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ure RAW novel - Chapter 9
09
은호는 익숙하게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을 열어 그가 놓아 둔 그의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편안한 박스 티셔츠를 좋아하는 그녀가 자고 일어나면 입기 쉽도록 그는 늘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안에 그의 티셔츠를 놓아두었다.
침실을 나와 주방으로 향하자 간단한 볶음밥과 주스가 놓여 있었다. 커피를 내린 그가 머그잔을 쥐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아침마다 샌드위치 먹는 거 힘들어했잖아. 속 부대껴도 조금만 먹어.”
“응. 오늘 주말인데 뭐 할까? 아, 와인 셀러 새로 산다고 했잖아. 오늘 그거 보러 갈까?”
생글거리며 볶음밥을 크게 떠서 먹었다. 오랜만에 그와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에 기쁨이 앞섰다.
그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피식 웃었다. 그도 분명 자다 일어나 머리칼이 부스스한데 왜 또 그게 나른해 보여 두근거리는지. 은호는 눈꼬리를 접었다.
“그렇게 좋아?”
“응. 우리 자주 가던 백화점 가자.”
“그래. 얼른 먹어. 너 그거 먹어야 가.”
“알았어.”
보란 듯이 한 숟갈 크게 떠 입 안으로 넣었다. 6년 전 그가 맛있게 만들어 주었던 야채볶음밥은 그대로였다.
고기보다 채소 종류를 좋아해 찾아 먹는 그녀에게 그는 가끔 야채볶음밥을 만들어 주곤 했다. 오이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아는 그가 귀신같이 오이는 넣지 않은 센스에 은호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주말을 맞은 백화점엔 사람이 많았다. 쇼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은호도, 도경도 백화점이나 숍에 자주 들르는 편은 아니었다.
가끔 주말이 되면 남들처럼 데이트 겸 백화점엘 오곤 했었는데 꼭 이곳에 들르면 5층에서 파는 냄비우동을 먹는 건 하나의 말없는 약속처럼 자리를 잡았다. 그 때문에 점심 메뉴는 따로 정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것도 다 좋았다.
“특별히 찾으시는 제품 있으신가요?”
전자 제품 코너에는 신혼부부들을 비롯한 커플들도 제법 있었다. 친절히 다가와 응대하는 직원의 추천으로 그의 회색 톤 집과 잘 어울리는 블랙 색상의 제품을 골랐다. 얼마 만에 누리는 일상 같은 일상인지.
습관처럼 5층으로 올라 그 시절 앉던 곳에 앉았다. 따뜻한 국물과 함께 나온 우동을 먹으며 유리창 너머로 일상생활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담았다.
“장인어른 생신 만찬이 다음 주라고 했던가.”
“…응.”
그의 입에서 나온 차 회장의 생일 만찬 이야기에 은호는 국물을 마시다 말고 멈칫했다. 일상생활의 행복에 취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턱을 괴고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아니면 파악을 하는 건지 그 특유의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을 훑으며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은호는 꿀꺽 국물을 마셔 넘기곤 수저를 놓았다.
“아버지가 오빠 많이 기다리신대.”
“그래?”
“으응.”
국물이 식어 가는 것도 잊고 은호는 맞잡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꼭 뭐라 추궁이라도 할 것처럼 날 선 눈동자를 하고도 별다른 것을 묻지 않던 그가 낀 팔짱을 풀고 어서 먹으라고 눈짓을 했다. 은호는 달아나 버린 입맛에 식어 버린 국물만 홀짝였다.
그의 손을 잡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은호는 멀리서 보이는 낯설지 않은 인영에 눈을 바짝 좁혔다.
발을 헛디뎌 기우뚱하는 것을 도경이 단단하게 잡아챘다. 은호는 그의 손을 꽉 붙들고 곁에 붙어 섰다.
비서인지 대동한 사람을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백화점을 살펴보고 있는 남자는 분명… 이정운이었다.
점점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로 다가왔다. 은호는 도경의 손을 잡아끌어 빠르게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왔다.
“왜 그래.”
“우리 장 보고 갈래? 냉장고 보니까 비었던데.”
은호는 그의 팔에 얼굴을 묻다시피 하며 도경을 끌고 왔다. 주위를 힐끔 살피다, 내려오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곤 다시 태연히 손을 맞잡았다.
스쳐 지나간 것인지 정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여전히 뚫어져라 그녀를 향해 있는 도경을 알지 못하고 은호는 그의 손을 꽉 쥐었다.
피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정운을 피하고 있는 걸까. 어차피 차 회장의 생일 만찬 때 그도 온다.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명목 아래였다.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도경이 그와 마주치는 게 겁이 나는 것일까. 어느새 손에 땀이 나는 것도 모르고 은호는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너,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은 무슨.”
따지고 보면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이정운과 공식적으로 파혼을 한 이후론 우연히 커피숍에서 한 번 만난 것이 다였고, 비즈니스 파트너로 아버지 생일을 챙기러 집에 온 것 외엔 딱히 뭐가 있을 것도 없었다.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은호는 움찔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는 건 명백하니까.
“아무 일도 없는 거 확실해?”
“응.”
꼭 찾은 증거를 손에 넣고서 어떻게 변호를 할까, 사건 파일을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 같았다. 은호는 애써 그런 그를 외면하고 다시 가던 길을 이끌었다.
“거짓말, 아닌 게 좋을 거야.”
무섭게 내리박히는 음성에 등골이 쭈뼛거렸다. 은호는 놓치지 않을 것처럼 그의 손을 꾹 잡을 뿐이었다.
***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월요일이 찾아왔고 늘 하던 대로 출근을 했으며 퇴근을 하고선 그와 집에서 영화를 보기도 했고, 은호가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사 먹기도 했다.
그리고 호텔에서 차 회장의 생일 만찬이 있던 날, 이른 아침부터 식사 약속에 늦지 말라고 윤 여사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옷은 어떻게 입고 와라, 메이크업은 저렇게, 백은, 슈즈는, 끝도 없는 잔소리에 은호는 해 봤자 결론도 나지 않고, 입만 아플 입씨름을 하기 싫어 그저 알았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어도 어차피 중요한 건 차 회장의 생일 축하일 텐데, 대체 뭐 하러 그렇게 신경을 써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 허울뿐인 ‘보여 주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은호는 초조하게 입술을 씹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서도경에게 전 약혼자와 마주치게 하는 일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누구에게도 이로울 게 없었다. 서로 상처를 받을 텐데.
분명 그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겠지. 아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전 약혼자와 마주칠 것이라는 걸. 그렇지만 서도경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윤 여사의 말에 따르면 곱게 차려입어 잘 보여야 할 귀빈들과 식사를 하러 간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 그녀와는 달리 서도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였다. 대체 이 남자가 긴장하는 것이 있기는 한가 의문이 들었다.
그와 로펌을 나와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슬쩍 물었다.
“오빠도 살인죄로 기소된 사람들 얼굴 보면 무섭고 그래?”
“그 사람들이 왜 무서워, 오늘의 용의자가 내일의 내 클라이언트가 될지도 모르는데.”
“대단한 직업 정신이다.”
비꼬려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알아들었는지 그가 그 냉소적인 낯으로 웃었다.
“그래서 피해자 가족들이 날 싫어하지. 살인자 편들어 준다고.”
“그건… 일이잖아. 오빠 일.”
“너무 그렇게 내 생각 해 주면 좀 위험한데.”
“…장난치지 마.”
위험한 눈으로 픽 웃는 그림 같은 얼굴에 끝내 은호가 조금 웃었다. 호텔 앞에서 차가 정차하자 벨 보이가 기다렸다는 듯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는 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안전벨트만 푼 채 그녀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놀라 등을 문손잡이 쪽으로 붙이자 그가 그윽하게 턱을 기울였다.
주차를 마친 차 안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여전히 벨 보이는 차 문 앞에 붙어 서 있었다. 그가 훅 가까이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움찔하며 눈을 꾹 감자 코앞까지 가까워진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를 향해 의아한 눈을 깜빡이자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그가 알지 못할 말을 했다.
“이게 이렇게 예쁠 일인지.”
“응?”
“내려.”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은호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막 일을 마치고 호텔로 오는 길인데, 윤 여사가 말한 옷차림에 백과 슈즈는 무리였다. 그렇지만 개의치 않았다.
연회장으로 안내하는 호텔리어를 따라 은호와 도경은 걸음을 옮겼다. 이미 자리한 많은 사람들이 은호를 알아보고 가까이로 다가왔다.
화려한 클러치 백을 쥐고 보석이 알알이 박힌 반지를 낀 여자가 손을 내밀며 알은체를 해 왔지만 누군지 알아볼 리가 만무했다. 차 회장의 일은 은호에게 있어 가장 재미없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니까.
“이쪽은 서도경 변호사죠?”
“서도경입니다.”
“어머, 법원장님께서는 안녕하시죠? 근데 은호 씨 애인이 서 변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새 윤 여사가 파티 참석자들에게 그를 일러 둔 모양이었다. 도경을 발견한 차 회장과 윤 여사가 손수 가까이 다가와 그를 반가이 맞았다.
양친께선 모두 평안하시냐는 틀에 박힌 물음에도 도경은 그저 생긋 웃었다. 참석한 사람들은 지루한 안부 인사들과 재미없는 대화들을 교양 강의라도 하는 것처럼 격식 있게 늘어놓았다.
은호는 그의 팔짱을 낀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는 사람이라곤 어릴 때 잠깐 얼굴을 본 게 다인, 이름도 모를 이들뿐이었다.
긴장으로 침을 바짝 삼켰다. 연회장을 훑어보던 은호는 테이블 끝에서 정면으로 마주한 얼굴을 보았다.
정운의 눈이 그녀에게로, 그리고 그녀의 옆에 선 도경에게로 가닿았다. 그가 성큼성큼 가까이로 다가온다.
은호는 걸음을 뒤로 물리다 문득 도경의 팔짱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녀가 몸을 뒤로 물리자 서도경이 단번에 그녀를 응시했다. 파리한 얼굴을 한 채 버티고 있는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도경이 정운과 마주 섰다.
“차은호, 일주일 만이네. 집에 갔었을 땐 네가 술이 취해서 제대로 얘기도 못 나눴는데. 아, 이쪽이 서도경 변호사이신가. 저는 은호 전 약혼자 이정운입니다.”
은호는 심장이 내려앉는 무언의 느낌에 숨통이 조였다. ‘전 약혼자’라고 씹어뱉은 정운이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걷어찰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서도경은 시니컬한 얼굴을 하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그 손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은호가 새벽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얼굴이 누군가 했는데, 이제야 뵙네요. 서도경입니다.”
이정운의 미간이 단숨에 일그러진다. 검사 앞에서, 판사 앞에서, 때로는 의뢰인 앞에서 표정 관리를 밥 먹듯이 능숙하게 하는 도경에겐 먹은 엿을 감추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도경을 뚫어져라 보는 정운과는 달리 도경은 은호에게만 오롯이 신경을 두고 있었다. 아주 느리고 고요하지만 상대를 꿰뚫어 보듯 첨예한 시선이었다. 그 날카로운 신경에 은호는 살갗이 베일 것만 같았다.
지은 죄도 없는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자꾸만 등골이 시렸다. 냉각된 분위기는 세 사람 사이에 은밀하게 퍼져 낮게 깔렸다.
쨍그랑.
목이 타들어 갔다. 은호는 손을 뻗어 쥐려던 샴페인을 놓쳤다. 음료가 바닥으로 추락하자 곧장 지배인과 직원들이 가까이로 다가와 어수선해진 장내를 정돈했다.
움찔거리는 그녀의 손, 꿀꺽 침을 삼키는 목, 그리고 파르르 떠는 속눈썹까지도 서도경의 신경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서도경은 덤덤한 모양새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실은 그녀도, 정운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일을 할 때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랄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흐르는 언어들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고 논리 정연했다. 꼭 그때의 그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 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음료가 묻어서.”
도경은 사라지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정운이 나가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연회장을 나와 관계자 외엔 사용하지 않는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야외 테라스로 나와 한 뼘 정도 키가 작은 이정운을 내려다보며 도경은 담배를 물었다. 정운은 말리지 않았다. 또 꼴에 남 앞에선 흡연은 하지 않는 신사인 건지 이정운은 그저 팔짱을 끼기만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서도경이 누군가 했는데 실물로 직접 뵙네요.”
“뒷조사로 그동안 많이 보셨나 봅니다.”
“뭐… 피차 알잖아요? 은호가 그렇게 찾아 대던 남자를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네요.”
도경은 그 얼굴 위로 담배 연기를 흩뿌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차일반이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이 남자와 마주하고 있으니 기분이 좆같고도 묘했다.
“내가 은호 놓아준 거예요. 우리 잘돼 가고 있었는데 내가, 놓아준 겁니다.”
정운은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며 주먹을 콱 쥐었다. 그와 약혼했던 2년 동안 은호가 담았던 남자가 눈앞의 남자라고 생각하니 솔직한 심정으로 화가 차올랐다.
이제 와서 내 여자라고 주장하고 싶기도 하고.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떨어져 있어도 다시 만나 이렇게 죽고 못 살 만큼 견고한 것에 여태 모른 척 피해만 왔던 패배감이 차올랐다.
대체 두 사람은 얼마나 서로를 믿길래, 6년을 떨어지고도 다시 붙을 만큼 굳건한지. 정운은 주먹을 빠득 쥐곤 비열하게 입술을 올렸다.
“내가 들은 거랑은 좀 많이 다르네요.”
“…그렇게 차은호를 믿어요? 당신 만나면서도 나랑 잤을 거라곤 생각 안 합니까?”
변죽을 울리는데도 눈앞의 남자는 무덤덤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피식대는 얼굴엔 정운은 누려 보지 못한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쉽사리 흥분을 하지도, 그렇다고 표정을 드러내지도 않는 이 남자는 담배 한 대를 여유롭게 피울 뿐이었다. 흩어지는 담배 연기 사이로 담담하고도 냉소적인 서도경의 눈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픽 웃었다.
“안 하는데?”
“…하, 그렇게 믿어요? 언제 어디서 어떤 시간에 당신 뒤에서 차은호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내 앞에서 다리 벌릴 거라곤 왜 생각을 안 해요?”
저 견고한 믿음에 금이 갔으면 하고 바랐다. 정운은 거칠게 토해져 나오는 숨을 간신히 삼켰다. 다른 남자와 약혼까지 했던 전 애인을 믿는다고? 같잖은 센 척이 분명하다. 정운은 입술을 비틀었다.
“당신 모르게 나랑 마주친 것도 여러 번이야. 근데 그걸 어떻게….”
“알량한 거짓말이 귀엽긴 하다만, 믿어 주길 바란다면 하다못해 둘이 떡이라도 쳤다는 증거 사진 한 장은 가지고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뭐, 라고?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해, 당신?”
“집 CCTV, 차 블랙박스, 로펌 CCTV, 이 정도면 매시간 매초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신이 말하는 둘이 붙어먹었다는 게 언젭니까? 너랑 달리 난 증거가 다 있거든. 언제 어디서 은호가 뭘 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그걸!”
“네가 말하는 그날이 언젠지는 몰라도 밤이었다면 아마 그 시간에 은호는 나랑 해 대고 있었을 텐데. 필요하면 CCTV 시간 맞춰서 돌려 보고.”
무너져 내릴 것처럼 눈을 콱 눌러 감는 정운을 보며 도경은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바들바들 떨고 있던 정운이 고개를 푹 숙인다. 보나 마나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굳이 확인을 하는지. 한심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다.
“쯧, 은호는 마음 없는 섹스는 안 합니다. 당신보다는 쌍방 통행인 내가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뭘 해 보고 싶거든 상대에 대해 알고나 떠들어요.”
입술을 빠득 깨문 정운을 향해 그가 혀를 찼다.
“부하 직원 시켜도 될 일을, 굳이 핑계 대 가며 차 회장 집을 드나들었다는 걸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도경은 픽 웃으며 마지막 연기를 뱉어 냈다.
“당신이 빈집에서 기다릴 동안 은호는 나랑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리고 필터만 남은 담배를 구둣발로 짓이겨 껐다.
어딜 다녀온 건지 사라졌다 나타난 도경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정운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윤 여사가 그를 ‘서 서방’이라고 호칭하며 호호 웃었다. ‘서 변호사’에서 ‘서 서방’으로 호칭이 바뀌었다는 건 윤 여사의 마음에 그가 굳건히 자리 잡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친절한 가면을 유지했다. 그를 향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내내 눈길을 주는 윤 여사와 마지막 차를 마실 때까지 그는 우아함을 지켰다.
차를 타고 집까지 가는 동안, 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늘 그가 하는 흔한 농담 한마디 없는 차 안에는 기묘한 정적이 돌았다. 그 침묵을 외면이라도 하는 것처럼 은호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커피 한잔 더 할까?”
“커피는 됐으니까 와서 앉아.”
“잠깐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
은호는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와 불편하게 입고 있던 외출복을 벗고 홈 웨어로 갈아입었다. 빨아야 할 외출복을 들고 거실로 나와 세탁소에 맡기기 위해 놓아두는 콘솔 위로 옷을 정리해 두었다. 그래도 차 한 잔 없이 있기는 그래 원두를 내리고 늘 커플로 마시는 머그잔을 꺼냈다.
“원두커피 괜찮지?”
그는 답이 없었다. 은호는 추출되기 시작하는 커피 머신을 들여다보다 말고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가 자그마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익숙했다. 익숙한 모양의 명함과 색깔. 이정운과 만나고 그녀가 주머니 속으로 아무렇게나 넣어 둔 것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거리를 뛰어가듯 종종걸음 쳤다. 두 다리가 휘청대며 스텝이 엉망으로 꼬였다. 채 도달하기로 전에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명함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허우적대며 뻗는 손 따위는 어이가 없을 만큼 쉽게 튕겨 낸 그가 서늘히 식은 눈으로 이정운의 명함을 훑었다.
“뭐 마려운 개처럼 내 눈치를 보던 이유가 이거야?”
그가 명함을 든 손가락을 튕겨 거실 바닥으로 종잇조각을 던져 놓았다. 빳빳한 종이가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밀려 꽤 멀리까지 미끄러져 갔다. 차가운 눈동자에 머릿속까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떨리는 다리로 발을 뗐지만 팔이 붙잡혔다. 허리가 감겼다. 여린 몸은 손 한 번 써 볼 틈 없이 당겨져 그의 앞까지 끌려왔다.
“왜, 말 안 했어.”
“…….”
“답 안 해?”
“…오빠.”
“질문을 바꿔 볼까? 언제까지 말 안 하려고 했어? 그 새끼가 너한테 좆 세우고 달려들 때까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로펌 앞에서 우연히 만난 게 다고, 아버지 생신 축하하러 집에 한 번 온 게 다였어. 비즈니스 파트….”
“그게 다라는 순진한 생각을 한 건 아닐 거고.”
“그 남자랑 나는 그냥 우연히 몇 번 만난 게 다야. 별것도 아닌 건데 괜히 오빠가….”
“별거? 너 지금 별거라 그랬어?”
급속도로 냉각된 그의 안면은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찔리면 그대로 심장까지 뚫어 버릴 것만 같은 뾰족한 음성으로 그가 뇌까렸다.
그는 그녀가 별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몇 번의 우연조차 말해 주길 바랐던 거다. 6년 전, 그녀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하고 넘긴 것이 쌓이고 쌓여 결국 그를 떠나가게 만들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가 없는 동안 우연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마주쳤던 것에, 그는 불쾌감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낀 것이 분명했다.
아까 이정운과 어떤 대화를 나눈 것인지 모르겠지만 또 우연히 마주친 것을 트집 잡아 그를 몰아붙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별게 아니라고 생각해 지나쳤던 것이 그에겐 트라우마로 작용한 것이 분명했다. 은호는 뒤늦게야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려 굳은 입술을 열었지만 사늘하게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삐죽이는 입술을 꾹꾹 씹으며 그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그의 시선이 차갑게 떨어질 뿐이었다.
“증거. 증거 될 만한 거 한번 모아 볼까?”
“무슨… 말이야?”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거실 바닥에 너르게 깔린 러그 위로 당겨 왔다. 절로 풀썩 무릎이 굽혀졌다. 홈 웨어 바지 고무줄 안으로 그가 손을 집어넣어 단숨에 바지를 벗겨 내렸다.
“아… 도경….”
그는 몸을 뒤로 물리는 그 작은 허리를 안아 와 몸을 뒤집어엎었다. 그의 거친 움직임에 완전히 벗겨져 버린 바지가 흉할 정도로 말려 러그 위로 던져졌다.
그가 은호의 골반을 잡고 수치스러울 정도로 엉덩이를 추켜올려 세웠다. 파묻히듯 그녀의 얼굴이 러그 위로 뭉개졌다.
“여기서라면 보안 카메라에 찍힐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이 시간에 어디서 무얼 했는지 이정운이 물어보면 답해 줘. 그 시간에 서도경이랑 떡쳤어요.”
그는 각도를 가늠하고 현관이 잘 보이는 곳으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현관에 달아 놓은 CCTV가 거실까지 다 찍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는지 그녀가 등허리를 움찔거렸다. 그는 사실 여부를 알고 있었지만 말해 줄 마음이 없었다. 그새 눈물을 쏟는지 그녀가 러그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는 상관 않고 새빨간 팬티 끈을 감아 내릴 듯 말 듯 농락했다. 아니라고, 서럽게 울먹이는 그 목소리를 묵살했다.
“보여 줘 봐. 흥분하는 거. 너 잘하잖아.”
스륵, 팬티를 내리자 얇은 팬티 위로 끈적끈적한 애액이 실선처럼 늘어졌다. 뭘 한 것도 없이, 그저 그의 손길이 조금 닿은 걸로도 민감한 몸은 흥분을 했다.
이미 팬티가 축축해질 정도로 젖어 버린 아래를 들여다보던 도경은 자꾸만 오므리려는 허벅지를 두 손으로 쫙 벌렸다.
벌름대는 구멍이 한껏 벌어지며 끈적거리는 속살을 내보일 때마다 애액이 틈을 헤치고 늘어져 내렸다.
이렇게 음란한 몸을 가지고 지난 시간 이정운 앞에서 돌아다녔을 생각을 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흥분돼? 그 남자가 우릴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여기 말고 차라리 침대에서… 흑….”
그는 현관에 부착된 보안 카메라가 있는 방향으로 흥분으로 잔뜩 농익은 그녀의 음부를 완전히 들이밀었다. 짐승처럼 엉덩이만 치켜든 그녀가 러그를 꾹 움켜쥔다.
“엉덩이 더 들어. 왜, 내가 아니라 이정운이 박아 줬으면 더 좋겠다 싶어?”
“아냐. 그런 거 절대 아니란 거 알면서 왜에….”
은밀한 치부를 모두 드러낸 채 엉덩이를 치켜들고 있는 것이 보안 카메라에 잡히기라도 할까 봐, 까발려져 드러난 제 치부가 싫어 손으로 한껏 벌어진 여성을 어설피 막았지만 그가 그녀의 손을 단번에 쳐 냈다.
“치워.”
“…아. 여기서 말고… 흐윽.”
“네가 어떻게 내 걸 먹으면서 엉덩이 흔드는지, 그 남자가 궁금해하는 것 같던데 말이야.”
“아, 아냐, 그런 거….”
“그 새끼랑 또 뭐가 있었어, 말해 봐.”
“없었….”
“없었어? 단 하나도?”
앞뒤로 박을 타듯 질구를 지분대던 손가락을 세차게 빨아낸 그가 은호의 두 다리를 한계까지 넓게 벌렸다.
그의 침이 묻어난 손가락이 질구 살점을 벌릴 듯 말 듯 앞뒤로 움직여 댔다. 넣어 줄 것처럼 하다가도 애를 태우는 손마디는 쉬이 길을 열어 내지 않았다.
그는 교미를 원해 숨이 넘어갈 듯 벌렁거리는 구멍을 알면서도 클리토리스만 느릿하게 문질러 댔다.
그녀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재촉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손가락 두 개를 질구 안으로 움푹 돌려 넣었다. 두어 번 빼냈다 빠르게 밀어 넣어 쳤을 뿐인데 작고 앙증맞은 그녀의 발가락이 꾹 접혀 들었다.
“한 번도… 하으, 응, 으응! 없어, 어.”
푸욱, 푸욱. 거친 삽입에 엉덩이가 튕겨 오르듯 밀려났다가도 더 먹여 달라는 듯 안으로 깊숙이 달라붙었다.
그의 손가락을 잡아먹고 진한 희열을 감추지 못하는 작고 예쁜 구멍에 도경은 감출 수 없는 음욕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는 추삽질을 하던 손가락을 빼고 벌렁거리는 구멍을 두 손으로 쫙 벌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속살까지 현관을 향해 내보였다. 속살 가득 희뿌연 그의 정액이 흘러넘치는 건 오로지 그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 그 절경을 본다면 당장에 목을 그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딜, 감히.
“안까지 잘 보여 줘 봐. 이정운도 보여 줘. 얼마나 네가 잘 먹는지.”
물론 보여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그녀를 몰아세웠다.
“후으으… 싫어….”
“엉덩이 더 들어. 더 잘 보이게끔.”
쯧, 혀를 찬 그가 벌어진 구멍 사이로 흘러내리는 애액을 핥아 올리며 입구를 진득하게 핥다 그대로 속살까지 홉 빨았다. 단것을 잔뜩 머금고 있는 속살이 혀끝을 따라 문대어졌다.
말캉거리는 그의 입술과 그보다 더 연한 혀가 속살을 빨고 음순을 잘근잘근 씹었다. 은호는 잇새로 빨려 들어가 끈적끈적하게 씹히는 날개 살이 찌릿해 저도 모르게 눈매를 바르르 떨었다.
“하으응, 응! 도경아.”
“다리 더 벌려, 빨기 쉽게.”
그가 빨 때마다 뱉어 내는 공기와 질척한 애액 거품이 요란하게 섞여 쩌벅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에서 이곳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어느새 묘한 쾌감을 심었다.
찰나 떨어지려는 것도 애가 닳아 그의 입술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며 질구를 세차게 비볐다. 스스로 구멍을 벌름이며 그의 날 선 혀를 조일 때마다 아랫구멍은 쾌감의 잔존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가 지체하지 않고 바지 지퍼를 내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속살로 페니스를 길게 박아 넣었다. 질구 주위가 색욕에 벌게져선 질척하게 물이 흐른다. 시커먼 음모가 푹 젖었다.
“아아앙! 도경…. 우으!”
거의 처넣다시피 꾸우욱 밀고 들어와 허전할 정도로 쑤욱 빠져나가는 남자의 성기는 그저 들어차 여린 점막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깊은 만족을 선사했다.
육욕에 머리가 몽롱해지고 페니스를 꽉 물고 있는 구멍이 저릿저릿했다. 은호는 그 쾌감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도 몰려오는 오르가즘에 눈꺼풀이 풀리고 입술이 벌어졌다.
“네가 그렇게 싫으면 그만두고. 그만둬, 은호야?”
다른 땐 몰라도 섹스할 때만큼은 제 감정에 솔직한 그녀가 그만둔다는 말에 움찔거렸다.
“알았어. 네가 그렇게 싫으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결해.”
“아, 안 돼! 흐으.”
그녀가 더욱 질구에 힘을 꾹 주며 안으로, 안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으려 애썼다. 뒤돌아 있어 자세가 여의치 않은지 보다 깊은 삽입을 위해 엉금엉금 기어, 빠져나가는 페니스를 기어코 구멍에 쑤셔 넣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디딘 무릎까지 그를 향해 붙여 가며 품은 자지를 안쪽으로, 안쪽으로 긁어 댔다. 힘이 풀려 몇 번이나 엉덩이가 내려앉았지만 그녀는 힘겹게 둔부를 추켜세워 그의 불알까지 마구잡이로 비볐다.
“안에 싸 줘?”
“으으응.”
대답이 모호했지만 도경은 좋을 대로 해석했다. 험악스럽게 발기한 기둥을 들이밀며 점막을 벌리기가 무섭게 축축한 구멍이 허겁지겁 페니스를 잡아먹었다.
벌겋게 단 살 기둥이 질 안에서 빳빳하게 문대어진다. 그때마다 여체의 내부는 쥐어짜 내듯 기둥을 조이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못하고 몸 전체를 흔들어 댔다.
서로의 성기가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액들로 떡 지고, 맞물린 입구에선 흰 거품이 잔뜩 엉겨 붙었다. 찌걱대는 색스러운 소리가, 음탕한 거실을 메웠다.
“현관에선 절대 안 보여. 은호야, 너 무서워하는 건 안 해. 아직도 그걸 몰라?”
사고가 멈춘 머릿속과 육욕이 지배한 두 몸뚱어리는 쉬이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
은호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곤 시트에 얼굴을 푹 파묻고서 퉁퉁 부은 눈을 비볐다. 허리를 껴안아 오는 손을 외면했다.
결국 두통이 동반됐다. 그의 손을 피해 비비적대며 침대 끝으로 멀어지자 귓등으로 뜨거운 숨이 달라붙었다.
“…힘들어.”
훌쩍이며 쓰라린 눈가를 닦았다. 말없이 안아 주는 품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
“눈 부었나 보자.”
고집스레 등을 보이다 따뜻한 품으로 안기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못 이기는 척 돌아보았다. 못지않게 피곤한 얼굴이 지그시 그녀를 향해 있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워.”
“…화내지 마.”
“이리 와. 안겨.”
끌어당기는 손길에 거부하지 않고 안기자 그가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며 등을 쓸어 주었다.
또 그 익숙한 포근함에 엉엉 눈물을 토해 냈다.
“쉬, 그만 울어. 탈진하려고 그래?”
그가 난감하리만치 부드럽게 달래 주는데 은호는 참지 못하고 아이처럼 그에게 대롱대롱 매달렸다.
“다음부턴 어떤 새끼를 만나든 말해. 최소한 딴 놈 입으로 네 이야기 듣게는 하지 말란 소리야. 알았어?”
“…오빠.”
“그렇게 앓는 소리 해도 안 봐줘.”
그러면서도 그가 은호를 끌어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