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05)
104악당의 연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세세히 훑어보는 마치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흔들림도 없는 부동자세를 지켰다.
“흠. 자네가 트레이브 가문에서 온 시종인가?”
“그렇습니다.”
낮고 선명하되 정중한 목소리를 꾸며 내며, 비굴하진 않지만 무례하지도 않을 정도로, 딱 적절하게 허리를 숙이는 내 행동에 늙은 시종장은 살짝 감탄한 듯 탄성을 흘렸다.
“호오. 제국 정통 예절을 배웠나?”
“예. 젊었을 때 제국의 가문에서 일해 본 적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시종과 시녀라는 신분으로 제국의 황실을 암중으로 조정하던 악의 조직, ‘블랙 서번트’에서 그 비전을 배운 것뿐이지만, 조금 억지를 쓰자면 ‘황동의 왕좌’야말로 정통 예절 중 정통 예절이라고 할 수 있으니 분명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8개 국어를 할 줄 안다고 들었네만. 사실인가?”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는 배워 뒀습니다.”
뭐. 사실은 35개 국어까지 가능하지만, 지나친 능력은 독이 될 수도 있는 법. 나는 어디까지나 그리 뛰어나지는 않은, 그러나 나름 쓸 만한 시종을 가장하며, 슬쩍 시종장의 눈치를 살폈다.
“마침 잘됐군. 그럼 자네는 이제부터 백목궁으로 가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안내하게.”
“알겠습니다.”
정확한 목적을 이룬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백목궁은 주로 외국의 귀빈이 머무는 숙소, 외국어에 능통한 시종이 새로 들어왔다면, 그곳에 최우선적으로 투입하는 게 당연했다. 심지어 제국 정통 예절까지 습득하고 있다면, 아예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사실 진짜 문제는 이 이후부터지만.
끄응, 내 그 늙은이 때문에 정말….
내가 시종 노릇을 하며 이곳에 잠입한 이유는 그 늙은이가 ‘그것’을 숨겨 둔 장소가 다름 아니라 왕궁 한가운데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기가 보관하기 귀찮아도 그렇지. 그걸 왕궁에 떡하니 숨겨 놓다니…, 그 정신 나간 늙은이나 할 수 있는 짓이었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은 어떤 난관 앞에서도 온갖 편법과 비책을 짜낼 수 있어야 하는 법!
마침 연말에 왕실 무도회가 있다는 것과 그런 행사에는 부족한 시녀와 시종을 유서 깊은 명가에서 지원받는 전통이 있기에 나는 늙은이와 협상 끝에, 트레이브 가문의 시종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왕실에 들어온 것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 시종의 신분. 이대로 내궁까지 접근하는 건 절대 무리다.
하지만 무도회가 열리는 지금이라면, 무도회장까지 접근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리고 내 목표는 바로 그 근처에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건데….
만약을 대비해 변장을 하고, 암살에 사용되는 밀실 트릭까지 이용해 늙은이의 침실에 있는 척 알리바이까지 조작해 두기는 했지만, 이 방법으로 시간을 오래 끄는 것은 무리였다. 특히 녀석이 저택에 남아 있는 이상, 몰래 나와 있는 것은 하루가 한계일 터. 그런 여러 가지 제약이 있는 만큼, 나로서는 무도회의 첫날인 오늘, 모든 것을 끝내고 저택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내 계획은 한 가지 변수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 났다.
“에잇! 무도회장에 하인은커녕 호위도 마음대로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아무리 로스트 가주님이라도 혼자 들어가셔야 합니다.”
이런 젠장!
대머리를 붉힌 채 펄펄 날뛰는 뚱땡이와 그런 뚱땡이를 앞두고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세로 버티고 서 있는 왕실 기사를 보며, 나는 내심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블랙 서번트’의 시종으로서의 예절과 더불어, ‘데스 쉐도우’의 잠입술을 습득한 나였기에 일단 왕궁에 들어온 이상, 무도회장까지 잠입하는 것은 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무도회장을 중심으로 경계가 강화된 덕분에 나는 아직도 백목궁에 발이 묶인 채, 이런 뚱땡이의 시중이나 들어 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좀 넉넉하다면 모를까.
벌써 해가 저문 지금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나로서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강행 돌파를 할 수도 없으니….
끄응. 하여튼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어요.
“흥, 호위까지는 양보한다고 침세.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가의 가주인 나보고 이런 짐까지 직접 들고 들어가란 말인가?”
하인이 들고 있는 화려한 상자를 가리키며, 뚱땡이가 따지듯이 건넨 말에도 왕실 기사는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은 이미 여러 번 겪어 봤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
“그 문제라면 시종을 한 명 붙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어떠십니까?”
“좋네. 자네 조부님 체면을 봐서라도 내 이 정도로 양보함세.”
뚱땡이가 일단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왕실 기사는 힐끔 주변을 둘러보다가, 내게 시선을 향했다.
“거기 시종. 자네가 로스트 가주님을 무도회장 안까지 시중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순간 번쩍 정신을 차리고, 거의 자동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이며, 나는 내심 음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흐흐. 이게 웬 횡재냐?
아마 왕실 기사는 임시 시종인 걸 모르고, 눈에 띄는 날 붙여 준 것 같은데, 덕분에 지금까지 주변을 기웃거리기만 할 뿐, 무도회장 안으로는 한 걸음도 들이지 못하고 있던 나로서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하여 하인이 들고 있던 상자를 받아 들고, 뚱땡이를 따라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서며 나는 내심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이건 공왕에게 올리는 예물일 터, 예물을 올리고 나면 내가 사라져도 모를 테니, 그 틈에 내궁에 잠입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다.
“네가 들고 있는 물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지? 그건 우리 가문이 사활을 걸고 구한 보물이다. 만약 그 물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 결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명심해라.”
“예.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보물은 뭔 놈의 보물. 기껏해야 조그마한 황금 뚱땡이상이겠지.
쓸데없이 떠들어 대는 뚱땡이의 잔소리도, 나는 기분 좋게 받아넘겼다. 어쨌거나 내가 무도회장에 들어온 건, 이 뚱땡이가 펄펄 날뛰어 준 덕분이니까.
뭐, 그렇다고 이딴 건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커다란 크기에 비하면 내용물이 부실한지 비교적 가벼운 상자를 든 채, 나는 뚱땡이의 뒤를 이리저리 따라다녔다.
생긴 건 그냥 돼지 사촌인 주제에 어느 정도 부와 권력이 있는지,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얘기를 나누는 뚱땡이를 따라다니는 건 바쁘면서도 지루한 일이었지만, 나는 하품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대신 눈에 띄지 않게 힐끔힐끔 주변을 훑어보았다.
흐음, 저쪽 복도인가? 눈알이 돌아가도록 주변을 살펴본 끝에 겨우겨우 성검자에게 들은 복도를 찾아내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부피가 부피인 만큼 그걸 몰래 가지고 빠져나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긴 하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대책이 있는바, 남은 것은 이 공물을 공왕에게 던져 버리고, 자유의 몸이 되는 것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 내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어라?
어쩐지 익숙한 광채를 보고, 나는 무심코 눈을 깜빡였다.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유독 밝게 반짝거리는 하나의 은빛 뒤통수가, 이상하게 낯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이, 설마.
나는 고개를 획획 내저어 의심을 떨쳤다. 집에 처박아 두고 온 계집애가 저렇게 화려한 드레스마저 입고 여기 오다니… 그 가능성은 그야말로 0.00…01% 이하.
가히 악마학적 수치였다.
뭐, 사람이 이 정도 많이 있으면 비슷한 뒤통수 한둘쯤이야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만약 저기 있는 은발의 주인이 그 계집애라면, 저 금발의 주인은 녀석이라도 되려고?
아하하하하하.
내가 그렇게 휙휙 고개를 내저어 편집증적인 망상을 떨쳐 냈을 무렵, 무도회장 안쪽에서 요란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공왕 전하께서 드십니다!”
그 외침을 들은 순간, 나는 뚱땡이를 따라 급히 허리를 숙였다.
쓸데없는 망상에 집착하느라 일을 망칠 수야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오늘은 연말을 맞이하기 위한 무도회이니, 모두 마음껏 즐기고 가도록 하라.”
그래, 그래, 많이 즐기라고들, 나는 그사이에 필요한 것만 챙겨 갈 테니까.
그렇게 내가 내심 고개를 끄덕일 무렵, 그 육중한 무게는 사실 위장이고, 사실은 일류 암살자가 아닐까 싶은 몸놀림으로 공왕에게 다가간 뚱땡이는, 거의 엎드릴 듯 넙죽 허리를 숙여 보였다.
“신 피렛 K. 로스트. 전하께서 주최하신 연회에 참가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나이다.”
“허허, 로스트 공은 언제나 과인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군.”
흐음. 이 뚱땡이, 생각보다 아부를 잘하는군.
하기야 권력자면 권력자일수록 강자에게 잘 비비고 약자를 잘 굴려야 하는 법. 왕실을 전복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야, 핵심 권력층에게 이 정도 아부는 필수다.
그렇게 아부로 공왕의 기분을 띄운 뒤 뚱땡이가 내가 들고 있던 상자를 가리키자 공왕을 비롯해 주변의 시선이 몰려들었고, 나는 상자가 돋보이도록 앞으로 내밀었다.
어차피 일개 시종을 신경 쓸 작자야 없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시선을 상자 쪽에 모아야, 내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신이 이번에 굉장히 대단한 보물을 손에 넣었기에, 이번 기회를 빌려 그것을 공왕 전하께 바치고자 합니다.”
호― 이거 그냥 황금 뚱땡이상은 아니었나 본데? 루반 공국이 비록 자그마한 소국이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공왕을 앞에 두고 당당하게 보물을 논하는 뚱땡이의 말에 나는 작은 흥미를 느낀다.
어차피 내가 챙길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래도 대체 뭘 가지고 이렇게 자신 있어 하는지, 궁금하기는 했으니까.
“이것은 본래 모험가에게 구입한 물건으로, 세계를 혼란에 빠트렸던 어느 사악한 조직의 폐허 깊은 곳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던 것입니다.”
“호오. 대체 어떤 보물인지 궁금하군.”
세계를 혼란에 빠트렸던 조직이라…. ‘프리 나이츠’에는 보물이랄 게 없었으니, 거긴 아닐 테고, 설마 ‘로드 오브 킹덤’의 유물이라도 찾았나?
근래에 망한 조직을 되새기며, 나는 뚱땡이의 손짓에 따라, 천천히 상자의 자물쇠에 손을 가져갔다.
“학식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기보 중에서도 정점에 위치한 보물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두근.
순간, 나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녹슬어 있던 심장이 요동치며, 낡은 혈관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가운데, 눈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뚱땡이를 향한다.
…네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주변에서 모여드는 경악스러운 시선이 침이라도 흘릴 듯 입을 쩍 벌리거나, 눈알이 튀어나올 듯 눈을 부릅뜬 채,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알려 주는 듯했다.
뚱땡이는 내가 들고 있는 상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기대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과거 한때나마 이 세상을 지배했던 사악한 집단의 마지막 유산!”
“…….”
나는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뚱땡이의 손을 따라 모여든 수많은 시선의 세례 때문이 아니라, 당장 이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해 보지 않으면, 심장이 으스러지다 못해 터질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상자 안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칠흑색 표지에 검붉은 문자가 새겨져 있는 그 한 권의 책을 확인한 순간, 나의 심장은 그대로 침묵에 빠졌다.
“《악의 서》입니다.”
쨍그랑―!
누군가의 떨어트린 와인 잔이 깨지는 소리가, 누군가가 힘을 잃고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비명 같은 신음이 경악에 삼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나는 묵묵히 상자 안의 책을 바라보았다.
아주 멀고도 가까운 과거, 13사도라는 절세의 무력을 앞세워 최초이자 최후로 전 대륙을 지배한 조직.
신화시대 이후 유일하게 ‘세계 정복’을 이뤄 낸 고금 최강, 최고, 최악의 악의 조직, ‘암흑성’.
그 최후의 유산인 《악의 서》가 이 손안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호오. 그것이 《악의 서》라는 말인가?”
바로 그 순간, 정적뿐이던 공간에 흘러든 한 줄기 음성을 따라,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시선이 움직였다. 그 음성이 정적을 깨트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만하고도 도도하기 그지없는 음성에는 왠지 모르게 사람들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그리고 기묘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덜컥―!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니, 실제로 눈곱만큼 심장이 떨어진 듯싶었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진홍색 머리카락과 나비 가면 뒤에 숨겨진 루비빛 눈동자.
한 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 강렬한 이미지가 나의 심장을 덜덜 떨게 했다.
아냐, 아냐. 설마, 설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루반 공왕. 괜찮다면 그것, 본인이 대신 받아 가고 싶네만.”
내심으로 처절하게 이 현실을 부정하던 나는 루반 공왕을 향해 반말을 하는 그녀의 행동에 그대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 무, 무, 무엄한! 네년은 누구기에 감히 공왕 전하께 그런 무례를 범하는 것이냐!”
“흠?”
너무나 뜻밖의 상황에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시뻘건 얼굴로 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뚱땡이를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에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걸 잊고 있었군.”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여인이 붉은 나비 가면을 벗은 순간, 장내에 기묘한 정적이 내리깔렸다.
《악의 서》가 등장했을 때와도 같은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무거운 공기 속에서 그녀는 뚱땡이에게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흠,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년이 믿는 것이 고작 그 미모뿐이라면 공왕 전하의 충실한 신하인 피렛 K. 로스트, 가문의 명예를 걸고 널 가만히 두지 않겠다!”
…저 병신. 그 요염한 미소에 넋을 잃기라도 했는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느라 바빠 주변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뚱땡이에게 나는 눈을 감고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리고 제발 재앙의 불꽃이 내게까지 튀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원했다.
“흐음. 본인의 미모가 대단하긴 하지만, 본인이 믿는 게 미모만은 아니지.”
“무, 무어라…?”
나지막한 말과 함께 공왕을 돌아보는 그녀. 그 모습을 보고 뭐라 말을 토해 내려다, 뚱땡이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더없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있는 공왕의 모습을, 그제야 눈치챈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공왕?”
경악과 불신감. 의문과 당혹감이 뒤섞여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보던 끝에 공왕은 무도회장의 단에서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 공왕이 그녀의 앞에 우뚝 멈춘 순간, 장내에서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악의 서》가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연주를 계속하고 있던 궁중 악사들이 손을 멈추고, 뚱땡이의 얼굴이 멍하니 변하고, 나이 든 이들이 시력을 의심하듯 눈을 비비고, 몇몇 여인은 턱이 빠진 듯이 입을 벌리고, 누군가는 와인이 손을 적시는 것조차 모른 채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 수많은 경악의 시선 속에서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나와 같은 극소수의 인물들과…,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공왕 당사자뿐이었다.
그리고 채 처음의 충격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두 번째 충격이 무도회장을 덮쳐들었다.
“서쪽 산맥을 다스리는 제국의 충실한 신하 아로트 H. 루반, 스물여덟 대지와 일곱 바다의 지배자이시자 하늘 아래 유일한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와장창―!
시종들이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트리고, 늙은이들이 심장이 멈춘 듯 가슴을 움켜쥐고, 여인들이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고, 중년인들이 마시던 와인마저 뿜어내는 등 온갖 소란 무도회장을 휩쓴 뒤 찾아온 것은 죽음과 같은 정적이었다.
털썩.
모든 것이 멈춰 버린 듯만 싶던 기이한 공간은 나를 비롯한 몇몇 눈치 빠른 인물이 무릎을 꿇으며 순간 산산이 깨어졌고, 그제야 잃어버렸던 넋을 되찾은 이들은 허겁지겁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화,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지금까지의 정적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쩌렁쩌렁한 고함이 무도회장을 울리는 가운데, 홀로 입을 쩌억 벌린 채 굳은 뚱땡이를 보며, 28국토의 주인이자, 이 대륙의 절대 군주는 한 줄기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권위 정도면 공왕에게 말을 놓는다고 해서 그다지 문제가 없을 거라고 보는데, 그렇지 않은가?”
천하의 누구라도 감히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막강한 권위가 담긴 질문에도 뚱땡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에 거품을 물며, 눈을 까뒤집고 넘어진 인간이 대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흠,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지.”
혼절한 뚱땡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그녀, ‘황제’는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공왕에게 요염하고도 권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보다 공왕. 짐은 저 물건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군.”
흠칫.
그제야 황제의 목적이 떠오른 듯, 공왕은 살짝 몸을 떨며, 힐끔 내 손에 들린 《악의 서》를 보았다.
의혹, 탐욕, 욕망, 갈등, 아쉬움.
온갖 감정이 그 눈을 스쳐 지나간 끝에 공왕은 결국 땅에 닿을 듯 깊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신의 것은 곧 폐하의 것이오니, 폐하의 뜻대로 하소서.”
당연한 결정이었다.
황제는 28국토의 주인이자, 이 대륙의 태반을 다스리는 절대 군주.
제국에서 황제를 거스를 수 있는 자는 없으며, 그것은 설사 공왕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왕이 그것을 알면서도 망설였던 것은, 《악의 서》의 유혹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고작 한 권의 책과, 루반 공국의 멸망을 바꿀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흐음. 그대의 충의가 참으로 갸륵하니,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무엇 하나, 내년 제국에 바쳐야 할 공물은 제해 주도록 하겠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파격.
공국에서 바치는 공물의 양은 막대하거늘, 말 한마디로 그것을 없는 걸로 해 버리는 황제의 말은 더없이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내에 있는 이들 중, 그 말을 믿지 않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이 제국의 황제였으니까.
“그럼 불청객은 이만 물러갈 터이니, 모두 마음껏 즐기도록 하게.”
“부, 불청객이라,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초청받지 않고 왔으니 불청객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짐은 이제부터 독서를 즐기고 싶으니, 만에 하나라도 다른 누군가가 짐의 청정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거라 믿겠네.”
“명심하겠나이다.”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닿을 듯 숙이는 가운데,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나의 귀로, 한 줄기 절망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거기 시종, 짐을 수행하도록 하라.”
거기 시종? 거기 시종이 누군데?
설마 나야? 응? 나인 거냐고?!
통곡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개를 최대한 숙인 채 황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봤자, 쓸데없는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무도회장을 나선 후, 황제가 향한 장소는 궁전 높은 곳에 툭 하니 넓게 튀어나와 있는 넓은 발코니였다. 겨울 특유의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에서 대담하게도 난간 위에 턱 하니 걸터앉아 황제는 턱을 괴고, 달빛 아래 은은하게 드러난 왕궁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그냥 몰래 도망쳐야 할지 갈등하던 나의 귀에 한 줄기 낯익은 음성이 들여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라바일가의 가주이자 제국의 충실한 신하인 세레나 R. 라바일, 백팔 검가와 삼천육백 가문을 다스리며 하늘 아래 유일한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악당의 가호하는 아흔아홉 악마들이시여….
이젠 기도할 기력도 없다.
그냥 날 죽여라.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