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53
외전 3화
“그럼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알겠군.”
“무언가 큰일이 벌어졌을 거라는 건 알지만 저희 같은 사람들이 감히 남궁세가 내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답니다. 대협께서 이리 큰 부상을 입을 만한 일이 있었겠지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여인은 남궁세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했다.
하기야 집안에서 일어난 하극상은 여러모로 낯부끄러운 집안 망신이니 밖에는 알려지지 않는 편이 나았다.
장성한 아들들이 현 가주인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어, 조용히 살고 있던 어린 이복동생과 계모를 해치려고 했다.
무엇보다 집안 재산과 권력 때문에 아버지와 싸우는 것이 그냥 흔한 패륜이라면, 이복동생 앞에서 계모를 인질로 잡고 죽이려 한 것은…….
‘쪽팔리는 짓이잖아.’
상대가 검성쯤 되면 모를까. 아무리 제갈세가 출신이라 해도 무공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해 남궁세가 직계 고수들에 비하면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다. 계모라고 해도 무슨 옛날이야기처럼 아들들을 학대하거나 불이익을 준 적도 없었고, 적당히 예의를 지키며 대해 왔다.
형들의 행동은 당연히 비열했지만, 형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이뤄놓은 모든 것들을 언젠가 배다른 막냇동생에게 하루아침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형들의 불안을 알면서도 그동안 나 몰라라 한 자신에게도 책임은 있었다.
만약 연이린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혼사가 진행되어 청휘가 연가장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면 어쩌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대로 내가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절벽에서 떨어질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자신이 제갈윤정을 구하고 죽는다면, 형들은 청휘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자신에게는 죄책감을 가질 것이고 청휘 그놈은 워낙에 물렁한 놈이니 자신이 남긴 말을 잊지 않을 것이다.
“혹시 나를 찾은 것을 누군가에게 알렸소?”
“설마요. 남궁세가 셋째 공자님이시란 걸 저도 방금 알았는걸요.”
남궁세가 셋째 공자. 그건 남궁청운의 신분을 표현하는 가장 간결한 단어였다.
“그럼, 왜 날 구한 거지?”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 은공이시라고.”
아까 낫 들고 달려들던 노인을 막아서며 자신을 구해 줄 때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난 기억에 없는데?’
게다가 그럼 다친 자신의 약값을 댄 건? 말이 앞뒤가 안 맞지 않나?
물론 평범한 여인의 몸으로 서슬 퍼런 낫을 든 사내와 대치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 은인이란 말이 허언은 아닐 듯싶었다.
남궁청운이 어리둥절해하거나 말거나, 여인은 마을에 들어서자 옅게 웃으며 자신이 쓰고 있던 삿갓을 그의 머리 위에 씌웠다. 신변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마음을 아는 듯했다.
여인은 처음부터 그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지 마차를 대기시켜 두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어디로 가는 거고.”
“여기까지 따라오시고 물어보면 너무 늦으신 거 아닌가요?”
“아까 그 노부부만큼 위험해 보이진 않아서.”
“확실히 그건 그렇군요.”
남궁청운이 마차에 편히 앉도록 돕던 여인은 아까 일이 생각났는지 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몸이 편해진 남궁청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여인을 관찰했다.
어딜 봐도 무공을 익힌 적 없는 평범한 민가의 여인. 양갓집 규수라기에는 거칠고 하녀라기에는 태도가 단정했다. 손가락의 굳은살 위치를 보면 붓을 잡는 여인이었다.
대충 봐도 기녀나 예인은 절대 아니었고.
“어디 상단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네? 아, 맞아요.”
노부부는 약초를 캐서 생활하고 있었으니 상단 관계자라면 그들과 연이 있을 법했다.
“사실 이곳에서 부상당한 사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쩌면 대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어요. 설마 여기까지 흘러올 거라곤 다들 생각 못했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남궁세가에서 그를 찾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듯 여인이 애써 설명하자 남궁청운은 피식 웃으며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멈춘 마차에서 내리며 여인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연가상단’이라 쓰여 있는 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누가 호구같이, 아니 부상자를 무상치료해 주는 자애를 베풀고 있나 했더니.’
갑자기 긴장이 탁 풀리며 어깨에 힘이 빠졌다. 부상자의 몸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신변을 맡기는 낯선 경험이 그리 즐겁지 않았는데 이젠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나 참 연가장이라니 의외로 인연이 깊…… 어?”
익히 잘 알고 있는 호남 연가장의 장남, 연이현을 떠올리던 남궁청운은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이 여인을 언제 만났는지도 함께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설마 은공이라는 게 그때 일 말하는 거였어?”
“기억이 나셨습니까?”
“아아. 뭐.”
예전에 청휘를 데리고 연이현과 그 누이 일행과 동행했을 때, 빚에 쫓기는 모녀를 구하는 연이현을 슬쩍 거들어 준 일이 있었다. 뭐 대단한 일을 한 기억은 없고 정말 그저 일이 좀 빨리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뿐인데 은공이라는 거창한 소릴 들을 줄이야.
“대협에게는 대단찮은 일이었겠지요.”
기억이 안 날 만큼.
“그래서 날 도운 건가?”
“사람 구하는 건 상단 사람들 대부분이 하는 일입니다만, 제가 망설이지 않고 대협을 변호할 수 있었던 건 대협이 절 도와주신 적이 있기 때문이죠.”
“내 치료비를 부담한 건?”
안 물어봐도 알 것 같지만 아까부터 궁금했던 거라 그냥 한번 물어봤다.
“장주님의 명으로 연이 닿는 한 신원 미상인 환자들을 돌보고 있답니다.”
“그거 고맙군.”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원래는 그렇게 산속에 있는 환자까지 도울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아가씨께서 실종되신 이후로는 다들 생각이 많아졌거든요.”
혹시라도 어딘가에 쓰러져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어딘가에 붙잡혀 있는 게 아닐까.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 단서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아…….”
연이현의 동생 연이린의 실종은 강호에 여러 말을 떠돌게 했다.
그 지인들은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종적을 찾아다녔지만 연이린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덕분에 새삼 지금 남궁청휘가 어떤 심정일지도 떠올린 남궁청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하는 여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종적을 알 수 없고, 형 하나는 눈앞에서 절벽으로 추락사, 형 둘은 골육상쟁을 벌였으니 최소 유폐.’
제 잘못은 아닌데 괜히 미안해졌다.
“왜 그러세요?”
“어, 아니. 내가 상단에서 신세를 지면 아무래도 알아보는 이가 있을 듯해서.”
“아, 그렇겠군요.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일단 상단 내에 있는 의원에게 상처를 보인 남궁청운은 절대 안정이란 진단을 받았다.
남궁청운을 도왔던 노부부는 약초꾼들이라 외상 치료에는 제법 능했지만 역시 의원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도망칠 때 터진 상처들까지 있어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거야 이제는 아무래도 좋지만 아무래도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연가상단에 머무르는 것은 좀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듯했다.
난감해하는 남궁청운을 보던 여인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누추하지만 저희 집에 머무르시겠어요?”
“어?”
여인은 어머니와 함께 상단 뒤쪽에 작은 집을 얻어 지내고 있다고 했다.
“상단과 가까워서 상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거든요.”
딱히 다른 방법도 없고 돈도 없고…… 그렇게 남궁청운은 염치 불고하고 여인들만 지내는 집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집에 이렇게 남자를 막 들여도 돼?”
“부상자잖아요? 게다가 집에 안 들여도 대협 같은 분이 나쁜 맘 먹는다면 집에 들이나 안 들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그거야 뭐, 그렇지.”
“그리고 집에 남자분이 계시면 든든하니 나쁘지 않고요. 전에는 조금 문제도 있었거든요.”
“문제? 뭐 좀도둑이라도 들었어?”
“뭐…… 비슷해요.”
남궁청운이 자기 신변을 감추고 싶어 했기에 주변에는 먼 친척이라 둘러대기로 했다.
“참, 장주님과 소장주님께는 알려도 될까요?”
“……연이현?”
“네. 두 분은 교분이 있는 사이이시고, 소장주께서는 비교적 자주 이쪽에 들르시거든요.”
남궁청운은 그 오지랖 넓은 연이현을 떠올렸다.
그는 남궁세가에 대한 소문이 전혀 퍼져 있지 않은 것과는 달리 자신이 어찌되었는지 뻔히 알고 있을 터였다.
“굳이 소식을 전할 필요는 없어.”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하면 못 알아들을 녀석은 아니지만, 괜히 동생을 찾고 있는 본인 입장에 이입할 가능성도 높았다.
전혀 다른 처지인데.
“그러고 보니 당신이 왜 호남까지 와 있지? 내 기억에 분명 그때 연이현이 근처에 있는 상단에 데려다 놓는다고 했으니 호남이랑은 거리가 멀었을 텐데?”
“아…… 그 근방에는 아는 얼굴이 많아서요. 자꾸 시비가 걸리니까 아예 이쪽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하셔서 감사히 받아들였죠.”
여인의 씁쓸한 얼굴을 본 남궁청운은 그제야 자신이 왜 여인을 못 알아봤는지 알 것 같았다. 짧은 만남이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내내 어둡고 우울해 보였던 기억 속 여인과 대조적으로 지금 눈앞에 있는 여인은 다른 사람처럼 밝고 생기가 넘쳤다.
“크흠. 그러고 보니.”
“?”
“아직 이름을 못 들었소.”
“네?”
“은공의 함자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소?”
남궁청운의 말에, 여인이 싱긋 웃었다.
그때 남궁청운은 연이현과 함께 모녀를 도우면서, 한 번도 이름을 묻거나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는지도 몰랐다.
“제 이름은…….”
남궁청운은 여인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오지랖 넓게 웃던 연이현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했다.
* * *
집에 남궁청운을 두고 모녀는 상단으로 출퇴근을 하며 환자 간병까지 해 주었다.
다소 뻔뻔스러운 성격의 남궁청운이라지만 역시 양심에 조금 찔렸다.
“아무래도 너무 신세를 많이 지는데.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지.”
“제 은혜는 되었고…… 이런 부탁은 좀 그렇지만 혹시 가능하시다면…….”
한참 말을 흐리던 여인은 어렵게 노부부의 일을 끄집어냈다.
“싫은데.”
“얘기만 좀 들어 주세요.”
노부부에게는 윤조라는 이름의 외아들이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부모와 함께 부지런히 약초를 캐다 팔다 나중에는 그 돈으로 땅을 사 키우기 쉬운 약초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상재도 있어 나중에는 가게도 차렸고 집안은 풍족해졌다.
“근방에선 제법 성공했다고 해요. 우리 상단이랑도 그때 몇 번 거래를 했었고요.”
“아, 상단과 직접 거래한다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다 했지.”
“음. 요새 다들 귀한 약초를 찾고 있기도 하고요.”
요약하자면 수완도 좋고 인망도 있어 주변인들과 함께 땅을 더 사고 규모를 키우려 하던 차에 남궁세가 사람이 동업을 제의했다고 한다.
“남궁소욱?”
“네. 분명 그 이름이었어요. 혹시 아시는 분인가요?”
“으음. 내가 아는 이름이 맞다면 칠 장로네 손자 중 하나인데. 친척이 워낙 많아서 원.”
“그 사람도 그렇게 말했다고 해요.”
다들 나름 잔뼈가 굵은 장사치들이라 정말 남궁세가 사람이 맞는지 인맥을 최대한 동원해 확인까지 하고 동업을 받아들였다. 남궁소욱은 약초를 재배해 남궁세가에 납품할 수 있도록 판로를 뚫어 주겠다고, 부족한 비용은 얼마든지 융통할 수 있다고 인심 좋게 말했지만…….
“아, 뒤는 말 안 해도 알 거 같다.”
남의 밥상에 숟가락 얹는 놈들 하는 짓이야 불 보듯 뻔했다. 숟가락 얹는 척하다 밥그릇에 밥상까지 빼앗았겠지.
“잘되던 일들이 갑자기 안 풀리기 시작하고, 갑자기 돈을 갚으라고 하고는 홀랑 집어삼켰겠네.”
“맞아요. 당연히 다들 항의하러 갔지만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났고요.”
사람들이 하도 찾아오자 남궁소욱은 아예 남궁세가 안으로 들어가서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과 얘기를 해 보려고 찾아간 이들은 만나기는커녕 감히 세가의 도련님을 사기꾼으로 모함했다고 호되게 매를 맞고 쫓겨났다.
도와주겠다고 나섰던 이들도 남궁세가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안 후엔 조용히 몸을 뺐다.
성실한 성품이었던 윤조는 일궈 낸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터무니없는 액수의 빚까지 갚느라 아픈 몸으로 일을 하면서도 부모님께는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윤조의 큰아들이 갑자기 병에 걸렸고, 빚을 갚느라 허덕이던 부부는 의원에게 제대로 보이지도 못하고 아이를 보내야 했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받은 윤조는 이성을 잃고 남궁세가에 뛰어들었지만 인사불성이 되어 돌아왔고, 부인은 그런 남편의 병구완을 하며 남은 어린 딸을 보살피느라 동분서주하다 불운한 사고로 세상을 떴다.
며느리가 죽기 전 간신히 시부모에게 소식을 보낸 덕분에 서둘러 아들 내외를 찾아온 노부부가 본 것은 이미 회생 불가 상태로 죽어 가는 아들과 울고 있는 어린 손녀뿐이었다.
“그 근방 사람들은 다들 아는 일이에요.”
“허어.”
세가에 인간 말종 많은 건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참…….
‘그래도 나름, 꼴사나운 짓은 하지 말라고 교육받으며 자란 것 같은데.’
물론 친척이 한둘이 아니니 무슨 짓을 하고 사는지 알기도 힘들고, 그걸 모두 관리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더러 그놈들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안 될까요?”
“나 남궁세가에서는 죽은 사람인데? 살아 있다는 거 알릴 생각 없는데?”
“그렇군요. 그럼 할 수 없죠.”
“……?”
뭐지, 이 빠른 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