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08
208.
백 대협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으리란 생각에 발길을 서두르던 이린은 동굴 초입에 다다르자 움찔 떨며 멈췄다.
위에 사람의 기척이 있기 때문이었다.
“연 소저. 그만 올라오십시오.”
“…죄송합니다.”
절벽 위를 가뿐하게 올라온 이린이 고개를 숙이자 백혜안이 화난 기색도 없이 피식 웃었다.
“연 소협이 걱정이 많은 이유가 있군요.”
“음…. 오빠가 뭐라 그러던가요?”
“연 소협은 연 소저가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모른답니다. 너무 걱정시키지는 마십시오.”
“네.”
남의 사유지를 멋대로 돌아다니고, 몰랐다고는 하나 묘실(墓室)까지 들어간 죄가 있는 이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보셨습니까?”
“네?”
“그 동굴에 계신 분은 제 고모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의선의 하나뿐인 따님이기도 하셨죠. 돌아가신 지는… 꽤 오래되셨지만 시신이 썩고 있지 않아 저 동굴에 모셔 두고 있습니다.”
“썩지 않는다고요?”
“원래는 화장을 할 예정이었는데 불에 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피부에 바늘도 들어가질 않는답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백혜안의 목소리에 한탄이 어렸다.
‘아, 혹시.’
이린은 예전에 읽은 신교의 책을 떠올렸다. 신교에서는 죽은 뒤 자신의 몸을 이용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강시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몸이 상하지 않도록 처리를 했을 테니 불로 태워도 타지 않고 땅에 묻어도 썩지 않을 터, 관만 썩어 온전한 모습 그대로 흙과 벌레들로 뒤덮이게 되겠지.
‘가족의 시신이라면… 그냥 땅에 묻어 버릴 수도 없겠지.’
이린은 문득 이전 항주에서 마주친 혈교의 장로를 떠올렸다. 검으로 잘리지 않던 손.
하지만 듣기로 남궁청휘의 검기에 팔이 잘렸다고 했다.
생각에 잠긴 이린의 얼굴을 귀여운 듯 흐뭇하게 바라보던 백혜안은 말을 이었다.
“물론 고수의 강기라면 자를 수 있을 거라고들 하더군요. 하지만….”
“아.”
말을 흐리자 이린도 작게 탄성을 흘렸다.
‘시신을 훼손하고 싶지 않겠지.’
끔찍하게 훼손되어 돌아왔던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시신이 생각나 버린 이린이 애써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모님의 몸을 원래대로 돌리기 위한 연구를 하고 계십니다. 편히 쉬게 해 드리고 싶으신 거지요.”
“언제부터요?”
“…아마 연 소저가 태어나기도 전부터일 겁니다.”
이린은 신교와 관계가 있는 거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애써 참았다. 하지만 백혜안은 시원스러웠다.
“고모님께서는 신교와 연이 있는 분이셨다고 합니다.”
“네?!”
“신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네에…….”
어떤 의미로는 잘 알지만 어쩐 의미로는 잘 알지 못했다.
“고모님께서는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의술을 베풀며 신교라는 집단에 깊이 빠지셨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혈교 같은 수상한 집단과 관계없는 조용한 종교였다고 하더군요.”
“그분은 왜 신교에 빠지셨을까요?”
이린은 다시 이상한 생각에 잠기고 싶지 않아 대화를 이어 갔다.
“조부님께선 의술을 행함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요. 돈이 없고 권력이 없어 목숨을 잃는 것이 당연해서는 안 된다고요.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요.”
이린은 예전에 읽어 본 적 있는 신교의 교리에 대해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부님과 아버님께선 고모님이 그 신념에 어긋나는 삶을 살지 않으셨을 거라 믿으십니다. 그저 의선의 후인으로 이곳에 계셨다면….”
그렇게 중얼거리던 백혜안은 눈을 깜빡이는 이린의 얼굴을 보곤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연 소저도 너무 오라버니를 걱정시키지 마세요.”
“…하지만 그분은 후회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남겨진 이들은 슬프지 않습니까? 저는 아주 어릴 적 고모님을 뵌 이후로 살아 있는 고모님을 뵌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아는 고모님은 언제나, 저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돌같이 차가운 얼굴을 하고 계시지요.”
“의선과 문주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조부님께선….”
의선은,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의 죽음을 외면하고 구차하게 연명하는 것보다 눈앞의 소녀를 살리기를 택한 후 눈을 감으며 말씀하셨다.
[너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단다.] [아버님.] [그래, 이제야 알겠구나. 그 아이도 분명 후회하지 않았겠지. 그래. 내 딸인 것을. 분명, 옳다고 생각한 길을, 내가 가르쳤던 그대로 걸어갔겠지…….]그렇게 말하며 의선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고모님이 여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마땅히 의선의 뒤를 이었을 것이라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선 그 말에 더 상처받지 않으셨을까요?”
“네?”
뜻밖의 말에 백혜안의 시선이 이린을 향했다.
“이미 여인으로 태어났는걸요. 남자였다면 허용되었을 일인데 여인이라 안 된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게 좋을 리가 없잖아요.”
“그건… 생각하지 못했군요. 제가 연 소저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너무 거창하세요. 저는 그분이 아니니 그분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로 뛰어난 분이었다면 분명 더 힘들어하셨을 거 같거든요.”
자신들은 집 안에 갇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자조하던 제갈세원의 갑갑함과는 또 다른 고통이 있었겠지. 이린은 자신이 겪은 것들이 아닌데도 속이 답답해져서 저도 모르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린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백혜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연 소저의 말씀대로였을 겁니다.”
의선의 제자와 자제들 중 누구보다도 뛰어났다는 고모님이었으니까.
“실은 저도 딸아이가 있답니다. 아직 어리지만 나중에 그 아이에게 저도 모르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손이 다 떨립니다.”
“으음.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일단 애정과 표현, 그리고 배려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일단 본인의 경험에 의거한 이린의 말에 백혜안은 ‘애정과 표현과 배려’를 몇 번 중얼거리곤 웃으며 답했다. 그야말로 사랑받고 자란 아이다운 대답이었다.
“연 소저가 말씀하시니 굉장히 설득력이 느껴집니다.”
“어어. 그, 저 말고 저희 아버지나 오라버니에게 물어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린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화살을 돌리자 백혜안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요. 두 분은 연 소저를 무척 익애하시니까요.”
“…소문이라도 난 걸까요.”
난감한 얼굴의 이린을 보며 백혜안은 고요히 웃으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연 장주님과 연 소협은 연 소저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분들이니,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네.”
산에서 본 동굴과 동굴 속에 있는 관에 대해 함구하기로 약조한 이린은 곧 지현문에 도착했다. 이린이 돌아오자 이현은 바로 하산을 결정했다. 지현문에 손님이 머무르지 않는 것은 아마 신교에 얽힌 이가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린도 별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안, 네가 두 분을 배웅해 드리거라.”
“예, 아버님.”
“배웅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모처럼 오신 손님인데 저도 아쉬우니 조금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데 도리가 있나, 돌아갈 때 너무 어둡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었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한 이린은 금방 납득했다.
“연 소저도 연 장주와 연 소협을 닮아 무공이 뛰어나시겠지요?”
“하하. 보통이죠.”
“겁이 없어서 걱정이지 실력은 뛰어나답니다.”
서호에서 뜻밖에 왜구와 싸운 얘기를 들은 백혜안은 역시 이린의 겁 없음에 감탄했다.
“놀랍군요.”
“산적이랑 그렇게 크게 다를 것도 없는걸요.”
“산적을 그리 가볍게 여기는 이도 흔치는 않을 겁니다.”
이린의 무공이 뛰어난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이린이 어릴 적 의선이 직접 영단의 기운으로 해독하며 십이경맥에서 세맥까지 모두 통하게 하였으니 벌모세수(伐毛洗髓)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시작점부터 다른 아이들과 비교도 되지 않았을 테지.
‘성격이 맞지 않아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모를까.’
혹시라도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면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 인근에서 조금 이상한….”
“어? 남궁 공자?”
백혜안이 이현과 대화를 나누던 중, 산어귀에 서 있는 이를 확인한 이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린의 시선을 따라간 이현은 멀리 보이는 낯익은 청년의 모습을 확인하고 이린에게 먼저 가 보라 손짓했다.
“남궁 공자가 기다리고 있었나 보구나. 나는 백 대협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갈 테니 먼저 내려가 보렴.”
“응. 백 대협. 감사했습니다.”
“연 소저를 뵐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언젠가 또 뵙지요. 보중하십시오.”
“네!”
백혜안은 뛰어 내려가는 이린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남궁 공자!”
“아, 연 소저!”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남궁청휘의 얼굴은 자신을 향해 뛰어 내려오는 이린을 발견하자마자 확 밝아졌다. 그리고 이린이 다가오자 팔을 뒤로 숨기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왜 이런 곳에 계세요? 금방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아, 그게….”
실은 곽천영과 그 일행이 보이지 않는 것이 혹 이린을 따라간 게 아닌가 싶어 마중 나왔지만, 그걸 말하는 건 어쩐지 옹졸해 보일 듯했다. 말을 고르던 청휘는 그만 다른 말을 해 버렸다.
“저어……. 소저를 기다리다 보니 그만 여기까지 와 버렸습니다.”
“그, 그럴 필요는 없다니까요.”
아무래도 꽤 오래 기다렸을 듯싶어 이린은 어쩐지 강하게 나가질 못했다.
이린의 눈치를 살피던 청휘는 슬쩍 등 뒤에 감추었던 꽃다발을 꺼냈다. 이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으면서도 물었다.
“…혹시 또 강매를 당하신 건?”
“아닙니다.”
이린의 농담에 청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린이 가장 기뻐하며 받아 준 것이 꽃이다 보니 지나가다 꽃을 보면 자꾸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을 뿐이었다.
선선히 꽃을 받으며 묘하게 시선을 피하는 이린을 본 청휘가 활짝 웃었다.
지난번 팽수명의 일로 청휘는 이린이 생각보다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냥 연 소저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이린은 지레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현은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아직도 내려오질 않고 있었다.
“오빠가 들으면,”
“저는 연 소협께서 들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있어요.”
이린이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자 청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에 시선을 피했다.
“소저께선… 제가 싫으십니까?”
“그, 싫지는, 않아요.”
“제가 불편하신 듯해서.”
“남궁 공자는 저 때문에 큰 부상을 입었는데도 저와 함께 있는 게 싫지 않으세요?”
“소저가 다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렇다고 남궁 공자가 다치시면 곤란해요.”
상대방이 걱정된다는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며 백혜안과 이현은 따사로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연 소저와 함께 있는 건 어느 댁 공자십니까?”
“남궁세가의 막내 공자십니다.”
“호오. 곧 시집보내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아직 어립니다.”
“하긴 연 소저보다는 연 소협이 먼저 가야겠지요.”
본인도 이미 혼인해 아이가 있는 백혜안은 이현의 반응에 여유롭게 웃었다. 결혼 압박을 피하고 싶은 이현은 말을 돌렸다.
“…도중에 보니 치안이 썩 좋지는 않더군요.”
“지현문이 봉문(封門)에 가까운 상태라 근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근방에는 이렇다 할 큰 문파도 없어 걱정입니다.”
“아까 말씀하신 일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찾아오는 이들에게 약을 지어 주고 진료를 봐주는 정도입니다. 저희를 수상하다 여기면 다른 곳에서 가만두지 않겠지요.”
“봉원우가 말을 곡해해서 전하는 이는 아니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함께 와 주신 덕분에 걱정을 덜었습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마지막으로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이린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경공으로 훌쩍 달려가는 이현의 뒷모습을 보며 백혜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라면 타인에게 맡길 일이 아니지만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처지인 지현문은 믿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연 소협. 부디 몸조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