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59
59.
아직 청아가 얼린 얼음이 남아 있기에 경공을 펼쳐 얼음 조각을 디디며 건너온 이린은 혹시나 싶어 홍아에게 부탁해 남아 있던 표면의 얼음을 녹이도록 했다. 청휘가 쫓아오지 않는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이린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곧 다시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홍아로 인해 생긴 수증기 덕분에 설령 청휘가 따라 내려온다 해도 들킬 염려는 없었다.
‘아, 놀랐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우드득거리는 팔을 풀어 주고 돌아보니 청아와 홍아가 그사이 이린이 들고 온 반쯤 익은 뱀들의 몸을 삼키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거 먹고 싶어?”
키-
키이-
하지만 몸 크기와 길이 차이가 너무 커서 아무리 시도해도 힘들어 보였다. 동족상잔에 대한 의문은 잠시 치워 둔 이린은 나무 꼬챙이 채로 죽은 뱀들을 수로에 던져 버렸다.
키이-
키이이-
“저런 거 먹지 마. 지지야.”
어지간한 건 그러려니 하겠다만, 니네 통째로 삼키는데 저거 독 들었잖아.
키이이-
뭐, 먹어도 소화시킬 거 같긴 한데 괜히 또 독을 품을 수 있는 뱀이 되는 것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기에 이린은 단호했다. 못 먹게 했다고 화가 난 건지 팔딱거리며 반항하는 청아와 홍아를 안아 든 이린은 다시 통로를 올랐다.
다행히 딱 맞춰 경비가 지나간 것을 확인한 이린은 잠시 대기하다 구멍을 빠져나와 두고 왔던 가방부터 회수해 청아와 홍아를 담고 나오지 못하도록 잠갔다. 아까 고기도 먹였는데 배가 고팠나 아니면 역시 날것을 좋아하나.
‘그래도 일단, 주려고 했던 건 주고 와서 가뿐하긴 하네.’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지금의 청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내내 그에게 받기만 했던 것이.
그래서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그때야 청휘가 나에게 마음도 있었고 같이 복수해야 할 이유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나랑 안 엮이면 위험도 줄어들고 좋지 뭐.’
옷에 흙 묻은 건 없나 툭툭 털며 이린은 조금 우울한 기분으로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다들 걱정할 테니 돌아가야지.”
흩어져서 도망치면 다시 방으로 모이기도 했는데 이린만 한참을 오지 않으니 길을 잃은 걸까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빠 보고 싶다.’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했다. 오빠가 보고 싶었다.
“지금 어디 있으려나.”
어른들은 술판을 벌이고 있겠지만 오빠가 거기까지 끼기에는 아직 좀 어리지 않나? 연가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누굴 초대하는 걸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장주일 때는 그런 거 할 여유도 별로 없었고 내가 주인이라 계속 자릴 지켜야 하기도 했고.’
어쨌든 찾으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이린은 유독 요란스러운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니까 돈이 필요 없으면 뭐가 좋겠냐 이 말이다!”
“별로 답례를 바라고 도운 것도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빚진 거 같아 찝찝하다고!!”
“벌써 2년이나 된 일인데 아직도 그리 신경을 쓰시다니 청운 공자께선 참으로 성실한 분이시군요.”
“으아아!!”
남궁청운과 연이현은 아직도 똑같은 대화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린의 예상대로 배분 높은 어른들이 고급스러운 자리를 따로 만들고, 항렬이 낮은 제자와 가문의 자제들은 젊은이들끼리 놀라며 따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기에 다들 편히 즐기고 있었다.
이린이 걱정되어 술이 잘 넘어가지 않던 이현만이 적당한 때에 빠져나오려다 남궁청운에게 붙잡혔을 뿐.
‘이린이 잠들기 전에 가서 한 번 더 얼굴 좀 확인하려고 했는데.’
이린 자신은 이제 잊고 있는 것 같지만 어릴 때도 용모 때문에 또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울며 대인 기피 증세를 보였던 과거가 있다 보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씩씩해 보이긴 하지만 워낙에 어른스러운 아이라 속내가 어떨지는 또 모를 일이고.
답답한 이현의 반응에 발작 중인 남궁청운의 반응은 나름 재밌었지만 이린에게 가 보려는 이현은 지금 이 상황이 조금 난감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청운공자께선 저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계시지만 정말 빚을 진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뭐?”
이현의 갑작스러운 말에 청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날 마을 사람들에게 이현이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말을 다 들었는데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저러는지?
청운의 떨떠름한 얼굴을 마주하고도 이현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날 토사에 깔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공자를 찾아낸 건 제 어린 누이동생과 그 아이의 애완동물이거든요.”
“엑?”
“마침 잘됐군요. 지금 이린을 찾아가 보려던 참인데 공자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 어어.”
처음 듣는 얘기에 남궁청운은 얼떨떨해하며 이현의 뒤를 따랐다.
“잠깐, 여긴 우리 집인데 왜 네가 앞장을 서? 내가 안내를 해야지.”
“그건 그렇군요. 그냥 함께 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흥. 그런데 동생이라면 그때 그…… 쪼끄만 아이 아냐. 어떻게 사람을 찾았다는 거지?”
“정확히는 동생이 데리고 다니는 애완동물이 공자를 찾아냈지요. 공자만이 아니라 그때 공자와 같이 묻힌 여자분도요.”
“완영을?”
“아는 사이셨군요?”
“아, 뭐어…….”
그러고 보니 큰형님이 이 녀석한테 은근히 태도가 정중하던데 그 때문이었나?
머리를 긁적이던 청운은 겸연쩍어하며 이현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동생에게 험한 말을 해서 미안했다. 나도 그땐 정신이 없어서.”
“……기억하고 계셨군요.”
청운의 사과에 이제껏 어떤 감사의 선물을 받을 때보다 얼굴이 밝아진 이현이 활짝 웃었다.
만약 이곳에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있었다면 비명을 질렀을 미소였다.
‘거 잘생기긴 되게 잘생겼네.’
남궁청운 자신도 지금껏 잘생겼단 소린 숱하게 듣고 산 거 같은데 눈앞의 소년은 정말 잘생겼다. 심지어 거기에 성격도 좋고, 무공에 대한 평도 나쁘지 않았다.
남궁세가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꽤 유복한 집안에, 무엇보다 가족들이 화목했다.
‘집안 사정만 좀 알면 남궁세가보단 저쪽을 택하는 여자가 더 많을걸.’
아들들에게 냉랭한 아버지와 사이가 썩 좋지 않은 배다른 형제.
솔직히 객관적인 눈으로 봤을 때 성가시기 짝이 없는 집안이었다. 자신도 딱히 아직 혼인에 뜻을 두고 있지 않지만 지금 남궁세가 형제들을 보면서 혼담 넣기를 주저하며 주판을 굴리고 있을 집안들은 꽤 많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연가장은 어떤가. 군자검 연적훈은 부인 잃고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순정남으로 유명한 데다 저 유순해 보이는 연이현은 동생 일이라면 싸움도 불사할 듯 보였다.
그러니 부인을 맞는다면 얼마나 잘해 줄지 안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누이가 있었다면 당장 사돈 맺자고 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시커먼 형과 남동생뿐이니.’
이렇게까지 잘난 놈이 꼭 존재해야 할까?
남궁청운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이현은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누가 봐도 누이동생이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라 너무나 남 일인 청운은 좀 떫은 얼굴을 했다.
‘나도 청휘가 여동생이면 저랬을라나.’
청휘가 지금보다 훨씬 작고 어릴 때, 새어머니인 제갈윤정이 아장아장 걷는 청휘에게 깜찍한 여자아이 옷을 입혀서 돌아다닐 때는 확실히 귀엽긴 했다. 청운이 가지 말라는 형들 몰래 찾아가서 구경하다 온 적도 있었을 정도니까.
진짜 여동생은 더 귀엽겠지, 이상한 결론을 내린 남궁청운은 혼자 납득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린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면 기뻐할 겁니다.”
“으음. 그래. 그러지 뭐.”
그리고 그런 청운을 보며 이현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능구렁이 같은 사람들 천지인 강호에서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 있다니.’
확실히 늦둥이 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삼형제 중 막내였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해 이현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왜 웃냐.”
“아니요. 삼공자께서 저에게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올라서요.”
“뭐? 뭔데!”
돈더미를 던져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돌려보내던 사람의 말에 청운은 화색이 되어 물었다.
“언젠가, 제 동생의 신변이 위험해진다면 한번만 그 아이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네 동생? 연가장이 애지중지하는 그 쪼끄만 여자애가 신변이 위험해질 일이 있을까 싶다만, 어린애가 위험한 게 눈 앞에 보인다면 당연히 돕겠지. 그게 무슨 조건이야?”
아니, 그걸로 무슨 빚을 갚아.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리는 청운을 보며 이현도 어쩐지 웃음이 터졌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청운 공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성정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이토록 호방하신 공자께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거칠었는지 궁금하군요.”
“……알 거 없어.”
“알겠습니다.”
“너무 즉답이잖아!”
“안 가르쳐 주실 거 아닙니까.”
하도 아웅다웅하다 보니 이건 이것대로 재밌어진 이현은 청운을 다루는 법을 대충 알 것 같았다.
‘노악도 처음에는 까칠했지.’
그렇게 실없는 한담을 나누며 걷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특유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과 청운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이거 애들 목소리 같은데?”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애들이 왜 밖에서…….”
문득 낮에 이린에게 있었던 일을 떠올린 이현은 기묘한 기시감에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야, 같이 가!”
남의 집에서 경공으로 달리는 것은 아무래도 무례한 것 같았지만 어차피 뒤에 집주인도 있겠다 싶어 거침없이 달려간 이현은 아까와 비슷한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이린이 또다시 남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굳어 있었다.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아직 싸우고 있지는 않다는 것 정도일까.
이현이 다급하게 이린을 불렀다.
“린아!!”
“오빠아…….”
이현의 목소리에 이린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리고 오빠를 부르며 고개를 돌린 이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순간 이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