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04)
103영웅의 연회
원래대로라면 그분에게 사정을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도, 내가 그분 몰래 행동한 것은 차마 에반 경과 나의 관계를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약혼은 단지 언약에 의한 것이지만, 약혼자가 있음을 그분에게 밝히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분은 식사마저 거르시며, 헤일 가주님의 침실에서 두문불출하셨고, 덕분에 나는 그분의 눈에 띄지 않고, 무도회에 참가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가문의 어중간한 무도회도 아닌 왕실 무도회에 참가할 준비가 쉬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마침 트레이브 가문에 내 체격에 꼭 맞는 드레스가 있었던 데다가, 제일러 집사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덕분에 겨우 늦지 않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후우….”
그리하여 다음 날 저녁.
하녀들의 도움으로 드레스를 차려입고, 나는 거울 앞에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목선을 강조하는 가느다란 진주 목걸이와 어깨가 환히 드러나 있는 새하얀 드레스는 분명 나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고급스럽고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지만 한평생 검사로서 살아온 내게 드레스는 갑옷보다 불편한 구속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기사복을 입고 싶었다. 하지만 은밀히 무도회에 참여해야 하는 이상, 그럴 수는 없었던 만큼,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 준비가 끝나셨….”
내가 드레스를 끌고 방을 나서자, 왕실 기사답게 가벼운 갑옷과 정장을 차려입고, 홀에서 기다리던 에반 경은 인사를 하던 도중 말꼬리를 흐렸다. 뭔가 놀라운 것을 보기라도 한 듯 입을 살짝 벌린 채 서 있는 에반 경의 모습에 나는 한 줄기 의아함을 느꼈다.
“에반 경?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내 말을 듣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에반경은 살짝 얼굴을 붉히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내게 한 손을 내밀어 보였다.
“제게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내 손등에 그가 키스를 하는 순간, 마음이 껄끄러워지는 것을 애써 참아야만 했다.
여기서 에반 경의 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기사에게 더없는 모욕이었고, 나 또한 지체 높은 귀부인들을 만날 때는, 종종 갖춰야 했던 예절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예절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었던 데다가, 혹시 그분이 이 모습을 보고 계신 건 아닌지 무심코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껄끄러운 기분을 숨기기 위해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에반 경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이랴―!”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길을 따라 달려가는 가운데,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현재 왕실의 귀빈들이 머물고 있는 외궁은 왕실기사단이 나서 엄중히 경계하는 상황.
제아무리 대단한 조직이 있더라도, 외궁에서 무언가를 탈취하는 건 불가능하다. 문제는 무도회가 시작된 뒤 귀빈들이 내궁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내궁에 들일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고, 특히 무도회장은 소수의 기사들만 경비로 배치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왕궁에서 할 일은 두 가지. 무도회장에 수상한 이가 없는지 감시하는 것과 무슨 일이 발생하면, 귀빈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15년 전, 기억나십니까?”
나는 그 갑작스러운 말에 살짝 눈을 떴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에반 경에게 조용히 반문을 던졌다.
“어떤 일 말씀입니까?”
“저와 어떻게 만나셨는지 말입니다.”
“그건….”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고, 나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무려 15년이나 지난 과거고, 고작 10여 살 때의 일이었다. 트레이브 저택에 대한 것도 잊고 있던 만큼, 에반 경을 만났을 때의 추억 같은 게 제대로 기억 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내 태도를 보고도, 에반 경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 갈 뿐이었다.
“제가 원래 몸이 약했다는 건 기억하십니까?”
“예.”
건장한 기사가 된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어린 시절의 에반 경이 나보다 작고 왜소했던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기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나 양께서는 그런 제게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검을 운동하면 키도 크고 튼튼해질 거라고 하셨지요.”
“…어렸으니까요.”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라바일가의 후계자로서 이미 검사로서 단련받고 있던 만큼, 내게는 ‘나약함=수련 부족’이라는 엉뚱한 공식이 성립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아직 어린아이였던 에반 경에게 조부님께 들은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지만, 새삼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민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과거를 공유할 대상이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조금 애틋하게 만들고 있었다.
“세레나 양에게 그 말씀을 들은 이후 저는 처음으로 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마침내 왕실기사단장의 직위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 말에 나는 순간 당혹감을 느꼈다. 원래 트레이브 가문은 검가가 아니었고, 그런 면에서 에반 경이 검을 수련하여, 왕실기사단장이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그것을 단지 성검자라 불리신 헤일 가주님의 영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게 내 말 때문이었을 줄이야….
“비록 순수한 실력만으로 기사단장의 직위를 손에 넣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지위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수련은 쌓았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일 가주님과의 인연이나 체면을 봐서라도, 에반 왕실은 에반 경을 우대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20대의 젊은 나이에 왕실기사단장이라는 위치까지 오르는 것이 가능했으리라. 하지만 그런 배경이 있다고 해서 에반 경의 실력을 폄하할 수는 없었다. 비록 검을 겨뤄 보지는 않았지만, 에반 경의 단련된 신체나 몸동작만 봐도, 그가 일류의 경지임을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태까지 그저 추억을 되새기듯, 잔잔하던 에반 경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나를 똑바로 주시하는 그 갈색 눈동자와 뭔가 굳은 결의가 엿보이는 단아한 얼굴에서 무언가를 느낀 나는 숨을 죽였다.
“세레나 양. 저와 정식으로 약혼을 맺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
그것은 당혹감일까? 아니면 곤혹감일까? 아주 조금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그 당당한 고백에 나는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에는 이미 정해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당신과의 약혼은 추억일 뿐이라는 것을 이 곧은 눈앞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으니까.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다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내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소가주님. 왕궁에 도착했습니다.”
꾸준하게 움직이고 있던 마차가 멈추며, 마부석으로부터 들려온 소리에 힐끔 창밖을 내다본 에반 경은 이내 평소와 같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대답은 다음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 순간 내가 느낀 안도감은,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트레이브 저택이 왕궁과 가까워서 망정이지, 그 침묵이 조금만 길어졌으면 어떻게 됐을지….
그야말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듯한 심정으로, 마차에서 내린 나는 에반 경의 에스코트를 받아 궁전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왕실 무도회에 참석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호스트 역할을 하는 시종의 인사를 받으며, 에반 경과 함께 무도회장에 들어선 순간, 갑작스럽게 주변에서 모여든 시선에 나는 거북함을 느꼈다. 천검자로서, 그리고 라바일가의 가주로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덕분에 이런 공식적인 자리는 여러 번 겪어 봤고, 황실 무도회에도 참가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귀빈들의 기묘한 시선은, 과거에 받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나를 거북하게 하고 있었다.
루반 공국에 나를 아는 이들은 드무니, 벌써 신분이 드러난 것은 아닐 텐데, 왕실기사단장인 에반 경과 함께 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드레스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어색하기 때문일까?
“그럼 저는 경비 상태를 점검하러 가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으로서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에반 경이 자리를 잠시 비우자, 나는 솔직히 조금 안도했다.
이제 거북한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일 뿐이었다.
“저는 핼던트 H. 네드발이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레이디의 성함을….”
“한 곡 어떠십니까?”
…이런.
내 옆에서 에반 경이 사라지는 순간, 벌 떼처럼 몰려든 귀빈들의 인사와 댄스 요청에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나는 그들의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춤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온 것은 처음인 데다가. 무도회장에서 할 일이 있었던 만큼, 춤이나 추고 있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귀빈들이 불쾌하지 않도록 정중하게 대화와 무도 요청을 거절하면서, 틈틈이 수상한 이는 없는지 주변을 살피던 중 나는 설마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한 인물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
무도회의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과 자수정과 같이 맑게 빛나는 자색안. 그리고 유독 치렁치렁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냉랭한 얼굴의 소녀를 보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순간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저토록 아름다운 은발 자안 소녀가 세상에 둘이나 있을 거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나를 보고 당황하는 소녀의 얼굴이, 그것이 내 착각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공왕 전하께서 드십니다!”
이런….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 쩌렁쩌렁한 시종의 목소리의 울림과 함께 무도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신 공왕 전하를 보고, 나는 일단 다른 이들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리스가 대체 어떻게 여기에…?
본래 집에 있어야 할 소녀가 난데없이 왕실 무도회에서 나타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연말을 맞이하기 위한 무도회이니, 모두 마음껏 즐기고 가도록 하라.”
소탈한 성품으로 잘 알려진 공왕 전하답게 짧은 말이 끝나자마자 허리를 펴고, 나는 아리스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무도회장의 구석에서 찾아낸 소녀에게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리스와 함께 있던 상대를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드레스 위로 드러나는 풍만한 몸매, 불꽃처럼 선명한 진홍색의 웨이브 머리, 무엇보다 나비 가면 뒤에서 요요하게 빛나는. 낯익은 루비빛 눈동자가, 나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검사로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은 나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가르침을 지킬 수 없었다.
아니, 아예 기억해 낼 수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고, 다음에는 내 머리를 의심했으며, 최후에는 이 현실을 의심했다.
하나 스쳐 지나가듯 시선이 교차한 일순간,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우며, 가볍게 윙크를 해 보이는 여인을 보고, 나는 그 모든 의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것이 꿈이나 환각이 아님을 깨달은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며 몸이 뻣뻣해진다.
뭔가 떠드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주변 사람들이 놀란 듯이 한쪽을 향해 시선을 모으는 것도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비워진 내 머릿속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내 눈에 보이는 광경은, 그만큼 놀랍고도, 두려운 것이었으니까.
다른 상황이었다면 모른다. 다른 대상이었다면 모른다.
하지만 다름 아닌 아리스가 저 여인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나의 평정심을 산산이 깨뜨리고, 처참히 짓밟아 공포로 불태우고 있었다.
만약 아리스를 데려온 것이 바로 그녀라면, 그리고 그녀가 아리스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파멸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