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36)
35영웅의 행운
검만 있으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가문의 영광만이 전부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둔함.
검을 얻는 대가로 인간임을 버리며 의미를 잃어버린 헛된 믿음.
어떤 검도 마음을 채워 주지 못했고.
어떤 영광도 짐을 덜어 주지 못했다.
이 공허함이 하나의 빈자리 때문이며.
이 무거움이 죄책감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뒤늦은 깨달음.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게 남은 것은 한 자루의 검뿐.
돌아갈 길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때문에 이것은 기적.
평생 안아 온 후회를 돌릴 수 있는 단 한 번의 마지막 기회.
그것을 위해서라면 평생을 바쳐도 좋았다.
아니, 오히려 내 남은 한평생으로도 부족할 것이기에, 나는 바느질감을 편안히 받아 들었다.
“오늘부터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다.”
“알겠습니다.”
자수는 모든 여인의 기본 소양이다.
그러니 시골 처녀로 살아가려면, 수를 놓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이겠지.
“왜…요?”
“일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나와는 달리 불만을 품으면서도, 아리스가 결국 바느질감을 받아 간 뒤 방으로 들어온 나는 바늘을 들었다.
기본적인 바느질 방법 정도는 안다.
하지만 제대로 수를 놓을 정도는 아니다.
집중해서 부족한 실력을 메워야만 한다.
그렇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수건에 바늘을 찔러 넣으려던 나는, 문밖의 인기척을 느끼고 손을 멈췄다.
평소에는 출입하는 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걸까?
끼이익.
마치 내 내심을 읽기라도 한 듯.
문을 연 그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집중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가르침은 내게 있어 천금보다 귀한 보배였으니까.
“네가 들고 있는 것은 검이 아니다. 바늘을 잡았을 때는 바늘만을 보고, 수를 놓을 때는 수만을 생각해라. 때로는 검에 집중하여 얻는 것보다, 검을 잊음으로써 잃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결국 검을 완전히 잊는다면, 그때는 집중해도 상관없다.”
“명심하겠습니다.”
말을 끝맺은 그가 방을 나갈 때까지 자세를 지키던 나는 눈을 감았다.
그는 집중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이 대충 하라는 뜻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혹시, 검을 잊으라는 의미로 한 말일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그런데도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검사이기 때문이겠지.
검을 놓고 검에 대한 집착을 버렸음에도, 뼛속까지 배어 있는 검에 대한 기억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 아닌 집념.
한평생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며 검만을 추구한 나의 인생 자체였다.
과연 나는 이것을 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이것을 완전히 잊고도 나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의문을 마음에 품고도, 나는 그의 가르침대로 검을 잊어 나갔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단순한 검술은 물론, 검을 쥐는 법이나 지식까지 검에 대한 모든 것을 잊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번민과 미혹을 견뎌 내는 것이었다.
내 마음에 있던 검에 대한 집념,
그것은 나의 의지를 거부했다.
오히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싸워 온 그 어떤 적보다 사납고 날카롭게 내 마음을 헤집어 왔다.
미쳐 버릴 것만 같은 혼란과 고통.
그 끝에.
나는 결국 미쳐 버렸다.
한낱 세레나라는 여인이 버텨 내기에, S. R. 라바일이라는 검사는 너무 잔혹했기에.
나는 검사다.
검을 버릴 수는 있을지언정, 검을 잊고 검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고통.
죽음보다 더 잔혹하고 처절한 공포.
싫다.
내가 왜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거부한다. 부정한다.
어떤 은혜도 검에 대한 애정보다는 작다.
어떤 시간도 검과 함께한 시간보다 짧다.
어떤 명예도 검에 대한 긍지보다는 낮다.
검을 버리면서까지 갚아야 할 빚은 없다.
그런데도 나에게 빚을 강요한다면, 그것이 누구든, 베어 버리면 될 뿐!
치솟아 오르는 살기에 휩싸인 채.
나는 침대 뒤에서 상자를 꺼냈다.
덜컥 열린 상자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한 자루의 검.
목숨보다 소중한… 오직 나만의 검.
절대 버릴 수 없다.
결코 잊을 수 없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버리고, 누구라도 베어 버릴 수 있다.
일단, 그부터 베어 버릴 것이다.
내게 검을 잊으라 말할 이는 전부.
그럼 더 이상 나를 검으로부터 떼어 놓을 상대도, 속박할 것도 없어진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검과 함께….
―영원히 고독을 헤맬 것이다.
검을 향해 뻗어 가던 손이 덧없이 굳는다.
무엇을, 하고 있지, 나는?
어째서, 들려 하지, 검을?
왜, 죽이려는 거지, 그를?
내게 있어 검은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검을 잊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내게 없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
벌써 잊은 건가?
검보다 중요한 것도 있다는 걸?
통증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의 고통과 기억하기조차 무서운 공포를?
검과 함께하는 고독을?
10년 전, 그날의 후회를….
벌써 잊어버린 건가?
우둑.
허공을 움켜쥔 손톱이 손을 파고들며 붉은 핏방울이 검 위에 떨어진다.
결코 잊을 리 없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됐다.
그런데도 나는 잊고야 말았다.
검이란 결국 피를 마시는 마물임을.
그에게 진 빚은, 내 모든 것을 내주어도 갚을 수 없는 것임을.
“하, 하하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데도 정작 나오는 것은 웃음.
겨우 검이라는 이름의 쇠붙이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쇠붙이 때문에 또 그를 베려 하다니.
결국 나는 괴물.
절대 인간이 될 수 없는.
인간임을 버리고, 버림받은 자.
이 목숨에는 결국 아무 의미도 없다.
오직 검에 대한 추잡할 정도로 순수한 욕정 외에는 그 무엇도 없는 삶을, 굳이 이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회의, 의심, 의혹, 절망, 회한.
그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나는 다시 검을 향해 손을 뻗는다.
내 삶의 끝을 장식할 반려를 찾기 위해.
탁.
그것은, 이성 이전에 본능이었다.
어깨를 짚은 손목을 붙잡고 꺾어 누른다.
범인이라면 순식간에 팔이 부러질 공격.
하나 다음 순간, 양팔을 붙잡힌 채 침대 위에 눌린 것은 내 쪽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혀라.”
귀로 들려오는 음성은 무뚝뚝하고.
마주한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그러나 붙잡힌 손목의 온기는 부드럽고.
바짝 붙은 얼굴에 닿는 숨결은 따스했다.
그 온기에 취한 걸까?
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다만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이미 검을 버렸다는 걸, 잊지 마라.”
그 나지막한 음성은 깊고 무겁게 스며들었다.
그가 팔목을 풀고 일어나 조용히 방을 빠져나간 뒤에도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취한 듯 멍하니, 그의 말을 되새길 뿐.
그래, 검을 손에서 놓을 때부터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각오했다.
이제 와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설사 검이 없더라도 내게는 아직 남은 자리가 있었다.
시골 처녀이자 그의 가족이라는, 이전까지의 나는 아무리 원해도 얻을 수 없던 의미가.
“아….”
순간, 나는 깨달았다.
검은 이미 내 삶에 유일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어느새 내가 검에 대한 욕망을 잊었다는 것을.
더 이상 검은 나를 속박하지 못하리란 것을.
모든 것이 새로웠고, 모든 것이 신비했다.
검은 나의 모든 것이라 생각했다.
검 없는 내게 가치란 없다 믿었고, 그래서 두려워했다.
그러나 어째서 몰랐던 걸까?
검은 내 삶이자, 내 고독이요, 짐이었다는 것을.
검을 버린다는 것은 나의 회한을 버리는 것임을.
나를 버린다는 게 이처럼 상쾌한 것이라는 것을.
그야말로 새로 태어난 듯한 기분 속에 나는 문뜩 검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안다. 검이란 신외지물이라는 걸.
이제는 모른다. 검이 내게 가지는 의미를.
이제는 느낀다. 세레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굳이 검을 쥘 이유도….
이제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검을 드는 것은, 검을 잊으면 집중해도 상관없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시 검에 집중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말은 내게 그 무엇보다 큰 가치이자 의미니까.
그렇게 검을 쥔 순간.
나는 묘한 생소함을 느꼈다.
단순히 검에 대한 집념만이 아닌 경험과 감각마저 모조리 사라진, 생전 처음 검을 쥐는 듯한 느낌.
그런데도 패하리라는 생각은 안 든다.
싸우는 법을 잊었으니, 패하는 법 또한 모를 뿐.
물끄러미 바라보던 검을 다시 집어넣으려던 나는 문뜩 손을 멈췄다.
‘집중하지 마라.’
…어째서?
그건, 이미 해결한 화두가 아니었나?
그런데 왜 그 화두가 내 손을 멈추고, 검을 붙잡게 하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느꼈을 뿐이다.
그 안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여운을.
그리고 모든 것을 잊었음에도, 다시금 울려오는 검의 울림을.
‘네가 들고 있는 것은 검이 아니다.’
검이 아니라면, 무어란 겁니까?
해답은 없었다.
그러나 대답은 있었다.
우웅―.
잔잔한 검의 울림.
그것은 쇠붙이의 진동 따위가 아닌, 검이 내게 내놓은 대답이었다.
까마득하다고 느껴지는 옛날. 그 의미도, 이유도 모른 채 처음으로 손에 쥐었던 검은 단순한 쇠붙이가 아니었다.
그저 더없이 친근하고도, 재미있는…
친구…였을 뿐이다.
‘바늘을 볼 때는 바늘만 보고, 수를 놓을 때는 수만을 생각해라.’
그것은 관조를 넘어선 직관.
본질 자체를 꿰뚫고 이해하는 마음의 눈.
그 깨달음 속에서 나는 검의 본질을 ‘보았고’, ‘느꼈다’.
그저 단순한 쇠붙이.
그러나 누군가가 정성껏 다듬어 내고,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남겼으며, 누군가가 인생을 걸고 이어받아 10년 동안 지켜 온, 나의 분신.
‘때로는 검에 집중하여 얻는 것보다, 검을 잊음으로써 잃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검이란 몸을 버리고, 생각을 버리며 얻어 낸 마음.
그것은 형태에 집착해 잊고 있던, 검의 영혼이었다.
‘그래서 결국 검을 완전히 잊는다면, 그때는 집중해도 상관없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마음을 얻으면 형태도, 생각도 따라오게 된다는 것을.
정신과 신체와 마음은 결국 하나이듯.
모든 것은 하나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환희를 넘어선 쾌락, 그것마저 넘어선 평온 속에 나는 검을 상자에 넣고 바늘을 들었다.
하얀 손수건에 실을 꿰는 손동작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검이 일정 경지에 이르게 된 순간.
검사는 네 개의 벽 앞에 정체하게 된다.
10년 동안 나를 막아 온 벽은 무위지경.
새로운 검술을 만드는 게 가능한 경지.
시조 일검자께서는 이를 통해 형을 버린 필살 검술, ‘바위의 검’을 낳았다고 한다.
또 자신의 미혹에 빠지는 심마지경.
광기로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경지.
신화시대 이래 최강의 검사라 불리던 광검자조차 끝내 극복하지 못한 저주.
자신을 버림으로써 도달한다는 무아지경.
무의식의 영역을 다루게 되는 경지.
이를 통해 움직이는 요새 성검자는 백전무패를 이뤘다고 한다.
그리고 만물과 하나 된다는 물아지경.
모든 것을 이해하고 느끼게 되는 경지.
천하 만물의 마음을 읽고 대화를 나눈다는 용검자가 이룩했다고 전해진다.
하나를 이루는 것만 해도 평생이 걸리며, 그것만으로도 일당백의 능력을 발휘하여 검자라고 불릴 수 있게 하는 검경.
그것을 단 며칠 사이에 네 개나 이뤄 낸다는 것은, 신비하다 못해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불신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놀랐을 뿐이다.
모르는 것은 가르칠 수 없는 법.
그가 이룬 검경은 얼마나 많고도 깊을까.
만약 그가 다시금 검을 든다면….
그 검은, 얼마나 황홀할까.
“후훗.”
왠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맞춰 무심코 옅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나는 천천히 수를 완성해 갔다.