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03)
102마왕의 연회
“…….”
깨자마자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뭔가 하얗고도 풍만하기 그지없는 무언가였다.
뭐지, 이건?
잠결의 조금 얼떨떨한 정신으로, 그것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 보고, 그 부드러움과 탄력에 내심 감탄하며 기분 좋게 만지작거리던 나의 귀에, 한 줄기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처녀의 가슴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참으로 무도한 소년이로군.”
……?
애매한 정신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나는 한 차례 눈을 깜빡거렸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한쪽 손 위에 머리를 기댄 채 루비빛 눈동자의 여인을 멍하니 보길 잠시 잠결에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야 그 말뜻을 이해한 나는 천천히 내 손에 쥐어진 것을 바라보았다.
…처녀의 가슴?
어지간한 빵 덩어리보다 더 큰 데다가 빵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감촉과 탄력의… 이것이 가슴이라는 믿기 힘든 사실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을 잃고 망연히 있기를 한참.
나는 잠시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당신, 왜 여기에…?”
자칭 세레나의 언니를 차마 박대하지 못하고, 따로 모포를 깔아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건만, 왜 내가 그녀와 같이 자고 있던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질문에 대한 여인의 대답은, 참으로 태연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날이 추워서 그대를 난로 대용으로 사용했네. 라바일 경만큼은 안 되지만 그대도 꽤 따듯하더군.”
…하아?
그 어처구니없는 답변에 나는 얼이 빠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인은 그 정도야 뭐 어떠냐는 듯,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대신 그대도 본인을 마음대로 희롱했으니, 서로 간에 빚은 없었던 걸로 하겠네.”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잠결이라고는 해도 그렇지, 남의 가슴을 반죽 주무르듯 가지고 놀다니, 이게 얼마나 큰 실례인지 모를 리 없었으니까.
물론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남의 잠자리에 마음대로 파고들어 온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만약 누군가 내 가슴을 그렇게 했다면, 나는 81개의 주문을 몽땅 풀어서라도 상대방을 박살 낼 터였다.
그런 면에서 대범하달지, 아니면 뻔뻔하달지 모를 태도로 여인은 태연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털썩 걸터앉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흐음. 결국 라바일 경은 안 돌아왔군.”
그녀의 아쉽다는 듯한 중얼거림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세레나가 그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하룻밤을 묵었음에도 세레나를 만나지 못한 그녀로서는, 이 상황이 아쉬울 만했다.
“좀 더 기다려 볼 거야?”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지만… 본인은 바쁜 몸이네. 특히 오늘은 따로 갈 데가 있어서 그건 좀 힘들겠군.”
뭘 고민하는 건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여인을 무시하고, 나는 바닥에 널려 있던 모포를 정리했다. 세레나의 의자매라는 게 진짜든 아니든, 그녀를 일일이 상대해 줘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짝!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무슨 방법?”
갑작스러운 손뼉 소리를 듣고, 나는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묘한 눈으로 나를 천천히 훑어본 뒤, 한 줄기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얼이 빠져 버리고야 말았다.
“귀여운 소년. 오늘 본인과 데이트를 하지 않겠는가?”
“…뭐?”
“그럼 우선 옷부터 마련해야겠군.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도록 하게, 귀여운 소년.”
“잠깐, 지금 무슨 소리를….”
그 난데없는 말에 잠시 어이없어하다,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를 제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노력은, 눈사태를 두 손으로 막아 보려는 것과 다름없었다.
엄청나게 자기중심적이고 엉뚱한 여인은 별난 성격만큼 행동력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어영부영하는 사이 그녀에게 거의 납치되다시피 집을 나서, 도심에 있는 고급 의복점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제단사를 만나 본 다음에는 보석 가게를, 그다음에는 신발 가게를… 하는 식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그녀와 온갖 가게를 돌아다녀야만 했다.
하아… 대체 뭐야, 이 여자는?
나는 녹초가 되었다.
도주를 위해 종일 숲길을 걸은 적도, 전쟁터에서 며칠 밤낮을 새우며 싸운 적도 있지만, 고작 반나절 만에 이렇게 지친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뒤를 따라다닌 내가 녹초가 됐음에도, 정작 여인은 오히려 아직도 활력이 넘치는 듯,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약한 소년, 벌써 지쳤는가?”
“…그럼 안 지치게 됐어?”
“흐음, 생각보다 체력이 약하군. 무슨 병이라도 있는가?”
“나야말로 대체 뭘 먹으면 당신처럼 체력이 넘칠 수 있는지 묻고 싶은데?”
그녀의 체력을 비꼬고자 던진 말, 하지만 그에 대한 여인의 대답은 내 예상을 가뿐히 벗어난 것이었다.
“비싸고 귀하고 좋은 걸 잘 먹고, 아무리 바빠도 수면 시간을 챙겨서 잘 자고, 20년 동안 쉬지 않고 꼬박꼬박 운동하면 이렇게 되네.”
“…당신도 검사야?”
“음? 본인은 검술이라고는 전혀 모르네만.”
“검사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체력 단련을 열심히 할 필요가 있어?”
내가 의아해하며 던진 질문에 여인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검지를 일자로 쫙 펴서 좌우로 내저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정확히는 그 풍만하기 그지없는 가슴을 가리켜 보였다.
“체력을 키우려 그러는 게 아니라, 가슴을 키우려고 그러는 거네. 잘 먹고 잘 자고 운동하지 않으면 가슴이 잘 안 큰다는 건 상식 아니던가.”
“…….”
할 말을 잃고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보길 잠시, 지금까지 전쟁터 돌아다니느라, 밥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운동도 제대로 못 했던, 지금까지의 과거를 회상해 본 뒤, 무의식중에 살짝 밑으로 시선을 내려 펑퍼짐한 옷자락에 묻혀, 반듯하게만 보이는 스스로의 가슴팍을 내려다본 순간, 나는 왠지 급격히 우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아냐. 여기서 납득하면 안 돼!
순간적으로 납득할 뻔했던 나는 급히 고개를 저어 우울함을 떨쳐 냈다. 이런 비상식적인 여자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 어차피 이런 건 어떻게 키우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타고나느냐의 문제지!
…근데 왜 이렇게 울적해지는 걸까?
그렇게 좌절의 바닥을 헤매는 나를 끌고, 여인은 향한 곳은 처음에 들렀던 의복점이었다.
“준비는 다 되었는가?”
“예, 루반 공국 제일의 제단사 10명이 달라붙은 덕분에 늦지 않게 끝났습니다. 다른 가게에서 온 것들도 함께 준비해 줬습니다.”
“흐음. 그렇군.”
여기는 왜 또 온 거지?
의복점의 점주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눈 뒤, 여인은 안쪽에 있는 내실로 걸음을 향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고용인들에게 가볍게 손짓을 한 뒤, 나를 가리켜 보였다.
“조금 수줍음을 타는 아이니, 잘 도와주게.”
“알겠습니다.”
수줍음을 타? 누가? 내가?
내가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는 나를 두고 다른 방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그냥 이대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그녀를 따라가야 할지 고민하던 도중, 나는 어느새 고용인들에게 포위된 걸 깨달았다.
뭐지? 설마 함정인가?
뜻밖의 상황에 내가 긴장하는 순간, 고용인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인이,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탈의실은 이쪽입니다.”
“…뭐?”
“저희는 이런 일에 익숙하니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 그럼 서두르시지요.”
아니, 잠깐…!
부끄럽다니? 뭐가 부끄러운 건데?!
내가 당황해하는 사이, 고용인들은 나를 납치하듯이 탈의실로 데려와 우르르 달라붙어 모자와 옷을 벗겼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허둥거리던 끝에, 가까스로 남장하고 있었음을 기억해 냈을 때, 나는 이미 홀딱 벗다시피 한 채, 여종업원들 사이에 서 있는 상태였다.
“이게 대체 무슨…!”
“자, 이것을 입으시지요.”
채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속옷에서부터 드레스와 신발에 이르는 여러 옷가지를 내미는 여종업원의 행태에 어이를 잃고 있기를 잠시, 나는 일단 옷을 집어 들었다.
화를 내더라도, 옷은 입고 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옷가지를 갖춰 입던 도중 나는 우뚝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사이즈에 딱 맞춘 드레스라니, 이런 게 우연히 준비돼 있을 리 없다. 아마 아까 들렀을 때 주문해 둔 것일 터, 그렇다면 그녀는, 이미 내가 남장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단 건가?
그래 놓고는 항상 ‘건방진 소년’이라느니, ‘귀여운 소년’이라느니 하며 날 불러 대던 여인의 뻔뻔함에 기가 막혀 하면서도 나는 여종업원들의 독촉에 마지못해 드레스를 다 갈아입었다. 하아.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여종업원들이 내온 거울을 확인하고, 나는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구두와 종아리에 달라붙는 하얀 스타킹, 부끄러울 정도로 팔랑거리는 하얀 치마와 그 위로 매끄러운 광택을 발하는 검은 옷감, 거기에 머리카락에 묶인 리본까지 더해지니, 영락없이 잘 치장된 인형의 꼴이었기 때문이다.
“옷은 다 갈아입었는가?”
“당신,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문을 열고 걸어 나온 여인의 질문을 듣고 차갑게 말을 쏘아붙이려던 도중,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실크 장갑으로 가느다란 팔을 강조하고, 그 머리카락만큼이나 붉고도 얇은 드레스로 그 농염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여인.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숨 막히는 요염함이 순간적으로나마 내 넋을 잃게 했다.
“흠. 미안하지만 본인에게는 이미 마음을 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대가 아무리 귀여워도 본인의 애인으로는 받아 줄 수가 없네.”
“누가 당신 애인이 되기나 하겠대?!”
“아니었는가? 본인을 꽤 뜨거운 눈으로 보기에 그런 줄 알았네만.”
…내가 말을 말아야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참다못해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뒤에 있던 점주를 돌아보았다.
“수고했네. 대금은 마음대로 적어 두게나.”
“감사합니다. 손님.”
그와 함께 여인이 점주를 향해 내민 하나의 새하얀 인장을 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백금인장?!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무제한의 자금을 끌어다 쓸 수 있기에, 어떤 의미로는 36대 기보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백금으로 만들어진 인장을 보며 나는 어이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
백금인장이 대륙 제일의 갑부로 이름 높은 카산드라 가주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금인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 여인이 카산드라 가문의 직계혈족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쩐지.
도무지 믿기 힘들어야 할 사실을 앞두고도,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카산드라가의 직계 혈족쯤 되지 않으면, 이 정도까지나 제멋대로에 천방지축인 성격이 쉽게 나올 리가 없었으니까.
“마차는 준비됐는가?”
“예. 지금 바깥에 대기 중입니다.”
대체 어느새 준비해 둔 건지, 의복점 앞에는 화려한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과연 이대로 따라가도 될지 고민할 틈도 없이, 나는 여인에게 끌려 마차에 타게 되었다. 겉보다 화려하고 값비싼 내부 장식에 무심코 감탄하다 못해 질려 하며,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향했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어차피 도착하면 알게 될 일, 좀 더 느긋하게 기다려 보는 게 어떠한가, 예쁜 소년?”
“언제까지 날 소년이라고 부를 셈이야?”
“음? 소년을 소년이라고 부르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이 여자, 설마 내가 남장하고 있던 것도 모르면서 이 드레스를 입힌 건 아니겠지?
여인의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길 잠시, 나는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거만한 여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는 묘하게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도 딱히 밉거나 짜증나지는 않으니, 여러모로 신기한 여인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반쯤은 포기한 심정으로, 나는 마차가 멈추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정작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나는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높은 탑, 현관 위로 이어져 있는 수많은 계단, 사방 곳곳에 보이는 근엄한 근위병,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화려한 기사, 무엇보다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건물은 아무리 봐도 좀 큰 저택 따위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래서야, 마치….
“왜 그러나. 왕궁 처음 보는가?”
“…하아.”
따지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는 기분에, 나는 한숨과 함께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목적지가 무도회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행 따위는 거절했겠지만, 이미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마음대로 나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 여인은 품에서 붉은 나비 가면을 꺼내 자신의 눈가를 가렸다.
“…오늘 가장무도회라도 있어?”
“본인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귀찮기 때문이라네.”
하긴, 카산드라가의 직계혈족이라면, 어지간한 제국의 황족 못지않은 귀빈이다.
벌 떼처럼 몰려드는 인간 군상들을 상대하느니, 그냥 얼굴을 가리는 게 훨씬 현명하기는 했다. 하지만 가면으로는 얼굴만 숨길 수 있을 뿐, 이목 자체는 피할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무도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의혹과 조소가 섞인 시선을 받아야 했다.
범인과는 차원이 다른 신경을 자랑하듯, 여인은 나비 가면 밑으로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이들의 시선을 태연히 받아 냈다. 하지만 정상적인 신경을 지니고 있던 만큼 나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차라리 나도 가면을 쓰고 올걸….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나, 나비 가면을 쓰고 온 여인의 기행 때문인지, 따로 접근해 오는 이들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여인 또한 특별히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는 듯, 그저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만 할 뿐이었기에 나는 가까스로 얼음 가면 속에 들끓는 노기와 수치심을 숨길 수 있었다.
“흐음?”
그녀를 따라다닌 지 얼마나 지났을까? 여인이 걸음을 멈추고 기묘한 탄성을 토해 내자,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해하던 중 나는 주변의 이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쳇, 콧대 한번 높기는….”
“높을 만도 하지. 저 정도 미녀는 내 생전 처음이야.”
“그래도 누구와도 춤 한 곡 추지 않고 모두 거절하다니, 너무 무례하지 않은가?”
“쉿. 아까 그녀가 에반 경과 함께 들어온 걸 보지 않았나? 말로만 듣던 에반 경의 약혼녀인 모양인데, 그런 그녀를 험담하다가 에반 경에게 결투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끄응.”
두 사내의 이야기에 나는 흥미를 느꼈다. 에반이라면 분명 성검자의 손자인 에반 E. 트레이브를 말하는 것일 터, 그의 약혼녀라면 관심을 둘 만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정작 그 약혼녀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
이미 해가 저문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을 리본으로 장식하고, 첫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호수처럼 푸른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미녀.
그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낯익은 여인의 모습이 나를 경악하게 하고 있었다.
“세레나?”
그와 함께 왕진을 나갔던 세레나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해 넋을 잃고 있다가, 내가 그녀를 향해 다가가려고 할 무렵, 한 줄기 쩌렁쩌렁한 외침이 내 귀에 들려왔다.
“공왕 전하께서 드십니다!”
하필 이럴 때…!
그 쩌렁쩌렁한 소리와 함께 무도회장 안쪽에 쳐져 있던 휘장이 열리며, 걸어 나온 중늙은이를 향해 세레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는 걸 보며 내가 망설일 때, 여인이 그런 나를 뒤로 화악 잡아끌었다. 바로… 공왕 따위에게 허리를 숙이지 않더라도, 눈에 띄지 않고 넘어갈 절묘한 장소로.
“오늘은 연말을 맞이하기 위한 무도회이니, 모두 마음껏 즐기고 가도록 하라.”
워낙 교묘한 위치로 물러난 덕분일까? 공왕은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고, 그의 말에 다른 이들이 숙였던 허리를 펴자 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을 담아,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당신, 세레나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글쎄… 짐작했다면 짐작한 일이고, 몰랐다면 몰랐다고 할 수 있겠군.”
애매하게 말을 돌리는 여인을 보며, 나는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몰랐다면 이런 우연을 믿을 수가 없었고, 알았다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여인은 내 혼란을 해결해 주지 않았다. 다만 입술 앞에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가볍게 한쪽 눈을 깜빡여 보인 뒤, 공왕…. 아니, 정확히는 공왕의 앞에서 뭔가를 떠들고 있는 뚱뚱한 대머리를 뚫어져라 볼 뿐이었다.
“흐음. 저 물건인가?”
“……?”
의미를 알 수 없는 여인의 말에 의아해하며, 나는 일단 세레나부터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간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얼어붙은 채 우리를 보는 세레나의 모습이,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왜 저런 거지?
뭐에 그렇게 놀란 거야?
그 뜻밖에 모습에 당황하길 잠시, 나는 얼어 있는 게 세레나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무도회장에 있던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특히 공왕 주변에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두 눈을 부릅뜨고, 뚱뚱한 대머리와 그 뒤의 시종이 들고 있는 상자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묘한 모습에 당황하며, 뒤늦게야 뚱땡이의 외침에 귀를 기울인 나는 순간, 내 청각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기대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과거 한때나마 이 세상을 지배했던 사악한 집단의 마지막 유산!”
…뭐, 라고?
긴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세계를 지배하려 한 조직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 시도는 거의 반드시 실패했다.
내가 이끌던 ‘로드 오브 킹덤’조차 세계의 반을 손에 넣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제국조차도 겨우 28국토를 다스릴 뿐, 대륙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을 만큼 세계 정복이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1000년의 역사를 통틀어 단 하나, 세계 정복을 이뤄 냈던 예외가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검자나 마술사에 버금가는 초인이던 13사도를 거느리고 압도적인 힘과 지략으로 대륙을 휩쓴 조직.
진리의 탑을 침범하고, 열두 개의 신전을 봉하고, 지상의 모든 땅을 점령하여 마침내 세계 정복을 이뤄 냈던 조직.
그러나 너무 오만해 신을 모욕했기에 신의 저주를 받아, 폐허조차 남기지 못하고 멸망했다는 전설의 조직, ‘암흑성’.
그러나 ‘암흑성’이 남긴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폐허도, 생존자도 남지 않았지만, 단 하나의 유산만큼은 신의 저주를 받고도 사라지지 않고 아직 이 대륙에 남아 있었다.
끼이익.
시종이 들고 있던 상자의 뚜껑이 열린 순간, 나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금은보화도, 아름답게 세공된 장식품도 아니었다.
다만 온통 칠흑색으로 이뤄진 겉표지에 검붉은 문자가 새겨진 한 권의 책이었을 뿐.
하지만 장내에 있던 이들은 그 누구도 그것을 보고 실망하거나 비웃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죽음과도 같은 정적 속에 탐욕과 갈망이 어린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과거 이 세계를 지배했던 암흑성 최후의 유산이자….
“《악의 서》입니다.”
대륙 36대 기보.
그중에서도 서열 1위의 보물을…, 나는 숨을 쉬는 것마저 잊은 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