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06)
105영웅의 대담
황제 폐하께서 무도회장에서 사라지신 뒤에도, 나는 쉽사리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공왕 전하를 비롯해, 모든 이들이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황궁의 구중심처에 계셔야 할 황제 폐하께서 고작 제국에 속한 27개의 국토 중에서도 가장 서쪽 변방에 있는 이 작은 루반 공국에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신 것은 그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으니까.
“아리스. 괜찮으신가요?”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자마자 나는 곧장 아리스를 찾아갔다. 폐하의 정체를 알고 큰 충격을 받은 듯, 평소보다 유독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폐하께서 걸어 나가신 문을 바라보던, 아리스는 천천히 내게 고개를 돌렸다.
“세레나. 아까 그 여자가… 진짜 황제야?”
“예. 사실이에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오는 아리스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하면서도 불안해하던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아리스. 설마 폐하와 함께 오신 건가요?”
“…맞아. 어젯밤, ‘추색의 지도’로 세레나를 찾아서 우리 집에 왔어.”
“저를 찾아서…?”
“응.”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내가 검자이고, 폐하의 의자매라도, 황제 폐하가 직접 나를 찾아오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이거, 세레나한테 전해 주라고 했어.”
아리스가 꺼내든 황실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기다리겠노라’.
오직 단 한 마디의 글만이 적혀 있는, 서신이라고 말하기도 힘들 그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 때라면 영광으로 여겼을 일이었지만, 지금은 부담감과 불길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간단하다고 해도 황명은 황명.
황제 폐하께서 오하고 명하신 이상, 내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아리스. 잠시 다녀올게요.”
“…응.”
서신의 내용을 짐작한 듯, 아리스는 굳이 자세한 것을 캐묻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배웅하는 은발 자안의 소녀를 뒤에 남겨 둔 채, 나는 무도회장을 벗어났다. 황제 폐하께서 어디에 계실지? 짐작 가는 곳이 있었던 만큼, 나는 궁전 안쪽의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 안쪽은 황제 폐하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그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과연 왕실 기사라고 해야 할까?
황제 폐하가 신분을 드러낸 게 좀 전임에도, 복도를 막고 경계를 서고 있는 두 기사에게, 나는 조용히 그분의 서신을 내밀어 보였다.
“폐하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왕실 기사들은 내 말을 듣고 흠칫했다. 그리고 서신에 찍힌 황실의 인장을 확인하고,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좌우로 물러났다.
그렇게 기사들 사이를 지나 도착한 발코니에서 나는 오직 한 명의 시종만을 대동한 채 난간에 걸터앉아 정원을 내려다보고 계신 그분을 찾을 수 있었다.
“……!”
그 순간, 나는 숨을 잊었다.
이 어두운 밤중인데도, 달빛을 받아 일렁이는 진홍색 머리와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 보는 듯 고고한 시선, 바람에 휘날리는 드레스에 가려진 농염한 몸과 매끄럽게 뻗어 나온 길고 새하얀 팔다리까지.
그 모습은 더없이 아름답고도 요염해 같은 여인인 나조차 한순간이나마 넋을 잃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째서… 폐하께서 저런 얼굴을?
검자라는 명성 때문인지, 아니면 의자매라는 관계 때문인지, 나는 비교적 황제 폐하를 자주 본 편이었고, 폐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로서도…, 아니 오히려 그런 나이기에 추억을 회상하듯 아련한 얼굴을 한 황제 폐하의 모습은 더욱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이 지나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엄청난 무례를 저지르고 있음을 깨닫고, 나는 황제 폐하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라바일가의 가주이자 제국의 충실한 신하인 세레나 R. 라바일, 백팔 검가와 삼천육백 가문을 다스리며 하늘 아래 유일한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나는 예법에 따라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이 숙여 폐하께 인사를 올렸다. 다행히 폐하는 내 늦은 인사를 질책 않으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폐하의 불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흐음. 우리 사이에 꼭 그런 말을 써야 하는가?”
“황실의 법도가 지엄한데, 어찌 신이 폐하께 그런 무례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의 말씀에 나는 곤혹감을 느꼈다. 비록 장난스러운 억지에 의자매를 맺었지만, 그렇다고 감히 일가의 가주에 지나지 않는 내가, 황제 폐하를 자매처럼 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라바일 경. 그대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네.”
“…….”
폐하의 동의에도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시선이, 그리고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나의 몸을 굳어지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심하게. 짐이야말로 바로 제국의 황제이며, 그리고 그 어떠한 법도로도 감히 짐을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을.”
입 안이 바짝 마르며, 땅에 대고 있던 손끝이 바르르 떨려 온다. 분명 그 음성은 낮고도 조용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은 세베크의 빙산보다도 무거운 권세였고, 용의 포효만큼이나 압도적인 권위였다.
나는 새삼 자각했다.
이 대륙을 다스리는 지배자, 모든 법도 위에 군림하는 군주,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권위의 주인.
겨우 10여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해 흐트러진 제국의 법도를 바로 세우고, 강인한 통치로 제국을 바로잡은 절대 군주. 그 장본인이, 바로 내 앞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잠시나마 잊고 있던 사실을 되새겼다. 모든 법 위에 존재하기에 그 어떤 법도 폐하에게는 의미가 없으며, 폐하 앞에서 법도를 내세우는 것은, 제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무엄한 짓이라는 사실을.
“흠, 알았다면 됐네. 그런 고지식한 면이 경의 매력이기도 하니, 이번의 무례는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겠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다행히 크게 기분이 상하신 것은 아니었다. 여유로운 음성과 함께 몸을 짓누르던 위압감이 사라지자, 나는 진심으로 폐하께 감사를 표했다. 이런 무례를 연거푸 용서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배려인지, 제국의 신하라면 모를 수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마침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네.”
흠칫.
나는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긴장했다. 폐하께서 옥체를 이끌고 나를 찾아오신 이유, 그것이 지금 말씀한 소식 때문이라는 추측이 나를 긴장하게 했다.
“황공하오나, 신이 불충하여 어떤 소식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짐작 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근 20년간 제국의 정보력이 약해졌다고 해도, 빙설관 레닌과 마족인 아리스에 대한 소문까지 놓칠 리는 없었으니까.
아리스에 대해 물으신다면 뭐라고 해야 할지? 대답할 말은 이미 생각해 두었다. 마족을 비호하는 것에 노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폐하의 진노를 산다고 하더라도, 결코 아리스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각오를 다지며, 나는 폐하의 말씀을 기다렸다.
하지만 정작 폐하의 말씀은 내 예상과 조금…, 아니 상당히 어긋나 있는 것이었다.
“그대가 트레이브 가문의 소가주와 약혼을 했다고 들었네. 그게 사실인가?”
“……!”
느리게 다가오던 ‘바위의 검’이 ‘전장의 불꽃’처럼 흔들리다가, ‘그림자 베기’처럼 급소를 베어 오면, 아마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어떻게 그 사실을…?
예상은커녕 상상조차 못 한 질문에, 나는 당황하며 황제 폐하를 올려다보았다. 두 가문에서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알 뿐, 대외적으로는 공개되지 않은 그 약혼을 설마 폐하께서 알고 계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흐음. 과연 그랬던가? 경이 먼 방계의 아이를 후계자로 삼아 검을 물려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나 싶었네만, 이제 보니 애초부터 트레이브가와의 약혼을 마음에 두고 있었군그래.”
그런 내 시선을 긍정으로 파악하신 듯, 폐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씀을 이어 가셨다. 하지만 나는 곤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방계의 사촌에게 가문을 물려준 것은, 애초부터 결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고, 약혼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식으로 약혼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그 약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경이 트레이브 가문과 같은 명가와 맺어졌으니, 진심으로 축하해야 할 경사로고.”
“폐하. 그것은….”
진심으로 유쾌한 듯, 즐겁게 말씀을 이어 가시는 폐하의 모습에, 나는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모르시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하지만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 폐하께서는 문뜩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한 줄기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래, 경의 약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이걸 주도록 하겠네.”
“……!”
순간 나는 말을 잊었다. 폐하께서 손가락으로 가리키신 물건, 그것은 옆에 있던 시종의 손에 들려있던, 《악의 서》가 담겨 있는 상자였기 때문이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신에게는 과분한 물건이옵니다.”
“사양할 필요 없네. 경은 짐의 의매가 아니던가? 그러니 적어도 이 정도 선물은 주어야 짐도 체면이 서는 법이네.”
“하오나…!”
점차 심각해져만 가는 상황. 나는 어떻게든 폐하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채 말을 끝맺기도 전 나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그대와 함께 살고 있는 마족 소녀 때문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경이 약혼식을 올리게 되면, 그 소녀를 짐의 이름으로 보호해 줄 터이니.”
“……!”
그림자처럼 휘둘러지던 칼날이, 바위처럼 무겁게 나의 심장을 가른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흘러나온, 결코 예상치 못했던 내용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붙은 내게 폐하는 나지막이 말씀을 이어 가셨다.
“짐의 보호라면 더 이상 그 소녀가 세상의 눈을 피해 쫓겨 다녀야 할 필요는 없을 터, 어딘가의 외딴 마을에서 조용히 살 수도 있을 테고, 원한다면 영지가 딸린 가문을 하나 내줄 수도 있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세상의 그 어떠한 부와 권세와 무력도, 감히 폐하가 비호하는 이를 해칠 수는 없다. 설사 열두 신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제국과 싸울 각오가 아닌 바에야, 감히 그런 짓을 벌일 수는 없고, 만에 하나라도 제국과 싸운다면, 그 결과는 멸망뿐이니까.
물론 대놓고 마족이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주변의 비난을 피할 수 없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폐하의 도움만 있다면, 그 사실을 평생 숨기고 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럼 아리스는 더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분 또한 아리스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시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매일매일 상처 입으며, 피로로 쌓인 걸음을 옮기며, 싸구려 건량이나 수프 따위로 배를 채우실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것이 정말 《악의 서》라면, 그리고 그 힘을 빌릴 수 있다면…, 그분의 병을 고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경의 약혼 선물로는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두근.
온갖 생각이 복잡하게 뒤엉키는 가운데, 무심코 시선을 들어 폐하를 마주 본 순간. 나는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요염하기 그지없는 미소, 권위로 가득한 시선, 그리고 그 루비빛 눈동자에 깃든 하나의 뜻이 나에게 심장이 멈출 듯한 충격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왜? 어째서?
내가 잘못 읽은 것이기를 바랐다.
내가 잘못 느낀 것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무엄한 것을 알면서도, 계속 황제 폐하의 눈을 마주한 결과 그 안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결코 거역을 용납 않는 절대적인 권위뿐이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경이 만족했다니, 짐 또한 무척이나 기쁘네.”
두근.
폐하의 요염한 미소를 통해, 어렴풋하던 추측에 확신을 얻고 고개를 숙인 나는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물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소리 높여 외치고 싶은 말을, 도저히 참아 낼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럼 이만 물러나 보도록 하라.”
그것은 마지막 기회. 여기서 물러나면 이후에는 어떤 말이나 행동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 누구보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신 세레나 R. 라바일.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 어.
그래선, 안, 돼.
결국 끝끝내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나는 폐하 앞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황제 폐하의 뜻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