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21
221.
“아직도 안 일어났다고? 어디 아픈가?”
“그런 건 아닌 듯한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깨우겠습니다.”
“됐어. 내가 깨우지 뭐. 이린, 이제 그만 일어나.”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소란에 이린은 흐릿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조금만 더 있으면 뭔가 떠오를 것 같아 스르르 다시 수마에 몸을 맡겼다.
“잠깐만요. 어딜 들어가시는 겁니까?”
“연이린, 안 일어날 거야?”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목소리의 주인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이린을 불렀다.
이린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왜 이상하지?’
묘한 불안감이 가슴을 두드렸다. 동시에 반짝 눈이 떠졌다.
“오늘은 웬일로 아직까지 안 일어나고 자고 있어? 이제 일어나야지?”
“응……. 일어났어, …사형(師兄).”
눈을 뜬 이린은 눈앞에 있는 요사한 미모의 사내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한 얼굴인데 어째서 실망한 기분이 드는 걸까.
‘이게 아닌데, 뭐지?’
아직 잠이 덜 깬 듯 눈만 깜빡이는 이린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손을 뻗었다.
“뭐야, 아직도 잠이 덜 깼어?”
저 손의 주인이 무례하다는 걸 알고 있는 이린의 주먹이 저절로 사내의 얼굴을 향했다.
타앙!
순순히 맞아 주는 것 대신 손으로 받아 내는 것을 택한 사내가 이어지는 발길질을 피해 몸을 날렸다.
“여인의 방에 이리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시끄러워, 유영!”
곽천영은 자신의 수하에서 보직이 변경된 옛 부하를 쏘아보며 이린이 던지는 베개를 받아 냈다.
이린은 자면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축객령을 내렸다.
“곽 사형! 작작하고 나가!”
“오늘 스승님과 함께 아침 식사할 거라고 신신당부했던 건 너거든?”
“그렇다고 들어와서 깨울 필요는 없잖아.”
이린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유영을 보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유영. 금방 준비하고 나갈게.”
“예. 아가씨.”
곽천영과 유영이 나가자 이린은 기지개를 켜고 거울 앞에 섰다.
파란 눈에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 거울 안에는 익숙한 20대 초반의 여인이 서 있었다.
“오늘은 꼭 물어봐야지.”
기합을 넣은 이린이 옷장을 열었다.
이린의 방을 나온 유영은 곽천영을 붙잡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아가씨 방에 마음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왜? 어차피 혼인할 건데?”
“소교주.”
유영의 떨떠름한 표정에 곽천영이 짧은 한숨을 흘렸다.
“너 이제 옛 주공은 안중에도 없구나?”
“심신이 편안해지니 힘들었던 옛 시절은 떠오르지 않는 법이더군요.”
“…….”
분명 예전에는 좀 과묵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늘어난 걸까.
그 원인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또 유영 괴롭혀?”
문이 열리며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이 보이지 않자, 시선은 자연히 아래로 내려갔다.
열한두 살 정도로 보이는 금발 벽안의 어린아이는 분명 저 방의 주인이었다.
“아하, 만반의 준비를 다 하셨군?”
“어때. 귀여워?”
“글쎄. 그 말을 들으려면 좀 더 어려져야 하지 않을까?”
“그건 좀 어려운데.”
이린은 옷이 몸에 맞는지 확인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린아이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지어 봤자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어린아이한테 맞는 옷이 있는 거지?”
“사 준 사람이 있으니까 있지.”
“아아.”
복장을 확인한 이린은 곽천영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쪼르르 달려 나갔다.
본래의 이린보다 한 뼘 반 정도 작아 보이는 어린아이 모습의 이린은 어딘지 행동도 어린애 같았다.
‘용모가 바뀌면 저렇게 되는 건지 일부러 연기를 하는 건지.’
이린이 갈 곳은 뻔했으므로 두 사람은 한숨을 쉬며 뒤를 따랐다.
“린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달려간 이린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잘생긴 청년의 품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이린과 꼭 닮은 금발에 벽안. 20대 중반 정도의, 아이의 숙부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조각 같은 미모의 청년은 제 품에 안겨든 아이를 끌어안고 헤벌쭉, 아니 싱글싱글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아버지.”
“미안하다. 한동안 좀 바빴지.”
이린이 도착하자 서둘러 음식을 가져온 시비들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어?”
“그냥요.”
“그럼 기왕이면 아빠라고 불러 주면 안 될까?”
“으음. 이 나이에 그건 좀.”
이 나이에 어린아이 모습으로 매달리는 건 괜찮고?
아빠라고 불러 주지 않는 딸에게 실망한 청년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스승님. 또 그렇게 위엄 없는 얼굴을….”
“아버지. 사형이 자꾸 제 방에 멋대로 들어와요.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세요.”
“또?”
외모만 보면 저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제자를 보는 청년의 눈에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기억은 없지만 아버지가 사형 교육을 잘못시킨 게 틀림없어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부녀의 단란한 대화에 곽천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스승님은 저랑 이린이 혼인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까?”
“이린이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그 말에 청년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인 안 하고 아버지랑 살지 뭐.”
“그럴까? 혹시 교주 자리는 관심 없고?”
“스승님.”
“교주님.”
“아, 연 부교주님 오셨네요.”
중년 여성 하나가 서류를 들고 나타나자 이린은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아쉬워하는 청년, 곽선후가 여인을 쏘아보았지만 이미 수년간 교주와 함께해 온 부교주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서류를 내밀었다.
“급하게 확인하셔야 할 일입니다.”
“그냥 알아서 하면 안 돼?”
“안 됩니다.”
질렸다는 얼굴의 곽선후를 보며 이린이 키득거렸다.
“봐, 교주라고 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고. 그냥 사형이 해.”
“…아니라곤 못 하겠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곽선후가 인상을 찌푸리고 뭔가 적어 주고 있었다. 교주가 확인한 서류를 받아 든 연수혜 부교주가 사라지자 그 뒷모습을 흘낏 쳐다보던 이린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전부터 궁금했는데.”
“?”
“왜 내 성은 ‘곽’가가 아니라 ‘연’가야? 아버지 혹시….”
그렇게 말하며 이린의 시선이 연수혜의 뒤를 좇았다.
쨍그랑!
덕분에 천마 곽선후, 검성과 함께 중원에서 대적할 이가 없다는 고수가 잡으려던 찻잔을 놓쳐 떨어트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입을 꼭 다문 시비들은 고개를 숙인 채 후다닥 다가와 잔해를 치웠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관심도 없는 이린은 음식을 우물거렸다.
“…무서운 오해 하지 마라.”
“그럼 왜 어머니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해 줘? 뭐 하룻밤의 실수 그런 거야?”
“…….”
딸의 가감 없는 적나라한 질문에 곽선후는 입을 다물었고, 이린과 시선을 주고받은 곽천영이 지원 사격을 시작했다.
“저도 궁금하긴 했습니다. 이린한테도 감출 일입니까?”
“…….”
“뭐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혼자 딸을 키우고 계시겠죠.”
묵묵히 딸에게 차를 따라 주던 천마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원래 몰랐어?”
“몰랐어.”
곽천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5년 전 크게 앓은 이후로 이전까지의 기억이 없는 이린의 시선이 추궁하듯 아버지를 향했다.
딸의 따가운 시선에 청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곽천영은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스승의 변모한 모습을 관람하며 와작와작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씹었다.
살면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참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으음, 그래, 아직도 모르는 건 문제가… 있지.”
“응응.”
곽선후는 이린이 음식을 삼키는 것을 확인하고 차를 한 잔 비운 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말거라. 사실 네 어머니는… 검성 연화문이다.”
“그건 알아.”
“…알아?”
“사형이 말해 줬는데?”
천마의 시선이 천영을 향하자, 되바라진 제자는 조용히 시선을 피하며 차를 마셨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요?”
“…….”
이어지는 추궁에 땀을 뻘뻘 흘리며 곽선후는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혈교와의 전쟁이 있었던 건 알고 있지?”
“네.”
“일단 혈교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겠구나.”
곽선후가 교주가 되기 전, 전대 교주의 제자 중에는 위지운이라는 자가 있었다.
곽선후의 사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당시 교주를 죽이고 교주 자리를 찬탈하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 교주를 죽이고 교내의 세력을 반쯤 장악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거기에 초를 친 게 스승님이시고요.”
“딱히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폐관 수련 마치고 나오는 사람을 다짜고짜 공격하니까 이쪽도 어쩔 수 없이 반격을 했고, 공격한 쪽이 나보다 약한 게 내 탓은 아니지 않느냐?”
자신과 같은 푸른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경청하는 이린을 보며 곽선후는 이야기를 순화하려 애썼다.
“그 일 이후로 스승님이 교주가 되셨고, 뛰쳐나간 혈교 잡겠다고 정파랑 손잡고 싸운 것도 알아요. 중요한 건 그다음이죠. 검성이랑 무슨 일이 있어서 이런 결과물까지 나온 건데요?”
곽천영의 손가락 끝이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결과물을 가리켰다.
곽선후는 옛일을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혈교랑 싸울 때는 별거 없었어. 이상한 늙은이 하나가 그 여자한테 툭툭거리고 있던 거 빼면.”
“툭툭거려요? 어떻게요?”
“뭐어, 무인이라고 여자를 포기한 거냐든가 여자답지 못하다든가 뭐 그런 쓸데없는 소릴 하며 신경을 긁고 있었지.”
“아버지는요?”
“나는 그냥 강해 보여서 한번 붙어 보자고 했는데 번번이 그럴 때가 아니라고 거절당했지. 늘 죽을상에, 웃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이상한 여자라고만 생각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검성이 혈교 교주를 죽이고, 정작 위지운은 놓쳐서 나는 그놈 추격하러 갔지.”
“그 위지운이라는 사람이 탈주해서 혈교를 만든 게 아니었어요?”
이린의 의문에 곽선후가 고개를 저었다.
“혈교도 천마신교에서 나온 놈들이라 강자지존(强者至尊)은 확실해서 평천신교와 결합할 때 그쪽 신교 교주 주선하가 위지운을 무릎 꿇린 이후로 주선하가 교주, 위지운이 부교주가 되었다고 들었다.”
“위지운은 약했어요?”
“글쎄? 본교의 위지 부교주보다는 강하려나?”
이린은 아까 본 권황 연수혜와 함께 부교주직을 맡고 있는 도황 위지척을 한번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성이 같은 위지씨네요.”
“사촌 간이었다던가, 육촌이었다던가? 본교에서는 좀 드문 일이지. 나이 차도 있고 친하지도 않아서 당시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지금 부교주 자리에 있다는 뜻이었다.
이유가 있어서 숙청당하지 않았겠지만 이린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뭔가 찜찜하네.’
간단하게 부연 설명을 한 곽선후가 말을 이어 갔다.
“절벽에서 떨어졌다는데 당시 기상상황도 안 좋았고 아래가 하필 꽤 험한 협곡이라 시체도 못 찾았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아무튼 위지운 놈은 놓치고 돌아왔더니 뜻밖에 부상 입은 검성의….”
거기까지 말한 곽선후가 갑자기 이린을 보며 말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