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ure RAW novel - Chapter 10
10
“제주도에 가는 거지?”
“그래.”
“제주도까지 그럼 변호하러 가는 거네.”
퇴근을 하고 돌아와 지친 몸을 소파에 아무렇게나 누이고 있는데 그가 목덜미 밑으로 쿠션 하나를 받쳐 주며 이번 주에 제주도엘 간다고 말했다.
“나도 가고 싶다.”
“하루 월차 내고 같이 가.”
“어떻게 그래….”
“대표한테 말해 둘게.”
“김 대표님 오빠 사촌 누나지. 전에 학교에서 봤던 기억 나.”
일 때문에 제주도에 간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나도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말을 괜히 한 게 아닌가 싶다가 간 김에 조금 쉬다 오자는 그의 말에 은호는 기분이 좋아졌다.
“보고 싶은 해변이 있어. 갈 수 있을까?”
“어디든.”
친구 수희가 그녀의 남자 친구와 다녀왔다며 월정리 해수욕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 준 적이 있었다.
좋았다며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한동안 그 사진이 담긴 핸드폰을 붙잡고 끙끙거렸던 기억이 있었다. 재판 중이라 바쁘던 도경에겐 사진은 보여 주지 못했었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소파에 시체처럼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있는데 주방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도 요리엔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딱히 뭘 해 먹는다거나 정성스럽게 요리를 한다거나, 그와 어울리지 않기도 했지만 관심이 없기도 했다.
그래도 배가 고파 쉬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있으면 언제 만들어 온 건지 야채볶음밥을 만들어 내밀었다. 입이 까다로운 편인데도 신기하게 그가 만들어 주는 볶음밥은 입맛에 맞았다.
“당근은 조금만.”
“또 편식하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당근이 많이 없는 쪽을 숟가락으로 퍼 내미는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주스까지 챙겨 왔다.
“나 그럼 짐 싸야겠다.”
배슬배슬 웃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키자 그가 옅게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결혼,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맺는 좋은 결실이라는 생각엔 동의를 한다.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그도, 은호도 해 본 적 없는 선택 사항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듯 어른들에게 떠밀려 하고 싶진 않았다. 이정운과의 약혼처럼 어떤 명분에 의해, 서로를 어떤 이유로 필요로 해서 그래서 하고 싶진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만났지만 진심으로 행복을 위해 결혼을 한 친구 란주처럼, 평범해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끌리듯 발목이 붙잡혀 끌려가는 결혼 생활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은호 씨, 요즘 많이 무리한다 했어. 서 변한테 대충 들었어요. 푹 쉬고 모레 봅시다.”
“네. 대표님.”
그는 오늘 오전 비행기로 제주도로 떠났다. 은호는 오늘 온라인으로 예매한 늦은 밤 비행기 티켓을 들여다보며 꽤 오랜만에 한가로이 커피를 마셨다.
일찍 퇴근을 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친구들을 만났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란주는 그사이 얼굴이 활짝 폈다.
결혼 준비를 위해 적금을 붓고 있는 수희는 결혼 준비를 어찌어찌했다고 정보를 푸는 란주의 신이 난 무용담을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나도 내년 안으론 꼭 할 거야. 이제 적금도 거의 다 모았고.”
“근데 은호 넌 결혼 안 해? 도경 선배랑 근 10년을 서로만 봤는데 결혼할 때도 되지 않았어?”
“지금도 같이 사는 건 같은데 뭐. 난 언제 하든 상관없어. 오빠가 바쁘기도 하구.”
“그래도 동거랑 결혼이랑은 또 다르다, 너?”
은호는 감자튀김을 케첩에 푹 찍어 야금야금 케첩이 묻은 부분만 떼어 먹으며 경험에서 묻어 나오는 친구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근데 란주 너, 맥주는 자제해야 하는 거 아냐?”
“왜?”
“허니문 베이비가 생겼을 수도 있잖아.”
“아냐. 우리 피임했어. 나 당분간은 애 가질 생각 없거든. 신혼 좀 즐기고 나서.”
“난 결혼하면 바로 아이부터 가질 건데.”
섞이지 못하는 대화를 듣고만 있었지만 은호는 아무래도 좋았다. 결혼을 한 친구나 결혼을 준비 중인 친구나 어느 친구 못지않게 행복했다.
곁에는 서도경이 있고, 그와 함께 어떤 미래를 그려도 그 상상의 끝엔 행복에 도달해 있었다. 중요한 건 그거니까. 동거든 결혼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 은호, 무슨 생각을 한다고 그렇게 감튀만 뜯고 계실까?”
“그냥…. 참! 수희야, 네가 보내 준 해변 사진 있잖아. 나 거기 보러 가.”
“제주도? 정말?”
은호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좋겠다. 주말에 가?”
“아니, 오늘.”
“세상에, 월차 쓴 거야?”
서도경과 함께 간다는 말에 여행으로 주제가 흘러간 대화는 란주의 허니문으로 궤도를 탔다.
은호는 호프집에서 나와 곧장 집으로 향했다. 침실로 들어가 가방을 열고 챙겨 둔 옷가지들을 넣고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이것저것 집 안을 둘러보며 챙겨 갈 것이 없는지 확인하던 은호는 침실 콘솔 위에 나란히 놓인 액자 앞에 멈춰 섰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날, 6년 만에 만나 그의 집으로 쫓기듯 들어섰을 때도 이 액자를 본 것 같은데. 대학 시절 찍은 사진 속의 은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엠티 때 찍었던 사진.
액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은호가 놓아둔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도어록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잠겼다.
현관 비밀번호는 여전히 그녀의 생일이었다.
이제 30분쯤 뒤, 제주도에 도착할 거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은호는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서울보다 날이 따뜻했지만 그래도 이제 막 겨울을 향해 가는 제주도는 날이 찼다.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주머니 속으로 두 손을 푹 집어넣었다. 어깨를 웅크렸다. 분명 이쯤 공항에 도착할 거라고 답이 왔는데 그는 바쁜 걸까.
“바쁜가.”
들어가 기다릴까 하다가 공항 안에만 있기가 답답해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있는 쪽을 택했다. 발끝을 내려다보며 신발코로 바닥을 의미 없이 누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따뜻한 온기가 확 감싸 왔다.
익숙하고 설레는 남자의 향기. 은호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등 뒤에서 그녀를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나와 있어.”
“응. 답답해서.”
은호는 천천히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손을 빼 그녀를 감싸 안은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춥지 않아?”
“안 추워. 오빠가 안아 주고 있잖아.”
다정한 말에 그의 뺨이 그녀의 뺨으로 내려와 달라붙었다.
“재판은 어떻게 됐어?”
“당연히 이겼지.”
“응. 그럴 줄 알았어.”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섞였다.
은호는 깜빡깜빡 눈을 깜빡이며 지나다니는 차를 바라보고 있다 문득 손가락 사이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고개를 아래로 옮겨 갔다.
3년을 함께했고, 6년을 그리워했으며, 돌아와서야 다시 맞잡은 손가락 사이에 본 적 없는 반지가 끼워진 것을 발견했다.
반지와 함께 그녀의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이 그녀의 약지를 살살 비비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결혼하자, 은호야.”
툭, 그의 손등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삐죽거리며 숨을 참았지만 결국 툭툭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답해. 너 원하는 건 다 해.”
“내가 싫다고 그래도?”
“싫다고 안 그럴 거잖아.”
“그게 뭐야….”
훌쩍이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눈물이 흐르는데 입 밖으론 웃음이 샜다.
“나보다 널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
그가 뜨거운 입술로 영원한 사랑을 고했다.
“지금도, 앞으로도.”
은호는 울면서 웃었다. 이상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맞잡은 손이 이 손이라면 그 어떤 것도 좋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웃음이 섞였다.
에필로그
은호는 건전지가 다 닳은 인형처럼 책상 위에 엎어져 있었다. 팔다리가 흐느적거렸다. 여행의 문제점 중 하나였다. 다녀오고 나면 일상이 급격히 단조롭게 느껴진다.
은호는 책상에 기대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깔끔한 타입의 반지였다. 멋을 부리진 않았지만 세련됐다. 기분 좋게 반지를 바라보다 은호는 로펌을 나설 준비를 했다.
오늘 점심시간에 도경의 어머니가 회사 앞으로 찾아온다고 했었다. 어차피 정식 인사야 상견례 때 갖기로 한 것이니 가볍게 얼굴만 보기로 한 자리였다.
감사하게도 로펌까지 오겠다며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하는 도경의 어머니는 가볍게 차만 한잔 마시는 자리라는 것을 강조했다. 은호가 신경을 곤두세울까 봐 해 둔 배려가 분명했다.
서도경의 어머니, 정 여사는 지난날 본 적이 있었다. 서도경과 연애를 하던 그 시절, 도경의 집으로 어머니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6년 만이구나.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한참 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을 했는데도 도경의 어머니가 자리에 먼저 와 있었다. 본의 아니게 죄송스러워 은호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추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온 건 난데요. 오랜만이에요, 은호 양.”
그녀도 법조계에 몸을 담았었다고 들었다. 온화한 인상의 분위기는 도경과 달랐지만 예절, 기품, 특유의 고아한 분위기는 도경과 닮았다.
분명 호락호락하지 않은 눈매였지만 건네는 말, 웃어 주는 눈, 아들이 지나치게 냉담한 면이 있으니 이해하라는 농담도 온화했다.
두 사람은 차를 들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은호 양도 잘 지냈어요?”
“…네.”
그녀가 도경과 은호의 자세한 지난날의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알게 모르게 가슴이 쓰라렸다. 그녀를 보기가 미안해서, 은호는 김이 오르는 차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옅게 미소만 띠고 있었다. 그런 것은 개의치 말라는 듯 정 여사는 부드럽게 분위기를 풀어 나갔다.
“도경이가 나한테나 제 아빠한테나 얘기를 잘 안 해요. 그래서 난 은호 양 어머니한테서 연락을 받고서야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는 걸 알았어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녀와의 대화는 좋았다. 편안했다고 해야 하는 게 맞았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로 힐끔 눈길이 갈 때마다 정 여사가 온화하게 웃었다.
“은호 양은 재스민차를 좋아하나 봐요.”
“네. 향이 좋아서요. 어머니도 좋아하세요?”
“그럼요. 아주 예전에 도경이가 재스민차를 선물했는데, 생전 안 그러던 애가 차를 선물해서 왜 그러나 했는데 은호 양이 이 차를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은호 양을 보니 생각이 나네요. 나중에 우리 집에 차 마시러 와요.”
은호는 다감한 그녀의 초대에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점심시간을 뺏어 미안하다는 말이 그녀의 끝인사였다. 상사 눈치 보느라 힘든 회사 생활에 유일하게 쉬는 게 점심시간인데 그마저 뺏어 미안하다는 거였다.
어떻게 보면 서도경, 그 남자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 같은데, 또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준다는 점에선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은호는 도경의 어머니가 탄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도경을 떠올렸다.
도경은 퇴근 준비를 마치고 개인 사무실에서 나와 은호가 있는 책상을 둘러보았다. 어딜 간 건지 비어 있는 자리엔 그녀 대신 김 대표가 앉아 있었다.
“누나가 왜 거기 있어?”
“부탁한 자료가 있어서 기다리고 있어. 은호 씨는 잠깐 복사하러 갔고.”
김 대표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 도경에게로 다가갔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은 오랜만에야 적막이 흘렀다.
“너 결혼한다면서?”
“이제 알았어?”
“아, 자존심 상해. 내가 너보단 먼저 할 줄 알았는데.”
김 대표는 히죽이면서도 다 감추지 못한 웃음을 지었다.
“은호 씨, 그때보다 많이 강해진 거 같더라.”
“안 강해도 돼. 내가 옆에 있으면 되니까.”
“아 정말.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냐, 어떻게.”
“사람이 변하면 쓰나.”
“야, 너 빨리 가.”
“안 그래도 그럴 거야.”
종이 뭉치를 든 은호가 복사실에서 나와 두 사람 앞에 섰다.
“대표님, 말씀하신 자료 여기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은호 씨도 퇴근해요.”
도경은 퇴근 준비를 마친 은호의 손을 잡고 로펌을 나왔다.
말은 저래도 사무실을 나서는 두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고 서 있는 그의 사촌 누나를 알고 있었다.
“오늘 어머니 만났다면서.”
“응. 사무실 근처까지 오셨었어. 어머니까지 뵙고 나니까 진짜 결혼하는구나, 실감이 나.”
도경은 그의 캐시미어 머플러를 은호의 목에 둘러 주며 다시 손을 꼭 잡았다.
근처의 예약해 둔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길이 들떠 있었다. 은호가 조잘조잘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다.
“그래서 재스민차를 마시는데.”
“마시는데.”
“어머니가 오빠가 예전에 재스민차를 선물해 준 적이 있다고 해서 놀랐어. 어머니랑 같이 차 마시는데 옛 생각 나는 거 있지.”
“좋았겠네.”
“응응.”
도경은 뺨에 발그스름한 꽃이 핀 은호의 뺨을 비벼 주었다. 다섯 번의 겨울을 홀로 보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찾아온 겨울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여전히 아이같이 해맑으면서도 부드러운 그녀의 웃음은 그를 향해 있었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그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양가 친지가 모두 참석한 결혼 발표가 있는 날 아침이었다. 은호는 그가 만들어 준 볶음밥을 삭삭 긁어 먹고선 창가에서 햇볕을 받고 있는 재스민 화분을 바라봤다. 바람을 따라 불어오는 꽃향기를 맡다, 시야가 가로막혔다.
눈앞에 도경이 눈이 부시도록 잘 어울리는 슈트를 입고 서 있었다.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서 그에게로 다가가 답삭 그의 품 안에 안겼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가 은호를 안아 주었다.
행사가 있는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두 사람은 내내 손을 잡고 있었다.
차 윈드실드 위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만에, 두 손을 꼭 잡고 맞는 첫눈이었다.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던 은호가 운전 중인 그를 힐끔거렸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뜻으로 턱짓을 하는 그를 가만 보다 은호가 마른 입술을 혀로 닦았다.
“있잖아, 오빠. 기쁜 소식이랑 슬픈 소식이 있는데.”
“있는데.”
“기쁜 소식부터 말하자면 나 오늘 예쁜 거 입고 왔다?”
‘속옷.’
그의 귓가에 작은 바람을 불며 속삭였다.
찌릿하게 들이닥치는 숨소리에 그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퍽 기대된다는 얼굴로 그가 그림처럼 씨익 입술을 올렸다.
“뭔데.”
“응, 노팬티.”
끼익, 끽. 차가 급정거를 할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클랙슨이 울려 댔다.
“뭐?”
그가 조금 격양된 어조로 되물었다.
은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새치름하게 웃었다.
“정확히 말하면 노팬티는 아니고 이벤트용 밑 트임 스타킹 신었어.”
란주가 신혼여행에서 이벤트용으로 효과를 톡톡히 봤다며 내민 것을 수희와 하나씩 주워 왔다. 완전히 발가벗은 노팬티보다 밑만 훤히 뚫린 이편이 오히려 더 야릇한 느낌에 은호는 모은 두 다리를 배배 꼬았다.
다녀와서 입을까 하다, 이게 그렇게 효과가 만점이라길래 나오면서 주워 입었는데 은호는 영 익숙하지 않은 이 헐벗은 기분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가 좌회전을 하다 말고 큭큭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사랑스러워 딱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걷어 봐. 보게.”
“안 돼.”
시각적인 것이든 촉각적인 것이든 지금 조금이라도 자극을 주면 입고 있는 스커트가 젖을지도 몰랐다. 미끄덩하게 아래가 젖기라도 하면 손을 넣어 닦을 수도 없고,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슬픈 소식은 그거야. 집에 가서 보여 줄게.”
“젖었어?”
하여간 귀신이 따로 없다. 이래서 별다른 티 안 내려고 했던 건데. 그런데 또 그럼 애써서 입고 온 의미가 없어지니까. 은호는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치맛단을 좀 더 아래로 내렸다.
“아냐. 그럴까 봐 무서워서.”
“뭐 어때. 너 젖으면 내가 늘 깨끗하게 해 주잖아.”
“빠, 빠는 게 더 위험해. 바보야.”
이렇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벤트랍시고 입고 온 자신이 잘못한 건가. 은호는 끙끙대며 이마를 붙잡았다.
별다른 동요도 없이 그저 미소만 띠고 있는 그는 핸들을 돌리던 손을 짧게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려 봐.”
“응?”
“다리 벌려 보라고.”
“시, 싫어.”
“누가 스커트 걷으래? 그냥 다리만 벌려.”
대체 이건 또 무슨 수작인 건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흘끔대다 치맛단을 아래로 꾹 잡아 누른 채 두 다리를 스르륵 벌렸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그러고 있어.”
“왜?”
“어려워? 걷은 것도 아니잖아.”
“아니 뭐….”
어려운 건 아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시키는 게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게 불안했다. 벌려 놓은 다리 탓에 입구가 벌어지는 것이 느껴져 그게 은근히 야릇했다.
다시 다리를 닫으려고 접자 그가 허벅지를 툭 건드린다. 은호는 어느새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물며 다시 두 다리 사이를 열었다.
아, 질구가 은근히 벌어진 이런 자극적인 느낌은 위험했다. 위험 수위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져 눈을 움찔거렸다.
이걸 노린 거였어.
“아, 안 할래. 젖으면 안 된단 말이야.”
꾹 다리를 닫으며 치마를 움켜잡았다.
뭐 아무것도 하지도 않았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그가 맛있는 것을 아껴 먹는 짐승처럼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도 손은 뻗지 않고 싱긋 웃는다.
“지금 네 표정 어떤지 알아?”
“…….”
“말 안 해 줄래.”
“야.”
“뭐 해, 내려.”
은호는 벨 보이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는 것을 보며 화들짝 놀라 괜히 옷매무새를 체크했다. 서둘러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다가온 도경의 팔을 잡았다. 화려한 드레스가 싫어 입은 단정한 원피스인데 차라리 길게 내려오는 원피스를 입을 걸 그랬다.
“있잖아, 도경아.”
“말하세요.”
“오늘 정운 씨도 올 거야. 혹시라도 우연히 마주칠지도 모르니까 미리 말하는 거야.”
“알아. 오는 거.”
어렵사리 당부했는데 그는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두 사람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낯익은 남자를 보며 은호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강 비서님. 오빠 나 파우더 룸에 가 있을게. 화장도 좀 고칠 겸.”
“같이 가.”
“두 분 모시겠습니다.”
도경은 텅 빈 파우더 룸으로 들어가는 은호를 먼저 보내고 강 비서를 가까이로 불러 세웠다. 은호는 강 비서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한 그를 거울을 통해 바라보며 립스틱을 덧그렸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자리를 뜨는 강 비서가 멀어지고 이내 그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그가 은호의 허리를 꽉 끌어와, 호텔까지 오는 동안 방어한 것이 무색하게 치마 안으로 손을 쑤욱 넣었다.
은밀하게 엄폐해 놓은 그곳으로 단번에 손가락이 찾아들었다. 스윽, 입구를 쓸어 핥는 손가락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아…!”
“이렇게 젖었는데 왜 아닌 척이야. 너 표정만 봐도 다 알아.”
“…자꾸 자극시키니까 그렇지.”
“내가 너 만진 적 있어? 건드리지도 않았잖아.”
“그건….”
뭐든 해 줄 것처럼 하다가 다시 치맛자락에서 빠져나가는 손은 그다지 미련이 없어 보였다. 화장대로 걸어가 그녀가 덧그리다 만 립스틱을 가져온 그는 태연해 보였다.
“립스틱 다시 발라 줄게, 보자.”
왜 이렇게 무덤덤하지? 평소의 그 같았으면 이 치마를 다 찢어발겼음 발겼지 이렇게 고분고분 넘어가지 않을 텐데. 그가 이렇게 건조하게 나오니 오히려 목이 말라 오기 시작한 건 그녀였다.
“내가 바를래.”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봤다. 할 말 있냐고 묻는 얼굴은 심하게 건조했다.
“왜 평소처럼 안 해?”
“빨게 해 주긴 할 거야?”
“언제는 하지 말란다고 안 했어?”
“이제부터 그래 보려고.”
“왜?”
당황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별 의미 없어.”
“알았어. 좀 쉬고 있자. 어차피 식 진행하려면 시간 좀 남았으니까.”
“아, 자, 잠깐.”
의자로 가 앉으려는 그의 팔을 꼭 붙잡고 끌어와 당겼다.
뺨이 울긋불긋,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간 그를 알아 온 세월이 얼만데 이렇게 쉬울 리가 없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어.”
웃는 그의 가슴팍을 때렸다. 조금도 밀려나지 않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쪽,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결국엔 먼저 매달려 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마는 그는 기어이 목적을 달성한 사람처럼 고개를 나른하게 꺾으며 웃었다.
“화장대 짚고 뒤돌아.”
“입으로만 할 거야? 넣을 거야?”
“둘 다. 빨아만 줘?”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야?”
“그래서, 하지 마?”
도경이 바지 지퍼를 내리며 진득하게 물었다.
“…나 안 벗어도 돼. 스타킹이 트여서 이렇게 바로 넣으면 돼….”
문 밖에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운이 시뻘게진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었다. 굳은 채 자리에 서 있었다.
“하으, 아아, 하응! 더 깊게, 도경아. 하앙! 더 안… 까지!”
“클리토리스 비벼 줘? 차은호, 대답해야지.”
“그, 그럼 쌀지도, 아앙, 아, 몰라….”
“싸면 내가 늘 어떻게 해 줬지? 어떻게 해 줬어, 은호야.”
“우흑, 말 안 할, 거야. 으응!”
“그럼 안까지 안 긁어 줄 거야. 그래도 돼? 너 내 거 깊이 박아 주는 거 좋아하잖아, 그래도 돼?”
“흐윽….”
남자를 애원하는 그녀의 음성이 황홀에 젖어 있었다. 이정운, 그에겐 단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기분 좋은 목소리.
“아… 제발… 깊이….”
“싸고 나면 내가 어떻게 해 줬어. 음란하게 말해 봐.”
“빠, 빨아 줬… 어. 흐아앙!”
“빨아 줬지? 기분 좋아서 울 때까지 빨아 줬지. 은호야.”
“응. 흐윽. 하읏.”
“끝나면 네가 만족할 때까지 빨아 줄게. 알았지? 착해, 예뻐. 클리토리스 만져 줄게.”
“앙, 아앗, 하으, 도경…!”
“더 세게 만져 달라고?”
잔뜩 들떠 격양됐지만 최대한 교성을 눌러 죽이는 비음, 문 너머에선 쩌벅대며 젖은 소리가 민망하도록 났다. 남녀가 교접할 시 나는 소리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보지 않아도 생생하게 장면이 그려지는 난잡한 대화에 손이 달달 떨렸다.
정운은 차마 더 듣고 있을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선 덜덜 떨리는 다리로 자리를 벗어났다.
은호에게 인사를 하고 싶으니 그녀가 있는 곳으로 좀 부탁한다고 청한 정운을 안내한 강 비서는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번외. Bittersweet
“나 엠티 별생각 없다니까.”
“새내기 때부터 찍히고 싶어?”
“정말….”
울고 싶은 기분으로 엠티행을 결정했다. 수희는 한껏 몸이 축 늘어진 은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새 감기가 걸렸다며 콜록대는 꼴을 보자니 선배들 틈에서 죽어나겠구나, 싶었다.
은호는 훌쩍이며 가방을 뒤적여 막대 사탕을 꺼냈다. 감기 기운이 오르면 습관처럼 당분을 섭취했다. 그러고 나면 한결 마음이 좋아져 축축 가라앉는 몸도 괜찮아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합을 가장했지만 말이 엠티지 사실은 그저 밤새도록 마시고 놀고 싶어 주최한 거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였다. 와글와글 섞여 노는 것도 딱 귀찮았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는 것도 싫었다.
“젊은 애가 벌써 그래서 써?”
수희는 그렇게 말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걸 어떡해. 의미 없이 노닥거리고 좋아하지도 않는 자리를 지키는 건 정말이지 그녀와 맞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감기에 걸려 목 상태가 좋지 못했다. 어디든 딱 드러눕고만 싶었다.
“너 선배들 얼굴은 다 알아?”
“몰라. 넌 알아?”
“과 생활 하는 선배들 뭐 대충은 알아. 야, 너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선배들 되게 많아.”
“별로 안 고마워.”
관심이라면 정중하게 사양하고 싶었다. 그런 게 싫어 친한 친구들을 제외하곤 집안이고 뭐고 밝히지 않고 학교를 다니고 있는 건데.
“술 억지로 먹이고 그럼 어쩌지?”
“너 감기 걸렸다고 말해 뒀어. 설마 그렇게야 하겠어?”
“오는 게 아니었어.”
처음 보는 혹은 인사 몇 번 해 본 것이 다인 선배들이었다.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살갑게 다가오는 선배들도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교수들까지 참석한 술자리는 열기가 더해 갔다.
“그래도 친해지고 싶었는데 한 잔만 해라.”
“그래. 그래도 선배가 주는 술인데.”
단골 멘트가 왜 안 나오나 했다. 말없이 구석에 앉아 자리만 지키고 있던 은호는 코앞까지 들이밀어진 술잔을 슬프게 바라봤다.
“저 그럼 맥주로 한 잔만.”
소주는 체질에 맞지 않으니 맥주로 딱 한 잔만 마시겠다고 선을 그었다. 또 좋다고 술을 내미는 선배들을 보고 있자니 딱 집으로 가고만 싶었다. 은근슬쩍 친해지고 싶다고 다가오는 선배 하나를 모른 척하고 건네는 맥주잔을 받았다.
두 눈 딱 감고 이거 한 잔만 마시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은호는 맥주잔을 비우다 말고 콜록거렸다.
“선배, 혹시 이거 소주도 섞은 거예요?”
“어어, 맥주만 마시긴 심심하잖아.”
머릿속이 급격히 어지러웠다. 감기 기운이 격렬하게 치솟아 오르는 기분에 은호는 붙잡는 선배들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봐요. 은호는 제가 데리고 나갈게요.”
은호의 팔을 붙잡고 술판을 빠져나온 수희가 방문 하나를 열어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술 취한 애들 다 엉켜서 자고 난리 났네. 아, 쉰내. 술 냄새보다 쉰내가 더 난다. 이리로 와, 은호야. 다른 방으로 가자.”
그녀가 꼬드겨 은호가 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인 건지 수희는 사람이 없는 방을 세심히 골랐다. 이만하면 쉴 만하다고 생각을 한 건지 수희는 은호를 방으로 들여보내기 전에 약부터 챙겨 먹였다.
“들어가서 쉬어. 난 놀다가 올게. 혹시 몸이 더 안 좋아진다거나 하면 전화해. 알았지?”
“…두통.”
“얼른 들어가서 쉬어.”
은호는 수희가 문을 열어 준 방으로 어기적어기적 들어가 이불이 깔린 바닥을 더듬어 몸을 눕혔다.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바닥에 눕히자 울려 대던 두통이 조금 잦아들었다.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이불을 더 끌어 올렸다.
은연중에 시원한 스킨 향기가 느껴졌다. 따뜻하진 않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향기. 은호는 이불을 바짝 당기며 좀 더 가까이로 다가갔다. 향기가 불어오는 쪽으로.
따뜻한 체온이 가까이 있음을 직감했다. 은호는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새벽, 게임에 빠진 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