거리를 지키다가, 어느 순간 저 멀리 사라져 있는 흰 그림자를 본 이들은 언젠가부터 연가장의 어린 장주 연이린을 소의신녀(素衣迅女)라 불렀다.
“으음… 그 별호는 새삼 조금 부끄럽네요.”
뛰어난 경공으로 붙은 별호였지만, 이린에게 진 사내들이 약간의 빈정거림을 담아 부르던 별호이기도 했다.
방금 전 이린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자연스레 그 호칭을 입에 담은 남궁청휘는 다급히 사죄했다.
“불쾌하게 했다면 송구합니다. 그저 연 소저를 처음 뵈었을 때 모습이 마치 선녀가 하강하는 것만 같아, 소의신녀라는 별호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에 그만…….”
“네?”
다급하게 이어진 청년의 목소리에 이린의 뺨에 옅은 온기가 서렸다.
동시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청휘의 얼굴 역시 발갛게 물들었다.
방금 전 비무를 할 때 이린과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후에 이어진 불의의 사고 때문일까.
그동안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생각조차 없었던 속내가 멋대로 튀어 나갔다.
남궁청휘도, 그의 진중한 성격을 아는 이린도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연이린이었다.
“여, 연출이에요!”
“네?”
“의도한 연출이었다고요.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단 제 남편 후보들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성공적인 연출이었군요.”
적어도 그날, 흰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하늘에서 내려오던 여인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은 사내는 없었으니까.
그 여인의 부군(夫君)을 가리기 위한 경합에 호위를 위해 찾아온 자신마저도.
“가끔씩, 그날 장주께서 패한 건 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패배는 경공 실력의 문제이지 대협 때문이 아니에요.”
“제가 뒤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전력으로 달리지 않으셨지요. 그자는 덕분에 장주에게서 승리를 얻어 냈습니다.”
“상대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으니 방심한 제 잘못이겠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청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이린 역시 벽면을 살피며 그와 속도를 맞추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어요. 제 경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내공이 부족하니 결국 저를 이기는 사람이 나타났을 거예요.”
“하지만 연 장주는, 아니 연 소저는 그때 혼인하지 않기를 바라셨지요.”
“장원을 지키기 위해선 무공이 고강한 부군이 필요했지만, 인품은 쉬이 가려낼 수 없으니까요.”
애초부터 결혼을 미루기 위한 수단이었고, 흔들리던 기반을 안정시킬 만한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
그렇게 몇 년 후, 결국 장주와의 혼인을 쟁취한 사내가 나타났다. 인품은 어떨지 몰라도 무공만은 탁월한 사내였다.
“하지만 다시 만나 뵈었을 때 그는 당신 곁에 없었습니다.”
남궁청휘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사문(師門)에 일이 있어 돌아갔을 뿐이에요. 어떤 사람인지도 솔직히 잘 모르지만. 적어도 결혼하기 싫다고 수하들까지 맡겨 두고 도망갈 만큼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웃으며 자신의 약혼자를 변호하는 이린의 모습에 남궁청휘는 자신의 질문이 무례하다는 사실조차 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를 연모하셨습니까?”
“아시다시피 딱히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는걸요. 연가장에 그리 오래 머물지도 않았고. 분명 잘생기긴 했지만, 워낙에 미남으로 유명했던 오라버니 덕분인지 남자 얼굴에 한눈에 반한 기억은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