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30)
129악당의 당황(1)
“으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었다. 과거에 ‘이름 없는 골짜기’를 찾기 위해 사막을 횡단했을 때나 느껴 봤던….
아니, 그때보다 혹독한 갈증에 신음하길 잠시, 문뜩 입가에 와 닿은 시원한 무언가를 나는 주저하지 않고 들이마셨다.
꿀꺽.
기껏해야 몇 방울이나 되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내게 생명수와도 같았다.
바짝 마른 입을 적시며 목에 넘어온 생명수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심장을 식히며, 차갑게 굳어 있던 몸에 점차 생기를 불어넣었다.
“후우….”
그야말로 죽었다 깨어난 기분이 이러할까. 가늘게 이어지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 내며 스스로 살아 있다는 감촉을 확인하고, 나는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사방에 깔린 어둠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꿈속인 건가?
잠시 생각을 해 본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늙고 쇠약해졌다고 한들, 꿈과 현실조차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직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라면 얼음과 같은 한기 대신, 따스한 체온이 느껴질 리가 만무했으니까.
응? 따듯한 체온?
그제야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닫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제야 막 정신을 차린 상태로 어둠을 꿰뚫어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대안 삼아 한 손을 들어 주변을 더듬던 도중, 문뜩 뭔가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이 손에 닿은 것을 느낀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 이상한 담요는 뭐냐?
아니, 이 감촉은 담요라기보다는….
“어라어라. 일어나셨나요?”
사람 같으은?!
코밑에서 들려온 앳된 음성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깨달은 나는 임무 수행 중에 느닷없이 영웅을 만난 것 이상의 혼란에 빠졌다.
악당이 나쁜 짓을 하면 어디선가 영웅이 나타나는 건 상식이지만 의식을 잃고 있다가 깨어나 보니 난데없이 누군가에게 안겨 있었다는 상황은 내 평생 겪어 본 적 드문 일이었으니까.
응? 잠깐만, 근데 이 목소리는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잡으려 애쓴 끝에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몽롱한 정신 상태에 의지하는 것보다 직접 상대를 확인하는 것이 더 빨랐으니까.
그리하여 가까스로 초점이 잡히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통해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는 쩌저적 얼어붙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절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아홉 줄기로 묶어 내린 남색 머리카락에, 여우처럼 가느다란 눈매가 특징적인 낯익은 소녀의 얼굴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더욱더 어처구니없는 이유가, 나를 기가 막히게 하고 있었다.
“…왜 옷을 벗고 계신 겁니까?”
훤히 드러난 매끄러운 목, 작고도 둥그스름한 어깨, 내 몸을 끌어안고 있는 가는 팔, 그 너머로 보이는 새하얀 등까지….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나를 끌어안고 있던 소녀는, 싱긋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을 내놓았다.
“그야 치료에 필요하니까요.”
“치료가 끝났다면 이제 옷을 입어 주시지요.”
“어라. 그럴까요?”
소녀가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 놓여 있던 옷을 걸치는 사이, 나는 힐끔 주변을 살펴보았다.
…배 안이었나?
미세하게나마 출렁거리는 바닥과 어렴풋하게 보이는 내부 구조를 통해 이곳이 나룻배의 선실임을 추측하고 나는 떨떠름한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내가 쓰러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몸 상태를 보면 고작 몇 시간이 지났을 터, 그런데도 전혀 생소한 이 상황이라니. 답 없는 의문에 혼란해하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불꽃이 일어났을 때였다.
화륵.
램프 속에서 일어난 잔잔한 불길과 함께 마침내 뚜렷하게 드러난 소녀의 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고여덟 살이나 됐을까 싶은 작은 체구, 바닥까지 늘어진 아홉 가닥의 머리카락,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가느다란 눈매, 별처럼 뚜렷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 살짝 찢어져 핏방울이 맺힌 작은 입술, 거기에 여유롭고 장난스러운 미소까지. 그렇게 3년 전에 만났을 때와 한 치도 다름없는 모습으로, 소녀는 살짝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라어라.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시면 부끄러운데요.”
“…….”
따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그게 알몸으로 외간 남자를 끌어안고 있던 사람이 할 말이냐고.
하지만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알고 있었기에, 나는 내심을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질문을 꺼냈을 뿐.
“대체 이런 곳에는 어쩐 용무십니까?”
이 소녀는 이곳에 있어도 될 인물이 아니다.
어지간한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나지 한 북부 설원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할 소녀가 이런 서부까지 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로서는 그저 어처구니없을 뿐이었다.
물론, 짐작 가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어라. 소녀가 오라버니를 만나러 오는데 뭔가 다른 이유라도 필요한가요?”
끄으응…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군.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나이 차이에도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소녀의 태도에, 나는 내심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해서 그 태도를 고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고스란히 마음속에 삼킬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속이 용암처럼 끓게 돼 버렸지만 말이다.
“당연히 이유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사제장님.”
겨울 신전과 함께 북부의 종교계를 양분하는 암흑 교단. 그 정점에 있는 삼대 사제 중에서도 가장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실질적인 암흑 교단의 최고 지도자인 암흑 교단의 사제장을 바라보며, 나는 그저 묵직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